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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같은 기억을 안주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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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30, 2016 01:16에 작성됨.

 

 

처음으로 써보는 소설입니다, 만 공돌공돌한 인생인지라 글 같은 건 영 못 쓰겠군요. 머릿속에 소재가 이것저것 떠올라서 신나게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보니 이도저도 아니게 되어버렸습니다. 덕분에 떡밥만 이리저리 뿌리다가 지쳐서 급결말.. 개연성의 부재는 다 술 때문이에요! (변명)

 


 

 

울긋불긋 단풍이 핀 가로수를 한 그루 한 그루 지나친다. 한때는 오랫동안 다녔던 길이지만 바뀐 것 하나 없음에도 격세지감을 느낀다. 가을이라도 타는 걸까, 문득 올려다본 하늘은 깨끗하기만 하다. 맑은 바람이 콧등을 간질인다.

건물 사이로 난 길이 끝나면 넓은 공원이 펼쳐있다. 벤치에 앉아서 쉬고 있는 중년의 남자, 손을 잡고 공원 가장자리를 따라 걷는 남녀, 비행기 장난감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들, …. 여기에 다다르면 해방감 뿐 아니라 평화로운 감정마저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옛날과는 다르게 이제는 대부분 낯선 얼굴들이지만.

공원 중앙에는 분수대가 있다. 내리쬐는 햇빛은 작은 물방울을 통과하며 일곱 빛깔 꽃을 피워낸다. 무지개를 보니 고등학교 때 과학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떠오른다. 무지개는 사실 색이 일곱 개인 게 아니라고. 뭐라더라, 햇빛은 모든 파장의 빛이 섞인 백색광인데 파장마다 굴절되는 정도가 달라서 나타나는 현상이라 했던가. 그래서 일곱 색이 아니라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모든 색을 가졌다던가. 뭐, 그런 류의 재미없는 얘기.

분수대 근처의 벤치에 적당히 걸터앉아 가지고 있던 비닐봉지를 연다. 성인이 되어 좋다고 생각했던 것 중 하나인 캔맥주를 한 캔 꺼내 한모금 마신다. 굳이 따지자면 맥주보다는 일본주이지만 공원에서 일본주를 마시는 것도 뭣하니까. 시원함과 수반되는 약간의 알코올 해독작용. 조금 고양된 기분으로 흘러가는 경치를 즐긴다. 오랜만에 느끼는 평화로움이다. 많은 이들의 크고 작은 추억이 깃든 장소. 역시 이 자리에서 바뀐 건 나 뿐이다.

"저기, 합석해도 될까요?"

술집에서 홀로 술을 즐기다 보면 이따금 들을 수 있던 대사다. 다만 다른 점은 여기는 술집이 아니라 공원이라는 점, 그리고 방금 들린 목소리는 어딘가 애틋하게 그리운, 낯설지 않은 목소리같다는 것. 얼굴을 올려다보니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아아 그녀임에 틀림없다.

"부디. 괜찮으시면 맥주 한 캔 어떠세요?"

'아, 고마워요.' 라고 말하며 그녀는 봉지에서 맥주를 꺼내갔다.

"크, 오랜만에 먹어보네요. 괜찮다면 안주로 어떤가요? 오늘 아침에 구워본 쿠키인데 꽤 괜찮은 것 같아요."

맥주에 쿠키? 꽤나 신선한 조합이지만 고맙다고 인사하고 한 개 꺼내 물어본다. 음, 의외로 어울린다.

 

내가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건 그녀가 데뷔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같이 일하던 친하게 지내던 동료, 아니 그 정도였으면 친구라 해도 되겠지. 그 친구가 주목하던 약소 프로덕션의 신인 아이돌. 당시에는 헤에, 하고 넘겼지만 그 해 말, 프로덕션의 아이돌 전원이 정상급으로 자라있던. 들리던 소문으로는 연초에 프로듀서를 새로 들이며 급성장했다고 한다. 내 프로듀서도 그는 프로듀서들 사이에 전설로 불린다고 했지.

"하아, 역시 가을은 좋네요. 이번 여름은 더워서 가을이 오길 얼마나 고대했는지 몰라요."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단발. 머릿결은 여전히 좋다.

"아아 많이 힘들었죠 정말 이번 여름은."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쿠키를 문다. 역시 신비할 정도로 어울린다.

"있잖아요, 그거 알아요?"

정적을 깨고 다시 용기내어 말을 거는 그녀.

