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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제] 후유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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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25, 2013 20:56에 작성됨.

 
 잔업을 마치고 퇴근하던 중에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누구에게 걸려온 것인지 확인하고 전화를 받으려던 순간 전화는 다시 끊어져버렸다. 평소에 이런 장난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사람이었기에 무언가 용건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이번에는 내 쪽에서 전화를 거니 약간의 기다림 끝에 전화기 너머에서 상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가던 발길을 돌려 그녀가 알려준 장소로 향했다.

 "카에데 씨?"
 "치히로 씨, 여기에요."

 문고리를 잡고 여니 삐걱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낡은 문이 열리고 바라본 가게의 모습은 예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어두운 주홍빛 불빛만이 희미하게 비추고 있는 가게는 좋게 말하면 분위기가 있었고 나쁘게 말하면 가게답지 않았다. 가게 안쪽에는 주방이라던가가 보였지만 바깥쪽에는 술을 파는 가게라기 보다는 폐업 직전의 카페 같은 분위기였다. 문에 달린 종에서 딸랑딸랑하는 종소리가 울렸지만 가게 안쪽에도 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종소리를 듣고서 누가 들어왔는지 이쪽을 쳐다보는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가게 안에는 한 사람의 모습만 자리하고 있었다. 가게 자체가 크지 않아 다섯 명만 있어도 꽉차보일 것 같은 가게였지만 주인도 다른 손님도 없이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이 내가 찾던 그 사람이었다.

 "착실하다고 해야할 지…"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타카가키 카에데, 같은 신데렐라 프로덕션의 아이돌이었다. 제법 눈에 띌 정도인 검은 오프숄더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평소에는 쓰지 않는 안경을 쓰고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로 반쯤 테이블에 엎어진 채로 앉아있었다. 마치 물에 반쯤 잠긴 듯한 모습을 보니 절로 술에 잠겼다는 인상이 들 정도였다. 그런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충실한 위장과 조용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운 가게의 분위기는 더더욱 어울리지 않아 보이면서도 왠지 그림이 되는 모양새였다.

 "이런 곳에서도 마시는 건가요?"
 "이런… 곳이요?"

 카에데 씨는 몸을 일으켜 멍하니 주변, 아무도 없는 가게를 두리번댔다. 평소의 그녀에게서는 생각하기 힘든 풀어진 모습을 보니 술에 강한 편인 그녀가 얼마나 마셨을 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좋은 가게에요. 분위기도 조용하고 안주도 맛있고. 비장의 가게라는 느낌?"

 후훗 하고 웃으며 카에데 씨는 앞에 놓여진 술잔에 남아있던 것을 홀짝 들이켰다.

 "원래 손님이 이렇게 없는 가게인가요?"
 "평소부터 손님은 거의 없는 모양이지만요. 그래도 오늘은 제가 세게 좀 나가려고 세 냈어요."

 세를 내고 마시려면 얼마나 마시려는 걸까 싶었지만 아마 평소에 하는 썰렁한 말장난일 것이었다. 주인도 보이지 않은 걸 보면 왠지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잔을 비우고 나서 카에데 씨는 다시 테이블 위에 얹은 팔에 머리를 반쯤 눕히듯이 엎드렸다. 그렇게 심각할 정도로 취하지 않은 것을 보면 술기운 때문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심경의 문제 때문인 듯싶었다.

 "치히로 씨도 한 잔 하지 않을래요?"
 "아, 아뇨. 저는 내일도 일이 있으니까…."

 엎드린 채로 고개의 방향만을 바꿔 나를 바라보며 술을 권하는 카에데 씨였지만 스케줄이 없어서 휴일인 카에데 씨와 달리 나는 내일도 정시 출근을 해야했기 때문에 가볍게 거절했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그렇게 말하면서 두 번 권하지 않는 카에데 씨를 보며 왠지 뒷일은 생각하지 말고 그냥 마셔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누가 숙취 같은 건 말끔하게 날려버리는 드링크를 만들지 않으려나.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직 8년 전의 저처럼 팔팔하다구요."

