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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똥별이 파고든 자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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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04, 2013 00:25에 작성됨.

 “수고했어, 마코토쨩.”
 유키호가 뚜껑을 미리 따 둔 이온음료를 내밀었다. 라디오 녹음은 순조롭게 종료되었다. 오히려 평소에는 생방송으로 진행하던 방송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훨씬 편하게 녹음할 수 있었다. 중간에 그녀가 또 스튜디오에 구멍을 뚫을 뻔 했지만, 우리 라디오에서는 매 방송마다 있는 일이니까. 다만 말리느라 내가 좀 고생할 뿐이지만.
 “응, 유키호도 수고했어.”
 “미안, 오늘도 힘들었지...”
 “으응, 아니야. 유키호가 그래주는 게 방송도 재미있고. 나도 익숙해졌어.”
 사실이었다. 땅을 파고 들어가는 유키호를 말리는 건, 이 방송에서만이 아니라 원래 사무소에서도 내가 하던 일이기도 했거니와, 방송 자체가 정통 라디오라기 보단 개그 방송이 되어가는 분위기이기도 했기 때문에, 유키호가 어떤 이유로든 폭주하면 라디오 청취자들은 웃어주니까. 같은 계산적인 이유를 내세울 필요도 없이, 유키호는 실은 심지가 굳은 아이니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다. 동료로써.
 “그럼 이 이후에는, 아까 말한 그 스케쥴을 가는 거야?”
 “응. 갑자기 잡힌 거라 정확히는 모르지만, 또 화보 촬영인 것 같아.”
 사실 나도 기왕이면 유키호랑 차라도 마시며 쉬는 것도 좋았을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일은 일이니까. 물론 유키호가 아쉬워하는 것도 이해는 가는데다, 나도 많이 아쉽지만 말이지.
 “월요일에 스케쥴 비니까. 그 날은 꼭 가자. 괜찮지?”
 “응. 고마워, 마코토쨩.”
 유키호가 웃는다. 다행이다. 아까 전화를 받으면서 느꼈던 약간의 짜증이 눈 녹듯이 사라진다. 이런 거야말로 유키호의 세일즈 포인트가 아닐까. 그녀는 이어폰을 귀에 꽂아 넣고 음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신곡을 받았다고 했던가. 어려운 곡이라 레코딩이 힘들어서 고생이라고 들었는데. 유키호도 노래를 못 하는 건 아닐 텐데.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걸까?
 “...난 또 무슨 프로듀서 같은 소리를.”
 “응? 마코토쨩, 뭐라구?”
 “아, 아무것도 아니야! 하하...”
 유키호한테 방금 내가 생각한 걸 얘기하기는 부끄러워서 얼버무렸다. 다행히도 잘 넘어간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프로듀서가 늦는다. 프로듀서가 도착해야 유키호도 사무소에 보내고 나도 다음 스케쥴로 갈 수 있을 텐데. 평소라면 유키호와 이야기하고 있으면 시간이 잘 가겠지만, 신곡을 받아 계속 청음을 하며 집중하는 그녀에게 말을 걸기가 힘들었다.
 가만히 유키호를 바라보았다. 갈색의 단발이 깔끔하게 떨어져 내리고, 같은 색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는 감았다 떴다를 계속하고 있었다. 음악에 맞추어 움직이는 손가락은 얼음처럼 희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얇았다. 다소곳이 앉아 음악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은 유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어제 미키를 보며 느꼈던 감정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왜 내 주변엔 이렇게 귀엽고 예쁜 애들뿐인 거냐구. 그렇게 푸념을 늘어놓으려는 찰나, 유키호와 눈이 마주쳤다. 음악에 집중하던 그녀는 놀랐는지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마, 마코토쨩?”
 “아, 미, 미안. 그만 넋 놓고 봐 버렸네.”
 “아, 아우우...”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고개를 못 들고 있었다. 집중하고 있던 걸 계속 쳐다봐서 그런가? 근데 이렇게까지 부끄러워할 이유가 있나? 뭔가 내가 말실수라도 한 건가.
