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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15, 2016 00:54에 작성됨.


 천재는 고독하다.
 그 누구와도 같지 않기 때문이다.



 문을 여는 순간 시큼한 냄새가 쏟아져나왔다. 무심코 코를 막게 되는 찡한 느낌에도 이치노세 시키는 그저 무덤덤했다. 하지만 시키는 위기감도 긴장감도 없었다. 그저 '앗차 저질렀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이 보고 있었다면 과장되게 자신의 머리를 콩 쥐어박았을지도 몰랐다.

 한 손으로 코를 막고 한 손으로는 현관문을 크게 열었다 닫으며 생각을 해봐도 냄새의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시키의 기억력이나 통찰력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집 안에는 원인이 될만한 위험요소들이 수도 없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경찰이 이 집에 들이닥친다면 바로 주인을 체포하려고 할 정도였다. 시키가 걱정하지 않는 건 독극물, 예를 들면 청산가리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고 나머지는 허가증을 보여주면 될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의심을 한다면 귀찮아도 그녀의 학위 증명서 같은 걸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하는 지루한 방법까지 동원하면 경찰도 이해해 줄 것이 분명했다. 다만 약품 때문에 이런 상정 외의 사태가 발생하는 건 정말로 사양이었다.

 한참을 환기를 시킨 후에 방 안으로 들어서니 효과가 있었는지 냄새가 덜했다. 시키는 그제야 코를 막고 있던 손을 떼고 과장스럽게 기침을 해댔다. 하지만 그 연기는 얼마 가지 않아 씁쓸한 자조의 웃음으로 변했다. 주변에 지켜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과장된 행동으로 주변을 속이는 것이 몸에 배어 버렸다.

 시키는 아이돌을 하고 있었다. 모든 일에 빠르게 질리는 괴짜의 괴벽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시키는 지금의 생활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생전 처음 해보는 노래와 춤도, 팬들을 만나는 것도 모두 낯설었다. 하지만 시키에게 낯선 일이야말로 두근거리고 설레는 일이었다.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그 경험은 계속해도 질리지 않는 놀이와도 같았다.

 그래도 그 녀석, 프로듀서가 없었다면 다른 일들처럼 금방 그만뒀을 게 분명했다.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시키는 그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어려서부터 천재라고 떠받들어진 시키였기에 자신을 걱정해 주고, 핀잔을 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는 흔해 빠진 이유도 있었다. 외모가 시키의 취향이기도 했다. 냄새도 좋았다. 여러 가지 이유를 댈 수 있었지만 결국 답은 간단했다.

 이치노세 시키는 프로듀서에게 반해버렸다. 그것뿐이었다.


 시키는 신고 있던 신발을 정리도 하지 않고 집어 던지듯이 현관에 버려두고 냄새가 나는 곳을 찾았다. 그렇게 오래 걸릴 것도 없이 깨져있는 병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약한 지진 때문인지 아니면 유령 때문에 폴터가이스트 현상이라도 일어난 건지 모르겠지만, 찬장에서 떨어진 모양이었다. 시큼한 냄새가 나기에 산(酸) 종류의 뭔가가 아닐까 했는데 바닥이 멀쩡한 걸 보니 그건 아닌 듯싶었다. 뭐였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뭐 아무래도 좋겠지 하며 시키는 깨진 병을 의식 밖으로 걷어찼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바닥에 물을 끼얹어버리고 싶은 폭력적인 생각도 들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기에 대충 휴지를 반 두루마리나 뜯어서 위에 던져버렸다. 당장은 휴지 더미가 약품을 흡수해주겠지만, 그걸로 해결되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더는 생각하기가 싫었다.

 시키는 그대로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직 오후 정도였지만 오늘은 아무것도 더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머리를 비우려는데 계속 시큰한 냄새가 맴돌았다. 예민한 후각은 놓치지 않고 남아있는 그 냄새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시키는 싸구려 향수를 찾아서 신경질적으로 몸에 잔뜩 뿌려댔다. 향수라는 건 아주 조금씩 뿌려서 은은한 향을 내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칙칙 하고 수도 없이 향수를 뿌려서 계속 방안을 떠도는 냄새를 지워냈다. 이내 짙은 꽃의 향기가 나기 시작했다. 장미 냄새였다.

