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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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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07, 2014 21:32에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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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로코롬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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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아,네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누구신지.."

"네. 여기가 작곡가 토루키씨의 개인 사무실 맞나요?"

"예 그렇습니다만.."

"그분께서 개인적으로 주문하신 택배를 배달하러 왔습니다"

"택배...요?"

"택배요"

"죄송하지만 오늘 택배가 올거라는 연락은 받지 못했는데요"

"아하...그래요..?"

 

연락을 받지 못한 것이 당연하다. 당신들이 나를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모든 것. 펼쳐지는 모든 상황. 모두가 작전을 이루는 요소에 불과하니까.
쉽게 말하자면 전부 다 거짓말이다. 전부 다.

 

===약 20시간 전. 오후 1시 40분.===

 

"근데 프로듀서"

"왜"

 

정성스레 두 손으로 들고있던 핫초코잔을 살며시 내려놓으며 치하야가 말했다.

 

치하야와 나는 지금 사무소 옆에 있는 카페에 앉아있다.
1시간가량 데모CD를 녹음한 그녀는 꽤나 지친 상태였다.
그녀가 마시는 것은 내가 사준 - 단것은 싫다는 애한테 억지로 사먹인 - 핫초코.
나는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내가 마실 것은 시키지 않았다.

 

"데모CD는 언제 돌리실거에요?"

"..."

"프로듀서?"

"다 마셨으면 갈까"

 

책상을 짚고 일어서는 시늉만 하며 치하야를 내려보았다.
살짝 찌푸린 두 눈썹. 불만을 가득 품은 채 나를 올려다보는 두 눈. 토라진 입술.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데모CD 돌리는 날이 궁금하다고?"

"네"

"데모CD 돌리는 날이 궁금하다고?"

"....그래요"

"데모CD, 메모CD, 네모CD, 세모CD..."

"프로듀서는 정말 심술맞네요"

"칭찬이야?"

"...몰라요 이제 정말"

 

이정도 놀려먹었으면 말해줄 때도 된 것 같다.

 

"그걸 네가 알 필요는 없어 치하야. CD를 돌릴 때 널 데려가지 않을거니까"

"절 안 데려가신다고요?"

"그래"

"왜죠"

"그걸 지금부터 말해줄게"

 

신인 아이돌이 자신의 CD를 돌리는 절차는 간단하다.
아이돌과 프로듀서가 함께 방송국을 돌며 관계자, 연예인, 작곡가 등에게 앨범을 건네주며 인사.
특별히 흠잡을 데 없는, 전통적이며 정통적인 방법이다. 모두가 이렇게 한다. 딱히 다른 수단을 생각하지도 않는다.

 

"근데 왜 그 방법을 버리시는거죠"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자. 그렇게 나눠준 CD중 실제로 재생되는 CD는 얼마나 될까"

"...상당히....적겠죠"

"그거야. 그게 문제라고"

"..."

"그렇게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나눠준 CD중 대부분이 쓰레기통에 버려진다면,
인력낭비에 자원낭비지. 효율이 떨어져"

"그럼 다른 방법이라도 있나요?"

"있지"

"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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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루키씨의 비서 되십니까?"

"예. 토루키씨에게 들어가는 모든 배송물은 저를 거치게 돼있습니다"

"글쎄요. 이 물건은 수령인 본인의 요청에 따라 직접 배송하도록 돼있는데요"

"본인의 요청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무슨 물건이길래 그런거죠"

"수령인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발설할 수 없습니다. 회사 규칙이에요"

"그렇다면 저도 상관의 안전을 위해 들여보낼 수 없습니다"

 

제기랄. 첫날 첫일부터 거대한 장벽에 막혀버렸다.
토루키는 7년 전부터 업계에 발을 담근 작곡가다. 실력이 널리 알려진 것이 6년 전. 사무실을 차린 것은 5년 전.
이 여비서의 우직한 태도를 보면 아마도 사무실을 차림과 동시에 일을 시작했을 것이다.
일이 순탄치 않을 것이란건 생각했지만 처음부터 이 지경이라니.

 

"너무 과민반응 아니십니까. 그냥 택배인데 말이죠"

"읏.."

"무슨 폭탄이라도 들었을거라 생각하시는겁니까.
본인의 과대망상이 저와 제 고객, 저희 회사에 누가 되고있다는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럼 물건을 직접 보여주시죠"

"수령인의 요청에 따르면.."

