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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무릇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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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30, 2018 02:18에 작성됨.

 너는 뭐야?


 우리는 꽃이야.


 나는 뭐야?


 너는 여기서 춤을 추는 아이.


 어째서?


 그것이 우리를 즐겁게 해주니까.


 즐거워?


 응, 네가 춤을 추면 우리는 즐거워.


 어째서?


 너의 춤은 우리에게 활기를 불어넣으니까.


 그런데 왜 빨간색이야?


 너의 활기는 붉은색. 네가 불어넣어 준거야.


 그런데 왜 검은색이야?


 활기 없는 너는 검은색. 나눠주고 남은 잔해.


 나는 어떻게 하면 돼?


 계속 춤을 춰. 계속 우리를 즐겁게 해줘.


 나는 언제까지 하면 돼?


 네가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그러면...



 "수고하셨습니다."

 촬영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그런 인사가 오갔다. 녹화방송이라는 게 여러 가지를 촬영하는지라 기본 4~5시간은 훌쩍 넘기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평소보다 조금 오래 걸렸다. 몇몇 사람들은 피로감이 확 눈에 들어와 이번의 강행군을 표현하는 듯했다. 뭐... 나름의 노고란 것이겠지. 나는 이번에도 대타인지라 별달리 할 일도 없었지만. 딱히 큰 사고 같은 것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신경 쓸 건 딱히 없었다. 간간이 업무 연락만 주고받은 걸 제외하면 말이다. 며칠이 지나 어느새 오디션 일이 2주 앞으로 다가왔다. 신청일은 모레까지지만 거의 확정이 난 분위기이기에 조금씩 정리를 하기 시작한 참이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아마 같은 작업을 하고 있겠지. 이른바 서류전형이라는 것이다. 주로 인사고과 쪽 사람이나 베테랑 프로듀서들이 담당하지만 나의 경우엔 상당히 이례적인 듯하다. 사업의 규모가 나날이 커지고 유명 아이돌들을 많이 배출한 영향인지 지원자들이 당초 예상보다 60% 정도 더 늘어났다는 게 관계자들 사이에서 들리는 풍문이다. 그 때문에 안 그래도 빠듯했던 일정이 더 빽빽해져 본래 서포트를 맡았던 2선에게도 그쪽 일을 맡기기 시작한 것 같다. 도합 한 달이라는 기간이 그리도 짧은 건지 아직까지는 확 와 닿거나 하진 않지만 현재 내 업무용 태블릿에 들어있는 이력서의 양만 보면 이건 꽤나 빠듯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찌 됐건 나도 그 2선 라인에 포함되어있으니 일거리가 나오는 건 당연하겠지만.

 "어디 보자, 다음 장소는..."

 다음 스케줄은 예정대로라면 라디오 수록이다. 현 시간은 오후 5시 반. 수록은 7시에 시작하고 여기서부터 가는 데는 대충 30여분 정도 걸리니 대략 1시간 정도의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일 수고하셨습니다."

 스케줄 확인이 끝남과 동시에 내 앞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 다음은 7시에 라디오 수록입니다."

 "알겠습니다. 오디션 일도 있을 텐데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마침 기분전환도 필요했거든요."

 그렇다. 내가 지금 여기 있는 이유는 바로 대타다. 선배님이 잠깐 다른 현장에 가 있는 동안 그 자리를 맡은 것이다. 언제 올 수 있을지는 본인도 모른다고 했지만, 그 당사자가 돌아왔으니 내 역할은 이제 끝이다.

 "이제 일이 몸에 꽤 밴 것 같군요. 더는 제 도움이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전 아직 그리 당당하게 갈 수 있을지가..."

 "괜찮습니다. 당신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프로듀서로서의 일을 완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 말씀하신다면... 아, 다른 일이 있어서 이만 먼저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네, 그럼 이따가 사무실에서."

