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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음의 저편. -제5장, arcadia-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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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28, 2020 22:58에 작성됨.


[도쿄도 고토구 오다이바 대형 쇼핑몰 앞 ------ 카츠라기 타로]


“오---다이바!”

“너무 들떠 있는 거 아니야?”

“오다이바는 평소에도 작정하고 와야 하는 걸. 너도 속으로는 기대하고 있잖아. 타도코로.”


  우리는 모두 들뜬 마음으로 역을 나섰다. 밴드부가 결성된 뒤로 합주 외에는 다 함께 무언가를 해본 적이 없으니까, 다들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차분한 분위기인 치하야도, 오늘만큼은 평소보다 밝은 모습이었다.


“저 건물, 볼 때마다 신기하게 생겼네. 방송국 건물이던가?”


  사토는 뒤쪽으로 보이는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커다란 구와 그에 연결된 기둥들이 철근 구조물과 같이 보이는 인상적인 건물이었다. 유명한 랜드마크이기도 하고, 미술 시간에도 건축 디자인 예시로 보았던 대형 방송국의 건물이었다.


“응응. 방송국이야. 그러고 보니 치하야, 방송국 건물이면 와 보지 않았어?”

“방송 출연이나 미팅이 있으면 가끔 와. 그래도 이렇게 주변을 둘러보는 건 처음이야. 일할 때는 관광은 하지 않으니까.”


  헤에, 역시 아이돌이구나. 치하야가 음악 방송에 나올 때면 레이나가 라인으로 알려주어서 한 번씩 보고 있지만, 역시 일상적으로 보다보니 가끔 치하야가 아이돌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도 있었다. 무엇보다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치하야와 무대 아래에서의 치하야는 꽤나 갭이 있었다. 무대에서나 연습 때나 노래를 시작하면 박력이 넘치지만, 그 외에는 차분하고 소극적인데다, 가끔 허술한 부분도 있어서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어느 쪽이던 치하야는 치하야니까 크게 상관은 없었지만, 그래도 역시 TV에서나 보던 아이돌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러면 첫 행선지는 굿즈 샵으로 하자. 프라모델이나 피규어가 많으니까 분위기 파악에 도움이 될 거야.”

“그러고 보니 프라모델 중에 곰돌이 모양을 본 것 같아.”

“아마 베O가이를 말하는 거 같은데? 레이나도 이참에 프라의 세계에 입문해보는 게 어때?” 

“정말? 라인프렌즈도 있으면 좋겠다!”


  우리는 우선 쇼핑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선은 프라모델이 많은 건O베이스 매장에서 대략적인 분위기를 파악할 계획이었다. 에스컬레이터로 한 층 한 층 올라가던 중, 사토가 게임 센터를 가리키며 우리를 불러 세웠다.


“잠깐 들렀다 가지 않을래? 철권이라던가, 태고라던가, 재밌을 것 같은데!”

“그럴까나. 어이, 카츠라기. 오랜만에 철권으로 승부, 어때?”


  타도코로는 나에게 승부를 걸어왔다. 중학생 시절의 우리는 가끔 동네 게임 센터에서 격투 게임으로 내기를 하고는 했다. 다만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게임 센터가 사라져버려서 해볼 일이 없었다. 오랜만에 추억이 떠오른 나는 타도코로의 승부 요청을 받아들였다.


“치하야, 혹시 태고의 달인 해본 적 있어?”

“아니. 게임 센터는 딱히 와본 적이 없어서, 처음이야.”

“치하야는 음악을 좋아하니까 리듬게임이 취향에 맞을지도 모르겠네. 남자애들은 바쁜 것 같으니까, 우리는 이쪽으로 가 볼까!”


  잠시 후, 타도코로와 나는 단판승부를 마치고(적당히 봐주다가 붕권 세 번으로 간단히 마무리했다) 레이나와 치하야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토는 한창 인형 뽑기를 즐기고 있길래 일단 잠깐 내버려두기로 했다. 태고의 달인 기계에 다다르자, 능숙하게 북을 치는 레이나가 눈에 들어왔다. 레이나는 드러머니까, 역시 리듬감으로 태고도 잘 하는 것 같았다. 바로 옆의 치하야도 처음 치고는 굉장히 능숙했다. 리듬게임은 음악적 재능도 중요한 요소인걸까. 나는 막 한 곡을 풀 콤보로 마무리한 치하야에게 말을 걸었다.


