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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하야『Cross The Rub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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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06, 2014 14:59에 작성됨.

'루비콘 강을 건너다'

 

로마의 카이사르가 로마를 장악하기 위해 강을 건넌다는 과감한 결단을 했던 고사에서 유래된 말. 보통 고사 그 자체보다는 거기서 나왔다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이 훨씬 유명합니다만, 같은 뜻이라고 합니다. 제가 아이돌을 하기 전에 언젠가 들었던 세계사 수업에서 지나가는 이야기로 잠깐 나왔을 정도의 적당한 잡지식입니다만, 아무래도 무의식적으로 이런 상황에 딱 알맞다고 생각해버렸는지 팟 하고 생각이 나는군요.....

 

아, 저 멀리서 프로듀서가 제게 달려 오고 있습니다. 정말로 인생이 즐겁다는 것을 표현하는 듯 그의 얼굴은 환한 미소가 가득합니다. 한 손에는 수첩, 또 다른 한 손에는 옷이군요. 하얗고 나풀나풀 거리는 짧은 원피스.

 

.....앞으로 제가 입어야 할 옷. 하아, 진짜, 저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 밖에 없는 거 같습니다.

 

"자, 이게 오늘 네가 입을 옷이야. 어때?"

 

......카이사르는 자신의 의지였고, 저는 제 의지가 아니라는 점이 약간의 차이라고 해야될까요.

 


............

 


........

 


".....오오...."

 

제 옷과 머리 스타일, 메이크업 상태, 그외 사소한 악세서리 등등을 체크해주시던 의상 스탭분들의 입에서 이상한 탄성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대체 어떻길래 그럴까요, 저는 거울을 바라보았습니다. 양갈래로 묶은 머리카락이 제일 먼저 들어옵니다.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런 헤어스타일은 타카츠키씨 정도의 나이에나 어울리지, 저한테는 그다지. 거기다 쓸데없이 조그만 모자까지 머리 위에 살짝 덮어놓았습니다. 단순 사진 촬영이라서 그나마 다행이지 만약 공연이 있었다면 툭 하고 떨어질 거 같아서 신경이 쓰이는 군요. 그 다음으로 제가 입고 있는 의상을 바라봅니다.

 

전체적으로 하얀색, 그리고 파란색으로 포인트를 준 하얀 원피스와 장갑, 그리고 줄무늬 오버 니삭스. 원피스와 장갑에는 프릴이 잔뜩 달려있습니다. 제 이미지 컬러를 넣는 등 어느 정도 노력을 했긴 했지만, 역시 저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복장입니다. 대체 프로듀서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갖고 온 걸까요.

 

역시 그 때 거절했어야 했습니다. 후우.....이미 늦어버린 이상, 이렇게 후회밖에 할 수 없지만요. 그러고보니 최근 프로듀서가 좀 이상해진 거 같습니다. 갑자기 사진 촬영일을 잔뜩 들고 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평범한 패션화보라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다 하나 같이 이상한 것들.

 

잠옷 차림으로 촬영을 하지 않나, 갑자기 수영복 촬영을 하지 않나. 음 또 한 달 전에는.....메이드? 그렇습니다. 메이드 차림을 했어야 했죠. 그러고보니 그 때 좀 고생했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복장뿐만이 아닌 이상한 말투도 요구했는데, 그게 익숙하지 않아서 상당히 고역이었습니다. 큿, 생각해보니 좀 부끄럽기도.....

 

이제는 노래만이 제 삶의 전부는 아니게 되었습니다만, 그래도 노래가 소중한 것은 변함 없고, 노래 관련 일에 대해서는 여전히 욕심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프로듀서는 요즘 이런 이상한 일만 가져오고 있는 겁니다. 참다 못해 한 번 따져보았지만, 그 결과로 돌아온 것이 바로 이 일. 프로듀서는 이 일만 하고나면 노래 관련 일을 주겠다고 했기에, 일단은 승낙했습니다만. 설마 이럴 줄은......

 

뭐, 됬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이미 맡기로 결정한 이상, 전력을 다해서 해내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최종 점검이 끝났는지 스탭 분들이 뒤로 물러났습니다. 이제 촬영장으로 이동하면 되는 걸까요? 아니면 아직 대기?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는 순간, 문이 덜컥 하고 열리면서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 입은 남성이 들어옵니다.