 나는 선배에게 폴더인사를 하고 그대로 자리를 나섰다. 오늘은 선배나 나나 야근 확정이므로 아마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자동차의 액셀이 중량감 있게 밟히며 몸이 조금씩 뒤로 쏠리는 듯한 감각이 되살아났다. 중고로 산 놈이라 조금 삐걱거리는 느낌이 있지만 아직 현역이니 좀 더 부려 먹혀도 될 놈이다. 슬슬 낮이 길어지면서 본래 어두웠어야 할 하늘은 아직 퍼런빛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에 호응하듯 라디오에서도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내가 자주 듣는 이 라디오는 원래 좀 더 늦게 시작하지만 이번에 개편하면서 조금 앞으로 당겨졌다. 그 자리에는 아까 말했던 라디오가 새로 생겨났다. 어떤 내용인지는 대충 파악하고 있지만 직접 듣는 거랑은 또 다르기에 이따가 한 번 틀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전방 100m에서 00병원방면으로 우회전입니다."

 그런 내비의 말과 동시에 신호가 우측신호가 떠서 나는 브레이크를 밟을 필요도 없이 그대로 스티어링을 돌려 다른 도로로 이동했다. 도로에 나서면 브레이크를 밟을 일이 몇 없기에 발을 쉬려하던 내 계획은 언제나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그래도 덕분에 어디 갈 때 늦을 일은 없지만.


 매일매일 치료를 다니러 가던 병원도 오늘로 끝이다. 이제 몸에 쑤시는 곳도 없고 어깨도 딱히 당기지 않는다. 의사들의 솜씨가 좋은 건지 내 회복력이 빠른 건지는 몰라도 그 높이에서 떨어졌는데 의사 말마따나 그 정도 부상이면 운이 좋았다고 봐도 될 것 같다. 더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르겠다는 의사의 지나가는 말이 떠올랐지만, 그런 건 딱히 상상 따위 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러고 보니 내가 구한 그 아이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같은 병원이긴 했지만 내가 먼저 발길을 돌릴 수는 없었다. 일단 표면적인 이유는 관계자 외 면회 금지에 회사에서도 의도적으로 접촉하는 건 삼가라는 말이 있었기에 그랬지만, 지금은 내가 찾아가도 되는 건지 하는 의문 때문이다. 비록 구해주기는 했지만 그녀의 이야기까지 들어보는 건 뭔가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 같아 그다지 달갑지 않다. 그런 기억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일 테고 적어도 그건 외부인인 내가 쉬이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처음에 만나러 간다는 그 오기는 어디 갔냐고 묻는다면... 내가 어른의 사정이라는 방패를 앞세운 겁쟁이라고 봐도 상관없다. 실제로도 그것 때문에 조금씩은 몸이 근질거리니까.

 "라디오 네임, 휴가 떠나는 용사님. 이제 골든위크도 2주 앞으로 다가왔어요. 카에데 씨는 따로 휴가계획을 잡고 있나요? 전 이번에 꼭 가보고 싶은 장소에 발을 디뎌보려고 합니다. 일단 내국은 아니고요. 어디로 가는지 알아맞혀보세요. 정답은 골든위크가 끝난 뒤의 이 코너에서..."

 청자가 게스트에게 역으로 퀴즈를 내는 소식은 조금은 신선해 보인다. 아마 청자들은 그녀가 갈 장소들을 머릿속에서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가까운 옆 나라부터 시작해서 먼 이국까지 말이다. 그리고 나도 이왕의 휴일, 여행을 가고 싶다고 생각할 테고. 나는... 개인적으로 가까운 곳부터 천천히 시작하고 싶다. 일단 물가가 싸기도 하거니와 비행기라는 것에 조금은 적응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이유다. 하지만 올해는 특별히 일이 없다면 집에서 틀어박혀 있겠지. 스케줄이 어찌될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학창시절 방학 때처럼 여유롭게 뒹굴 거리면서 말이다. 가끔씩은 그런 것도 좋지 아니한가? 어떨 때는 집에 가만히 처박혀있는 게 최고의 휴가일지도 모르는 법이다.

 "그럴 기회가 온다면 말이지..."