 문득 시키는 울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무소의 다른 동료들도 프로듀서도 시키의 이런 모습을 알지는 못했다. 그들이 아는 시키의 모습은 만능이었고 적당적당하고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도 사람이었다. 짜증을 내고 신경질을 내고 울고 싶어하는 여자아이였다. 하지만 그 모습을 가장 싫어하는 것도 시키 자신이었다. 모든 것을 이해해버리기 때문에 공포도 감동도 연민도 느낄 수 없었던 시키는 울어본 적이 없었다. 진심으로 화를 내본 적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반응이나 행동은 그녀의 예상 내였다. 아무런 놀라움이 없었다. 시키는 마시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는 약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지만, 바보 같은 생각이라며 이내 웃어넘겼다.

 대신에 시키는 사랑에 빠지는 약의 성분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페닐에틸아민, 세로토닌, 도파민, 바소프레신, 옥시토신 같은 호르몬들의 조합비를 생각하고 있었다. 사랑을 하면 분비되는 호르몬들로 약을 만들어서 먹는다면 제멋대로인 뇌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겠지. 한 마디로 만들어진 사랑이었다. 흥미로운 이야기였지만 시키는 금방 그만두었다. 몇 번이나 떠올렸기에 이미 약의 제조방법까지 생각해뒀지만 언제나 시키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것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대신 핸드폰을 가져와 프로듀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하고 있다거나 다른 사정 때문에 전화를 못 받을 수도 있었다. 오히려 그렇다면 민폐가 되겠지. 하지만 시키는 전화를 걸었다. 심심하기도 했고, 왠지 견딜 수가 없었다.

 "응, 무슨 일이야, 시키?"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았지만 프로듀서가 전화를 받았다.

 "저기저기, 지금 뭐 하고 있어?"

 분명 먼저 물어본 건 프로듀서 쪽이었지만 시키는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다분히 계산된 진행이었다.

 "어... 일 끝나고 밥이나 먹을까 생각 중이었는데."
 "무슨 일?"
 "마유의 촬영."

 프로듀서는 시키 말고도 다른 아이돌 몇 명을 담당하고 있었다.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톱 아이돌들은 스케쥴이 끊이지 않아서 전속 프로듀서 한 명이 담당하는 식이었지만 그렇지 않으면 한 명의 프로듀서가 여러 아이돌을 담당하고는 했다. 스케쥴이 비는 경우가 많으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겹칠 때도 적당히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었으니까. 프로듀서의 역할은 보호자가 아니라 총괄 담당 같은 비슷한 무언가라고 생각했다.
 
 마유도 프로듀서의 담당 중 한 명이었다. 작은 체구와 귀여운 이미지가 인기인 아이였다. 다만 그건 팬들에게 보이는 이미지일 뿐이고 사실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집착과 질투가 심한 아이였다. 그리고 그 대상은 당연히 프로듀서였다. 정말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사무실에서의 마유의 모습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흐~응. 어땠어?"
 "굉장했지. 분명 이번에도 대성공이라니까."

 프로듀서는 즐겁고 들뜬 분위기였지만 시키는 마냥 즐겁지는 않았다. 마유는 시키의 연적이었으니까. 물론 마유의 입장에서는 시키가 굴러온 돌로 보일 테니 싫어하는 것도 당연했지만 시키도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위험할 수도 있었지만 시키는 위험이라는 단어를 스릴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평소처럼 로리타 계?"

 그런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마유도 동료였기 때문에 시키도 마유의 매력이나 세일즈 포인트 같은 건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수영복."
 "뭐? 아직 겨울인데?"

 슬슬 날이 풀리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겨울이었다.

 "스튜디오 촬영이었으니까. 확실히 조금 이르긴 해도 편집이니 뭐니 하는 걸 거치면 초여름 정도에 낼 스케쥴에 맞으니까."

 그런가 하고 시키는 대충 대답했다. 어른의 사정이라는 건가 하면서.

 "나는 어때?"
 "응?"
 "시키 쨩의 수영복. 보고 싶잖아?"

 전화기 너머에서 푸흡 하는 소리가 들렸다.

 "냐하. 역시 그런 거지?"
 "아니, 싫은 건 아니지만. 그보다 작년에 이미 봤잖아?"
 "그랬었지~ 해롱해롱했지~"

 다시 전화기 너머에서 콜록콜록하는 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건 됐고. 밥이나 먹으러 나올래? 대충 근처인데."
 "응? 내 집 어디인지 알고 있었어?"
 "정확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침대에 누워서 뒹굴던 시키는 벌떡 일어났다. 덕분에 침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쳐서 한참을 머리를 싸매고 더 뒹굴어야 했다.


-


 "뭐~야. 그냥 패밀리 레스토랑이잖아."
 "좀 봐주라. 예정에 없던 일이라 지갑이 텅텅 비었다고."

