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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음의 저편. -제5장, arcadia-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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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02, 2020 18:02에 작성됨.

[도쿄 스이게츠 학원 고등부 1학년 복도 ------ 타도코로 신이치]


“부탁해, 줄리아!”

“하아? 갑자기 뭔 소리야, 신치?”


  원래대로라면 나는 지금 밴드부실에 있어야 하지만, 레이나에게 적당한 핑계를 대고 1학년 복도를 찾아 왔다. 


“기타? 그러고 보니 밴드부가 생겼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그게 신치였어?”

“너무 의외라는 반응인데. 기분 나빠해도 돼?”

“미안, 특별한 의미는 아니었어.”

  

  이 아이는 줄리아. 사실 본명은 따로 있지만 본인이 본명으로 불리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해서 다들 줄리아라고 불러주고 있다. 


“서머 페스티벌을 준비해야 하는데, 도저히 템포를 쫓아갈 수가 없더라고. 너 말고는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떠오르지를 않아서 말이지. 어떻게 안 될까?”

“기타라면 도와줄 수 있긴 하지만...”


  줄리아는 항상 기타를 매고 다녔다. 작년 스이게츠제의 중고등부 연합 공연에서 기타보컬 솔로로 무대에도 서는 등 실력도 좋았다. 그래서 요전번에 레이나가 우리 밴드부로 스카우트를 시도한 적도 있었지만, 이미 외부 밴드 활동을 하고 있어서 합류하지 못했다고 한다. 줄리아는 1학년생이었지만 나는 작년부터 줄리아와 대충 아는 사이였다. 다시 말하면, 내가 기타에 대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저기, 타도코로 씨?”

“안녕, 치하야. 밴드부실에 가는 길이야?”

“응. 타도코로 씨는 지금 바빠?”

“어쩌다 보니...”


  계단을 내려오던 치하야가 복도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얘기했다시피 원래대로라면 나는 밴드부실에 있어야 했기에, 치하야가 의문을 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라, 밴드부의 키사라기 치하야, 맞지? 아이돌을 한다는.”


  줄리아가 치하야를 알아보고 말을 걸었다. 줄리아도 아이돌에 관심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요즘 교내에서 치하야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므로 1학년에서도 꽤나 유명한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혹시 성함이?”

“줄리아라고 불러줘. 말은 편하게 해도 괜찮아.”

“그러면, 잘 부탁해. 줄리아 씨.”

“그냥 줄리아, 라고 해도 괜찮지만... 뭐, 됐나.”


  치하야는 동급생, 심지어 하급생에게도 초면이면 깍듯이 존대를 하고 있지만, 그래도 상대가 편하게 이야기해달라고 요청하면 바로바로 부드럽게 어조를 바꾸었다. 우리가 처음 결성했을 때 치하야가 말을 놓기까지 한 달 가까이 걸린 것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상급생인 치하야랑 하급생인 줄리아가 서로 입장이 바뀐 기분이 드는데, 본인들이 괜찮아 하니까 딱히 상관없나.


“부활동 모임이 있어서 타도코로 씨를 부른 건데, 혹시 방해됐을까?”

“아니야. 신치도 그 밴드부 일로 온 거였거든. 곡 템포를 못 따라가겠다나 뭐라나.”

“ㅇ, 어이, 줄리아!”

“왜 그래. 어차피 연습할 때 다 들킬 텐데. 굳이 숨길 필요 없잖아?”

“...”


  특별히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치하야가 있는 앞에서 대놓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 않나...? 


“그러고 보니 타도코로 씨, 제대로 기타를 친 지 꽤 오래 됐다고 했었지?”

“아, 응...”

“그러면 줄리아 씨, 밴드부실에 함께 갈래? 기타를 치려면 밴드부실에서 하는 쪽이 좋을 것 같아서.”

“에, 나, 부원이 아닌데 들어가도 돼?”

“타도코로 씨를 도와주는 거라면 괜찮을 거 같은데. 어때, 타도코로 씨?”

“어? 어...... 괜찮지 않을까?”


  나는 약간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사실 밴드부실에 초대할 정도로 본격적인 도움을 요청할 생각까지는 없었기에 조금 당황했고. 치하야가 전에 알던 것보다 적극적인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둘은 어느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밴드부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나, 사실은 치하야의 CD를 샀어. 뒤쪽 트랙이었나? 파워풀한 곡이 있어서 마음에 들더라.”

“CD, 사줬구나. 고마워, 줄리아 씨. 기타도 그렇고, 줄리아 씨도 음악을 좋아하는 거지?”

“응. 장르는 록을 가장 선호하긴 하지만, 음악이라면 특별히 가리지는 않아. 아, 그리고 치하라고 불러도 될까?”

“괜찮아. 나, 사실 생일이 빨라서 줄리아 씨랑 동갑이거든.”

“그렇다면 역시 그냥 줄리아라고 불러주는 게 좋은데.”