 불행히도 이 바닥은 쉴 때 일할 때가 딱딱 구분되어있지는 않다. 주말에 일이 잡혀있는 건 기본이요 다음 스케줄 확인과 앞으로의 것들을 채워 넣으려면 집에서도 일하는 것이 일상이다. 아직까진 여유롭게 해결은 가능하나 주위의 말을 들어보면 정말 산사태처럼 굴러들어오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그럴 때는 회사에서 자는 것이 당연시된다. 그렇다고 딱히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프로듀서로서 일하려면 억지로라도 성실해져야 하는 법임을 신참인 나도 깨닫고 있는 중이다. 아마 담당하는 아이돌이 있었다면 이렇게 느긋하게 팔을 치료하러 가는 일도 없었겠지.

 다음 사연을 소개하기 직전에 나는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충 보이는 빈자리에 주차하고 나서 차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오자 한창 낮의 열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공기가 나를 구석구석 휘감기 시작했다. 아직까진 그리 마구잡이로 덥지 않기에 불편하거나 하진 않지만, 만약 여름이었다면 당장 시원한 곳으로 몸을 피신했을 것이다. 올해 여름은 부디 덥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2주 정도 다녀본 결과, 나는 역시 병원 체질이 아니다. 매일매일 와야 하는 건 그렇다 치고 특유의 깨끗하지만 이질적인 분위기와 아주 희미하게나마 흘러나오는 약물 같은 느낌의 묘한 냄새는 내겐 전혀 맞지 않는다. 제대로 된 병치레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인지, 이 장소 자체가 그런 느낌이 들게끔 만들어진 건지는 몰라도 하여간에 이 장소에 들어서면 한시라도 빨리 나가고 싶을 뿐이다. 원무과 앞에 있는 번호표를 뽑고 대기를 하라고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나 이외에 여기서 진료를 받으려고 대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따라 유달리 말이다. 오늘 무슨 날이라도 잡은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빨리 끝난단 소리니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자.

 "이리도 회복속도가 빠를 줄은 몰랐습니다."

 내 팔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몇 가지를 물어본 뒤에 나온 대답이 저거였다.

 "뭐... 자세한 건 x레이를 찍어봐야 알겠지만, 이 정도면 완치되었다고 볼 수 있겠군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다 나았다면 딱히 안 찍어도 될 것 같아요. 크게 지장은 없으니까요."

 해방감을 깨끗하게 누리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치료는 여기 까지 하는 걸로 하죠. 다음부터는 그런 무모한 짓을 할 땐 한 번 더 생각해주세요."

 "예..."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다고 하지 않나? 그런 상황에선. 그리고 무리를 하지 않고선 구할 수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당신이 구한 아이도 오늘 퇴원이었던 거 아세요?"

 "그랬나요?"

 "못 들었나보군요. 치료 자체는 끝났고 불안증세도 이제 많이 가라앉았으니 통원치료를 받기로 했고요."

 "갈 땐 다른 사람이랑 같이?"

 "아뇨, 아무도 안 왔습니다. 혼자서 짐을 싸고 갔지요. 뭐, 택시라도 타고 간다면 괜찮겠죠."

 담당 프로듀서가 데려가지 않았다는 건가?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 좋은 뜻은 아닐 것이다. 그때 통화내용을 들어보면 더더욱.

 "그렇게 잘 됐다면 다행입니다만..."

 역시 한 번쯤은 만나둘 걸 그랬다. 혹시라도 더 도울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뭐, 마냥 어린애도 아닐 테니 자기 앞가림은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는 거 아닐까요?"

 "글쎄요..."

 앞가림... 그 말이 뭔가 내 심장을 작은 바늘로 휘젓는 것 같았다. 작지만 확실한 고통이 느껴져 오는 그런 거 말이다. 말로 다 설명하기엔 정리가 전혀 되지 않지만, 분명해진 것도 없다. 그나마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그녀 나름대로 앞가림을 해왔던 것의 결말이 지금 이 상황이라는 것. 그런 결심은 여러모로 고민하고 절망해오면서 내린 것임을 짐작할 수는 있으니까. 내게 있어서 이런 복잡한 감정은 제대로 처리하기가 매우 힘들다. 그야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상상력이 빈약한 나로서는 이것에 대한 이해를 머리로 하는 건지 마음으로 하는 건지조차 모르겠다.