 

프로듀서네요. 프로듀서는 저를 한 번 보더니, 숨을 스읍하고 들이쉬고는 힘차게 외쳤습니다.

 

"치하야! 너는 오늘부터, 아니 오늘까지만이라도 치-쨩인거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그 뒤로도 뭐라뭐라 말하지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뭐, 일단 절 맞이하러 온 거겠죠. 프로듀서의 뒤를 따라 촬영장으로 이동합니다. 으음, 이거 움직이기 좀 불편하네요. 치마 길이가 짧아서 조금만 크게 움직여도 아슬아슬합니다. 하아, 빨리 촬영을 끝내고 싶네요.

 

지나가는 도중 스쳐지나가는 몇몇 스탭분들의 눈빛이 이상합니다. 그렇게 힐끔힐끔 보지 말았으면 좋겠는데요. 저라고 좋아서 이런 복장 한 게 아니니까요. 그냥 자기 할일 하러 가셨으면 하는 군요. 빨리 촬영장으로 이동해야하는데.....읏, 스튜디오의 복도가 이렇게 길게 느껴진 건 처음, 이네요.

 

본격적으로 촬영이 시작된 지 한 30분 정도 지났습니다. 그동안 감독님은 제 사진을 여러 장 찍었지만, 아직 만족할만한 사진이 나오지 않는 듯 합니다.

 

"치하야쨩! 표정이 딱딱하다고? 좀 더 밝은 얼굴! 귀엽게 미소 지어봐!"

 

좀 답답하신 모양인지, 저한테 큰 소리로 요청을 하는군요. 큿, 저도......저도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만.....아무래도 이건.....

 

"그래서야 마지막 멘트도 제대로 해낼 수 있겠어?"

 

네? 멘트? 그게 무슨 소리죠? 저는 프로듀서를 찌릿 노려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건 분명 알고서도 이야기 안해준게 틀림 없기 때문이니까요.

 

"하하하.....미안, 깜빡했다. 이번에는 단순한 사진 촬영뿐만이 아니라 특별 멘트 영상도 같이 찍는 거거든."

 

여, 영상까지!? 으.....으으.....지금 당장 프로듀서에게 달려가 다다닥 쏴붙이고 싶은 심정이지만, 이미 강을 건너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하아......두고봅시다 프로듀서. 이 일이 끝나면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독설로 고통스럽게 해드리겠습니다. 각오하시길.....

 

"아.....네.....혹시 그 멘트는 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음, 사진 촬영이 끝나면 알려줄게."

 

제발 이상한 멘트가 아니길 빌면서, 저는 다시 촬영에 임하기로 했습니다.

 


............


........

 


"여전히 웃는 얼굴이 미묘하지만, 그래도 이건 이것대로 수요가 있으니까 여기까지만 하자."

 

감독님의 이상한 말을 끝으로 해서 겨우 사진 촬영은 끝났습니다. 대체 저런 사진에 무슨 수요가 있다는 걸까요. 사람 생각은 때로는 알 수 없는 법입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 남은 건 영상 촬영이군요. 어떤 스탭 한 분이 제게 다가와서는 명함 크기의 작은 종이조각을 건네주었습니다. 혹시 멘트를 적어둔 건가요? 어디 한 번.....

 

'치냥 러브 빔 발사! 큐웅-!' (한 쪽 다리를 약간 들며 양 손은 가슴팍에 대고 하트 모양을 만들어낼 것)'

 

...........아..........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해버린 거 같습니다. 이, 이걸 정말 해야하는 걸까요? 순간 온 몸에 힘이 쭉 빠져 고개 돌리는 것조차 어려워졌긴 합니다만, 여기서 빠져나가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 겨우 프로듀서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치-쨩! 힘내!"

 

.......약간이나마 기대한 제가 잘못입니다.

 

"치하야쨩, 멘트 확인했지? 곧 영상 촬영이 있을 거니까 준비해!"

 

감독님은 제 속도 모르고 다시 촬영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아아, 정말 저는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요......솔직히 도망가고 싶습니다. 지금 당장 집에 돌아가서 웅크리고 싶습니다. 이 순간만큼은 하기와라씨에게 구멍파는 기술을 전수 받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아이돌입니다. 프로입니다. 아무리 싫은 일이라도 맡아버린 이상.....해야합니다. 해야합니다. 해야......

