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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마음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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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21, 2016 12:45에 작성됨.

야요이는 갑작스레 부탁이 있다며 자신을 불러낸 왕에 당황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왕의 요구에 당황했다.


"비룡에... 인간을요?"
"응. 치하야쨩이 필요하다고 해서.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우리들의 비룡 중 가장 온순한 것은 야요이의 비룡이니까. 부탁할게."
"그거야 상관없지만..."


말과는 다르게, 야요이는 더할 나위 없이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벌써 자신의 비룡에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타는 것을 어떻게 비룡에게 말해둬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아무리 온순하다고 해도 인간을 등에 태우지 않으려 할 수도 있다. 그런 사실에 한숨을 내쉬던 야요이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역시 대담한데요, 그 사람..."

 
그 비룡과 싸워봤다면, 보통은 비룡에 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당당히 요구하는 그녀에게 야요이는 할 말을 잊은 뒤였다.

 

 

 

 
 

 

 

"이번엔 전장에 직접 나가겠다니...내 곁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 마? 그리고, 비룡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에, 또, 그리고, 음..."
"됐으니까. 나도 뭐 크게 일 칠 건 아냐."


하루카가 말을 더듬거리는 것에 웃은 치하야는 그렇게 말하며 목걸이를 걸었다. 푸른 보석이 걸린, 투박하지만 깨끗한 목걸이었다. 그 푸른 보석을 잠깐 바라보던 치하야는 하루카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건 몇 번이라고 했지?"
"총 다섯 번, 마법의 발동이 가능해. 그 이후엔 그냥 평범한 보석이 되어 버리니까, 주의해줘?"
"응. 좋아. 그 정도면 충분해... 하지만, 대체 어떤 마법이야?"
"시즈카쨩의 마력이니까 손에서 얼음 덩어리나 냉각 광선이 나가는 것 정도려나? 그래도 꽤 위력이 되니까 사람을 향해 바로 쏘면 아마 죽을지도 모르니, 직격으로 쓰면..."
"그렇네... 그 정도인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바라보던 치하야는 문득 자신을 감싸안는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뒤에서 하루카가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 사실에 치하야는 약한 한숨을 섞어 말했다.


"하루카, 곧 가야해."
"알고 있어... 그렇지만... 어째서 비룡을 혼자 타야 한다고 하는거야? 나랑 같이 타면 안돼? 아무리 리인포스 와이번 종의 비룡이라고는 하지만, 어쩌다가 치하야쨩이 다치기라도 하면...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하루카가 고개를 숙여 어깨에 그 얼굴을 묻었다. 그런 하루카를 바라보던 치하야는 다시 한숨을 내쉬곤 손을 뻗어 하루카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무리하지 않을 거니까."
"...위험할 것 같으면, 바로 내 곁으로 오는거야. 약속이다?"
"응."

 
그렇게 대답하자, 그나마 조금 안심한 듯 하루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안도의 한숨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에 치하야가 웃자, 그 모습을 보던 하루카는 치하야를 끌어안았던 손을 놓았다.

 
"슬슬 출전해야 하나?"
"아... 그렇네. 개전 시간이야."
"조심해. 무리하지 말고."
"알고 있다니까."

 
그렇게 퉁명스레 말하자, 살짝 미소짓는다. 그리고 약간 고개를 숙여오는 그녀에, 치하야는 놀라지도 반항하지도 않은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살며시 맞닿는 온기를 느끼기 위해서라기도 한 듯이.
지금, 이 자리에서, 얼마 전까지 전우였던 이들과 싸우는 이유.

이 상냥한 왕을 위해서.
누구보다도 상냥한 이 여자를 위해서.

 

 

 

 


 

 

야요이의 비룡을 빌려 타겠다고는 했지만, 치하야는 꽤나 긴장한 상태였다. 전에도 비룡을 한 번 타 본 적이 있다고 해도 그건 하루카가 함께 탔었던 때의 일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치하야는 대담했지만, 상식을 지나치게 벗어나는 인간도 아니었다. 긴장과 두려움을 간신히 그 마음 속에 숨겨놓고 있을 뿐.
사실 이것도 대담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그 대담한 도전은, 첫째 왕자에게 크나큰 혼란을 줄 수 있었다. 그것은 비룡은 인간이 탈 수 없다는 편견에서 우러나온 혼란이었다. 전장에서 비룡에 올라탄 치하야의 모습을 목격한 첫째 왕자는 크게 놀랐다.

 
"치하야가... 아니란 말이냐?"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왠지 엄청난 손실을 입은 듯한 느낌이었다. 치하야가 아니라면 치하야를 왕위 후계자 리스트에서 추락시킬 수도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치하야만큼의 전략가라면 승산도 없었다.


"저 후드를 쓴 자를 집중 사격해라!!"


저 자 때문에 마왕군이 이토록 조직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면, 그 자를 없애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왕자는 주변에 있던 노병대에 그렇게 명령했다. 그에 노병들이 활에 화살을 걸었다. 따가운 햇빛에 화살촉이 빛을 냈다. 그 탓에, 빛줄기로 보이는 것들이 일제히 치하야에게 날아갔다.
그 근처에 있던 마왕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 쪽으로 뛰어들려는 듯한 태세를 취했지만, 치하야의 행동이 먼저였다.

 
"실드!"
 

