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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터의 어떤 하루 _ 시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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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21, 2018 12:58에 작성됨.

 프로듀서. 지금 뭐라고 하셨죠?


 머리를 짚으며, 시즈카는 프로듀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평일 스케줄을 위해 학교도 결석해가며 부랴부랴 출근한 현재 시간은 오전 10시. 


 "스케줄이 취소됐어."


 스케줄의 취소를 전해는 프로듀서의 말에는 무게감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걸 왜 지금에서야 알려주시는건가요?"


 "연락이 30분 전에 왔거든. 기자재들이 공항에 묶였다나봐."


 "...정말이에요?"


 "그걸로 뻥을 칠 프로듀서는 어딜 뒤져도 없다고 생각해."


 "30분 전에 말이죠."


 이 사실대로면 프로듀서를 탓할 수 없었다. 당일 취소, 그것도 30분 전 프로듀서에게 통보되었다면 이미 시즈카는 집에서 극장으로 출근하고 있는 도중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바로 문자라도 보내줬으면 어디가 덧날까. 시즈카는 걸려있는 시계를 바라보곤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하아-. 


 "기껏 출근했는데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을 지금...! 아니, 아녜요. 어쩔 수 없으니까요."


 이유까지 명확한 스케줄의 취소는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이제 시즈카가 신경써야 할 것은 갑자기 뻥 뚫려버린 하루를 어떻게 메워나가야 하는지였다. 시즈카는 스케줄 보드 앞에 서서 오늘의 날짜를 확인해보았다. 미처 지워지지 않은 시즈카의 스케줄 뒤로 몇 가지 다른 멤버들의 스케줄이 뒤따랐다. 한 두어시간 후 댄스 레슨이 있구나.  


 "맞아. 댄스 레슨도 취소해야 해."


 프로듀서는 지우개를 들고는 오늘의 스케줄 라인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쏵 지워내렸다. 빼곡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극장에 일이란게 있구나 싶었던 게 삽시간에 공란이 되어버렸다. 


 "프로듀서."


 "레슨실 거울이 깨져서 수리해야하거든."


 "네?"


 "어젯밤에 엘레나가 시축 연습한다고 했다가. 와장창."


 "...코토하씨는 자리에 없었나요?"


 "코토하도 있었지. 근데 코토하보다 공이 더 빨랐거든."


 "그, 그럼. 오늘 극장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건가요?"


 "그런 셈이지?"


 스케줄이 취소된 것도 모자라 아예 극장에 일이 없는 하루라니. 길지 않은 아이돌 생애 처음이었다. 시즈카는 오늘의 공란을 벙 찐 채 쳐다보았다. 이러면 정말 오늘 뭘 어떻게 지내야 하는걸까. 막막해졌다. 이럴 줄 알았다면 학교 과제라도 가져왔을텐데.


 "그럼 레슨하려던 멤버들도 안 오겠네요?"


 "아마도? 시즈카도 집에 갈래? 아오바씨도 의상 일 때문에 오후까진 외근이라 극장에 정말 아무도 없을거야. 사장님이 부르셔서 사무실 가야하는데 그 길에 데려다줄 수 있어."


 "스케줄 간다고 학교까지 빠지고 왔다고요. 도로 집에 가면 부모님이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원래 아이돌의 생활이..."


 "...됐어요. 프로듀서는 알아서 갈 길 가세요."


 정말,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니까. 시즈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극장 사무실을 나왔다. 막상 나오니, 이 좁다란 공간에서도 어디로 발길을 향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일단은 대기실로 가자. 누구라도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터덜터덜 대기실로 가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슬그머니 문을 열었다.  


 "누구 있...어요..?"


 살금살금 걸어 들어가며 두리번거렸어나 인기척 조차 없다. 


 "아, 정말 아무도 없어."


 허탈함에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이 크게 튀어나왔다. 들을 사람도 없는 마당에 뭐 어때. 같은 마음에 의자 하나를 끌어다 털썩 앉았다. 음악이라도 들어볼까. 몸을 뒤지는데, 헤드폰이 없다. 사무실에 놓고 왔잖아. 도로 일어나 사무실로 갈 기력도 쭉 빠져버려 그대로 탁자 위에 엎어져버렸다. 스마트폰을 확인해보자 고작 10분 지났다. 오늘 스케줄이 저녁까지 이어지던 스케줄이었으니까 정말 하루가 통으로 비어버린 셈이었다. 계획적인 오프였으면 뭘 하고 있었으려나. 뭐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계속 마음을 짓눌렀다. 아무래도 음악이라도 듣는 게 좋겠어. 다시 몸을 끙차 일으키려는데, 맞은편 의자 등받이에 걸친 익숙한 헤드폰에 눈길이 갔다. 노란색의 헤드폰. 시즈카는 헤드폰을 살폈다. 로코의 것이었다. 그렇다는 건 이 극장 어딘가에 로코가 있다는 뜻. 시즈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복도는 여전히 고요했으나, 그 고요함 속에서 살짝 웅성이는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시즈카는 최대한 귀를 기울이며 소리를 뒤따랐다. 소리가 이끈 곳은 급탕실이었다.