  음악에 진심인 이들은 음악으로 통한다, 랄까. 치하야의 성격이 조금 달라진 점도 있겠지만, 역시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니 둘 다 분위기가 고조된 느낌이 들었다. 어느 샌가 찬밥 신세가 되어버린 나는 기타를 챙겨 조용히 둘을 따라 걸었다. 의도했던 건 아니었지만, 치하야에게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주는 것도 괜찮은 결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또 다른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나는 왜 밴드부를 하고 있는 걸까? 오직 치하야를 위해서? 그녀에게서 과거의 나를 보았기 때문에?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이유가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다. 레이나는 원래부터 밴드 활동을 했었고, 사토는 그런 레이나를 뒤따라 온 것이었다. 카츠라기는 오지랖이 넓은 성격이니까, 합창부 시절부터 보던 치하야를 돕고 싶다는 마음에서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기타도 초보 수준이고, 무대에 서는 것을 동경하는 것도 아니었던 나는? 내 안의 동기는 무엇일까? 정말 순수한 선의 때문이었을까?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하던 중, 줄리아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어이, 신치. 안 가? 나, 기타 때문에 동행하고 있는 거잖아. 꾸물대지 말고 오라고.”

“아, 미안. 지금 갈게.”


  나는 급히 둘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밴드부실에 도착하자, 나와 치하야를 제외한 나머지 부원들은 이미 모여 있었다.


“어서와- 어레, 줄리아짱?”

“안녕, 레나.”

“여, 줄리아잖아. 밴드부실에는 무슨 일이야?”

“타로도 밴드부였어? 뭐, 신치가 밴드부라고 해서 대충 예상은 했지만서도.”

  줄리아는 카츠라기랑 사토와도 면식이 있었다. 둘은 작년 스이게츠제 실행위원이라 중등부였던 줄리아를 알고 있었고, 사실 내가 줄리아를 알게 된 것도 둘을 통해서였다. 


“신치가 곡 연습을 도와달래서 일단 따라오긴 했는데, 나 여기 있어도 괜찮은 거지?”

“대환영이야, 줄리아짱! 줄리아짱이 도와준다니까 든든하네!”

“그 정도까지야.”

  레이나는 기뻐 보였다. 인디밴드 활동을 했던 공감대가 있어서 서로 친한 걸까.


“어서 와, 줄리아. 타도코로 녀석을 잘 부탁해.”

“어이, 아들을 장가보내는 듯한 투로 말하지 말라고.”

“하?! 나도 그런 거 싫거든?!”

“다들 서로 알고 있는 거 같네. 다행이다. 후훗.”


  치하야는 우리의 만담을 보고 가볍게 웃었다. 나는 예전에 뮤 삼촌의 노트북에서 보았던 어색한 미소의 치하야를 떠올렸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굉장히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동기가 어찌 되었건, 이유가 무엇이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아이가 되찾은 저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킬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도쿄 오타구 765 프로덕션 ------ 프로듀서]


““하나, 둘, 셋!””

“아미 킥-!”

“마미 펀치-!”

“으헉?!”


  나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아미와 마미는 우쭐한 미소를 지으며 뒤로 넘어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희, 뭐하는 거야!”

“그치만 오빠. 일하는 시간에 졸면 안 된다구?”

“맞아 맞아! 그리고 이거! 오빠만 재밌는 거 읽고! 아미들도 이런 거 좋아하는데!”

“에...?”


  아미는 내 자리에 쌓여 있는 만화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물론 이 상황만 두고 본다면 근무 시간에 만화책을 읽다 잠든 불량 사원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건 엄연히 프로듀스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지난번에 치하야가 연기력 레슨으로 건O을 보고 싶다고 이야기했을 때, 자세한 사연을 들어보니 곡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로봇물을 보고 싶었다고 한다. 아마 밴드부에서 공연한다는 곡 때문이었겠지만, 다양한 방면을 공부해두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도 좋을 것 같았다. 꼭 밴드부의 일 때문이 아니더라도, 혹시 나중에 애니메이션 오프닝 곡을 부르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런 연유로 나는 신이치의 책장에 꽂혀 있던 ‘제노그라시아’의 코미컬라이즈 시리즈를 통째로 빌려 왔다. 녀석은 ‘어차피 잘 안 보니까 상관없어.’ 같은 반응이었지만, 나는 신이치가 아직도 제노그라시아에 나오는 주인공이 그려진 열쇠고리를 가지고 다닌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되도록 조심해서 보고 돌려줄 생각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아미, 마미. 너희도 제노그라시아 본 적 있어?”

“헤에, 취향이 올드 해. 오빠.”

“마미들, 그 시대에는 잘 걸어다니지도 못했을 걸.”