“헤에, 꽤나 능숙하네, 치하야. 처음이라고 하지 않았어?”

“생각보다 엄청 흥미로웠어. 화면에 나오는 동그란 비트를 보고 리듬을 찾아서 동작으로 재현해내는 과정을 거치는데, 마음속에서부터 음악을 끌어내서 연주로 표현해야 하거든. 리듬게임이란 거, 생각보다 즐겁네.”

“아, 그래...?”


  치하야는 난생 처음 해 본 태고의 달인에서 뭔가 심오한 걸 느낀 것 같지만, 일단 즐거워 보이니까 아무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게임 센터를 나선 우리는 원래 목적지였던 프라모델 매장으로 향했다. 매장을 둘러보면서 전시된 것들도 구경하고, 매장 스크린에서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클립이나 비치된 카탈로그 등을 찾아보았다. 나중에는 치하야가 작중에 나오는 악당들의 세계정복에 대한 야망과 행동들을 철학적으로 고찰하기 시작해서 잠시 당황했지만, 치하야가 얼마나 진지하게 이번 공연을 준비하고 싶어 하는지 알게 된 것 같아서 나쁘지만은 않았다.

  우리는 건O베이스를 충분히 둘러본 뒤, 다시 1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중간 정도에서 멈춰 서 있었을 때, 누군가가 치하야를 불렀다.


“어라, 치하야잖아.”

“미나세... 양?”

“치하야 씨, 안녕하세요!”

“타카츠키 양!”

“치하야, 야요이가 반가운 건 좋은데, 온도 차가 너무 큰 거 아니야?”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앞머리를 옆으로 넘긴 아가씨 타입이었고, 한 쪽은 양 갈래 머리를 한 밝은 타입이었다. 치하야가 우리는 전에 본 적 없는 환한 미소를 보이는 걸 보니 굉장히 친한 사이인 것 같았다. 혹시 아이돌 동료일까?


“어라? 혹시 미나세 이오리짱이랑 타카츠키 야요이짱?”

“음? 누구...?”

“맞네, 맞네! 반가워! 나, 둘이 낸 CD도 샀거든. 저기,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사인 부탁해도 될까?”

“어머, CD, 사주셔서 감사해요! 니히힛♬”

“꺄-! 분위기가 확 바뀌는 이오리짱도 귀여워!”

“아하하...”


  우와... 단숨에 분위기가 달라졌네. 역시 아이돌이란 대단한 거구나. 이 아이에 비하면 치하야의 갭은 갭으로 취급하기도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사토와 레이나가 사인을 받는 사이, 치하야는 타카츠키라고 했던 아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치하야 씨도 쇼핑하러 오신 건가요?”

“부활동 동료들이랑 견학을 나왔어. 타카츠키 양이랑 미나세 양은?”

“곧 쵸스케의 생일이라 생일 선물을 고르러 왔어요. 이오리짱이 고르는 걸 도와주기로 했거든요!”

“그, 그렇구나. 좋은 누나네. 타카츠키 양은...”


  그 순간, 치하야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 같다고 느꼈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의 치하야는 평소보다 밝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텐션이 낮아지는 것이 크게 느껴졌다. 분명 이 아이들과는 사이가 좋은 것 같은데, 어느 부분에서 기분이 상한 걸까.


“그러면 치하야, 우리는 이만 가 볼게. 다른 분들도, 다음에 또 뵈어요♪”

“나중에 사무소에서 봐요, 치하야 씨!”

“응, 타카츠키 양. 미나세 양도.”

“반가웠어, 이오리짱, 야요이짱!”


  우리는 치하야의 동료들과 헤어진 뒤 쇼핑몰을 빠져 나왔다. 그 후 인근의 과학관에서도 로봇 기술의 발전사나 이런저런 전시물들을 둘러보았지만, 전처럼 즐겁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쇼핑몰에 비해서는 즐길 거리가 좀 부족하기도 했고, 치하야의 텐션에 묘하게 신경을 쓴 것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사토 녀석은 뭐든 즐거워보였지만...