 '로코나이즈한 캐릭터 캐치는 매우 하이퀄리티하니까요!'


 '그렇긴한데... 애들한테 미안한 그림도 있는 거 같아서.'


 로코만 있는 줄 알았는데 한 사람이 더 있다. 시즈카는 반가움에 발칵 문을 열었다. 꺅! 뭔가요! 큰 소리에 각자가 깜짝 놀라 멈칫한 채로 시선을 교환했다. 


 "죄, 죄송해요!! 반가워서 그만!"


 시즈카가 곧장 사과했다. 


 "시즈카쨩? 스케줄 온거야?"


 "하, 하루카씨! 로코씨랑 같이 계셨군요."


 "시즈카쨩! 노크를 해 주셨어야죠! 이런 서프라이즈는 매우 덴저러스한거예요!"


 "미안해요. 로코씨."


 사과와는 별개로 하루카와 로코라니. 보기 드문 조합이었다.


 "두 분. 뭐 하고 계셨나요?"


 "며칠 후 버라이어티에 나가게 됐는데 미션으로 극장 멤버들을 형상화한 쿠키를 만들어가야 하거든. 만드려니까 막막해서 말이야."


 "로코가 아이디어를 기프트 하기 위해 온거예요."


 "약속을 잡고요?"


 "아니 극장에서 우연히 만났달까."


 하하하-. 하루카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이 두 사람도 서로의 만남이 계획되지 않았나보다. 괜한 안도감에 시즈카는 로코의 옆으로 착석했다. 식탁 위 로코의 스케치북에는 다양한 이모티콘 같은 그림이 여기저기 그려져 있었다. 


 "시즈카쨩. 보세요. 쿠키라는 틀에 캐릭터를 익스프레션하려 한다면 앱스트랙스하면서도 심플해야 하는거예요!"


 "아, 그래. 시즈카쨩도 한 번 봐 볼래? 로코쨩 아이디어가 괜찮으려나 잘 모르겠네."


 아침부터 암호같은 말을 들으니 해석이 쉬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림을 보는 순간 무슨 말인지 모를 문장들이 대충 알 것 같았다. 사이드 테일 타코야키. 빨간 머리털의 별 박힌 기타. 선배라 적힌 네모 상자. 눈썹 짙은 갈색 고양이. 


 "이건... 좋네요! 역시 로코씨. 예술적이예요!"


 "응?"


 시즈카의 눈이 반짝였다. 하루카는 하루카대로, 로코는 로코대로 시즈카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 해 반사적인 물음표가 튀어나왔다.


 "거, 거봐요! 하루카씨! 리액션이 괜찮잖아요!"


 뒤늦게 기세등등해진 로코는 하루카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어필했다. 


 "쿠키로 표현하기 어려운 건 아니지만 너무 희화화 된 부분도 있지 않을까."


 "버라이어티잖아요! 분명 모두들 언더스탠 할 거라구요"


 난감하게 웃는 하루카와 자신감이 만땅으로 찬 로코. 그 사이에서 시즈카는 스케치북을 뒤적거렸다.


 "시즈카쨩. 뭐 찾니?"


 "아, 아뇨."


 하루카의 물음에 시즈카는 급하게 스케치북을 덮었다.


 "흐흥. 시즈카쨩 궁금한거군요. 로코나이즈하게 변신한 모습이!"


 "아니에요! 저는.. 아. 그럼 제가 한 번 그려볼까요?"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으나 수습하기엔 늦어버렸다. 얼떨결에 스케치북을 받아 든 시즈카에게 하루카와 로코는 기대의 눈빛을 잔뜩 보냈다. 졸지에 자화상을 그리게 된 시즈카는 자신의 경거망동을 후회하는 것도 잠시. 피카소 저리가라 할 진지한 화백이 되었다.


 "시즈카쨩. 자신의 아트에 프라이드가 엄청나요."


 "정말?"


 로코의 칭찬도, 하루카의 기대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선 하나하나 장인의 기분을 담아 전신 자화상을 마친 시즈카는 자신있게 작품을 두 사람에게 선보였다.


 "어때요? 괜찮으려나요?"


 "역시 시즈카쨩! 프라이드를 가질만한 개성이예요."


 즉각적인 감상을 낸 로코와 달리 하루카는 감탄의 공백이 길었다. 이토록 개성적인 그림체라니. 잘 그렸다, 못 그렸다를 떠나서 그림체만으로도 누가 누구를 그렸는지 확연히 알 수 있다는 건 대단한 거 아닐까. 


 "화풍이 엄청나네. 시즈카쨩."


 겨우 찾은 칭찬의 말에 시즈카의 표정이 환해졌다. 


 "쿠, 쿠키에 사용이 가능할까요?"


 시즈카의 자화상을 하루카는 골똘히 쳐다봤다. 저걸 쿠키로 만들 수 있을까? 하루카는 스케치북을 앞으로 넘겼다. 멤버들의 과장된 캐릭터성이 한 눈에 들어오는 그림들. 흐흫. 자신조차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어쨌든 웃었으니까 긍정이지 않을까- 로코와 시즈카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게 하루카를 압박해왔다.


