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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06, 2016 17:47에 작성됨.

 

 치히로는 아무것도 없이 비어있는 책상 위에 갈색 상자를 내려놓았다. 제법 무거웠는지 쿵 하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먼지가 묻어있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치히로는 손을 살짝 털어냈다. 그리고 테이프로 봉해져 있던 것을 뜯어 상자를 열었다. 샤아악 하는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치히로는 상자를 연다는 행동을 좋아했다. 상자를 봉하기 위해 테이프를 잘라낼 때의 끼지지직하는 소리는 유쾌하지도 않고 기분이 나빴다. 반면에 뜯어낼 때의 소리는 시원한 느낌이어서 좋아했다. 소리 뿐만이 아니라 내용물의 경우에도 그랬다.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를 때는 그 두근거림이 좋았다. 내용물을 알고 있을 때는 바라던 것이 손에 들어온다는 기대감이 좋았다.
 
 치히로에게 상자란 자신의 노력으로 인한 보상이 되어 돌아오는 무언가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치히로는 한번도 온전한 호의에 의한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제법 무거운 것치고는 상자 안의 내용물은 별다를 것이 없었다. 간단한 사무용품이나 컵, 티포트 같은 자잘한 물건들뿐이었다. 다만, 특이하게도 자그마한 컴퓨터가 한 대 들어있었다. 보통 컴퓨터는 사무실에 미리 설치되어 있는 편이지만 이곳은 아직 사무실의 구색도 갖추지 못했기에 직접 가져와서 설치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치히로는 컴퓨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손에 잘 익지도 않고 다루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시대에 컴퓨터가 없으면 업무 자체가 불가능하다. 예전에는 그래도 손으로 직접 하는 맛이 있었는데 라고 생각하니 문득 나이를 제법 먹은 것 같아서 씁쓸했다. 물론 치히로의 나이는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어린 나이 때부터 일을 해왔기에 오랜 시간이 지난 것만 같았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다른 물건들을 정리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아직 상자 안에는 컴퓨터가 남아있었다. 책상 위에 컴퓨터가 들어서야할 공간은 남겨뒀지만 스스로는 컴퓨터를 설치할 수가 없었다. 뭐, 곧 누군가 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치히로는 다시 손을 털었다. 더 이상은 건드리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치히로는 책상 뒤쪽에 놓여있는 의자를 바라보았다. 회사의 자본력을 자랑하듯 준비된 의자는 푹신하고 안락한 최고급 의자였다. 붉은 가죽과 검은색 마감으로 꾸며진 의자는 비싸 보였다. 직접 앉아보니 그대로 누워서 잠들 수 있을 정도로 편안했다. 잠시 눕듯이 앉아 늘어져 있던 치히로는 이내 생각을 바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티포트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티포트가 탁 소리를 내며 물이 다 끓었음을 알리자 치히로는 자신의 컵에 녹차 티백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티백으로 타는 차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사무실을 옮긴 직후인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티백의 내용물과 뜨거운 물이 만나자 녹차의 은은한 향이 피어올랐다.
 
 치히로는 녹차를 한 모금 마시며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구석에 자리한 자신의 자리 말고는 텅 비어있었다. 그 흔한 의자나 소파 하나 없이 텅 비어있었다. 한쪽 벽면은 전부 유리창으로 되어있어서 바깥의 풍경이 훤하니 보였다. 덕분에 더욱 빈 공간이 넓어 보였다.
 
 이제 시작이라고 치히로는 실감했다. 자신의 반생은 오롯이 오늘을 위해서였음을 되새겼다. 언제나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힘이 들었다. 어느 때는 치욕스럽고 굴욕적일 때도 있던 나날들이었다. 그 모든 고통도 모두 지금을 위해 감수해왔다.
 