"제가 다시 깔끔하게 포장해놓겠습니다.
이쪽에도 남은 상자는 많으니 문제될 것은 없어요. 어서 열어보시죠"

"후우..."

 

이 방법을 쓸 때가 오지 않기를 바랬다. 나를 위해, 그리고 여기있는 모두를 위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내 체면이 아니다.
치하야가 정성스레 담은 노래가 작곡가들의 귓속에 울려 퍼져야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알겠습니다. 말씀드리죠"

"안에는 뭐가 들었죠?"

 

나는 호주머니에서 작은 리모컨을 꺼내들었다. 손바닥 크기보다 조금 작은 리모컨.
한손에 들고 조작하기에 최적화된 기기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리모컨 앞쪽에 붙은 POWER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상자속 물건이 사정없이 진동한다.

 

"뭐...뭐죠 이게?"

"남성용 성인용품입니다"

"나...남성...용...성..."

 

비서의 시선은 상자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상자는 매우 격정적으로 온 몸을 떨고있다.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옹알이같은 소리만 뱉어댔다.
나는 바로 POWER버튼을 다시 한 번 눌렀다. 야릇한 떨림이 가라앉은 자리에 무거운 침묵만이 남는다.

 

"....."

"....."

 

훌륭한 아이돌 프로듀서가 되기위해서는 얼굴에 두꺼운 철판을 여러장 깔아야 한다고, 언젠가 아저씨가 말했다.

 

"...이제 들어가서 고객님 물건을 사무실에 놓고와도 될까요"

"네..드..들어가셔도...좋...습니다..."

 


=============

 

"이렇게 일단 작곡가 사무실에 진입하면 그때부턴 쉬워져"

"......"

"치하야?"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해요?"

"직접 건네주면 절대 듣지 않을거니까 상대가 들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게 이 작전의 핵심이야"

"사무실에 들어가서 CD를 틀고 나오는 거군요?"

"밖에있는 관계자들은 듣지 못하도록 볼륨도 조절해야지"

"갑자기 노래가 나오면 꺼버릴 수 있으니까"

"그거야"

"와..."

 

치하야는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핫초코를 홀짝였다.
그리고는 큰 머그잔을 내려놓고 입가에 묻은 핫초코를 혀로 핥아냈다.
그런 모습을 보고있으면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피로가 풀린다.

 

사무소에서 누군가가 피곤할 때는 단 것이 최고 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혹시나해서 단걸 먹여봤는데 확실히 효과가 있는 듯 하다
그녀는 CD녹음을 마친 직후에 비해 얼굴이 밝아졌고 눈빛도 활기를 띄고있다.

 

"이제 좀 예쁘다"

"네?"

"다 마셨으면 나가자"

"네? 아, 네.."

 

카페 문을 열자 냉랭한 바람이 얼굴을 휘감았다.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자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혈관에 차가운 냉수를 주입당한 느낌.
지독한 추위에 몸을 떨며 목도리 안에 얼굴을 깊게 파묻으려던 순간.

 

"프로듀서"

 

치하야가 고개를 숙인 채 내게 말했다.

 

"왜?"

"저...설명은 잘 못하겠는데.."

"응"

"걱정돼요. 당신이"

"..."

"택배기사로 위장하는 것도 그렇고..가짜 택배도 그렇고.."

"..."

"정말 그런 방법밖..읍"

 

난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치하야에게 둘러주었다.
둘러주었다기보다는... 꽁꽁 싸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듯 싶다. 입을 완전히 가려버렸으니까.
그녀가 내 계획에 토를 다는 모습을 보기 싫었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이다.
또 다른 이유는..

 

"으읍..웁.."

"...이제 따뜻하지?"

 

얼음같은 칼바람에 휩싸인 그녀의 두 뺨이 빨갛게, 차갑게 상기되어있었기 때문이다.

 


=============

 

작업을 모두 마치고 토루키씨의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여비서를 속이는데 썼던 상자는 미리 매고갔던 가방에 담아 다시 가져왔다. 다음 작업에도 써야할 소중한 소품이다.