 "노력해볼게. 로코쨩. 시즈카쨩. 고마워."


 고맙다는 말과 함께 스케치북을 챙기는 하루카를 보며 로코와 시즈카는 손뼉을 마주했다. 짝! 


 "이제 슬슬 가 봐야겠네. 로코쨩. 시즈카쨩은 다음 스케줄 있어?"


 "로코는 로코의 아지트에서 로코 아트에 열중해야해요."


 "시즈카쨩은?"


 "저는 사실 원래 있던 스케줄이 취소되어버리는 바람에..."


 시계를 살폈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으나 그래봤자 오전 11시 10분. 


 "이야. 부럽네. 갑자기 찾아온 오프가 반가울 때가 있지."


 "음. 전혀요. 지금도 당장 뭘 해야 할 지 모르겠는걸요. 저... 로코씨."


 "완성 안 된 아트는 로코의 개인 프라이버시인거예요!"


 "그렇군요. 그, 그럼 먼저 일어나볼게요. 잠깐이었지만 만나서 반가웠어요."


 시즈카는 두 사람에게 안녕을 고하며 급탕실에서 벗어났다. 다시 돌아온 대기실. 하지만 약 한 시간 전과 같은 고요함이 아니었다. 말소리가 반가워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시즈카쨩!"


 "시즈카! 우짠일이가?"


 "나오씨. 미나코씨! 아, 사요코씨, 우미씨, 노리코씨도..."


 최근 결성된 유닛의 멤버들이었다. 우연의 일치라기엔 유닛의 멤버들 중에 단 한 명의 공석도 없었다. 그렇다면 분명 극장에 일이 있어서 왔다는 얘긴데. 지워지기 직전에 적혔던 스케줄 보드가 떠올랐다.


 "댄스 레슨...?"


 "응! 댄스 레슨때문에 왔는데 취소라지 뭐야!"


 노리코가 한 켠에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말했다. 


 "그거 프로듀서가 연락 안 해줬어요?"


 "했는데! 글쎄! 우리 다 못 본거 있지!!!"


 "그럴 수가 있어요?"


 시즈카는 홱, 사요코를 쳐다봤다. 무심하게 앉아 안경을 닦고 있던 사요코는 뜨거운 시선에 맨 눈으로 시즈카를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시즈카쨩?"


 "마... 그거 아니겠나. 사요코씨 마저도 못 볼 수가 있나요!"


 "아... 못 봤어."


 "그러시군요..."


 "사요코 쟈도 결국엔 우리랑 같은 속성인기라. 누가 은젠가 그러케 말하지 않았나. 뇌근 프린세스라고 말이다."


 "나오쨩한텐 프로듀서가 전화까지 했는데 못 받았다면서!"


 "속성이 그렇다는거지. 그 속성에서도 레벨이 있지 않겠나."


 사요코의 반박을 나오는 스무스하게 튕겨냈다. 그러고 나서 한 바탕 웃더니 얼마 안 있어 다섯명의 멤버들은 각자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 이상한 유대감 사이에서 시즈카는 이방인이 된 것 같은 느낌에 쭈뼛쭈뼛거리며 아침에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 슬그머니 앉았다. 음악이나 들어야겠다 싶어 뒤적거리다가 헤드폰이 사무실에 있다는 걸 다시 떠올리곤 고개를 푹 떨궜다.


 "시즈카쨩. 그러고보니 극장에 혼자있네?"


 미나코가 의자를 끌어와 시즈카의 옆에 앉았다. 


 "저도 스케줄이 취소됐거든요."


 "동병상련인거네."


 정성 들인 안경 닦이를 마친 사요코는 안경을 착용하곤 시즈카 쪽으로 옮겨앉았다.


 "시즈카도 연락을 못 받은거야?"


 스트레칭을 마친 노리코가 시즈카가 앉아있는 쪽 탁자로 몸을 걸치며 물었다.


 "아뇨. 전 여기 와서 통보받았어요."


 "몇 시! 몇 시에 왔는데?!!"


 방방거리며 우미가 물었다.


 "10시요."


 "빠르게도 왔구마... 보자... 간만에 시간도 남았는데 언니들이 놀아주까?"


 "네? 아... 네?"


 "잠깐. 나오쨩. 지금 시간이 몇 신지 봐봐."


 "열한시... 반 좀 넘은기라."


 "그거야! 시즈카쨩. 배고프지 않아?"


 "배..요?"


 "나! 배고파!!"


 "이왕 이리 된 거 오늘 냉장고를 싹 털어나볼까?"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미나코를 뒤따라 나머지 멤버들이 우르르 나가기 시작했다. 급탕실에 하루카씨... 라고 말할 겨를도 없이 시즈카는 휩쓸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로코와 하루카는 갈 길을 갔는지 텅 비어있었다.  


 "자. 막냉이는 여 앉아서 기다리믄 된다!"


 "나, 나오씨. 막냉이라뇨!"


 "틀린 말은 아니긴 하네."


 "사요코씨!"