옅은 청색이 감도는 막이, 치하야와 비룡을 감쌌다. 팅, 하는 무언가가 튕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청색의 막에 부딪힌 화살들이 그 아래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왕자는 그 후드를 쓴 자가 치하야가 아니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적어도 인간이 아는 범위 내에선, 인간이 마법을 쓸 수 있는 방법은 마석의 소유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석을 소유하는 것으로는 저 정도의 강한 실드는 펼칠 수 없었다. 아니, 할 수 있다고 해도 치하야는 마석을 갖고 있지 않았다. 마석을 내 줄 수 없다고 했던 마족들이 치하야에게 마석을 쥐어줬을 리도 없었다. 그의 지식 범위에선, 스타피스 메모리즈라고 하는 물건은 없었다.

그리고 그건 치하야가 바란 대로였다.


"태양의 젤러시!!"


치하야를 향해 활을 겨눈 것에 대한 보복처럼, 하루카의 목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거대한 불꽃이 인간군의 궁병대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 불꽃의 폭풍에, 첫째 왕자는 신음을 내뱉으며 말을 뒤로 몰았다. 그 위력에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기분을 느끼며 치하야는 비룡의 고삐를 잡고 외쳤다.

 
"위로 올라가자!"

 
비룡이 커다란 울음 소리를 낸 뒤에 치하야의 말을 따랐다. 그 사실에 치하야는 안도감을 느꼈다. 비룡이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 그만큼 다행으로 여겨질 수 없었다. 거기다가 야요이가 주의를 시켜놓은 덕분에, 비룡은 마족인 주인을 태웠을 때처럼 빠르게 날지 않았다. 평범한 속도로 상승했을 뿐이다.
그리고 치하야는 왠지 슬픔을 느꼈다.
 
모두가 같은 마음일 수는 없으니까, 분쟁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테지만─
이렇게 보면, 그 치열한 분쟁이 단지 사소한 먼지구름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자조하며 치하야는 땅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치, 금방 닿기라도 할 듯이.
그리고 그녀는 내뱉었다.


"....다이아몬드 더스트!"


약간의 생각 끝에 그녀의 입에서 주문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그 손에서 뻗어나온 얼음 송곳들이 창공을 가로질러 인간군을 향해 내달렸다.
그 모습을 보던 치하야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오늘의 전쟁도, 아마 마왕군이 승리할 것 같았다.
번개는 미친 듯이 내달려서, 먼지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희미한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치하야는 귀를 막았다. 귀를 막은 그녀의 머릿속으로, 언젠가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 누군가를 죽여본 적이 있어?」
「직접?」
「직접.」
「있어.」
「...괴롭지 않았어?」

 
하루카는 눈치채지 못했던 것 같지만, 자신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괴롭냐고, 하루카에게 되물어 봤을 뿐.


「전쟁은 살인의 숫자가 영광의 척도가 되는 일이지. 살인이 정당화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살인을 많이 한 자가 영광스런 이름을 받는 곳이야. 살인을 해야 모든 게 이루어지는 곳. 그런 전장에 나와서 약한 소릴 할 생각은 없어.」


머릿속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떠돌아다녔다. 그리고 치하야는 그런 자신의 목소리를 비웃었다. 괴롭지 않을 리 없었다.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 괴롭지 않을 리 없었다. 괴롭지 않은 척 하는 것 뿐. 괴로운 걸 보이면, 그 약하고 상냥한 왕을 지탱해 줄 수 없으니까.

그 날의 전쟁은, 결국 인간군에겐 아무런 수확도 없이 부상자만 남겨둔 채로, 검은 후드의 사람이 인간이 아닌 마족이라는 결론만 안겨주었다.
주문을 쓰고 비룡을 타고 다니는 자가 인간이라는 것을, 인간군은 인정하기 힘들었다.

 

 

 

 

 


"하루카."
"응? 무슨 일이야?"


조용히 걸어온 마코토는 하루카가 앉아있는 옆에 털썩 앉았다. 그녀가 자신과 자리를 동석한다는 것에 하루카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마코토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은 듯 하루카의 옆에 앉은 채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하루카는 하늘을 바라보며 마계에서 보이는 별을 세고 있었다.

 
"너... 그 인간을 애인으로라도 삼은거야?"

 
그 질문에 하루카는 순간 지금까지 세던 별의 숫자를 잊어 버렸다. 별을 계속 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더듬거리는 말이 입 안에서 튀어나왔다.

 
"잠, 잠깐, 마, 마코토가 그걸 어떻게... 아, 아니, 그, 그러니까, 아니, 내 말은...!"
"가타부타말고 간단하게 대답이나 해."
 

지극히 당황했다는 것이 느껴지는 그녀에 비해, 마코토는 냉담하게 그렇게 말했다. 그런 그녀에 잠깐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하루카는 숨겨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긍정의 표시에, 이번엔 마코토에게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나마 천족이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우우... 저, 저어, 마코토. 치하야쨩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말아줘, 부탁이니까... 내가 먼저 치하야쨩에게 반했고, 치하야쨩을 좋아한다고 말한 것도 내가 먼저이니, 그, 치하야쨩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결국엔 승낙했다는 거 아냐? 그 인간 쪽에서도."
"...네에..."
"...네가 누굴 좋아하든 그건 별로 상관 없어."
"응? 그럼..."


어째서 그걸, 이라고 물으려던 하루카의 말이 끊겼다.


