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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노세 시키 연작선 그 마지막, 「Trust nobo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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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6-26, 2018 02:12에 작성됨.

창 밖 너머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며칠째일까, 나는 작게 중얼거리고는 밖을 쳐다본다. 사실 날짜를 셀 것도 없다. 시키를 만난 날부터 연이어 내리는 비. 처음에는 차가웠던 비가 조금씩 따스해지는 것같이 느껴진다. 아마도 시키 때문일거야. 나는 입가에 빙긋 미소를 지으며 컵에 녹차 티백 하나를 넣고 주전자에 물을 넣는다. 쪼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배수구를 타고 흐르는 빗물. 그 청아한 소리와 함께 가스레인지를 조작해 불을 킨다. 따스하다. 손을 타고 흐르는 시키의 체온처럼.


물이 가열될 동안 시키를 깨우러 침대 쪽으로 다가간다. 침대에서 편하게 자라고 나 혼자 소파에 와 자고 있으면, 어느샌가 시키가 주인의 품을 바라는 고양이처럼 나타나 나를 껴안고 잠이 들어 있었다. 주인의 품이라, 오히려 시키가 나의 주인이었을텐데. 시키 트리스메기스토스에서 이치노세 시키로, 그리고 다시 시키냥으로 돌아가는 나날들. 이 모든 나날은 시키가 마지막으로 만들어낸 마법과도 같은 나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사가 키우던 고양이, 마법사가 되어버린 고양이, 고양이가 되어버린 마법사. 나는 재밌지도 않은 말장난에 피식 웃어버린다.


시키는 햄버그를 퍽 좋아했다. 물론 좋아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내 예상보다도 더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간 고기에 우스터 소스를 넣고 소금과 후추로 반죽을 한 플레인 햄버그를 시키는 특히 좋아했다. 아, 혹시 우스터 소스 때문일까, 나는 왠지 모르게 지어지는 조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다 끓은 물을 녹차 티백이 든 컵에 붓는다. 씁쓸함은 씁쓸함으로 지워내는게 최고지. 나는 몇 년간의 경험으로 녹차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오늘의 녹차는 가볍고 산뜻한 맛. 나스카 시절에 먹어왔던 쓰고 거친 녹차가 아닌,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는 녹차잎으로 우려낸 녹차다. 새로운 녹차와 새로운 환경. 바라던 것은 이 방 안에 있다.


녹차를 한 입 마시고 방 쪽을 쳐다보자, 방금 막 일어난 시키가 후아암-하고 고양이같이 그르렁대다 나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다. 뭐야뭐야-? 거리감따위는 없는 귀여운 고양이가 다가오듯이 다가와서는 나의 컵에 담긴 액체를 궁금해하는 시키. 그다지 맛있지는 않을텐데. 나는 그녀에게 컵을 내밀어 안에 든 녹차를 보여준다. 시키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 컵에 담긴 녹차를 한 입 마신다. 나의 온기와 시키의 온기가 녹차의 온기와 합쳐져 묘한 향기를 풍긴다. 안정되는 향기.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향기. 나는 그 향기에 취해버린 것 같다. 어쩌면 이내 취해버렸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귀여운 고양이와 같은 시키이지만 한 때는 마법사였으니까. 고양이로 메타모르포제했다고 해서 천재성이 어디 가는건 아니잖아. 녹차를 한 입 마신다. 옛날같이 위험한 맛은 나지 않는다. 다행이다라고 독백을 해 버린다. 나의 독백을 들은 시키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딱밤을 먹인다. 기분 좋은 스침. 기분 좋은 향기. 기분 좋은 독백.


혹시 시키도 녹차가 마시고 싶냐고 묻는다. 티백을 뜨거운 물에 우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라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시키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주전자에 물을 조금 담고 다시 끓인다. 들리는 소리는 따스한 온기가 조금씩 커지는 소리와 시키의 작은 웃음소리뿐.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시키는 싱글벙글 미소를 짓고 있다. 또 장난이라도 치려나, 나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짓고는 찻잔에 들어있는 녹차 티백에 뜨거운 물을 넣는다. 천천히 연녹색으로 변하는 컵 안의 내용물. 물이 향기로운 연녹색 녹차로 완전히 변하고 나면, 입김을 조금 불어 내용물의 온도를 식힌다. 그야 고양이인 시키가 뜨거운 것을 잘 먹을리가 없잖아. 입을 데이면 안 되니 따스하게, 체온같은 온도로 녹차를 식히자. 시키가 데이지 않도록, 시키가 아프지 않도록.