 "뭐, 어찌 되었건 마지막으로 처방전을 써 드릴 테니 일주일 동안 약을 복용하시면 됩니다. 그럴 일은 없다고 예상합니다만 혹시라도 다른 문제가 발생하면 비로 찾아와주시고요."

 괜한 사족 같은 말을 덧붙이며 의사는 그렇게 진료를 끝냈다. 예상한 만큼 빨리 끝났으니 쾌재를 불러야 하겠지만 왠지 석연치 않다.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길 일도 이번만큼은 무진장 신경 쓰인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겠지만 왠지 일도 손에 잘 안 잡힐 것 같다. 이런 걸 두고 충격 받았다고 하는 건가?

 "...묘하네."

 이리 말하면 될까? 뭔가 아닌 것 같지만 당장은 이 단어만 내뱉을 수밖에 없다. 

 "저기요!"

 처방전을 들고 약국으로 발걸음을 옮기려하자 뒤에서 간호사 한 명이 이쪽으로 급하게 뛰어왔다. 

 "네?"

 왜 불러 세웠는지 영문을 모르니 조금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는 건 별 수 없다.

 "환자분께서 데려오신 애가 이걸 두고 갔어요. 혹시 만나실 거라면 좀 전해주시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간호사가 내게 건네준 것은 수수하지만 소녀감성이 물씬 묻어나오는 지갑이었다.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는 기색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 마치 자신은 또래 애들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내 대답에 간호사는 마치 귀찮은 일 하나를 처리했다는 듯이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감사 인사를 보냈다. 직후 바로 가버렸기에 대답은 못 했지만. 뭐, 나름대로 바쁜 거겠지. 그리 생각하자.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일단 받아들긴 했지만 정작 그녀의 정확한 위치도 모르는데 어찌 찾는지가 문제다. 전화번호가 저장되어있는 것도 아니고 GPS추적도 못한다. 즉 내가 이 지갑의 주인을 찾을 단서는 단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그 사람한테 전화해볼까."

 나는 내 지갑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들고 안에 적힌 번호를 폰에 입력했다. 그녀의 담당 프로듀서라면 그녀의 위치를 알거나 적어도 대신 건네주게끔 할 수 있겠지.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

 그런 나의 기대를 처참히 박살내듯이 스피커에서는 인공적으로 합성한 티가 확연히 드러나는 무미건조한 여성의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보통 이런 건 업무용 전화라 어지간해선 해체하지 않을 텐데...

 "뭐지..."

 명함인쇄가 잘못되었건 정말로 번호를 없애버렸건, 이걸로 가장 가까운 단서가 사라져버린 것은 당연한 결과다. 왠지 괜히 떠맡아버린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이제 와서 그런들 현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이리된 거 정말로 운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난 내 강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써야 할 때는 써먹는 게 현명한 처사겠지.

 "그리고 곧 가야 하고..."

 오늘은 일거리가 많다. 오늘 중으로 어느 정도 정산해놓지 않으면 앞으로가 힘들어진다. 나는 지갑을 안주머니에 넣고 주차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거의 없는 빈 복도에는 내 발에서 나는 구둣발 소리가 파동을 일으키며 울려 퍼졌다. 


 "시마무라 우즈키의~ 스마일 월드!"

 저녁7시. 선배의 스케줄목록에 적혀있었던 라디오 방송의 시작 시간이 되었다. 아무도 없는 고요했었던 방에서 울려 퍼지는 활기찬 하이톤을 가진 우즈키의 목소리는 무채색의 공기를 화사한 색깔로 물들여 침묵의 그림자를 완전히 깨뜨렸다. 미소가 가장 아름다운 아이돌 순위에서 항상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그녀이기에 가능한 필살기인 것이다.