 나이 상으로 이 멤버들 중에서는 막내가 맞긴 했지만 노골적인 막내 대접은 몸에 소름 끼칠 정도로 어색했다. 게다가 모두가 요리를 준비하는데 가만히 앉아있는다?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건 아니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양 어깨에 찍어 누르는 것 같은 악력이 강하게 느껴졌다. 아, 아파.


 "나오 말대로 시즈카. 가만히 앉아나 있으라고."


 "노리코씨."


 "응응! 모가밍은 여기 앉아서 기다려!!"


 이렇게 까지 가만히 있기를 바라는데 재차 움직이겠다고 나서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시즈카는 옅은 한숨과 함께 움직이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다. 몇 번이고 확답을 받은 후에야 노리코와 우미도 부엌으로 향했다. 몇 명은 앉을 수 있는 식탁에 덩그러니 않아 요리하는 뒷모습들을 바라보는 기분이 새삼스럽게 생소했다. 작업반장같은 사요코. 냉장고 재료들을 다 꺼내 다듬기에 여념이 없는 미나코. 벌써부터 뭘 주어먹기 시작한 나오. 가득 물을 끓기 시작하는 노리코. 그 사이를 열심히 쏘다니는 우미. 작은 가족 시트콤을 현장에서 직관하는 느낌이기도 했다. 그렇게 관람하기를 몇 십분.


 "짠-. 오래 기다렸지. 첫 음식은 이거야."


 중국식 토마토 계란탕이 대접되었다. 생소한 비주얼이었지만 향은 꽤 좋았다. 수저라도 놓을까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또 다시 양 어깨를 잡혀버렸다. 이번에는 우미였다.


 "모가밍은 기다리라구! 나 암것두 안 했으니 이거라도 해야 해!"


 그러더니 빠르게 식탁 위로 식기들을 세팅해나갔다. 어깨에 잡혔던 악력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이었다. 그 후로 세팅 된 요리들은 각양각색이었다. 튀긴 만두, 야끼 우동, 계란 말이, 과일 화채 등등. 일관성 없는 메뉴들이 식탁을 가득 메웠다.


 "이야. 미나코. 메뉴 정말 엄청난 거 아니야?"


 "노리코쨩도 참. 냉장고 재료가 한정되어 있어서 이 정도밖에 못 했는걸. 모두들 맛있게 먹어. 시즈카쨩도."


 "아, 네. 잘 먹겠습니다."


 시즈카는 손을 마주하며 인사한 후 계란탕을 맛봤다. 맛이 좋았다.


 "맜있지? 이거 코노미씨나 리오씨가 완전 좋아하는 요리야."


 "왜요?"


 "마, 그거 아니겠나."


 나오가 손목을 꺾으며 뭔가를 마시는 제스쳐를 했다. 시즈카가 그 행동을 이해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5초였다. 술에 취한 위장을 달래는 맛 같은 건 아직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맛이 좋아 시즈카는 단숨에 들이켰다. 계란탕이 입맛을 당기자 다른 음식에도 주체할 수 없이 손이 갔다. 정신없이 먹고있는 와중에 시즈카는 찰나의 위화감을 느껴 행동을 멈췄다. 딸그락 거리는 식기 소리도 안 나고 시끄럽게 떠드는 만찬의 느낌도 아니다. 그릇과 젓가락을 들고있는 채로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오로지 자신을 보고있는 다섯 사람의 눈길. 시선의 스포트라이트를 제대로 받고 있음을 눈치 챈 시즈카는 황급히 식기를 자신의 앞에 놓았다.


 "왜 그러는거야! 모가밍? 맛이 없어?"


 "아, 아뇨 우미씨. 왜 안 드시고요? 다들."


 "우리도 먹고 있었는걸. 그치? 미나코?"


 "응. 무엇보다 요리를 해 준 사람을 제일 배부르게 하는 건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는거라고?"


 " 그.. 그 무슨..."


 "마이 배고팠구마-. 우리 시즈카가. 마이 묵으라. 묵고픈 거 있나. 만두 먹여주랴?"


 나오가 젓가락으로 만두를 하나 집어 시즈카의 입으로 가져다댔다. 시즈카는 경악하며 급하게 자신의 젓가락으로 만두를 가로챘다. 


 "알아서 먹을 수 있어요! 정말."


 "신경 쓰지 않고 먹어도 좋아."


 미나코의 말에 시즈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어쨌든 나오가 건네준 만두를 입 안에 넣었다. 그리곤 오물오물. 부담스러워서 맛이나 제대로 느낄 수 있을까 싶었던 것도 잠시, 튀김의 기름과 탁 터진 육즙이 어우러진 극강의 맛에 시즈카는 자기도 모르게 표정이 풀려 피식-. 풍선 바람 빠지는 것 처럼 웃어버렸다. 그 소리가 시발점이 되어 아하하하하하. 한 바탕 웃음 마당이 되어버렸다. 그 후로 들은 귀엽다는 소리만 몇 십번이려나. 엄청난 포식은 귀찮음을 몰고 와 막내 취급에도 저항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시즈카 귀여워-. 네네. 고마워요. 머리 쓰다듬어도 돼? 예. 뭐. 그러셔요. 막내를 위한 만찬은 끝나고 나서도 끝나지 않아 뒷정리를 하는 동안에도 시즈카는 의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일어나려고만 하면 돌아가며 어깨를 눌러대는 통에 포기하고 늘어져버렸다.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시계는 오후 한 시를 한참 넘긴 상태였다. 