시키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들어 녹차를 한 모금 마신다. 비가 오는 날의 대피소. 늘상 젖어있었던 매일매일을 녹여버린 나날들. 문득 이 비가 그치면 시키도 사라질까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을 생각하지 말자고 해도 생각해버린다. 언젠가는 시키가 떠날지도 모른다고, 늘 그랬던 것처럼 실종되어버릴지도 모른다고. 비는 금방이라도 그쳐버릴 것만 같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붉은 태양이 떠오를 것만 같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베란다 밖의 하늘을 쳐다본다. 구름이 잔뜩 끼어있고 비가 내리고 있을 뿐, 천둥이 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부슬부슬 내리는 장맛비. 그 빗물들이 베란다 바닥에 부딛쳐, 천둥같이 날카로운 소리를 낸다. 아직은 그치지 않을 비. 다행이다, 아직은 괜찮은 모양이다.


따스한 시키의 손길이 나의 목덜미를 감싼다. 비가 그쳐도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는 듯이 싱글싱글 미소를 지으며 내밀어진 손. 따스하다. 서로의 체온과 체온으로 이 장마의 끝을 기다리는 두 사람. 우리는 영원히 같이 있을 수 있을거야. 분명히 그럴 수 있을거야. 베란다의 제라늄 화분은 비를 먹고 자란 탓인지 꽃이 무성하게 피어있다. 시각, 촉각, 후각, 그리고 또다시 후각. 향기가 나와 시키를 감싼다. 슬픔이란 퀴퀴한 냄새는 더 이상 나지 않도록, 비에 젖은 냄새는 다시는 나지 않도록.


녹차를 마신 시키가 저녁을 먹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저녁을 먹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인 것 같지만, 뭐, 상관없겠지. 시키가 밥을 먹는 시간이 곧 내가 밥을 먹는 시간이고, 시키가 행복해하는 시간이 곧 내가 행복해하는 시간이니까. 저녁으로 무엇을 먹겠느냐고, 형형색색의 꽃무니가 그려진 앞치마를 대충 두르며 묻는다. 당연히 햄버그지-라고, 천연덕스러운 대답이 돌아온다. 그렇게도 먹고도 아직까지 질리지 않은거야. 나는 피식 웃으며 묻는다. 당연히 질리지 않는다는 대답이 들어온다. 그야 그렇게 햄버그를 잘 만드는 사람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으니까라고, 절대로 질리지 않는 맛의 햄버그를 이제서야 찾았다고. 질리지 않는 거구나.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냉장고에서 간 고기를 꺼내어 반죽한다. 손에 닿는 고기 반죽의 온도가 차갑지만, 시키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혼자 외로워했던 날들에 비해서는.


고기를 반죽하고 우스터 소스를 적당량 부은 후, 적당히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다. 그리고 한 시간동안 재운다. 고기의 품 속에 우스터 소스가 스며들 때까지, 시키와 함께 이것저것 한다. 청소를 한다거나, 책을 읽는다거나, 둘만의 노래를 부른다거나. 행복한 생활이다. 이것이 언제까지나 이어지면 좋을텐데. 언제까지라도,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이어지면 좋을텐데.


재운 고기를 달군 프라이팬에 버터를 두르고 굽는다. 양 면이 완전히 구워질 때까지 중불에서 구운 후 내오면, 시키의 페이버릿 햄버그 완성.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닌데다가, 시키의 행복해하는 표정을 보면 그 어떤 고생을 하더라도 싹 잊어버릴 것 같다. 그래, 시키만 있으면 돼. 이 모든 것은 시키가 나에게 돌아왔기에 일어난 기적같은 일상. 이 모든 것이 비밀이었으면 좋겠다. 비오는 날의 이 모든 행복이 다 나만의 것이었으면 좋겠다. 그 누구에게도 내주고 싶지 않은 행복, 그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은 사랑.


햄버그를 다 먹은 시키가 빈 그릇을 내밀며 한 조각 더를 외친다. 이럴 줄 알고 세 덩이를 하기를 잘 했지. 나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프라이팬에 남아있는 한 조각을 시키의 그릇에 덜어준다. 시키가 환호하며 나에게 부벼댄다. 친애의 표시라고, 시키는 말했었다.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친애의 표시. 그녀의 비밀을 내가 하나 가지고 있는거나 다름없다. 그럼 우리는 비밀을 나누는 사이가 되는건가. 사랑하는 사이를 넘어서, 더욱 깊고 넓은 바다와 같은 관계로. 나는 가만히 시키를 껴안는다. 이 미약한 힘을 둘로 나눌 녀석은 없어. 이 비가 그치더라도 그 누구도 나눌 수 없는 비밀을 우리는 가지고 있으니까.


비가 내린다. 제라늄 화분을 본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제라늄. 비가 온다. 비밀을 숨겨주는 비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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