 자리에 앉아있던 프로듀서는 직접 지갑을 꺼내서 거꾸로 들어 터는 시늉을 했다. 어차피 카드를 쓸 테니 현금이 없어도 문제는 없었지만 시키도 크게 불평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웬일이야? 갑자기 시키 쨩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거나?"
 "아니,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나서. 개인적으로 이야기도 하고 싶었고."

 시키는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조금은 두 사람 사이가 가까워졌다.

 "그런 걸 보고 싶었다고 하는 거랍니당."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는 그만두는 게 좋을걸."

 프로듀서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시키는 냐하하 하고 웃었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시키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것처럼 프로듀서 역시 남에게 보이는 모습을 꾸며내는 것이 똑같았다. 과장되고 장난스러운 분위기로 가리고 있었지만, 본심을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이돌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을 대하고 영업을 하는 처지여서 가면을 쓰는 일에 익숙한 것이다.

 "그래서, 하려는 이야기는 뭐였는데?"
 "그렇게 급하게 하지 않아도 되잖아."
 "어차피 음식 나오려면 시간도 걸릴 테고. 아무래도 괜찮잖아."

 시키의 말에 프로듀서는 멋쩍게 웃었다.

 "별건 아니고. 그냥 평범하게 이야기해보고 싶어서. 여자들끼리는 자주 수다도 떨고 그러잖아?"
 "그런가아?"

 확실히 시키와 프로듀서는 서로의 개인적인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는 편이었다. 서로 장난스레 말을 돌리는 편이었기 때문에 겉돌기만 했다.

 "이야기 안 해주면 어떻게 할 건데?"
 "그러면 밥 안 사."
 "뭐야, 쩨쩨해~"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한 끼 먹는 정도는 별로 부담도 되지 않는 돈이었지만 가격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내 이야기가 궁금하다는 거구나. 솔직하게 말하면 될걸."
 "그래."

 시키는 뒤로 기지개를 크게 폈다. 별로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음~ 뭐 대부분은 이미 너도 알고 있는 이야기일 테니까.... 미국에서 연구하던 이야기를 해줄게."

 시키는 레모네이드를 빨대로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시키냥의 특기는 화학이라고 했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서 순수 화학은 그다지 쓸모가 없단 말이지. 물론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보통은 크게 학교의 과목처럼 생물, 화학, 물리 이런 것들을 생각하지만, 실상은 우주과학이니 핵물리학이니 분자공학이니 양자역학이니 어려운 것들이 튀어나오잖아? 시키도 그래서 생화학 비슷한 걸 하게 되었는데... 쉽게 말하면 약을 만들거나 개발하거나 하는 거야."
 "무슨 약?"
 "에이에이, 그렇게 서두르지 말고. 다 말해줄 테니까~"

 시키는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말이지, 화학도 좋아하지만 역시 사람들에 대한 흥미가 많아서 말이야~ 사람의 기억을 지워주는 약을 연구하고 있었어."
 "뭐야, 그거 판타지잖아."
 "사실 그렇지도 않아. 이미 어떤 경우에는 약물을 과다 복용하면 부작용으로 기억상실 증세가 나타나는 일도 있단 말이야? 로라제팜이라던가 프로포폴 같은 거 말이야. 그런 쪽을 이용해서 이렇게 저렇게 해보는 거야.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워주거나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아니면 지나친 의식... 너무 예민한 사람도 잘만 사용하면 그런 부분을 없앨 수 있다던가 하는 연구였지."

 시키는 빨대로 레모네이드를 마시더니 귀찮은 듯 빨대를 치워버리고 직접 잔을 들어 마시기 시작했다.

 "새, 생각보다 대단하네."
 "냐하하. 좀 더 시키 쨩의 대단함을 경배하도록 해!"
 "아니, 그런 식으로 말해봐야 경외감 같은 건 전혀 안 드니까."

 입 안에 레몬 향이 가득해지자 시키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두 자리 건너편에 있는 중년 남자한테서 나던 담배 냄새가 신경 쓰였는데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공한 거야?"
 "글쎄에? 비~밀."

 시키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고는 쉿 하는 소리를 냈다.

 "뭐야 그게."
 "나아중에 그런 약이 만들어진다면 내가 커다란 공헌을 했다는 것만 잊지 말아줬으면 해!"

 뻔뻔한 말에 시키도 프로듀서도 크게 웃었다. 한참 웃다 보니 종업원이 나온 음식을 가지고 난감하게 서 있는걸 발견하고 두 사람 모두 얼굴이 빨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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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쓴 Overdose에서 조금 더 이어서 써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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