"알고 있는거야? 이 전쟁이 정전으로 끝나면, 포로는 반환해야 해."

 
그 말에 하루카의 표정이 굳었다. 마코토의 말뜻은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이해했다는 표시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에게서 좀 떨어진 곳에, 마미와 히비키 두 사람에게 둘러싸여 뭔가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검은 로브에 후드를 쓴 여자가 앉아있었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그녀가 이해했다는 것을 안 마코토는 조용히 말했다.


"그래, 그 인간은 포로지. 전쟁이 끝나면 곧바로 인간군으로 송환해야해. 그러면..."
"....난... 이 전쟁이 정전으로 끝나면, 치하야쨩을 다시는 못보는거야?"

 
하루카의 말에 마코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동안, 자매의 사이에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하루카는 마치 그 자리에 정지된 것처럼 치하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하루카의 모습을 보던 마코토는 할 말을 다 끝냈다는 표시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덧붙였다.


"아즈사의 경우를 잊지 말고 잘 생각해라. 지금 끝내놓는게 좋은지... 어떤지."


마코토의 말에 하루카는 신음을 내뱉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 마계의 장군인 푸른빛 머리칼의 여성이 조용히, 아무 말 없이 앉아있었다. 이따금 보이는 그 눈동자에 담긴 슬픔은, 백 년도 전에 생겼던 상처의 흔적이라는 것을 하루카는 잘 알고 있었다.
아즈사. 마계의 장군.
아름답고 강인했던 그녀가, 인간과의 교류가 있었던 시절 인간을 사랑하고, 그렇기 때문에 입었던 상처를 하루카는 잘 알고 있었다.


"모모자키...였던가."


하루카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코토는 이미 저 멀리 가 버린 상황이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듣기라도 하듯, 하루카는 그 이름을 잠깐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인간은 급속도로 늙는다. 그 노화의 속도는, 마족들에 비하면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아즈사는 자신은 변하지 않는 상황에서, 바뀌어 버리는 자신의 연인을 바라봐야만 했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몇십년이라는, 마족에게는 지독할 정도로 짧은 세월을 그 연인과 함께 한 뒤에 자신의 눈 앞에서 죽어가는 연인을 바라봤어야만 했다.

그 모든 이야기를 알기에, 하루카는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시선이 치하야가 있는 곳에 닿았다.
후드에 가렸지만, 그녀의 입술 끝이 웃고 있다는 것을 하루카는 볼 수 있었다. 그 미소를 보고 있으면, 자신의 입가에도 미소가 지어진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에 하루카는 슬픔을 느꼈다. 치하야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잠깐 머릿속을 뒤엎고 지나갔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으면, 어쩔까.
아무리 사랑해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포기할 수 없다면, 자신도 아즈사와 같은 길을 걸어가야만 하는 걸까.

그리고 하루카는 한숨을 섞어 웃었다.
이미 그런 일은 한 번 겪어본 뒤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던 시절을 잃어 버리는 경험을.

 
"나를 너무 무르게 봤구나..."

 
들어주는 사람도 없는 말이 공중에 낱낱이 흩어졌다. 그 말들을 붙잡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하루카는 치하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사랑한다는 건, 어쩔 수 없잖아?"

 
시선을 눈치챈 치하야가, 하루카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그 미소에 하루카는 마주 웃었다. 그녀를 정말로 좋아하니까 포기같은 건 생각 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 사실에 쓴웃음을 지으며, 하루카는 언젠가 마코토도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마코토에게 속으로만 말했다. 그 스스로도 마코토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잘 상상이 안 가기 때문이었다.

 

 

 

 

 

치하야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낮 동안엔 인간계의 하늘보다 훨씬 더 푸른 그 하늘은, 밤에는 어두운 붉은 빛을 띄었다. 마치 고급스런 붉은 융단이 깔린 듯한 그 하늘을 바라보던 치하야는 그럼에도 어둠이 깔린다는 것을 신기한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여기에 온 이래 몇 번이나 보는 거지만, 신기한 밤이었다. 밤이 깊어지면 검은색같지만, 그 하늘은 분명 약간은 붉은 기를 띄고 있어서 더욱 신기했다. 마치 인간계의 하늘이, 완전한 검은색이 아니라 약간은 푸른 빛을 띄고 있는 것 처럼.

 
"치하야."

 
이젠 익숙해진 목소리에 치하야는 시선을 돌렸다. 그 자리엔 흑발의 여성이 서 있었다. 하루카의 언니이자 이 마계에서 왕의 다음 자리인 재상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 그녀를 보고 미소지은 치하야는 물었다.

 
"배치는?"
"네가 말한 대로 끝냈어."
"고마워. 수고했어."


자연스럽게 그렇게 답하는 그녀를 본 마코토의 눈동자는, 약간 이채를 띠었다. 잠시 치하야를 바라보던 마코토는 방금 자신의 언행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인간이었다. 단지 평범한 인간일 뿐인데.
저기 있는 인간군의 인간들과 다를 바가 없는데.
자신은 왜 방금, 그녀를 이름으로 불렀을까?

 

 

 

"...저,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기라도 하지 그래? 보고 있는 사람이 불편한데."