 
 
 치히로는 어릴 적부터 아이돌을 동경해왔다. 다름이 아니라 그녀의 어머니가 아이돌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이돌 춘추전국시대라면서 수많은 아이돌이 히트하고 데뷔하곤 했지만 다들 아이돌의 전성기는 20년도 전이라는 말들을 한다. 그리고 그 시대의 바람을 이끈 사람 중의 한 명이 치히로의 어머니였다. 전설이 되어 이름을 남긴 히다카 마이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치히로의 어머니도 누구나 알 정도의 유명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돌연 결혼을 발표했다. 상대는 그녀가 출연한 드라마의 상대역이었던 남자 배우였다. 두 사람은 화제를 일으키며 결혼했고 곧 치히로를 낳았다.
 
 모두가 새로운 별의 탄생이라며 기뻐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치히로의 부모는 얼마 가지 않아 이혼했다. 흔한 일이었다. 유명한 연예인들이 잠시 동안의 사랑으로 결혼을 하고 금방 틀어져 이혼하는 일은 적지 않았다.
 
 치히로의 어머니는 해외로 사라졌다. 치히로의 아버지는 아무런 발표도 하지 않았다. 모두를 위해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치히로의 어머니는 얼마 안 가 목을 매단 모습으로 뉴스를 통해 부녀 앞에 나타났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치히로는 지금까지도 어머니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녀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단지, 허황된 꿈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었던 거다. 그리고 자신은 그 폭풍에 휘말려버린 것뿐이다. 왜 이런 부모 아래에서 태어났느냐고 한숨을 쉬어봐야 변하는 건 없으니까.
 
 
 치히로의 아버지는 치히로가 성인이 된 후 곧이어 숨을 거뒀다. 상처뿐인 인생이었다. 치히로의 어머니가 사라진 후로 더는 배우의 일도 할 수 없어서 신분을 숨긴 채로 혼자 다른 일을 하며 치히로를 키웠다. 그리고 '이제는 안심하고 너를 보낼 수 있겠구나' 같은 말을 남기고 스러졌다.
 
 그 후에 족쇄가 되는 성은 버렸다. 아버지의 쪽도 어머니의 쪽도 이미 유명해서 먼 친척의 성인 센카와라는 성을 쓰기로 했다. 치히로 라는 이름은 흔한 편이니까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 같아서 그대로 뒀다. 사실, 이름마저 버린다면 정말로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릴 것만 같았다.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고민한 끝에 치히로는 다짐했다. 그 누구를 탓할 수 없다면 모두에게 되갚아주자. 허황된 꿈을 좇아 사람을 상처입히는 일이 더 이상은 일어나지 않도록. 자신과 같은 절망을 하지 않도록.
 
 
 그래서 센카와 치히로는 이율배반적이었다. 누구보다도 운이 좋았지만 누구보다도 불행했다. 대형 아이돌 프로덕션의 사무원이면서 누구보다도 아이돌을 싫어했다. 누구보다도 아이돌을 싫어하면서 가장 아이돌에 가까운 존재였다.
 
 
 
 녹차가 조금 쓰게 느껴졌다. 이제와서야 아무래도 좋다며 센카와 치히로는 감상적인 생각을 저편으로 던져버렸다. 커다란 창으로 바깥을 관망하던 것도 그만두었다.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실례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위압적인 용모의 남자였다. 180cm가 넘어 보이는 키에 체구도 건장했고 가장 눈에 띄는 건 험악한 인상의 얼굴이었다. 보통 여자가 혼자 있을 때 저런 남자를 마주친다면 도망을 치는 게 정상적인 반응이겠지만 치히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남자는 치히로가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서 오세요."
 
 "센카와 치히로 씨, 맞습니까?"  
 
 남자의 물음에 치히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센카와 치히로에요. 치히로 라고 부르셔도 된답니다."
 
 치히로의 대답에 남자는 뒷목을 긁적였다.  
 
 "알고 계시다시피 제가 이번 프로젝트의 담당 프로듀서를 맡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센카와 씨."
 
 완곡한 거절을 표한 프로듀서는 양복의 속주머니를 뒤지다가 그만두었다. 
 