  그렇게 과학관 관람도 마치고 나자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다이바는 오타구에서 비교적 가까우니까, 돌아가는 시간에 여유가 있었다. 때문에 우리는 과학관 앞에서 저녁 식사를 어떻게 해결할지 논의하고 있었다.


“저기, 얘들아.”


  그 때였다. 아까부터 말 수가 줄어들었던 치하야가 입을 열었다.


“나는 먼저 돌아갈게. 오늘 이것저것 봤더니, 정리해보고 싶은 것도 있고, 아무래도 좀 피곤해서.”

“아, 그래? 그러면 조심해서 들어가, 치하야.”

“푹 쉬어! 오늘 즐거웠어, 치하야!”

“응, 그러면 나중에 보자.”


  치하야는 우리 쪽으로 손을 흔들다 이내 돌아서서 지하철 역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나는 그런 치하야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중간부터 조금 신경 쓰였지?”


  타도코로가 다가와 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 녀석도, 치하야의 텐션이 떨어진 것을 신경 쓰고 있었던 것 같았다. 역시, 타도코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동생의... 일일까?”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좀 전의 일만 두고 본다면 그럴 수도.”

“그래도 앞선 추측은 좋지 않으니까. 언젠가 우리에게 편하게 이야기해줄 날이 오겠지.”

“더 노력해야겠는걸. 기다려주자.”

“어-이, 카츠라기, 타도코로! 메뉴는 어떻게 할까? 레이나는 카레가 먹고 싶대-!”

“주변을 좀 더 찾아보자! 검색해볼게!”


  대화를 나누던 우리는, 사토의 부름에 돌아서서 둘이 있는 쪽으로 합류했다. 그러나 그 후 메뉴를 정할 때도, 식사를 할 때도. 타도코로와 나는 여전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 아이가 용기 내어 보여주는 밝음을, 우리가 앞으로도 지켜줄 수 있을까.



[도쿄도 오타구, 치하야의 자취방 ------ 키사라기 치하야]


  -삑, 삑삑삑, 삑삑삑삑-


  기계적으로 비밀번호를 누르자, 도어락이 모노톤의 기계음을 내며 열렸다. 소녀는 문을 열고 현관에 들어선 뒤 신발을 벗어 놓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언젠가부터 다녀왔습니다, 라는 인사말도 하지 않고 있다. 어차피 대답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풀지 않은 이삿짐 상자가 놓인 복도를 지나, 식기라고는 간단한 그릇 한 두개와 젓가락이 전부인 주방에 들어섰다. 소녀는 들고 있던 건O베이스 종이봉투를 내려놓고, 욕실로 향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온 소녀는 젓가락 하나를 꺼내 들고 종이봉투를 챙겨 거실에 앉았다. 그러고는 종이봉투에서 오는 길에 사온 편의점 도시락과 건O베이스에서 가져온 이런저런 카탈로그들을 꺼내 놓았다.

  소녀는 도시락을 뜯으며 ‘그래도 오늘은 즐거웠어.’하고 생각했다. 다시 종이봉투를 뒤지며, 소녀는 사진 한 장을 꺼내들었다. 스티커 사진 부스에서 즉석 인화로 뽑은 밴드부의 단체 사진이었다. 소녀는 사진을 잠시 바라본 뒤, 액자에 넣기 위해 오디오 기기 위에 엎어져 있던 액자를 세웠다.

  액자 속 사진에는, 초등학생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린 자신과, 지금은 높은 곳 저 어딘가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남동생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유우...”


  소녀는 쇼핑몰에서 만났던 동료를 떠올렸다. 형편은 넉넉하지 않지만 여러 동생들을 챙기고, 맏언니로서 씩씩하게 살아가는 그녀를. 소박하지만 소녀가 아는 그 누구보다 행복한 미소를 지어보이던 그녀를. 

  소녀는 이내 액자를 엎어 놓았다. 밴드의 사진은 일단 액자 옆에 놓았다. 

  그날도 소녀는 음악을 듣다 잠에 들었다.

  아직 미미한 온기가 남아있던 편의점 도시락은, 거의 다 남긴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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