묵묵히 서 있기만 하는 마코토를 바라보던 치하야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녀가 서 있는 바람에 치하야는 앉지도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마코토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뚫어져라 치하야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피하지도 못한 치하야는, 어쩔까 고민하다가 마주 그녀를 바라보기로 결심했다.
하루카의 언니라곤 하지만, 마코토는 그녀를 딱히 닮아있진 않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관찰하던 치하야의 시선이 문득 그 머리카락에 닿았다. ...더듬이인가? 저건? 하루카의 리본에 이어 호기심이 발동하는 자신을 발견한 치하야는 고개를 내저었다. 만져보고 싶지만, 마코토는 하루카처럼 그냥 만지게 내버려 둘 것 같진 않은 상대였다. 그 사실에 몰래 속으로만 한숨을 내쉰 치하야는 문득 목이 아파오는 것을 느끼고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하지만 치하야의 그 행동에 자신의 뒤에 뭔가 있기라도 한건가 돌아봤던 마코토은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려야만 했다.


"...왜 그래?"
"올려다 보자니 목이 아파서."


그 말을 하며 약간 분한 표정을 짓는 치하야에, 마코토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밤이고 지금은 양 쪽 모두 쉬고 있다고 해도, 지금은 전시다. 그런데 저런 행동을 할 생각이 드는 건가, 라는 생각이 마코토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족이 아니라면 전투 중에 저런 행동을 할 생각을 하는 녀석은 거의 없다. 천족도, 인간도, 전투 중에는 심하게 긴장한다는 것을 마코토는 잘 알고 있었다.

역시 이 인간은, 마족과 비슷한 면이 많은걸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런 생각과 다르게, 그녀의 입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야습에 대한 대비라. 정말로 야습을 해 올 거라고 생각해?"
"아, 아마도. 그리고 나도 야습을 해 오길 바라."
"어째서?"

 
그렇게 묻는 마코토에게서 시선을 돌려, 치하야는 불가에 앉았다. 마족의 진지에 있는 불들은 인간들처럼 나무를 태우는 것이 아닌, 마법으로 일으킨 불이라 꺼질 일은 없으며 연료도 필요없다는 점에 치하야는 극도의 편리함과 부러움을 느꼈다. 이 전쟁이 끝나고, 다시 마족과 사이가 좋아진다면 마석 대신 스타피스 메모리즈만을 교역해도 좋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치하야는 마코토의 질문에 답했다.

 
"기습은 말야, 성공한다면 상대를 제대로 와해시킬 수 있겠지만, 실패하면 자신의 부대의 대부분을 잃게 되는거야. 말 그대로 양날의 검이지. 실패하면 자신의 군대가 와해되는 거니까. 난 그리고 기습해오면 반드시 실패하게 만들겠어."
"...자신이 넘치는 말이구나."
"자신이 있으니까. 대비도 끝났고... 그러고보니, 하루카는... 어때?"

"본진 쪽에 있어. 내내 네 걱정이던데? 방해만 되는 녀석은 얌전히 본진에 있으라고는 해뒀지만."
"아, 아아... 그렇구나."


마코토의 말에 쓰게 웃은 치하야는, 역시 마족들의 '왕'에 대한 개념이 어떻게 자리잡혀 있는 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잠시동안, 두 사람 사이에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저기, 마코토. 한가지 물어봐도 될까? 하루카는 대체 어떻게 왕이 된 거야?"

 
그 말에 마코토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날카로운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에 치하야는 자신이 뭔가 잘못 말했나 싶어 불길을 바라보는 도중 힐끗힐끗, 마코토을 바라보았다.
마코토는 한참 뒤에 말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 인간군이야."

 

 

 

 

 

"젠장!!! 이게 뭐야!"

 
야습을 하기 위해 마왕군의 진지쪽으로 군대를 이끌고 가던 둘째 왕자는 갑작스레 양 쪽에서 나타난 마왕군에 당황하고 있었다.
마계의 지형은 대부분이 사막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둠 외에는 숨을 곳도 없었고, 동시에 이런 식으로 반격 당하리라곤 예상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둘째 왕자는 마왕군이 모래 밑에 숨어있었다는 사실에 이빨을 갈아야만 했다. 마족의 신체 능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는 것을 진작에 생각해놨어야만 했다.

이 작전을 시행하게 한 자신의 형을 향해 욕설을 내뱉으며 둘째 왕자는 후퇴하라고 외쳤지만, 이미 마족과 인간이 뒤섞여 엉망이 된 군단이 그의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비명소리와 피가 뒤섞여, 고요한 밤을 깨뜨렸다. 어두운 밤하늘에 인간군의 병사 중 한 명이었을 이의 머리가 튀어 올라 둘째 왕자의 발 밑에 떨어졌다. 그 사실에 둘째 왕자는 다시 한 번 당황했다.
그린 브리즈 호에서의 농성전이 시작된 이후 마왕군은 인간군 중 누구도 직접 죽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마족들은 인간군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고 있었다.

그 사실에 당황한 것은 둘째 왕자 뿐만이 아니었다. 인간군 소속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적어도 자신의 목숨은 보장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 앞에서 도륙당하는 자신의 전우들을 본 그들은 순식간에 그 생각은 안일한 것이었다고 인정해야만 했다.


"마코토, 일단 여기의 지휘는 이오리에게 맡겨두고, 우린 본진으로 돌아가자."