 "그나저나 시즈카쨩. 이제 극장에서 뭐 하려고?"


 정리를 끝낸 사요코의 물음에 시즈카는 으음... 하며 길게 답을 끌었다. 예정이 있을 리 없었다. 


 "사요코씨는 예정이 있으신가요?"


 "얼떨결에 오프가 생겨버렸으니까 쇼핑이나 갈까 싶어서."


 "유닛 멤버분들 다요?"


 "아마도? 이러다 다들 자기 갈 길 가버릴 수도 있지만 일단은. 시즈카도 같이 갈래?"


 쇼핑으로 오프를 보내는 것도 괜찮기는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쇼핑은 분명 지출이 있을 것이고, 오늘 시즈카는 교통비 정도만 챙겨 온 상태였다. 분명 이 사람들이라면 아낌없이 물건을 사 줄 사람들이었기에 결정했다. 쇼핑은 무리. 밥도 얻어먹었는데 또 신세를 질 순 없었다. 미안하다고 말하자 사요코는 괜찮다고 답하며 더 권하지 않았다. 점심에 이끌린 것도 순식간이었는데 헤어짐도 순식간이었다. 


 "으음."


 다시 혼자의 시간이었다. 남은 시간엔 정말로 음악을 감상하리라. 그 마저 하지 않으면 정말 오늘 하루를 버리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오프라고 허투루 보낼 수 없으니, 뭐라도 남겨야했다. 사무실. 사무실. 읖조리며 시즈카는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헤드폰이 어딨더라...


 "시, 시즈카..."


 옅은 목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다. 갑자기 등골이 쭈뼛 서 시즈카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서서히 몸을 돌렸다. 하필이면 바로 뒤에서 들릴 게 뭐람. 천천히 몸을 돌리는데 갑자기 우다다다 소리와 함께 양 옆에서 확 매달려 왔다. 뭐, 뭐야!


 "시즈카 언니!"


 양 쪽에서 서라운드로 들려온 목소리는 아미와 마미였다. 바로 뒤에서 들렸던 미세한 목소리는 안나였다. 


 "안나? 아미? 마미?"


 "우와우와! 시즈카언니! 잘 왔어! 우리 인원이 한 명 모자라서 매우 민감했다궁!"


 "미, 민감? 난감하다는거지?"


 양 옆으로 손을 잡혀 질질 끌려간 곳은 사무실의 소파였다. 소파 앞 탁자 위에는 각자의 스마트폰이 똑같은 화면을 발광하고 있었다. 


 "안나, 무슨 일이야?"


 "오늘... 게임 이벤트라... 넷이서 같이 게임... 해야 하는데... 유리코씨... 늦는다고..."


 "이것 봐! 대 핀치라궁! 그치! 마미!"


 "웅웅! 오늘이 이벤트 마지막 날인데! 오늘밖에 시간이 안 나서 같이 모이자고 한건데!"


 이거, 느낌이 안 좋다. 게임 이벤트 마지막 날인데 하필이면 한 명의 공식이 빈다라.


 "나, 게임 잘 못..."


 "와! 시즈카 언니가 같이 해 준대!"


 "안나... 기뻐..."


 날뛰는 아미마미보다 무서운 건 조용히 시즈카의 폰을 꺼내 자신들이 하는 게임을 까는 안나였다. 시즈카는 무념무상 제 휴대폰의 로딩바를 쳐다보았다. 게임은 빠르게 깔렸다. 안나는 바로 닉네임 칸에 '우동' 두 글자를 입력했다. 중복된 이름이라 안 된다고 튕기자 '우동동'이라 입력했다. 이건 오케이. 


 "못치. 아미적으로는 상당히 대충 만들었다고 생각하는뎁쇼."


 "닉네임...별로... 안 중요하니까..."


 닉넴 따위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아이에게서 온 초대장에는 ' vivid_rabbit님이 파티에 초대하셨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뭐, 상관은 없지. 수락했다. 수락하자마자 무슨 맵으로 넘어가는데 잠깐.


 "나 튜토리얼도 안 했는데."


 "원래 게임은 튜토리얼따위 스킵해버리는거라구!"


 "하지만 마미. 나, 캐릭터도 잘 모르는데..."


 "캐릭터는 자고로 끌리는 거 하면 그만인...!"


 "안 돼. 캐릭터는 무조건 이 아이야."


 아미의 말을 단칼에 끊어버린 안나는 시즈카의 캐릭터창에서 한 캐릭터를 손수 선택했다. 온과 오프 사이의 안나는 오프의 텐션에서 말에 끊김이 없었다. 그 어중간함이 도리어 낯설었다. 시즈카는 빠르케 캐릭터를 익혔다. 이 아이는 힐러구나. 이걸로 다른 캐릭터들에게 힐을 주고. 음. 움직이고. 어. 나는 어떻게 체력을 회복해야 하는거지. 