 

사무소에서 타고온 대형 밴 운전석에 앉아 온풍기를 틀고 담배를 피웠다.
아이돌 호송에도 쓰이는 차이기 때문에 안에서는 담배를 태우면 안된다는 것이 - 리츠코가 멋대로 정한 - 원칙이였다.
그런데 이렇게 추운데 밖에서 어떻게 담배를 피우냐고. 그리고 한 대만 피울거니까 괜찮을거야. 꽁초는 내가 가져가서 집에다 버릴게 리츠코.

 

'두둠칫 두둠칫 두두 두둠칫 두둠칫'

 

치하야에게 느닷없이 전화가 온 것은 담뱃불을 끄고 있을 무렵이었다.

 

"여보세요. 프로듀서?"

"왜 전화했어"

"아무래도 걱정돼서.."

"오지랖"

"큿.."

"순조롭게 잘 되고있어"

"정말요?"

"아니. 방금 하나 했는데 생각보다 힘들어"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내 걱정 할 시간에 딴거 해"

"뭐요?"

"연습, 아니면 뭐 좋은 아이디어 같은거"

"괜찮은 아이디어가 있어요"

"괜찮은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해. 뭔데"

"타카츠키에게 그라비아를 시키는 건 어떨까요"

 

가끔 굉장히 똑똑한 사람도 상당히 멍청한 얘기를 하는 때가 있다.
우리 사무소에는 나이도 적절하고 몸매도 좋은 아이돌이 꽤나 있다.
그런데 왜 하필....야요이? 그 어린애를?


       
"...왜....?"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고려는 해볼게"

"정말요?"

"아니. 시끄러워. 끊어"

"아, 프로듀"

'뚝'

 

...어쩌면 내가 힘든걸 알고 터무니없는 개그를 시도해보려 한 것은 아닐까.
그래 그런 거겠지. 치하야는 그런 멍청한 소릴 하는 애가 아니니까.
재미는 하나도 없었지만..노력이 가상하구나. 치하야. 나 힘낼게.

 

치하야의 어이없는 개그 - 이것이 개그가 아니었음을 알게되는 것은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난 이후 - 에 힘입은 나는
두서없이 불타오른 의욕에 힘입어, 대형 밴의 엑셀을 밟았다.

 

지정해둔 작곡가 모두에게 CD를 돌리는데 꼬박 3주가 걸렸다.
작곡가 5명이 사무소에 연락을 준 것이 그로부터 2주 후.
아직 데뷔도 하지 않은 아이돌이 연습생활 2달 반만에 노래 5곡을 얻게되었다.
게다가 완성도 낮은 노래도 아닌, 기본적으로 30V가 넘는 강력함을 지닌 노래들. 축복이다.
이제 나와 치하야에게 남은 숙제는 단 하나.

 

"다섯곡중에서 가장 별로라고 생각되는 곡이 뭐야?"

"가장 별로요? 왜 그걸 먼저.."

"가장 약한 노래로 데뷔해야 부담이 적어지겠지.
4단계 불법 어획작전 벌써 까먹었어?"

"맞다. 그랬었죠"

"뭐 아무튼 골라봐"

"음...잘 모르겠어요.
다섯곡 전부 한 번 정도만 더 듣고 고르는게 낫지 않을까요?"

"그러자 그럼"

 

여전히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3층 연습실에서 우리는 작은 오디오 플레이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재생버튼을 누르자 스피커가 토해내는 가이드보컬의 목소리가 방음벽 안을 울렸다. 아직 치하야는 녹음을 하지 않고 곡만 받은 상태.
다섯곡 모두 괜찮은 곡이지만, 이게 더 좋다 저게 더 좋다 하는 차이는 확실히 있었다.

 

20분이 지나고, 스피커는 울림을 멈추고 방음벽 안에는 정적이 돌았다.

 

"자 이제 결정해"

"근데 프로듀서"

"어"

"제 결정이 반영 되는건가요?"

"응"

"자, 어떤 노래가 가장 별로야? 멜로디, 가사 종합적으로 따져봤을 때"

"저는 이 '파랑새' 라는 노래가 가장 별로네요"

"...."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답변에 나는 멍하니 확신에 찬 그녀의 눈동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자투리]

"프로듀서?"

"응"

"그..택배상자에 든 물건 있잖아요? 진동하는거"

"그게 왜"

"뭐에요? 설마 진짜..성인.."

"아니야. 안마기야"

"아..."

"안마기..랍시고 만들었겠지 만든 사람은"

"네?"

"쓰기 나름이라고"

"...."

"..써볼래?"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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