"저도 당신처럼 한때는 아이돌이었어요."

모를 리가 있나. 아니 잊을 리가 있나.

"네, 알고 있었어요. 그보다 저를 알아보시다니 역시 대단하시네요, 키사라기 씨."

"그야 당연하죠.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 하더라도 한때는 제 선망의 대상이었던걸요? 그보다 헤어스타일을 바꿨는데도 알아보시다니 그 쪽이야말로 대단하셔요."

"왜냐하면 키사라기 씨야말로 제가 아이돌을 동경하게 된 계기니까요."

서로를 어색하게 치켜줄 뿐, 하지만 서로가 진심이라는게 느껴지기에 우리는 애써 우쭐해지는 감정을 가라앉혔다.

 

765프로의 아레나 라이브, 친구가 표를 두 장 구했다고 내게 같이 가자고 애원해서 호기심에 참석해보았다. 개막과 동시에 흘러나오던 M@STERPIECE...그녀들이 너무나 빛나서, 그 공간이 너무나 빛나서 압도되었다. 대망의 라이브가 끝나고 같이 갔던 선술집에선 친구보다 내가 더 신나게 떠들었다. 즐거운 추억이다.

그 후로 나는 765프로덕션의 팬이 되었다.

 

"...그 날도 오늘처럼 조금 쌀쌀했던 것 같네요. 친구랑 간 가라오케에서 '세빙'을 부르는데 말이죠, 아뇨,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곡명도 기억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딱히 키사라기 씨의 앞이라고 지어내는 게 아니니까요. 아무튼 부르고 있는데 험악한 인상의 아저씨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와서 참 놀랐죠. 들어와서는 다짜고짜 아이돌 일에 관심은 없냐고 하더군요. 지나가다가 새어나오는 노랫소리에 꽂혔다고 하셨어요. 앗, 가희(歌姬) 앞에서 이게 무슨 자랑이람."

"아니요, 괜찮아요. 이야기 계속해주세요. 그런데 험악한 인상이라면? 혹시 그 유명한 346프로의 프로듀서셨나요?"

"네. 아마 맞을 거에요. 회사 밖의 사람들도 알 정도로 유명하다면 그 사람 뿐이니..."

처음에는 애써 거절했지만, 감언이설에 꾀여 다음날 346프로 아이돌부 사무실을 찾아가 아이돌이 되고 싶다고 했다. 다들 당황했었지, 다 큰 성인여성이 갑자기 들어와서 아이돌이 되고싶다고 했으니. 정식으로 오디션을 봐라, 라는 말을 듣고 쫓겨났지만, 정작 오디션에 합격하고 다시 사무실을 찾았을 땐 모두가 환대해주었다. 아마도 그 프로듀서가 자신이 섭외한 사람이라고 특별히 귀띔했음에 틀림없다.

"사실 처음에는 신생 프로덕션이라고 크게 신경쓰지 않았어요. 아니, 못했어요가 맞겠네요. 미시로 사가 아이돌 사업에 뛰어들 때만 해도 저희는 96..아니 다른 어떤 회사의 아이돌과 한창 경쟁중이어서 프로덕션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정신이 없었거든요."

"아아, 그랬었죠. 더군다나 신인 쪽에는 346가 아니라 사이네리아라는 신생 아이돌그룹이 스포트라이트 받고 있었으니.."

"있잖아요, 저는 웬만해서는 새로 나오는 노래들은 한 번씩 들어봐요. 요즘의 트렌드는 어떤가, 어떤 가수가 어떤 스타일의 노래를 어떻게 하나 등등...그런데 당시 하나 필이 꽂힌 한 아이돌의 곡이 있었어요. 그걸 부른게 타카가키 씨였구요."

'쑥스럽네요,' 하며 남은 맥주를 들이켰다.

서로가 해주는 칭찬을 안주삼아, 쿠키처럼 달달한 각각의 기억을 나누며 우리는 추억을 더듬었다.

 

가져온 맥주가 동나서 정신을 차리고보니 어느새 하늘이 슬슬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노을이 지는군요. 역시 여기는 언제 봐도 아름다운 장소네요."

"...타카가키 씨는 어째서 아이돌을 그만두었나요?"

십 여 년만에 들어보는 질문이다. 뜬금없이 나온 걸로 보아 이전부터 퍽 궁금했던 모양이다. 치하야 씨를 쳐다보자 '술김에 실언했다'고 치하야 씨의 표정이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왕 내뱉은 궁금증인지라 답을 얻겠다는 심산인지 '아니에요'하고 변명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 말하는 건 이번이 세 번째인가, 네 번째인가. 처음 대면한 사람에게 고백하는 건 첫번째이다.