 

"......후...후훗....하하하....."

 

아, 저도 모르게 마른 웃음을 흘려버렸네요. 그러나 감독님과 스탭분들은 그것을 듣지 못한 것처럼 묵묵히 촬영 준비를 할 뿐입니다. 프로듀서는 흥미진진하다는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아아, 다 한통속입니다. 제 편이 되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틀렸습니다. 그냥 해야겠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이 순간을 넘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전 어쩔 수 없이 멘트 및 포즈를 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적어도 틀리는 건 안될테니까요. 한 5번쯤 보고 있을 참에, 감독님이 신호를 보냅니다. 벌써 준비가 다 됬나보군요. 

 

멘트나 포즈는 금방 외웠습니다만, 아직 제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하아.....준비가 되었던, 되지 않았던 상관 없습니다. 그저 빨리 넘겼으면 합니다. 그러니까.....저도 준비가 되었다는 사인을 보냅니다. 스텝 한 분이 카운트 다운을 합니다.

 

3,

 

2,

 

1.

 


"....치, 치냥 러브 빔 발사.....큐, 웅......"

 

정해진 포즈와 멘트를 날렸습니다. 그러나 감독님은 ok 사인을 내주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치냥 러브 빔, 발사....."

 

여전히 내주지 않습니다. 하, 한 번 더!

 

"치냥 러브 빔......"

 

감독님이 아예 고개를 절래절래 흔듭니다. 벌써 3번째입니다. 전 빨리 끝내고 싶습니다. 제발 ok 사인을!

 


"치냥....."

 


"치....."

 

".............."


무려 9번째가 되어도, 감독님은 여전히 고개를 좌우로 흔듭니다. 저는 이제 슬슬 한계에 다다렀다고 생각합니다. 울고 싶을 정도입니다.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습니다! 얼굴에 열이 확 오르고 땀이 줄줄 흐르는 게 느껴진다고요! 이래서야 화장한 것도 엉망이 되지 않습니까!

 

그,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그만.....그만해주세요.....부탁입니다.....

 

"저, 저어....그만......"

 

"......치하야쨩, 좀 더 힘내자. 자, 다시 한 번!"

 

그러나 감독님은 고집이 강합니다. 아, 정말.....기어코, 10번째의 시도를 요구하시는군요. 대체 언제까지 해야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눈 앞이 깜깜해집니다. 그러고보니 머리도 좀 띵한 거 같고.....어, 어라? 뭔가 툭하고 끊기는 소리가 들린 거 같은......?

 


............


........

 

.......헤헷, 안녕하세요? 치-쨩이에요. 키사라기 치하야와 좀 닮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절대 아니에요. 네, 그래요. 저는 지금 키사라기 치하야가 계속 실패한 촬영에 대신 도전하려고 해요. 조금 부끄러울지도 모르겠지만 힘내서 꼭 성공할테니까, 팬 여러분께서 많이 많이 응원해주셨으면 해요?

 

"이봐, 치하야쨩? 괜찮아? 아까부터 멍하니 있다고?"

 

앗, 감독님의 목소리다. 어라? 저를 아무래도 키사라기 치하야라고 생각하고 계시나보네요. 저는 치-쨩이에요!

 

"무슨 소리 하시는 거에요? 저는 치-쨩이랍니다?"

 

엣? 감독님이 왜 저렇게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요? 감독님? 괜찮아요? 뭐라 말씀 좀 해보세요! 앗!? 그러고보니 다른 스탭분들도 다들 딱딱한 돌처럼 굳어있어요! 다들 왜 그러시지?

 

".......치, 치하야쨩.....?"

 

입을 쩍 벌리고 놀라워하던 감독님이 이제서야 말씀하셨지만 여전히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을 부르고 있네요. 아무리 좀 닮았다고는 해도 계속 사람을 착각하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

 

"정말 왜 그러세요? 저는 치-쨩이에요, 치-쨩!"

 

"........아, 아아.....그래.....그렇구나....."