 "고-고! 단 번에 이겨버리자!!"


 "브- 라져!!"


 어느새 온 모드에 돌입한 안나와 유별난 외침으로 기합을 넣는 아미와 마미 사이에서 시즈카는 될 대로 엄지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앗, 시즈카 언니! 마미에게 힐!! 아니! 힐을 달라구! 킬을 하지 마! 시즈카! 안나에게 버프를 줘! 우아우아 마미 기지로 돌아가려 하는데 마미에게 버프를 주면 어쩌자는거야! 시즈카 언니! 힐러라니까! 탱커는 아미라구! 대체 왜 몸빵하는거야!!!


 ~ 패배 ~


 잔혹하게 떠 버린 단 두 글자. 아미, 마미, 안나의 외침들이 시즈카에겐 그저 블라블라만도 못한 소리처럼 들려왔다. 버튼을 이것 저것 만져대면서 열심히 하긴 했는데 세 사람의 표정들은 좋지 않았다.


 "시즈카 언니! 우리한테 피를 줘야지 왜 적군 애들 피를 깎으려 하는거야."


 "난 나름 노력한거야. 마미."


 "버프... 잘 못 줬어..."


 "버프가 뭔지 몰랐어...미안. 안나. 텐션이 내려가버렸네."


 "시즈카 언니... 게임에는 재능이 완전 꽝이야."


 "튜토리얼도 안 한 게임에 이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니야? 다시 해. 다시 해 봐."


 "시즈카... 힐러... 안 맞는 거 같으니..."


 안나의 초이스는 탱커였다. 몸도 겁나 크고 생긴 것도 무서우니까 분명히 모든 공격을 다 막을 수 있겠지? 캐릭터의 외형에서 오는 자신감에 느낌이 좋았다. 탱커는 앞서서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팀을 지켜주는거라는 아미와 마미의 설명을 머릿 속에 넣고 방금 전의 첫 판과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최선을 다해 임했으나


 ~ 패배 ~


 "시즈카언니... 아무리 크고 체력이 많아도 결국 죽는다구..."


 아미의 말처럼 얘도 결국 생명이었다. 수많은 공격들에 그 많은 피통이 철철 깎여 나가는데도 시즈카는 전장의 앞에서 모두와 맞섰고 빠른 패배로 인도했다. 게이머들의 타박과 패배 두 글자가 주는 굴욕감은 시즈카의 오기를 서서히 자극해왔다. 


 "나 그럼 공격해볼래. 죽이는 건 할 수 있을 거 같아."


 "아닐걸. 분명 죽는 걸 잘 할걸."


 "마미. 이번에는 믿어 봐."


 "안나... 캐릭터... 선택 해 줄게..."


 잽싸고 날래게 생겼지만 들고 있는 무기는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허리가 두 동강 날 것 같은 대검을 가진 캐릭터와 함께 한 다음 판도. 패배. 패배. 패배. 패배. 패배. 


 "...시즈카 언니. 이런 연패. 마미 게임 인생에 처음이야."


 "우아우아!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아미와 마미의 하소연에 시즈카는 할 말이 없었다. 화면에 가득 뜬 패배 두 글자. 여러 판을 돌렸으나 단 한 판도 이기지 못했다. 그 사이에 게임에 등록된 캐릭터를 한 번씩 다 경험해 본 것 같았다. 그나마 하소연이라도 하는 아미와 마미는 괜찮았다. 고개를 푹 숙이며 무언을 유지하는 안나는 공포 그 자체였다. 


 "...안나."


 "안나. 괜찮아."


 절대 괜찮아 보이지 않는 걸.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이번에는 이길 수 있으니 또 한 판 돌려보자는 말은 양심상 허락치 않았다. 또 질 게 뻔한걸. 


 "......안나! 아미! 마미!! 미안해!!!!"


 사무실 문이 부서져라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이는 유리코였다. 어지간히 급하게 왔는지 숨을 몰아쉬는 유리코를 세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 반겼다. 대타로서의 역할이 끝난 것에 안도한 시즈카는 슬며시 폰을 들고 일어났다. 프로듀서 책상에 올려진 헤드폰을 챙기곤 이벤트를 달리는 데 여념이 없는 네 사람에게 혼자만의 작별 인사를 한 후 사무실을 나왔다. 하아. 힘들었다. 대충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세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게임만 한 시간을 넘게 즐긴 셈이었다. 안나, 아미, 마미로서는 무려 한 시간을 넘게 패배만 했으니 걔들도 걔들 나름대로 고생 많았을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음악 감상으로 남은 시간을 보내리라. 생각하며 대기실로 입성했다.


 "요-. 시즈카?"


 "모가밍! 두 번째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대기실에는 메구미와 우미가 함께 있었다. 메구미야 그렇다 치고 우미는 아까 분명 밥 먹은 후 극장을 퇴근했었는데.


 "우미씨. 또 오신건가요?"