그 말에 마코토는 치하야를 내려다보았지만, 그 말에 어떠한 이의도 표시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손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 신호에 날아온 비룡의 날갯짓에, 거대한 풍압이 그들을 덮쳤다. 그 강한 바람에 치하야가 쓰러지기 전에 치하야를 붙잡은 마코토는 비룡이 땅에 내려서기도 전에 비룡 위로 뛰어올랐다. 그런 주인의 행동에 놀라거나 이의를 표시하지도 않은 채 비룡은 하강하던 걸 멈추고 그대로 인간군과 마왕군이 싸우고 있는 위를 지나 본진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치하야는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양동 작전이었네. 둘째 오빠의 허락은 받지 않았겠지만."

 
그 말에 마코토는 치하야를 바라보았다가 치하야가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가 바라보는 곳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속에서 뭔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계에 어둠 외에 엄폐물이 없다는 것은 하늘을 날 수 있는 마족들에겐 참 좋은 조건일지도 몰라. 하늘 위에서 보면 나같이 어둠에 약한 인간도 보이게 되니까."


치하야는 그렇게 중얼거리곤 똑바로 인간군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겐 단지 어둠속에서 뭔가가 움직이고 있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마코토는 그게 인간군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치하야는 마코토를 돌아보며 말했다.


"인간군을 우리가 먼저 기습하자. 본진 쪽에서도 알아차릴 수 있도록."
"...공격해."


그 말에, 비룡은 거대한 울음을 울렸다. 마계의 어둠이 그 거대한 울음 소리에 흔들렸다. 비룡 위에 타고 있던 치하야가 자신도 모르게 귀를 막을 정도로 커다란 울음이었다.
그리고 비룡이 목을 길게 빼자마자 그 입에서 붉은 불꽃이 용솟음쳤다.

 

 

 

 

 

 
"양동 작전이라. 하루카쨩이 데려온 참모는 정말로 대단하네."

 
아즈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사막을 휩쓸고 지나가는 마코토의 비룡이 뿜어낸 불길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자신들 뿐이라면 양동 작전이든 뭐든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 뻔했다고, 아즈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마족은 단체 싸움에는 약했고, 단체 싸움에서 있을 계락이나 그런 것엔 더욱 약했다.
과연 인간은 대단하다, 그렇게 감탄하며 그녀는 조용히,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인간은 접하면 접할수록 정말 대단하네요."


그녀가 한 때, 그리고 지금도 사랑하지만, 이젠 이 세상에 없는 인간에게.
그녀의 평생을 주고 싶었던 인간에게.

 
"히비키쨩, 출전하자?"
"이제야 가는건가! 기다렸다고! 출전 준비!!"

 
히비키의 목소리가 마왕군을 일깨웠다. 마왕군 본진에서 작은 움직임이 일었다.
그리고,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아즈사가 선두에 서서 달리자마자 마왕군은 그녀를 따라 인간군을 향해 내달렸다. 함성도, 무엇도 없었다.


그 이상할 정도의 고요함 가운데에서, 아즈사는 쓸쓸하게 미소지었다.

 
"친해지고 싶다고 하면, 이상할까?"


그렇게 중얼거린 그녀는 그녀의 빠른 발 덕분에 금방 눈 앞에 나타난 인간군을 향해 자신의 무기를 들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숨기듯이.
그리고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외쳤다.


"-달의 곁에서!"

 
그녀의 외침과 함께, 그녀의 손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초승달이 인간군을 휩쓸고 지나갔다. 귓가에 들리는 수많은 비명들에 아즈사는 고개를 숙인 채로 발을 옆으로 디뎠다. 그녀가 옆으로 피한 그 자리를, 거대한 발톱이 내려쳤다.
피로 붉게 물드는 대지를, 아즈사는 바라보지 않았다. 바라볼 새도 없었다. 멍하니 있다간 아군에게 큰 타격을 입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공중을 선회하던 비룡의 위에서, 검은 낙뢰가 인간군을 향해 내리꽃혔다. 아슬아슬하게 그 낙뢰를 피한 히비키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마코토는 아군이든 적군이든 인정이 없었다. 시선을 들어보면 여기저기, 흑빛 번개가 인간군을 내려치고 있었다.
저것이 마코토의 가장 약한 주문이라는 것을 안다면, 인간군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마계 정복을 포기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히비키는 외쳤다.


"Rebellion!"

 
그녀의 손 위에, 거대한 발톱의 형상이 드리워졌다. 그리고 히비키는 그것을 옆으로 휘둘렀다.
인간군을 한 바탕 휩쓸고 지나가는 그 발톱의 형상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즈사는 잠깐 무릎을 굽혔다가 땅을 박찼다.
그녀의 발이, 잠깐 히비키의 발톱을 밟았다가 지나갔다. 그 반동으로 가볍게 뛰어오른 아즈사는 공중에서 인간군을 바라보며 내뱉었다.


"일곱빛깔 버튼!"


그 순간, 그녀의 손에서 색색의 광탄 같은 것이 수없이 늘어나 인간군을 포위했다. 그에 인간군이 당황하는 모습은 그녀에게 똑똑히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공중에서 땅으로 내려서기 전에 그 광탄들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외쳤다.

 
"Fire!"
 