 “그, 저기... 마코토쨩...”
 “응?”
 유키호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여전히 새빨간 채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긴장이라도 한 듯 손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얼굴에 몰렸던 피가 전신에 퍼지듯이, 새하얀 손가락도 어쩐지 붉게 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긴장한 티가 역력히 난다. 마른 침까지 삼키기 시작했다. 꿀꺽, 하고 넘어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뭔가 넘어가는 게 보일 리가 없는 가녀리고 여성스러운 목은, 새빨갛게 물들어 원래의 색으로 돌아올 기미가 없다. 왠지 그 목을 움켜쥐고 싶었다. 손을 뻗고 싶다고 생각하자, 어제 미키에게 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던 그 일. 그 일을 떠올리자 갑자기 현기증이 찾아왔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고, 눈앞에 있던 그녀는 붉은색의 무언가로 보인다. 그 붉은색의 무언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코토쨩은... 그, 저기... 나를... 우우...”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까지 긴장을 했을까. 잘 모르겠다. 현기증이 점점 심해져간다. 왠지 모르게 그녀의 가녀린 목만이 선명히 보였다.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그녀가 입을 떼려는 순간, 대기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미안, 마코토, 유키호. 오래 기다렸어?”
 시야가 천천히 돌아온다. 눈앞에 흐릿하게 보이는 화이트칼라의 남자. 선명해진 시야 속에는 프로듀서가 서 있었다.
 “앗, 프로듀서! 기다렸다구요!”
 “오, 오셨어요. 프로듀서...”
 “미안, 미안. 이 녀석을 데리고 오느라고 좀 늦었어.”
 “앗, 유키호랑 마코토인 거야!”
 프로듀서의 뒤에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는 건, 금발의 톱 아이돌. 미키가 여기 왜 있는 거지?
 “저기, 프로듀서. 오늘 화보촬영 한다고 했던 거. 마코토 군이랑 하는 거였어?”
 “응. 마코토에겐 미안하지만 오늘도 커플 화보일 것 같아. 괜찮겠어?”
 ...커플 화보인 것보다는 상대가 미키라는 게 괜찮지 않지만 말이지. 미키야 모르겠지만 나는 어제 그런 짓을 해놓고 미키랑 화보촬영을 하면 껄끄러워질 수밖에 없는데. 일이니까 어쩔 수 없긴 하지만.
 “...괜찮아요!”
 “그래, 고마워. 마코토.”
 “헤헹! 이것도 다 톱 아이돌을 위한 거니까요!”
 의기양양하게 웃는 내 얼굴을 보고 미키와 유키호도 웃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된다. 마냥 속이 편한 것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녀들이 웃고 있으니까. 그거면 된 거지 뭐.
 “그럼 다들 차로 가자. 유키호는 사무실에 내려줄게.”
 “네. 가자, 마코토쨩.”
 “응.”
 유키호와 함께 프로듀서와 미키를 지나친다. 순간 잠깐 어지러웠다. 시야가 흐려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뭐지? 몸이라도 안 좋은 건가?
 “마코토 군, 왜 그러는 거야?”
 “...아니야! 잠깐 멍했을 뿐이야. 가죠, 프로듀서!”
 
 천천히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무언가의 경고였을까. 하고 마코토는 생각한다. 육감이라는 걸 믿는 성격은 아니지만, 아마 그건 그녀의 육감이 발동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다시 생각을 멈춘다.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비가 또 들이친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끝은 아직도 요원한 듯이 보였다. 갑자기 빛이 번쩍한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다급하게 쫓아온 듯한 천둥소리가 좁은 공간에 울려 퍼진다.
 심호흡을 해 본다. 긴장 같은 건 이미 다 풀어졌다. 다만 그녀로써 아쉬운 것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그런 옛날 일을 떠올리고 싶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원하는 걸 생각할 수 없다면 차라리 생각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뇌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굴러가주지 않았다.