 

왠지 모르게 감독님께서 안쓰러운 눈길로 저를 바라보는 거 같습니다. 다들 뭔가 이상해요. 불안해져서 프로듀서를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에, 프로듀서마저도 엄청 당황하고 있어요! 오늘 정말 무슨 날인가요? 그렇지만 프로듀서는 역시 프로듀서, 금방 원래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에헷, 정말 다행이에요. 프로듀서가 제게 말을 겁니다.

 

"치-쨩! 이제 10번째.....아니 처음으로 하는 거라서 좀 불안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힘내!"

 

네! 프로듀서! 응원 고마워요!

 

"그, 그러면.....다시 촬영 간다! 스탠 바이!"

 

3,

 

2,

 

1.

 

"치냥 러브 빔 발사! 큐웅-♥"

 

 

............


........


촬영을 무사히 마치고, 사무소로 돌아오는 중의 차 안. 저 치-쨩은 뿌듯한 마음으로 조수석에 앉아있어요. 물론, 치-쨩은 착한 아이니까 안전벨트도 꼭꼭 하지요. 제 옆에는 프로듀서가 운전하고 있어요. 심심해져서 프로듀서에게 말을 걸고 싶어졌지만, 운전 중에는 참기로 해요. 어라라?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보니 아무래도 길이 막힌 거 같아요. 하아, 치-쨩은 빨리 사무소로 돌아가고 싶은데. 오늘 따라 왜 이러는 걸까요.

 

"오늘 정말 수고 많았다. 잘했어, 치-쨩."

 

프로듀서의 칭찬, 감사히 받을게요!

 

"에헤헷, 그렇죠! 제가 생각해도 오늘 일은 정말 잘 한거 같아요."

 

감독님이 '크흡....치하야.....너의 희생은 잊지 않을게.....' 같은 좀 알 수 없는 말을 하시긴 했지만, 촬영은 정말 성공적으로 끝났답니다!

 

"그래......그건 그렇고 치하야, 이제 슬슬 돌아와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프로듀서도 저를 키사라기 치하야라고 부르면 어떻게 해요!

 

"치-쨩"

 

"치, 치하야?"

 

"치-쨩이에요."

 

".......내가 잘못했어, 치-쨩."

 

"네, 맞아요. 저는 치-쨩이에요."

 

......오늘만큼은 말이에요.

 


............


........

 


좀 이상합니다. 하루 동안의 기억이 없습니다. 갑자기 정신이 드니 제 방 침대였고, 날짜는 하루가 지나가 있었습니다. 혹시 촬영하다가 쓰러졌나 생각해봤지만, 만약 그랬다면 전 병원에 있었겠지요. 몸이 안 좋은가 확인해보지만 살짝 머리가 아픈 거 빼고는 별 이상 없습니다. 흐음, 검사라도 받아봐야 할까요. 그렇지만 지금은 당장 사무소로 향하고 싶어졌습니다.

 

프로듀서에게 그 동안 쌓아왔던 분노를 한꺼번에 쏟아부어야 하기 때문이죠. 모든 준비를 마치고, 서둘러 사무소로 향합니다. 전철을 타고, 조금 걸어서 도착한 우리 765 사무소. 그러나 그 안에는 제가 원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대신에 하루카가 있었습니다.

 

"안녕, 하루카."

 

"앗, 치하야쨩! 안녕!"

 

일단 프로듀서의 행방을 물어보기로 합시다.

 

"혹시 프로듀서 못 봤어?"

 

"아니, 아직 한 번도 못 봤어. 오늘은 오후 출근이신게 아닐까?"

 

아아, 그렇구나. 그러면 오후까지 기다려볼까요.

 

"그렇구나.....응."

 

"아, 맞다 치하야쨩! 어제 대단한 걸 찍었다면서?"

 

"응? 어떤 건데? 미안하지만 나 기억이 잘 안나서......"

 

"에이, 참 이렇게 귀엽게 나왔으면서 기억이 안난다는 거야?"

 

하루카가 어떤 잡지를 활짝 펼칩니다. 그 안에 있는 건, 저. 양 갈래 머리를 하고 하얀 원피스를 입은......그리고 대문짝하게 나온 광고 멘트가 눈에 띕니다.

 

'러블리 치냥의 특별 멘트 영상을 추첨을 통해 증정!'

 

........아.

 

"치하야쨩? 괜찮아? 치하야쨩!"

 

...........전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러 버린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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