그 순간, 인간군을 둘러싸고 있던 광탄들이 갑작스레 터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공중에서 보고 있던 치하야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냐는 듯 그와 함께 비룡에 타고 있던 마코토가 그녀를 돌아보자 치하야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편하달까, 뭐랄까. 싸움에 있어선 지시가 필요없구나. 대단한데, 다들."
"그렇겠지. 우린 태어나서 싸울 수 있는 나이가 되는 순간부터 오로지 전투 뿐이니까."
"그런가... 아. 저 쪽은 도주하는가보네. 이 쪽은 완전히 섬멸하는 게 좋겠어."
"그래?"
"응. 벌써 도망간 사람들도 몇몇 있는 것 같지만, 내버려두고 후방을 공격하자."

 
그 말에 마코토는 손을 들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차디차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 눈동자에 걸맞는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edeN!"

 
검은 빛이 앞에 원을 그렸다. 그리고 그 검푸른 원에서 튀어 나온 여러개의 번개가 인간군을 향해 쏟아졌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천벌과도 같은 모양으로.

 

 

 

 

 

피비린내와 함께 날은 밝아, 피에 물든 전장을 여실히 드러냈다. 멀리서도 보이는 붉은 모래에, 하루카는 인상을 찌푸렸다. 인간계보다 훨씬 푸른 하늘과, 붉은 모래의 대비는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더욱 기분이 나빴다. 피로 물든 붉은 모래라는, 그 괴기스런 풍경에서 시선을 돌린 하루카는 치하야가 아직도 막사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망설임 없이 치하야의 막사로 들어간 하루카는 안에서 아무 반응이 없다는 것에 당황했다. 원래 들어가면 치하야가 하루카를 알아보고 먼저 말을 건네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사실에 주변을 둘러보던 하루카는 치하야가 간이 침대 위에 쓰러져 있다는 사실에 더 당황했다.


"치하야쨩?! 무슨 일이야!!"
 

그렇게 외치며 황급히 치하야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달려가 치하야를 흔들자, 치하야가 가늘게 눈을 떴다. 희미한 시야로 하루카를 찾아낸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하루카가 다시 치하야에게 괜찮냐고 물으려는 순간, 치하야가 손을 뻗어 하루카를 끌어안았다.
그 사실에 하루카가 당황하며 얼굴이 잠깐 붉어졌지만, 치하야가 작게 흘리는 목소리에 그녀는 곧 헛웃음을 지어버렸다.


"미안해... 졸려서..."

 

 

 


 

 

 

잠이 덜 깬 치하야를 잠시동안 안고 있던 하루카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서 자신의 행동에 얼굴을 붉힌 채 머리를 정돈한 뒤 후드를 두르는 치하야를 미소지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잠결에 그렇게 행동한 것이 부끄러운 듯 치하야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이제 좀 괜찮아, 잠자는 공주님?"
"응. 어제 야습 대비 때문에 너무 졸렸어. 이제 괜찮아."

 
장난기를 섞어 그렇게 물어보자, 치하야는 고개를 끄덕이곤 답했다. 치하야가 목에 메모리즈를 거는 것을 보던 하루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치하야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에 치하야가 놀라며 돌아보았지만, 하루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치하야의 후드 끈을 묶어 주었다. 그에 살짝 치하야의 얼굴이 붉어졌다.

 
"고마워."

 
그렇게 말하는 치하야에게 미소지어보인 하루카는 살짝 뺨에 키스했다. 그에 치하야는 부끄러운 듯, 혹은 못마땅한 듯한, 그런 얼굴로 하루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곧 나가야 해. 저 쪽에서 움직일테니까."
"알고 있어."
"보급대는 확실히 막고 있지?"
"응. 북쪽으로 가는 길은 미키가 맡고 있고, 리츠코씨와 이오리도 그 곳에 있으니 문제 없을거야."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치하야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인간군이 남쪽으로 도망치면 추격전이 되고, 마족들과 보폭을 맞춘 추격전은 자신에게 좀 벅차다. 그러니까 여기서 결판을 낼 수 있다면 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 있으면, 결판이 난다.


"인간군은 계속 그린 브리즈 호에 고립시킬거야. 그러면... 잘하면, 오늘 내로 결판이 나."

 
그 말에 하루카의 표정이 굳었다. 그 반응을 본 치하야가 무슨 일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잠시 치하야를 바라보던 하루카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면 치하야쨩은 돌아가는거야?"
 


잠시동안 침묵이 막사 안을 멋대로 휘젓고 돌아다녔다. 하루카는 치하야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너무 무거워, 잠시 뒤에 하루카는 치하야의 어깨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런 하루카를 가만히 바라보던 치하야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언제부터 알았어?"
"치하야쨩은.. 쭉 알고 있었어?"
"나도 하루카한테 비룡을 타게 빌려달라고 한 날 하루 전에 알았었어. 정전을 하면 포로 송환을 해야 하니까. 그게 포로와 상대국에 대한 보통의 예우지."
"..난 치하야쨩하고 헤어지고 싶지 않아... 나도 마코토가 가르쳐줘서 알았어... 그렇지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시간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점점 초조해져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하루카.."
"마코토는 치하야쨩을 포기하라고 했지만, 난 포기할 수 없어."


치하야를 끌어안고 있는 하루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약간 숨이 답답해져 왔지만, 그 힘은 어딘지 모르게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정말로 좋아하니까 포기할 수 없어. 그렇지만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솔직히 말한다면, 난 정말로 인간군에 대한 섬멸전을 벌일까도 생각했었고.."
"...하루카."
"그러면, 치하야짱 돌려보내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어."