 “그만...”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그녀의 좌뇌와 우뇌는 번개처럼 전기 신호를 방출하며 과거를 되감고 있었다.

 프로듀서가 운전하는 작고 낡아빠진 차가 삐걱거리며 사무소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이 훨씬 지나있었다. 아무래도 식사는 또 이동 중에 해야겠구나. 영양가가 없진 않겠지만 매번 도시락은 좀 싫증이 나려고 한다.
 “유키호를 내려주고 바로 가자.”
 내가 대답하려는 순간, 미키가 갑자기 손으로 프로듀서의 어깨를 툭툭 친다.
 “저기, 프로듀서. 미키, 잠깐 화장실이 가고 싶은 거야.”
 미키의 말에 프로듀서는 약간 당황한 듯하다가, 손목시계를 쳐다보고 손가락으로 뭔가 계산하는 시늉을 했다.
 “...5분 줄게.”
 그 말에 미키는 볼을 부풀렸다. 나같이 여자처럼 잘 꾸미지 않는 사람이라도 화장실에서 5분만에 나오라는 건 좀 무리가 있다. 하물며 미키에게는 5분은 짧디짧은 시간이겠지.
 “레이디한테 화장실을 5분 안에 갔다 오라는 건 실례인거야!”
 “스케쥴이 급하잖아. 뭔가 다듬고 싶은 게 있다면 현장에서 해도 될 텐데?”
 “남자에게는 말 못하는 무언가가 있는 거야...”
 미키의 말에 프로듀서는 아까보다 조금 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손목시계를 쳐다보고 카 네비게이션을 조금 만지작거리더니, 미키를 향해 돌아앉았다.
 “...10분. 스케쥴 때문에 더 이상 못 기다리니까. 알았지?”
 “...알겠는거야.”
 미키는 뾰루퉁한 얼굴을 숨기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그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던 유키호도 그녀를 따라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왠지 모를 긴장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미키가 조금 정색을 해서였을까.
 “미키 녀석... 여유가 없는 건 아니지만, 빨리 나와야 할 텐데.”
 프로듀서가 안전벨트를 풀어헤치고 의자에 파묻혔다. 사원이 적은 소규모 사무소인 이곳에서 운전이 가능한 건 리츠코와 프로듀서 뿐이었다. 그나마 리츠코는 류구코마치 전속 프로듀서이니 이오리, 아미, 아즈사만 맡아서 움직이면 되겠지만. 나머지 아이돌들은 전부 프로듀서 혼자 커버하고 있으니, 나라도 피곤할 것 같았다.
 “다음 스케쥴이 몇 시인데요?”
 “여유가 없는 건 아니야. 장소도 가깝고, 시간도 적당하고. 하지만 촬영감독이 꽤 유명한 사람이라, 어느 정도 잘 보여 두지 않으면 나중이 힘들 것 같아서.”
 흔히 말하는 ‘업계의 사정’ 이란 걸까? 보통 이런 얘기는 우리에게는 잘 하지 않는 프로듀서이지만, 지금은 얘기하지 않으면 이유가 설명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꺼내신 모양이다.
 “음, 마코토.”
 “네?”
 의자에 파묻혀가던 그가 운전석에서 내 쪽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민다.
 “이것저것, 너한테는 미안한 일이 많구나.”
 확신한다. 지금 아마 뭔가 먹고 있었다면 100% 사레 들렸을 거다. 이 사람은 가끔 아무렇지도 않게 부끄러운 말을 한다. 본인은 자각이 전혀 없는 건가? 아니면 말해놓고 나중에 혼자 부끄러워하는 건가?
 “가,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프로듀서가 나한테 이런 말을 할 정도로 힘드신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먹먹해지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부끄럽잖아.
 “저번에 네가 나한테 따로 찾아와서 여자다운 일을 하고 싶다고 했던 게 문득 생각나서. 결국 이번 일도 남자 역이니까. 아직 내가 무능해서 이런 일밖에 갖다 주지 못하는구나 싶어.”
 “프로듀서는 절대 무능하지 않으니까요!”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왔다.