"있잖아요, 저는 그 때 보았던 아레나 라이브에서 '무지갯빛 미라클'이라는 곡이 가장 좋았어요.

아아, 갑자기 술집에 가고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거나하게 마셔서 잔뜩 취하고 싶다. 하찮은 신세한탄만큼 텁텁짭짤한 안주거리가 또 어딨을까.

"'모두가 각자의 색을 가져와서 만든 Rainbow, 그 반짝이는 다리를 건너라~♪' 이 노래를 들으며, 노래를 부르는 키사라기 씨와 동료분들을 보며 저도 저런 아름다운 미래를 걷고싶다고 생각했어요."

조금 흥분했는지 술기운이 올라온다. 아니, 내가 마신 건 맥주 두어 캔 뿐이니 이건 핑계인 건 나도 안다.

"아이돌이 되고나서는 한 손에는 765프로에 대한 동경을, 다른 한 손에는 나도 저렇게 되겠다는 열정을 쥐고 열심히 달렸죠. 346프로의 각양각색의 모든 이와 함께라면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 수 있겠다 하고요. 그런데 있잖아요, 혹시 프라운호퍼 선이라고 아세요?"

"프라운호퍼라면...학창시절 과학시간에 배웠던 것 같은데...기억이 잘 안나네요..."

치하야 씨도 무언가 불안한 감정을 감지한 듯, 아차 하며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팽창하는 감정은 눈앞을 가리고 유일한 배출구인 입으로 쏟아졌다.

"태양은 모든 빛이 섞인 백색광이라고 많이들 알고 있지만, 사실은 태양 내의 몇몇 원소들이 빛을 흡수해요. 그래서 프리즘으로 빛을 분광해보면 검은 띠가 군데군데 나타나죠. 그 띠들을 프라운호퍼라는 사람이 발견해서 프라운호퍼 선이라고 한다더군요."

(참고자료: 프라운호퍼 선; 출처: Wikipedia)

"무지개 역시 태양빛이 굴절되며 만들어지는 거잖아요? 완벽한 그라데이션처럼 보여도 싫은 군데군데 이가 빠져있는 거에요. 어른임에도 너무 이상을 꿈꾼거죠. 돌다리도 제대로 두들겨보고 건너라는데, 순진하게 환상에 불과한 무지개 다리를 맹신하고 건넌 거에요. 결국 그러다가 빈 틈으로 앗 하고 떨어져버린거죠."

차가운 감정이 압력을 못이기고 밖으로 토해진다. 치하야 씨는 미안한 얼굴로 할 말을 잃은 채 안절부절하다. 영문도 모른 채 냉기를 쐬게 하다니, 한 때의 우상에게 나도 참 악질이구나. 감정을 추스리자.

"...죄송해요, 무심코 흥분했네요. 해도 슬슬 지는데 오늘은 이만 정리해야 할 것 같네요. 키사라기 씨, 오늘은 만나서 반가웠어요. 다음에도 인연이 있다면 만났으면 좋겠네요."

"...카에데 씨"

이름을 불렸다.

"의 말장난, 오랜만에 들어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오늘은 한번도 해주시지 않았네요."

"솔직하게 살다가 절망에 빠지는 건 더는 싫어서요. 죄송해요, 이젠 하려해도 마음대로 잘 안 나오네요. 키사라기 씨도 단발보다는 역시 장발이 어울려요."

"...그렇군요. 이런 말 해서 죄송했어요. 그럼 다음에 또."

쓰레기를 정리하고 공원을 나선다. 택시를 잡고, 늘 가던 가게명을 부른다. 아직은 좀 이른 시간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좋지 아니한가. 출발하는 택시에서 창 밖을 보니 가을바람의 난류에 싸늘히 마른 단풍낙엽들이 회오리치고있다. 아아, 아름답고 신비로운 덧없음이여!

 

 

 


 

 

데레스테 카에데가 나온 기념으로 한번 써봤지만, 다 쓰고나니 등장인물이 누구냐는 아무래도 좋은 글이 된 것 같네요.. 아마 캐릭터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부족한 탓이겠지요. 글 쓰시는 분들 더더욱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옴니버스 식으로 써 볼 계획이었지만 후속편은 언제가 될 지 모르겠네요. 고로 빈칸은 자유롭게 채워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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