그 말에 치하야도 살며시 고개를 내저었다. 그 감각에, 하루카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치하야의 눈동자가, 슬픈 빛으로 하루카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도 그런 건 원치 않아."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손이었지만, 그 손이 잡아당기자 하루카는 자신도 모르게 치하야를 끌어안고 있던 손을 놔 버렸다. 그런 하루카를 보고 조용히 웃은 치하야가 뭔가 말하려는 순간, 바깥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인간군이 움직인다! 대비해!"


그 목소리에 막사 바깥을 돌아본 치하야는 한숨을 내쉬었고 하루카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하루카를 돌아보고, 치하야는 쓰게 웃곤 말했다.


"이야기는 오늘이 잘 풀리고 나서 하자, 하루카."
"..응"

 

 

 

 

 

 

전날의 피해가 워낙에 컸기 때문에, 인간군에서 움직인 군은 적었다. 그리고 치하야는 그 사실에 아쉬워하지 않았다. 이번에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치하야는 지시를 내려놓고서 전처럼 전장 근처에 있지 않고 본진에 있는 하루카의 곁에 있었다. 그녀가 하루카와 함께 있는 대신 상세한 설명을 들은 마코토와 타카네가 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하루카, 상태는 어떤 것 같아?"


곁에 있는 하루카의 비룡을 손을 뻗어 쓰다듬으며 치하야가 그렇게 물었다. 비룡은 그 주인의 성격을 닮는 것인지, 하루카의 비룡은 인간인 치하야도 거부감 없이 따랐다. 타카츠키의 비룡은 굉장히 온순했고, 생각해보면 마코토의 비룡은 상당히 인간을 싫어하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대조해보면 주인과 굉장히 닮았다, 라고 생각하며 치하야는 하루카를 돌아보았다.
하루카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곤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 말은 치하야에겐 들리지 않았다. 그게 마법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치하야는 후드가 더워서 손부채질을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에 하루카는 치하야에게 말했다.


"적당히 상대해주고 있지만, 아직 탈주자는 없다고 하네."
"그래? 역시 정규군인가... 아쉬운데."
"응. 뭐, 일단은 더 상태를 지켜봐야 할 것 같아."


하루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치하야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계보다 훨씬 더운 마계의 날씨에, 후드는 거의 자살 행위나 다름없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던 하루카가 조심스레 물었다.


"안으로 들어가는 게 낫지 않겠어, 치하야짱?"
"아니... 그러면 예상 외의 일이 생겼을 때 대처를 못하니까."

 
그러면서도 흐르는 땀은 어쩔 수 없다. 오늘은 특히 더 더운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잠시 보던 하루카는 갑자기 치하야에게 말도 없이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 모습에 무슨 일인가, 하고 치하야는 멍하니 하루카를 바라보았지만, 쏟아지는 더위에 곧장 신경을 꺼버렸다.
그리고 잠시 뒤에 다시 온 하루카는 치하야의 뺨에 무엇인가를 가져다댔다.


"왓!! 차, 차가워! 뭐, 뭐야, 하루카?"
"에헤헤.."


뺨에 하루카의 손이 닿은 순간 느껴지는 차가움에 치하야가 깜짝 놀라며 돌아보자, 하루카는 웃으며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하루카의 손에 쥐어진 것은 단순한 메모리즈였다. 그걸 멍하니 치하야가 바라보고만 있자, 하루카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마침 쓸 만한 보석을 가져왔던 걸로 기억해서, 이 보석에 시즈카쨩의 마력을 넣어달라고 했어. 내 마력은 불꽃이니까 시원해지는 것엔 전혀 도움이 안되니까."
"아, 시즈카라면... 그, 이전에도 메모리즈에 마력을 넣어주었던..."
"응, 기억하고 있구나."


그 말에 수긍한 치하야는 하루카의 손에 들린 메모리즈를 건네받았다. 메모리즈 안에 들어간 마력의 영향을 받았는지 차가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 메모리즈를 뺨에 가져다 댄 치하야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살 것 같네."
"시원할거야."
"응. 하아..."


기분이 좋은 듯 그렇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에 메모리즈를 갖다댄 채로 눈을 감는 치하야를 보던 하루카의 얼굴이 붉어졌다. 물론 그런 하루카의 반응은 눈을 감고 있던 치하야는 보지 못했지만.
잠시 멍하니 치하야를 바라보던 하루카는, 갑작스레 시선을 전장 쪽으로 돌렸다. 그 분위기를 눈치챈 듯 치하야가 눈을 뜨고선 손에 메모리즈를 쥔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전장을 바라보던 하루카가 조용히 말했다.
 

"한 명, 탈주자가 생겼다고 해. 도주 방향은 북쪽."
"그래...전군에게 전해줘. 북쪽으로 도망치는 탈주자는 놓아주라고. 그 외의 방향으로 도망치는 탈주자는, 가서 견제하도록 해."
"알았어."
"그리고, 아미...였던가? 그 아이를 불러줘."
"아미를?"
"응. 따로 지시할 게 있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하루카는 명령을 전달하는 듯, 입속으로 뭔가 중얼거렸다. 그런 하루카를 잠깐 바라본 치하야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어쩐지 쓸쓸해 보여서, 명령을 전달한 뒤 치하야를 바라본 하루카는 멈칫 할 수밖에 없었다. 어딘가 슬퍼 보이는 듯한 그 미소에 하루카가 머뭇거리며 그녀를 부르려는 순간, 그녀가 먼저 하루카를 돌아보았다.