 "여러분 오늘 하루는 어떠셨나요? 오늘은 웃을 수 있었나요? 웃을 수 있었어도, 없었어도, 전 세계의 모두가 지금부터라도 미소를 지을 수 있도록 저, 시마무라 우즈키가 최선을 다해 힘내겠습니다! 이 라디오는..."

 그녀를 직접 볼 기회는 선배와 같이 있다 보면 꽤 많이 있지만, 단 한 번도 힘든 기색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적어도 내 앞에선 말이다. 작년에 346프로덕션 최대의 이벤트인 신데렐라 걸에서 당당히 우승을 차지한 이후로 스케줄이 매우 빡세졌다고 들었었다. 예전에 비해 두 세배 정도라고 했었나... 그럼에도 저런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는 건 10대 여자애답지 않은 관록이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돌이란 건 본디 그런 존재일 테니까.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와 서류의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 그리고 계속해서 틀어놓은 라디오의 목소리. 어째 한창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를 했던 풍경과 엇비슷한 느낌도 든다. 물론 회사라는 특성상 그 공기는 내가 오기 전부터 있던 자스민향 디퓨져가 없더라도 사뭇 다른 느낌이지만, 하는 행동 자체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안에 내용만 다를 뿐이지... 

 "음... 양성소 2년에 백댄서 경력까지..."

 내 태블릿과 메모리스틱에 담긴 수많은 서류는 그 한장 한장이 한 개인의 거의 모든 것을 드러내고 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어찌 보면 간단하다. 일단 이 서류들을 크게 3개의 지역으로 나누고 각각 1차 면접이라는 이름의 예선을 치르게끔 한다. 그렇게 1차에서 추려낸 인원은 우리 회사로 와 두 번에 걸쳐 본격적인 오디션을 치르게 된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뽑히는 인원은 총 13명. 이들이 모두 한 팀이 되는 건 아니지만 상황에 따라선 또 모르겠다. 게다가 이러한 서류정리는 나 한 사람에게만 할당된 것이 아니니 경쟁률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 서류들을 들여다보니 뭔가 묘한 느낌이 든다. 한 사람의 인생과 노력이 겨우 이런 종이 몇 장에 전부 담아지는 것도 그렇고, 이것만으로도 증명이란 게 되는 건지 의문스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정과 간절함이 보이는 것들도 몇몇 존재했다. 비록 작업량 때문에 재빨리 검토하고 넘겨야 하지만 시간만 충분하다면 천천히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다.

 "라디오 네임, 초록귤 씨. 시마무라 씨, 새로운 라디오의 진행을 맡으신 거 축하드립니다. 전 지금 아이돌 양성소에서 열심히 기술을 쌓고 있습니다. 힘들 때도 있지만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기에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만... 이번에 보게 되는 첫 오디션이 너무 긴장됩니다. 경쟁자들도 평소보다 훨씬 많다고 하고... 혹시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합니다. 점점 웃음기도 사라져 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시마무라 씨는 이럴 때 어떻게 자신을 다독이고 있습니까? 부디 선배로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아아, 정말 절묘한 타이밍에 들어온 사연이었다. 아마 지금 코너는 고민 같은 걸 들어주면서 우즈키의 웃음 파워를 주입한다는 콘셉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 오디션 관련 작업을 하는 내게 들려온 그 사연은 어쩐지 낯설지가 않았다. 내 손에 있는 애 중 하나인 건가? 아니면 다른 곳의 오디션을 보는 것인가... 사소하지만 왠지 신경 쓰이는 의문은 이 사연을 듣자마자 줄곧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아... 음... 그렇네요. 저도 양성소에서부터 아이돌로 승급한 케이스라 그런 느낌이 어느 정도 공감이 가요. 특히나 다른 동기들이나 선후배분들은 승급하시거나 그만두시거나 해서 당시에는 거의 저 혼자서 있는 일이 많았거든요. 아니... 저 혼자인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아마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누군가가 저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더라면, 전 아직도 그곳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겠지요."