 "응응! 쇼핑하다 우연히 메구미를 만났거든! 네일 알려준다 해서 같이 왔어!!"


 "냐하하. 극장으로 올 예정은 아니었지만 말이지."


 살펴보자 이미 두 사람의 손에는 각자의 네일이 개성있게 칠해져 있었다. 


 "아! 잘 됐네!! 메구미에게 배운 스킬들 모가밍에게 사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응? 아. 그거 좋을지도?"


 "모가밍!! 여기 앉아봐!!"


 우미가 시즈카를 질질 끌어다가 의자에 앉혔다. 시즈카의 맞은 편으로 앉은 메구미와 우미는 시즈카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손을 한개씩 맡았다.


 "저기, 메구미씨. 우미씨."


 "바로 지워도 좋으니까. 한 번 부탁할게. 시즈카."


 웃으면서 부탁해 온 말에 거절을 할 수 있을 지 만무했다. 시즈카는 체념하고 양 손을 두 사람에게 맡겼다. 손톱 위로 찰박하게 차가운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이 두 사람이 함께 있는데 이렇게 조용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고요함이었다. 차분하지만 속도감 있는 메구미와 달리 우미는 한 번씩 버벅였다. 으응. 으음. 괜찮으려나. 혼잣말들이 불안했다. 메구미보다 우미가 맡은 손으로 계속 시선이 향하고 있었다. 


 "됐다! 냐하하! 시즈카. 봐봐!"


 우미가 쩔쩔매는 사이 메구미는 벌써 완성했다. 시즈카는 메구미가 맡은 손톱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역시 숙련자 답게 깔끔했다. 


 "와. 역시 메구미씨. 이뻐요."


 "뭐, 기본적인거니까 말야. 시간 더 투자하면 꾸밀 수도 있긴 한데."


 "아녜요. 어차피 학교 때문에라도 금방 지워야 하니까요."


 "그렇지? 아, 우미. 다 됐어?"


 메구미와 대화하는 사이에 우미도 완성한 모양이었다. 풀 죽은 강아지마냥 축 쳐진 모양새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맘처럼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시즈카가 시선을 돌려 확인해보았다. 어느 손톱은 너무 얇고 어느 손톱은 찐득하고 어느 손톱은 살에도 마구 묻어있었다. 시즈카는 양 손을 번갈아 살펴보았다. 달라도 너무 달라 두 사람을 비교하는 인간 테스터가 된 것 같았다.


 "왜 배운대로 잘 안 되는거지? 모가밍. 미안해."


 "처음부터 잘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안 그래, 시즈카?"


 "그래요. 어... 노력 하셨다는게 잘 느껴지는걸요. 그... 귀여워요!"


 "정말?"


 "네! 포인트. 그래요. 포인트 같아요. 메구미씨가 깔끔하다면 우미씨는 개성적이니까요!"


 "냐하하-. 우미. 성공했네."


 "응!! 그래도 모가밍. 다음 번엔 더 예쁘게 해 줄테니까!"


 기력을 회복한 우미는 다시 제 텐션을 찾았다. 메구미와 우미는 그 후에도 한참 네일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극장을 떠났다. 시즈카는 그 둘을 향해 손바닥을 펼친 채 팔을 흔들어 인사했다. 대기실의 문이 닫히자, 언제 시끌벅적했냐는 듯 정적이 가득했다. 시즈카는 가만히 앉아 우미와 메구미의 흔적을 감상했다. 우미 쪽은 마를려면 아직 한참 먼 손가락이 있었기에 행동에 제약이 있었다. 지우려면 바로 지워도 좋다며 리무버를 남겨두고 갔지만 오늘만큼은 이를 지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시계를 살펴보았다. 이제 할 일이 없다면 서서히 집에 가도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시즈카?"


 응? 문 열리는 소리 못 들었는데. 부자연스럽게 손을 쫙 편 상태로 시즈카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학교에서 바로 온 건지 교복을 입은 시호가 멀뚱히 시즈카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호?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냐니... 그러는 시즈카야말로 오늘 스케줄 있는 거 아니었어?"


 "그거 취소됐어. 시호야말로 극장에서 볼 일 없는 줄 알았는데."


 "내일 스케줄 확인하러 온 거야."


 "바로 사무실로 가면 될 거 가지고."


 "흐응. 그 손은 뭔데."


 스케줄을 확인하러 가기는 커녕 시호는 시즈카의 맞은 편으로 의자를 끌어 앉았다. 아, 네일. 이 모습을 시호에게 보여줄 수 없어 손을 확 접었다가 아직 마르지 않은 네일의 촉감에 다시 손을 쫙 펴버렸다. 우미의 정성에 살짝 난 스크래치를 시즈카는 난감하게 바라봤다. 


 "딱히, 시호가 알 필요 없다고 생각하거든."


 "다음부터는 차라리 샵에 가서 바르지 그래. 네일 바르는 실력이..."


 "그, 그러는 시호는 네일 잘 할 줄 알아?"


 하여튼 한 마디도 곱게 넘어가질 않는다. 저 아이는.