 
"하루카. 적어도 백년 정도는 기억해 줄 수 있어?"


그 말에 하루카는 잠시 멍하니 치하야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멍하니 서 있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치하야를 끌어안았다.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얼마 안 있으면, 전쟁은 끝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인간인 그녀가 있을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은, 그 한마디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인간군의 본진은 며칠 내내 침울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인간군 본진에 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며칠 전 있던 마왕군과의 접전 이후, 인간군과 마왕군은 충돌 없이 대치 상태였다. 그런데 그 접전에서 몰래 도망쳐 간 이들이 마왕군에게 습격받지 않고 무사히 인간계로 도망쳤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 소문에 인간군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술렁인 것은 말단 병사들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그들이 보아도, 이미 마왕군과 인간군의 싸움은 마왕군의 명백한 승리였고, 승기따윈 없었다. 그리고 말단으로, 강제 징용당해 전쟁터에 끌려나온 그들은 승리에 대한 강한 의지도, 의욕도, 그리고 영광어린 회군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고향의 땅과 가족, 사랑하는 이들 뿐이었다.

미련의 힘은 무섭다.
고향에 남겨두고 온 것이 있는 이들은, 자연히 그 소문에 이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날 밤, 몇몇의 병사들이 탈주를 시도했다.

 
"자아, 이 쪽이야. 얼른 오라고."


고요한 밤을 타서 어둠 속에 몸을 숨긴 그들은 재빠르게 인간군 본진을 벗어났다. 탈주를 시도한 병사는 세 명이었다. 그들은 그나마 살아남은 친한 이들에게 몇가지 약속을 받았다. 그 중 하나가, 무사히 탈출해 인간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은 경우 남아있는 이들에게 연락을 취하기로 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인간계로의 탈주에 선발대와 같은 역할이었다.
그들은 곧 인간군 본진에서 한참 멀어졌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들의 긴장은 더해갔다. 그 중 한 명이 조심스레 중얼거렸다.

 
"우리, 잘못하고 있는 거 아닐까... 적어도 인간군에 있으면 살 순 있을지도..."
"무슨 바보같은 소리야, 이제 마왕군도 죽이지 않는 전쟁은 관뒀다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던 듯, 선두에 서 있던 이가 그렇게 외쳤다. 그 말에 중얼거리던 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며칠 전 야습 이후, 마왕군은 살육을 완전히 허가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그들에게 공포로 다가왔다. 승기도 인간군에게 없는 상황에서 마왕군이 살육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들에게 당장 저승으로 가는 길을 약속 받은 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자신만만하게 앞장서는 한 사람을, 불안한 듯한 걸음걸이로 다른 이들이 따라갔다. 이상할 정도로 주변은 고요했고, 아무도 없었다.
애스터리스크 협곡은 인간계와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북쪽에 주둔하고 있는 마족들만 지나가면 얼마 안 가 인간계일 것이다. 그 사실에 어떻게든 스스로를 위로하며, 그들은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 지 모를 무렵, 흐릿하게 동쪽에서 빛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들은 눈 앞에 보이는 인간계의 풍경에 감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달렸다. 그 중 누군가가 사라졌다는 것 따윈 깨닫지도 못한 채로.

 

 

 

 

 


"수고했어, 아미."
"후아─ 정, 정말로 긴장했다궁..."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푹 내쉬는 그녀를 보고 리츠코가 조용히 미소지었다.
인간군 병사의 모습에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미는 다리를 쭉 뻗은 채로 북쪽에 주둔하고 있는 마왕군의 진지 한 가운데에 누워 버렸다. 그 모습을 보던 이오리가 아미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 참모가 명령한 게 하나 더 있었잖아? 그건 하고 자라고."
"아, 알았다구우... 웃차."

 
그 말에 하는 수 없이 일어난 그녀는 외쳤다.
 

"Gemmy!"


그 주문과 함께, 아미가 비둘기로 변했다. 흐음, 하고 그 모습을 보던 리츠코는 미리 치하야가 북쪽 주둔군에 보내준 종이에 급해 보이도록 글씨를 적곤 비둘기로 변신한 아미의 다리에 묶어주었다. 한마디로 하자면 전서구였다.


"그럼, 조금만 더 힘내."
"이 아미님에게 맡겨두시라!"


자신만만하게 그렇게 외친 아미는 날아올랐다. 약간 비틀거리긴 했지만, 비둘기로 변신한 그녀는 훌륭히 날아올라 인간군 기지를 향해 갔다. 그 모습을 보던 이오리가 물었다.

 
"뭐라고 적었어?"
"무사히 인간계에 도착. 마왕군은 조우하지 않았다... 라고."
"간단하네. 그나저나 이런 걸로 인간군이 해체 될 거라고 생각해?"

 
그 질문에 리츠코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것이 효과를 볼 지, 아니면 전혀 효과를 보여주지 않을지 그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녀는 조용히 내뱉었을 뿐이었다.


"해체되길 바라는 수밖에 없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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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의 내용을 정하고 주문의 이름을 정하는지,
주문의 이름을 정하고 주문의 내용을 정하는지에 대해선 밝혀진 바가 없다(?)

 

..그리고 이번엔 3~4편 분량을 합쳐놔서 더 길어졌네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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