 괜히 걱정이 되어서 물어본 것에 실없는 말장난을 할 정도라면 확실히 어느 정도는 괜찮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치히로 씨는 연애경험, 있으신가요?"
 "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카에데 씨가 갑작스럽게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지자 당황해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연애에 관련된 이야기를 카에데 씨가 이런 상황에서 꺼내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뭐, 한 두번 정도라면… 제법 예전 일이지만요."
 "그런가요…"

 예전의 추억이 잠시 생각났지만 생각을 물리고서 간단하게 대답을 하자 카에데 씨는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우고 한 모금 마시고 나서 혼잣말을 하듯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전에는 말이죠. 정말로 8년 전의 고등학생 때라던가. 좋아하는 남자아이가 생기고 나서는 운명이라고 생각하면서 밤에 잠도 자지 못하던 때가 있었어요."
 "확실히 있었죠… 그런 거."
 "생전 처음으로 화장을 해 보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하고선 알아채 주지 않으려나 두근거리기도 하고, 아직 말도 못 해본 주제에 이런 옷을 입으면 좋아해줄까 생각해보기도 하고."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자 눈을 감고 예전 생각을 하는 듯 한 카에데 씨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랬으면서 정작 용기를 내서 고백을 하고 사귀게 되고 나서는 실망하기만 하고 금방 헤어지게 되더라구요."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가까이에서 보이는 본모습은 차이가 있으니까요."
 "그렇죠. 그렇게 그냥 젊은 날의 추억 같은 게 몇 번 정도는 있었어요."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큰 법이라 자세히 알지 못하는 상대를 좋아했지만 뒤에 감춰져있던 본모습을 보고 크게 실망한 기억이 나에게도 있었다.
 다시 한 번 잔을 비운 카에데는 술이 남아있지 않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라 하는 소리와 함께 잠시 비틀거리는 것을 보고 일어나서 카에데 씨를 붙잡아 주었지만 괜찮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위태위태하게 걸으면서도 넘어지거나 하지는 않고 가게 안쪽으로 들어간 카에데 씨는 잠시 후 술을 한 병 더 가지고 나왔다.

 "마음대로 막 가져와도 괜찮은 거에요?"
 "괜찮아요, 단골이니까. 후훗."

 단골이라고 가게 물건을 아무런 말도 없이 더 가져와서 마셔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리 조금 취했기로서니 카에데 씨가 사무소의 다른 어린 아이들처럼 제멋대로 행동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에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주인과 그 정도로 가깝다는 것이리라.
 
 "그런데 이번에는 진짜였어요."

 다시 의자에 털썩 앉아 술을 따라 마시는 카에데 씨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려서 뭘 모르는 소녀의 마음도 아니었고, 오랫동안 지켜보고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이 사람이라면 괜찮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카에데 씨, 실연한 건가요? 전혀 몰랐는데…."

 같은 프로덕션의 아이돌과 사무원 사이였지만 그런 낌새조차 전혀 알아채지 못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별다른 말을 듣지 못한 걸 보면 아마 아무도 몰랐던 듯싶다. 카에데 씨의 나이가 어린 것도 아니기 때문에 팬들의 성격상 스캔들 때문에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는다던가 하는 일은 그다지 없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자신조차 눈치 채지 못한 상대가 있다는 점은 놀라웠다.

 "누구였나요?"

 물어보고 나서도 헤어진 당사자에게 너무 자신의 호기심만 생각해서 실례를 한 것이 아닌가 해서 아차 싶었지만 카에데 씨는 괜찮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프로듀서요."
 "아…. ……………네?"

 순간 자신이 뭔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멍하니 반응하고 나서야 방금 들은 말을 이해할 수 있었을 정도다.

 "치히로 씨가 생각하는 그 프로듀서 맞아요."
 "에에?!"

 내가 크게 놀라자 카에데 씨는 후훗 하고 웃었다.

 "놀라셨나요?"
 "놀란 정도가 아니라… 언제부터였어요?"
 "으음… 한 두 달 전부터였을 거에요."

 카에데 씨는 손가락을 세워가며 잠시 날짜를 계산하더니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맞아요. 두 달 전에 있던 제 공연 기억나시나요?"
 "물론이죠. 엄청 성공했었죠?"
 "그 다음부터였어요.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벌써 두 달 전이네요. 시간 참 빠르네요.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있었던 시간이어서 그런 걸까요?"

 어떻게 생각하면 마음을 쥐어짜는 말일 수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카에데 씨의 심정은 평안해 보였다. 이별이라는 이유라면 이렇게 평소보다도 많이 마셔버리고 가슴이 미어지게 아프다거나 눈물이 나온다던가 할 텐데. 적어도 나는 그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카에데 씨는 가슴 아파하기보다는 그저 마음 한편이 비어버린 것처럼 아쉬움을 느끼는 듯한 모습이었다.

 "두 달… 참 많은 일이 있었네요. 같이 여기저기로 마시러 다니기도 했었고. 사무소의 모두한테는 비밀로 같이 온천으로 여행을 가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싸우고 나서 다음 날에 사무소에서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눈이 딱 마주쳐버린다던가. 다른 사람들한테 들키지 않고 서로만 알고 있는 신호를 주고받는다던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부러운 짓을…!"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와 버렸다. 확실히 부럽긴 하지만.