 선배에게 전에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이야 다른 잡지나 인터뷰에서도 어느 정도 그 시절 얘기가 오가는 만큼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버린 감각이 있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언제나 새로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듯이 선율을 가다듬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녀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무명시절은 아직까진 먼 아련한 기억이 아닌 모양이다.

 "그래서 전 언제나 생각해요. 제가 걸어왔던 길과 지금 함께 걷고 있는 분들, 그리고 앞으로도 같이 걸어 나갈 길을요. 아무리 어두워도 저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요. 저를 믿고 뒤에서 받쳐주는 분들, 그리고 저에게 응원과 격려를 보내주시는 팬분들도 함께 라는 걸... 초록귤 씨도 그 점을 생각해주셨으면 해요. 다른 특별한 건 없어도 괜찮아요. 그저 자신의 평소대로 마음껏 실력을 뽐내주세요. 적어도 제가 당신을 응원하고 있으니까요."

 평소대로... 아마 충고를 달라고 하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말이겠지. 그렇지만 시마무라... 그녀가 하는 말이기 어딘가 신뢰가 가는 느낌이 든다. 그녀도 예전까진 이 수많은 이력서 중 한 장이었을 테니까. 거기서부터 시작해 지금 그 자리까지 올라간 과정 속에서 세간에 밝혀지지 않은, 그리고 내가 상상도 못할 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겠지. 그렇기에 저런 가벼이 보일 수 있는 말에서 진심이 느껴지는 것일 테고.

 "만약 오디션에 합격한다면 언젠가 같이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그때는 서로 열심히 해보아요!"

 그 말을 끝으로 사연은 다음으로 넘어갔다. 이런 무거운 사연은 개인적으로 가장 마지막에 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제작진 생각에 끼어들 만한 재간은 되지 않으니, 이런 불만은 마음 한쪽에 묻어두자. 그보다 눈앞의 일을 처리해야 하는 게 먼저니까. 

 "혹시... 이 중애 저 사연을 쓴 애가 있을까?"

 만약 있다면 한 번 봐보고 싶다.

 {우웅...)

 갑자기 전화기가 진동을 내며 책상 위에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전화를 할 만한 사람은 없을 텐데...

 "모르는 번호..."

 게다가 화면에 나타난 번호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숫자 배치였다. 광고 같은 게 아니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난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346프로덕션의 토야마 마사토입니다."

 업무 연락일지도 몰라 그에 따른 대응 버전으로 전화를 시작했지만, 스피커 너머에선 왠지 모를 바람소리만 들려왔다. 

 "여보세요?"

 다시 한 번 대화를 시도했지만 들려오는 건 아까와 거의 비슷했다. 가끔씩 들리는 사람 목소리 같은 울림과 치지직거리는, 마치 옛 브라운관 티비에서 나오는 흑백의 알갱이같은 소리와 유사했다. 

 "들리십니까?"

 일단 내 말은 들리는 건지 사람 목소리 같은 울림이 다시금 귓가를 때렸다. 하지만 여전히 뭐라 하는지는 모르니 난감하다.

 "소리가 잘 안 들리니 이쪽에서 다시 걸겠습니다."

 하는 수 없다, 이리 말하고 끊는 수밖에. 그리고 나는 곧바로 찍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이상하게도 걸리지 않았다. 번호를 다시 보니 폰에서 사용하는 번호가 아닌 지역번호로 되어있었다.

 “혹시 공중전환가?”

 그렇다면 이쪽에서 연락할 방법은 없으니 다시 전화가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급한 일이라면 아마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걸려올 것이다.

 그렇게 몇 분 정도 기다렸지만 전화는 묵묵부답.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만 없는 노릇이니 나는 작업을 계속 진행하기로 했다. 어찌 되었건 오늘 안으로는 대충 완료해야 다음이 순조로워지니 말이다. 게다가 아직 모집 자체는 끝나지 않았으니 적게 들어오든 많이 들어오든 준비는 해놔야겠지. 