 "지금 보니 너보다는 내가 잘 할 거 같아."


 "설마 시호. 혹시 이거 내가 했다고 생각하는거야?"


 "그럼?"


 "이야. 우미씨랑 메구미씨가 알면 슬퍼하실거야. 분명. 시호가! 시호링이! 하면서 말야."


 "...네가 한 게 아니야?"


 무심하던 표정이 조금씩 요동치기 시작했다. 시호는 콕 찝어 우미가 담당했던 손을 가리키곤 시즈카를 쳐다보았다. 이걸 네가 한 게 아니라고? 입은 열지 않았지만 반문의 내용이 너무나도 잘 보여서 시즈카는 픽 웃어버렸다.


 "우미씨가 해 줬어."


 "......개성적이네. 나쁘지 않은 네일이라고 생각해."


 "뭐야 그거. 내가 했다고 생각할 때랑 말이 다르잖아."


 "스케줄 좀 보고올게."


 "시호!"


 급하게 자리를 뜨는 모양새가 웃겨 시즈카는 킥킥거렸다. 아마 사무실에 가면 안나네가 열심히 게임 하고 있을걸. 네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도 자리가 비면 시호도 분명 게임팟에 휘둘려버리겠지. 사무실에서 일어날 일들을 망상하며 연신 히죽이며 웃음을 흘렸다. 그 즐거운 망상은 몇 분 지나지 않아 시호의 빠른 귀환으로 끝나버렸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거야."


 "사무실에 아무도 없었어?"


 "응."


 "그럴 리 없는데?"


 당황한 시즈카를 딱히 보듬어줄 필요를 못 느낀 시호는 도로 시즈카의 맞은 편으로 앉았다. 시호는 시즈카의 네일을 재차 흘끔거리더니 별 일 아니라는 듯 언제나처럼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렇게 대기실의 정적이 다시금 시작되었다. 시호는 연신 스마트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고 세월아 네월아 네일이 마르기만을 기다리던 시즈카는 까딱까딱 손을 움직이기만 했다. 어쩌면 네일은 이미 다 말라버렸는지도 모른다. 안정적인 정적이라 느껴져 딱히 다른 행동을 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었다.


 "몇 시야?"


 "네시 반."


 "하루 다 갔네."


 "너무 빨리 하루를 마감하는 거 아니야?"


 "갑자기 그것도 나쁘지 않단 생각이 들었어."


 뜻 모를 말에 그제야 시호는 스마트폰에서 시선을 거뒀다. 그 시선을 마주하며, 시즈카는 입을 열었다.


 "오늘 갑자기 오프나는 바람에 뭘 어째야 할 지 처음엔 대책 없었거든. 오늘 한 거라곤 얘기하고 밥 먹고 게임한 거 밖에 없어. 근데 그냥 갑자기. 이것도 나쁘지 않구나란 생각이 들었어."


 "......상당히 뜬금없네."


 "그러게."


 확실히 아침과는 마음의 상태가 다르다. 그냥 편안해졌다. 아침에 대체 뭐가 그렇게 조급했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시즈카는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더 이상 묻어나오지 않았다. 


 "그건 언제까지 그렇게 놔 두려고?"


 "역시 우미씨가 했다고 해도 좀 아니라고 생각하는거지?"


 "개성적이라니까."


 "뭐 참. 그래. 뭐. 개성적이네. 응. 그래. 내가 한 거라고 치면?"


 "...잘도 개성적이게 칠했네."


 "미묘하네. 그거."


 "......시즈카."


 시호가 만지작 거리던 스마트폰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뭐야? 갑자기 일어나고?"


 "...... 밥이나 먹으러 가자."


 "응?"


 "오프였다며. 밥 먹을 시간도 있지 않겠어?"


 "......"


 "시, 싫음 말고."


 갑자기 식사를 권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거절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기에 시즈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 됐네. 밥 먹고 집으로 가면 되겠어. 시즈카는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내내 음악을 감상할 시간을 주지 않던 헤드폰도 제대로 챙겨 목 뒤로 걸쳤다. 우미와 메구미가 준 리무버도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 과정을 시호는 문 앞에 서서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가자."


 "뭐 먹을래? 역시 그거?"


 "역시 그거라니. 뭘 생각한거야?"


 "그거말고 더 있어?"


 "... 맞아. 그거 먹자."


 극장의 문을 나서기 직전, 시즈카는 마지막으로 시간을 살폈다. 5시까지는 약 15분이 남았다. 분명 이것저것 뭔가를 한 것 같긴 한데 한 것 같지 않은 기분. 어차피 일주일 정도 지나면 이 날의 기억이 희미하겠지만 말이다. 하루카씨가 갑자기 찾아온 오프가 반갑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을까? 생각에 잠기느라 이미 몇 십걸음은 멀어져버린 시호의 뒤를 시즈카는 제 페이스대로 뒤따랐다. 


 드물게 이런 날도, 나쁘지 않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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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 치열하게 아이돌로써 최선을 다 할 시즈카에게 그리 큰 의미가 없을 하루를 주고 싶었어요

 부디 재밌게 읽어주셨기를요.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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