 "네?"
 "저도 데이트라던가 같이 여행이라던가 하고 싶은데 일이 너무 많다구요! 남자친구도 없지만! 일이 많아서 남자친구를 사귈 시간도 없지만!"

 한 번 거절해뒀던 술이지만 다시 마시고 싶은 충동이 생기는 듯 했다. 이러다 다른 어느 사무소의 사무원처럼 노처녀 이미지가 굳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치히로 씨는 좋은 사람이니까 괜찮을 거에요."
 "그,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가 아니라!"

 어느새 위로받아야 할 사람이 바뀌어있었다. 카에데 씨와 이야기하다보면 어느 순간 눈치 채기도 전에 이상한 방향으로 날아가 있다던가 하는 일이 종종 있다. 실연한 건 카에데 씨인데 어느새 내가 위로받고 있었다.

 "카에데 씨, 정말 괜찮은 거에요?"

 다른것보다 같은 여자이기 때문인지 그런 걱정이 들었다. 아무리 카에데 씨가 쿨한 편이라지만 실연하고도 저 정도로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을 텐데.

 "음… 그렇네요. 헤어지기로 했을 때는 정말로 세상이 다 끝나버리는 줄 알았는데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도 왠지 괜찮아요."

 말을 고르던 카에데 씨는 웃으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헤어져도 사무소에서 다시 만나게 되잖아요? 서로 간에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이렇게 되어버린 것도 아니고. 매일 열심히 일하고 우리들이 힘들 때에 웃으면서 격려해주고 제게 그렇게 웃어줬던 것들을 생각하면 그걸로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그걸로 괜찮은 건가요?"

 터무니없을 정도의 긍정적 사고라고 해야 할 지, 아니면 이미 헤어지고 나서도 추억해도 즐겁고 기쁠 정도로 그렇게나 좋았던 것일까. 어느 쪽이건 진심으로 부러웠다.

 "서로 나쁘게 헤어진 것도 아니고 그냥 각자의 마음이 있고 사정이 있어서 조금 맞지 않아서 이렇게 되었을 뿐이니까요. 운이 없다고 할 수도 있고. 제 욕심도 조금은 있었지만 프로듀서라면 분명 다음에 더 좋은 사람과 만나서 행복할 수 있을 거에요."
 "그런 건… 너무 가슴 아프지 않나요?"
 "괜찮아요. 지금도 그렇게 나쁘지 않아요. 저도 분명 다른 좋은 사람을 언젠가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한 번 더 잔을 비운 카에데 씨는 백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시간을 확인했다. 나도 옆에서 슬쩍 보니 이미 새벽 한 시를 넘은 시간이었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치히로 씨는 내일도 출근이라고 하셨죠? 그만 들어가 보시는게…"
 "카에데 씨는요?"
 "저는 이번 주에는 스케줄 더 없으니까요."
 "그래도 너무 늦게까지 있는 건…"
 "후훗,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그래도 저도 어엿한 어른이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내일 지각을 할 순 없었기에 카에데 씨의 말대로 가볍게 인사를 한 후에 가게를 나왔다. 역시 카에데 씨 혼자 두고 나온 것이 걱정이었지만 몇 번이나 괜찮다는 말을 들으며 반쯤 떠밀려 나온 것이었다. 확실히 카에데 씨는 강하다. 좋아하던 사람과 헤어지고도 그 사람의 행복을 빌어줄 만큼 강하지만 그런 그녀도 평소보다 과음을 할 정도로 강한 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네요."

 생각해보면 프로듀서의 말을 할 때는 자기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말했으면서 자신의 일을 이야기 할 때는 '더 좋은 사람'이 아닌 '다른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 카에데 씨였다. 그저 말하다 보니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다. 아마 깊은 생각 끝에 의도적으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카에데 씨의 마음속에서는 무의식적으로 프로듀서가 가장 좋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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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은 신성우 씨의 사랑한 후에.
http://www.youtube.com/watch?v=ATxwp1byGn4

이 글은 픽션입니다. 사랑 같은 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멋대로 상상해서 쓴 이별담일 뿐입니다[?]

주최자가 제일 먼저 딱 길게 써놨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지만 마감 끄트머리에 겨우 10kb 맞췄을 뿐인 부족한 글이네요. 죄송합니다.

어려워요. 어려워요. 진짜 어려웠어요.
무난하다 싶었지만 765 아이돌들하고는 영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말이죠. 모 아는 분께선 '아버지 때문에 몇 번의 이별을 겪은- 유키호' 같은 걸 쓰면 된다고 들었지만[?]
결국 카에데 씨네요. 치히로 씨의 시선으로 썼지만 카에데 씨 글이네요. 아마 정말로 강하지만 저렇게 강한 척 하는 것 자체가 후유증의 하나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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