 밤이 점점 깊어지는 시간. 창문 밖에서 비치는 바깥의 모습은 도심처럼 휘황찬란한 빛의 향연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시가지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그다지 어둡진 않다. 비록 부서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방 안의 조그만 집무실이지만 원주민 특유의 정결함과 깔끔함은 다른 곳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책상 위엔 딱 업무에만 필요한 것 외에 다른 잡동사니는 1도 없고 책장에는 여러 책자와 서류철들이 그 높이에 맞게 빼곡히 꽂혀있었다. 다만 그와 어울리지 않게 주위엔 여러 장식용품이라던가 액자, 포스터가 가득했는데, 아마 선배 밑에 소속되었던 아이돌들이 놓은 그녀들의 흔적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이런 분위기는 나름 괜찮다고 생각한다. 너무 정갈해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그나저나 꽤 늦으시네."

 라디오가 끝난 지 1시간 정도 되었지만 선배에게선 어떠한 연락도 오지 않았다. 일 처리도 거의 마무리단계에 접어든지라 상황에 따라선 오늘은 마주치지 못하고 퇴근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원래 인사 같은 걸 해두는 게 예의이긴 하지만... 이리되면 하는 수 없다.

 "좋아, 이걸로 마지막..."

 이 한 명을 놓는 것으로 현재 주어진 나의 할당량은 완전히 끝났다. 동시에 몸의 기묘한 피로감이 덮쳐 기지개를 켜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흐으……. 음……."

 팔다리를 최대한 쭉 뻗어 전신의 뼈와 근육을 펴내자 한두 번씩 관절 부위가 뚝뚝 거리며 제자리를 찾아가는 감각이 들었다. 이렇게 오래 앉아있는 것도 다른 의미의 육체운동 같은 것이다. 구석기부터 산업혁명 시절까지 어차피 사람이 몸을 움직여야 했었던 법. 몇몇 사람이 앉아서 일을 한 것도 최대로 잡아봐야 근 1~2천 년 가까이밖에 되지 않았으니, 이런 면에선 아직 진화가 덜 되었다. 그저 적응하는 것 뿐. 만약 적응력이 부족했더라면 이런 사무직은 당장에 사라졌겠지.

 "그럼... 정리하고 퇴근해야지."

 일이 끝난 이상 오래 이곳에 몸을 붙잡아둘 생각은 없다. 선배가 올지 안 올지는 조금 고민이긴 하지만 이 정도쯤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사람이니 이번에도 눈감아주시길 바랄 뿐이다. 내 안에서 선배가 어떤 이미지인지 한마디로 말하자면 압도적인 Cool이 몸에 베어버린 인간인 셈이다.

 "그걸 cool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지..."

 그리 중얼거리며 나는 업무용 태블릿을 손에 들고 집무실 문을 열었다.

 "...앗!"

 그리고 거의 동시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짧은 비명이 내 귀를 때렸다.

 "엣?"

 너무나 급작스러웠던 탓에 순간적으로 사고가 정지됐다. 눈앞에는 그냥 벽인데 그런 소리가 들리다니... 이상하다고 여기는 게 당연하다.

 "으으..."

 그러나 그런 상념은 다시 한 번 들리는 소리에 의해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그 소리로 난 이 상황의 원인을 바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선을 아래로 돌리니 낯설지만 뭔가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밤하늘같이 아예 검지만 않은 단발에 얇은 팔다리, 전체적으로 어두운 옷차림이지만 감싸여있지 않은 손과 목은 순간 핏기가 그다지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하얬다. 그리고 전혀 좋다고 보기 힘든 관상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

 "너는... 시라기쿠 양?"

 그녀가 어째서 여기 있는지는 모른다. 애초에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왔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녀는 명확하게 내 눈앞에 있었다. 유령도 귀신 따위도 아니다. 엉덩방아를 찧어 주저앉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자, 그걸 조금 망설였지만 이내 잡힌 느낌은 확실히 살아있는 사람의 온기였다.


 아마 오늘은 생각보다 조금 긴 밤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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