 "지금은 명함이 없군요. 죄송합니다."
 
 프로듀서는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아무런 직책도 소속도 없었기 때문에 명함이 없었다. 예전에는 다른 쪽의 프로듀스를 했었지만 그만둔 지가 꽤 됐다. 
 
 "그나저나 의외네요. 당신이 다시 아이돌 프로듀스를 하기로 마음먹을 줄이야."
 
 프로듀서는 이미 한 번 실패를 맛본 사람이었다. 아니, 실패라고 해야 하는 지는 논란이 있다. 그의 프로듀스로 담당 아이돌은 인기를 얻고 성공했다. 다만 그의 효율과 성과를 중시하는 방식에 염증을 느낀 아이돌들이 반발을 일으켰다. 결국 멤버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프로젝트는 해산이라는 끝을 맞았다.
 
 하지만 그 아이돌들은 여전히 인기 아이돌로 활동하고 있다. 게다가 아이돌들이 먼저 떠나간 것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아이돌도 회사와의 계약에 묶여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일을 결정할 수는 없다. 아이돌들과 점점 부딪히는 상황을 먼저 포기한 건 프로듀서 쪽이었다. 그래서 그의 프로듀스를 실패라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 자신이 못 박았다. 이건 실패라고. 자신은 프로듀서로써의 자격이 없다고.
 
 "사람은 언제까지고 멈춰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 이후로 다른 아이돌의 프로듀스를 맡지도 않고 있던 남자였다. 회사에서도 다른 유명 아이돌들의 프로듀스를 부탁했지만 전부 거절당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는 이 프로젝트를 맡았다. 
 
 "그 말은 대답이 되지 않네요."
 
 치히로는 웃으며 말했다. 도발적인 말이었지만 프로듀서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면,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걸 처음부터 시작한다면."
 
 지금껏 거리를 두고 있던 프로듀서는 앞으로 걸어 나와 치히로를 지나쳐갔다. 그는 빈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구석에 자리한 치히로의 자리 이외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비어있는 공간이었다. 
 
 "우선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적어도 기본적인 사무소의 구색은 갖추어야겠지요."
 
 프로듀서는 품 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이내 동작을 멈추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먼저 가보겠습니다."
 
 핸드폰을 다시 품에 집어넣은 프로듀서는 다시 바람같이 치히로를 지나쳐 문으로 걸어갔다. 
 
 "어머, 벌써 돌아가시려구요?"
 
 등 뒤에 울리는 치히로의 물음에 프로듀서는 짧게 대답했다. 
 
 "작은 일 하나하나라도 직접 결정하고 싶습니다."
 
 문을 나서는 프로듀서에게 치히로는 말을 걸었다.
 
 "저, 죄송하지만… 제가 컴퓨터를 설치할 수가 없어서 그러는데. 그쪽도 알아봐 주실 수 있나요?"
 
 걸음이 멈추고 프로듀서가 치히로를 돌아봤다.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알겠습니다."
 
 짧은 대답과 함께 프로듀서의 모습이 사라졌다. 기계 같은 대답과는 다르게 배려심이 느껴지는 작은 문소리를 남기고 나간 프로듀서였다. 넓은 공간에는 다시 치히로 혼자만이 남았다.
 
 "사람은 변한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미 프로듀서에게는 들리지 않겠지만 들으라는 듯이 치히로는 말을 꺼냈다. 
 
 "물론 변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아요. 바보 같은 사람."
 
 '그렇게 배신을 당하고서도 또'라며 치히로는 혀를 찼다. 프로듀서는 치히로가 기대하던 것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 점은 치히로의 예상 밖이었지만 이제 와서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프로듀서 씨한테는 미안한 일이 되겠지만요."
 
 작게 속삭이며 치히로는 남은 녹차를 비웠다. 주인을 잃은 말이 빈 잔에 담겨 회오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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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천히 천천히 써 봅니다.
 
 이번엔 얼마나 갈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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