  아니, 애초에 내 취향이 아니라고... 게다가 신이치 세대란 말이야. 몇 년 차이도 안 날 텐데 오버하기는. 역시 요즘 미디어는 너무 빠르게 변했다. 뭐 하나가 유행하면 새로운 것들이 단기간에 쏟아져 나와서, 어떤 한 명작이 오랜 기간 남아있지를 못하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만큼 깊이 있는 작품성을 가진 것들이 줄어들은 것도 있겠지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조금 늙은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로봇이라면 좋아해!”

“악당으로부터 세계를 구한다! 지구용사 아미마미 크로-스!”


  아미와 마미는 활기가 넘쳐 보였다. 항상 지치지 않고 뛰노는 것도 능력일지도 모르겠다. 저 나이대의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아미와 마미는 특출나게 활발한 편이기도 했다. 


“아, 맞아. 아미, 마미. 그 세계를 구하는 부분 말인데.”

“응응. 오빠.”

“영웅이나 용사들은 뭘 위해서 싸운다고 생각해?”

“에, 그게 뭐야, 오빠. 당연히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라구?”

“맞아. 용사가 싸우지 않으면 스토리 진행이 안 되는걸!”


  ...역시 이 아이들에게 물어보기에는 너무 고차원적인 질문이었을까. 치하야가 악당들과 영웅들의 대립구도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해 오길래, 도움이 될까 해서 물어본 거였는데. 아무래도 아미와 마미에게 철학적인 질문은 무리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역시 싸우는 이유라면~”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겠지?”

“소중한, 사람?”

“응응! 왜왜, 오빠가 악당 로봇에게 잡혀갔다면, 용사 아미가 정의의 로봇을 타고 용감하게 구하러 가준다거나~”

“용사 아미를 돕기 위해 퓨어링 천사 마미가 마법을 걸어준다거나~”

“왜 내가 잡혀가는 역할인건데...”


  소중한 사람이라. 확실히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라는 커다란 명분도 분명 중요하지만, 요즘 나오는 몇몇 애니메이션도 그렇고, 게임도 그렇고, 보다 개인적인 동기에 의해서 움직이는 주인공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누군가,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누군가를 위해서 움직이는 쪽이 독자들에게 있어서 보다 감정이입이 잘 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일상적으로 나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프로듀서로서의 일은 형태로만 보면 어디까지나 단순한 직업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아이들을 지지해주고, 지원해주면서 소중한 관계를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그렇구나. 소중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 인거네.”

“응응. 그렇지......이? 치하야 언니, 언제 왔어?!”

“고난도 스킬인 클로킹을 배우다니! 치하야 언니, 역시 보통이 아닌 걸!”

“저기,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는데...” 


  아미, 마미와의 대화에 너무 열중한 탓이었을까, 나 역시 치하야가 와 있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치하야와 함께 돌아온 리츠코가 쌍둥이를 불렀다.


“아미, 마미! 인터뷰 가야지. 어서 따라 와!”

“에에... 한창 오빠랑 다이나믹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다녀와서 마저 해도 괜찮잖니. 자, 어서.”

“힝... 그럼 다녀올게, 오빠. 치하야 언니도.”

“응. 열심히 하고 와.”

“조심해서 다녀오렴. 아미, 마미.”

““아이아이 서-!””


  아미와 마미가 리츠코에게 끌려 문을 나서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무소에는 다시 정적이 감돌았다.


“언제 봐도 활발하네요. 아미랑 마미는.”

“그렇지? 가끔 피곤하긴 하지만, 그래도 활기찬 건 좋지.”

“프로듀서. 갑자기 로봇 이야기는 어쩌다 하시게 된 건가요? 이 만화책들도 그렇고...”

“아, 이거? 지난번에 치하야가 건O을 보고 싶다고 했던 게 신경 쓰였거든. 나도 이런 종류의 만화를 본지 꽤 돼서 기억이 잘 안 나더라고. 혹시 치하야에게 조언해줄 때 도움이 될까 해서 빌려 왔어.”

“저 때문에 굳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

“괜찮아. 보다 보니 꽤 흥미롭던걸. 그건 그렇고 치하야. 지난번에 물어 본 악당과 영웅들의 동기, 어느 정도 알아냈어?”

“정의에 어긋나더라도, 자신의 꿈과 야망을 향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 아무리 악당이라도, 각자의 철학이 있다는 걸 느꼈어요.”

“인상적이네. 그럼 영웅들은?”


  치하야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거겠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

“치하야, 소중한 사람들이 생겼나보구나.”

“ㄴ, 네? 그야 물론이죠! 사무소의 동료들, 부활동의 동료들, 그리고...”


  치하야는 잠시 당황하더니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ㅍ, 프로듀서, 도...”


  나는 말없이 뿌듯함을 가득 담아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기, 프로듀서? 그 표정은 뭔가요? 부끄러우니까 뭐라도 말해주세요!”

“아, 인생은 아름답네-”

“프로듀서? 갑자기 승천하는 듯한 말투는 뭐죠? 프로듀서?!” 


  지금이라면 승천해도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며, 나는 평화로운 저녁 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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