 “마, 마코토?”
 “저 열심히 할 테니까요! 걱정하지 마시라구요!”
 “그, 그래. 같이 힘내자!”
 프로듀서에게 웃어보였다. 조금쯤 안심하셨으면 좋겠다. 나도 힘내고 있으니까. 그나저나 미키는 안 내려오고 뭐하는 거지.
 
 “저기, 유키호.”
 “...응? 미, 미키쨩은 일하러 가는 거 아니었어?”
 사무소에 막 들어가려던 유키호를 미키가 붙잡았다. 둘은 계단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서너 계단 정도 유키호가 높은 곳에 있었지만, 오히려 미키가 더 높은 곳에 서 있는 듯이 당당한 모습이었다. 유키호는 당당한 미키에게 위축되어서인지, 어깨가 축 처져 평소보다도 더 작아보였다.
 “느낌이 안 좋아서, 이참에 유키호한테도 확실히 해 두고 싶은 거야.”
 “뭐, 뭐를?”
 사무소 문을 붙들고 있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미키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왠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어금니를 앙다물고, 미키를 똑바로 쳐다보려고 애썼지만, 손과 눈동자의 떨림은 그리 쉽게 멎지 않았다. 그런 유키호의 모습을 본 미키는 슬쩍 웃어보였다. 자신감에서 나오는 미소는 잠깐 동안 그녀의 얼굴을 스쳐지나갔을 뿐이지만, 유키호에 떨리는 눈동자에 비춰질 정도의 시간 동안은 드러났다.
 “마코토 군, 넘보지 말아 주었으면 하는 거야.”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이 온 몸을 떨던 유키호의 떨림이 멎었다. 그 전까지 축 쳐진 어깨로 미키에게 주눅이 들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만 같던 가녀린 그녀가, 이제는 미키보다 커 보인다. 떨면서도 간신히 잡고 있던 손잡이는, 이제 그녀의 손의 떨림이 멎은 반동인지 무섭게 덜덜거리고 있었다. 유키호는 초점 없는 눈동자를 강제로 초점을 맞추는 듯이 미키를 바라보았다. 그때까지 너무나 당당하던 미키조차도 움찔했다. 
 “미키쨩.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그녀는 마치 입이 아닌 눈동자로 말하듯이, 나지막히 한 마디를 던졌다. 미키에게 말을 건낸 초점 없는 눈동자는, 사무소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미키는 그 자리에서 잠깐 휘청하며 계단 난간을 잡고 간신히 버텨 섰다. 이마에는 마치 비라도 내린 듯이 식은땀이 흐른다.
 “유키호도, 할 땐 하는 애라는 걸 깜박한 거야...”
 미키는 간신히 사무소를 등 뒤로 돌리고 서서,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한 걸음씩 조심스레.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 유키...호...쨩?”
 코토리가 뭔가 위험한 기운을 감지하고 뒤로 물러선다. 유키호의 주변에서 산소가 타들어가듯, 아스팔트가 햇빛을 받아 끓어오르듯 아지랑이가 일렁인다. 그녀는 어서 오라고 말했던 코토리의 말을 듣지 못한 듯이, 초점 없는 눈으로 사무소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제야 그녀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하고, 그와 동시에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나, 나... 나 도대체 무슨 소릴 한 거지?”
 입에서 알 수 없는 말들이, 아니, 이미 저걸 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글자들의 나열에 불과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녀가 내뱉는 말들은 혼란스러웠다. 아마 그녀 자신이 가장 혼란스러우리라. 그녀는 자신의 입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마치 남이 멋대로 움직이는 자신의 몸을 막아 보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윽고 입의 움직임이 멈추고, 그녀의 손이 입에서 떨어졌다. 그녀는 눈을 감고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어떡하지...”
 깊게 들이마신 숨은, 깊은 탄식이 되어 돌아왔다.



의외로 빨리 써지긴 하는데...
일단 글 자체가 꽤 길어질 것 같습니다. 다음 편도 가급적 2주 안에는 올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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