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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무릇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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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11, 2018 01:03에 작성됨.

 소녀는 춤을 춘다. 누군가가 자신을 봐줬으면 하기에. 누군가가 자신을 데려갔으면 하기에, 누군가가 자신을 인정해줬으면 하기에.


 소녀는 꽃밭에서 춤을 춘다. 꽃들이 자신을 봐줬으면 하기에. 꽃들이 자신을 데려갔으면 하기에. 꽃들이 자신을 인정해줬으면 하기에.


 꽃밭은 말했다. 너는 누구도 봐주지 않는다고. 너는 누구도 데려가 주지 않는다고. 너는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다만 여기서 계속 춤을 추면 된다고.


 다만 네가 완전히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추면된다고.



 양복은 역시 젖으면 무겁다. 상의는 벗어 던지고 와이셔츠만 입었지만 눅눅한 기분은 가시지 않는다. 물을 짜낼 시간이 없어서 남은 물기가 운전석 시트와 스티어링을 적셔버리는 건 별수 없는 노릇이다. 완전히 젖은 구두에 의해 패드가 자칫하면 미끄러질 것 같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는 불 보듯 뻔하다. 뒤에서도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물기가 뒷좌석 시트를 적시기 시작했고, 그 위에 앝은 숨을 계속 반복해서 마치 아직 살아있다는 듯이 쉬고 있는 젖은 소녀는 계속 잠들어있다. 그런 나도 흠뻑 젖은 상태이고 충격의 여파는 희미하게 남아있지만 그런 건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당장은 뒷자리의 소녀의 상태가 제일 신경 쓰인다. 심폐소생을 완료했어도 과연 아무런 이상이 없는지는 확답할 수 없다. 그리고 난 처음으로 병원이 이렇게나 멀었었는지 난생처음 깨달았다. 내비에는 분명 10분 거리에 있다고 했지만, 나의 신체 신호는 더욱더 오랫동안 달린 것 같이 느껴져 왔다. 지금은 그저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빌 뿐이다. 

 "얘는..."

 강에서 나와 내가 구한 애가 누구였는지 알았을 때는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호타루."

 시라기쿠 호타루. 불행의 상징이자 역귀가 내가 구한 소녀였다. 안 그래도 하얀 피부는 빛이 없어서 그런건지, 막 물 밖으로 꺼내져서 그런건지 생기가 더욱 없어 보였고, 흠뻑 젖어버린 몸은 그녀를 더욱 축 늘어져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가슴 언저리가 움직이지 않는 거로 보아 호흡은 완전히 정지된 상태임이 확실했다. 상태를 보고 위험하고 판단한 나는 곧장 심폐소생 준비를 했다. 예전에 잠깐 배울 일이 있었는데 설마 실제로 써먹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디 보자... 이 부분이었나..."

 사실 제대로 기억날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막상 부딪쳐보니 머리가 새하얘지는 기분을 느껴본 적 있는가? 그때가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다만 대충 기억을 더듬어 떠올린 부분이 존재했기에 거기에 의지할 수는 있었다는 게 다행이었다.

 "하나, 둘, 셋..."

 혹시나 서너 번 정도로 될 거라고 순간 기대했지만 역시 그럴 리는 없다. 아무리 운이 좋은 사람이라도 절차는 무시 못 하니 말이다. 아니, 지금 여기에 관계된 순간부터 운은 끊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내심 재수 옴 붙은 날이라고 어쩔 수 없이 생각해버렸으니까.

 "...콜록!"

 한 4~50번 언저리에 도달했을 때 갑자기 몸이 들썩이더니 기침을 하면서 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손을 떼었지만 기침은 좀 더 지속하였다. 그 뒤에 충격 때문에 의식이 잡혔는지 눈이 서서히 떠졌다.

 "으... 여긴... 설마 지... 옥...?"

 내심 지옥이길 기대라도 한 걸까?

 "유감이네. 이승이야."

 "이... 승...?"

 "그래. 대체 왜 이런 짓을 했는지 묻고 싶은데?"

 그러나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잠깐 자신이 떨어진 곳을 찾으려고 했는지 시선을 돌리다가 다시 의식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대답을 듣는 건 나중 일이 될 것 같다.

 "아, 신고..."

 구하는 데 집중하느라 깜빡하고 있었다. 애초에 신고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곧바로 뛰어내려 버린 거니까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늦게나마 신고를 하기 위해 폰을 들었지만 화면은 암전된 채 주인인 나의 명령을 거부해버렸다. 다른 버튼을 눌러보거나 화면을 계속 두들겨 봐도 폰은 침묵을 지켰다. 물에 절여졌다 나왔으니 고장 난 건 당연하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방수가 되는 놈을 살 걸 그랬나?

 "하아..."

 별수 없다. 구급차를 부르지 못한다면 직접 병원에 데려가는 수밖에... 그렇게 결심한 나는 차를 세워놓은 곳까지 호타루를 업어서 태운 뒤에 곧바로 출발해서 여기까지 이른 것이다.

 "빨리 좀 가자..."

 얕아도 숨은 제대로 쉬고 있고 아까 의식을 한 번 되찾았으므로 한시름 놓았지만 역시 아직까진 불안하다. 수면에 부딪혔을 때 내상이 생겼을 수도 있고, 아직 제대로 물이 빠지지 않았을 수도 있고, 심폐소생 때 너무 세게 눌러서 갈비뼈 같은 게 부러졌을 수도 있다. 괜한 걱정이 오가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상대는 내 운을 무효화시키는 불행의 상징이다. 그게 그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으니까 이렇게 불안한 거겠지.

 "윽..."

 역시... 언제부턴가 몸에서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던가 싶더니 나도 어느 정도 다치긴 다친 모양이다. 스티어링에 힘을 줄 때마다 팔꿈치 위쪽부터 시작해 욱신거린다. 패드를 밟는 다리도 마찬가지고. 아직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하지만, 높은 곳에서 떨어진 데다 꽤 무리해서 힘을 썼으니 회복하기까진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휴가 내고 쉬기에는 아직 이르니 어떻게든 해볼 수밖에.

 

 그렇게 시간이 하염없이 흘렀다고 느껴졌을 때 나는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아직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호타루를 두 팔로 안아 올리고 바로 응급실 쪽으로 달려갔다. 팔은 더욱 욱신거리고 말라가던 몸이 다시 물기에 젖어 들어가는 걸 느끼면서 말이다. 내 생에 운동회를 빼고 이렇게까지 빨리 달렸던 적이 있었던가? 

 "무슨 일이시죠?"

 응급실에 들어서자마자 담당 의사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내게 달려왔다. 간호사들은 단박에 상황을 파악했는지 그에 맞춰 뭔가 준비를 하는 움직임이 빨라졌고 빈자리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물에 빠진 아이를 구했습니다. 심폐소생을 해서 숨은 돌아왔지만 의식은 여전히..."

 "이쪽으로 오시죠. 당신은 괜찮습니까?"

 "몸을 부딪쳐 아픈 것 빼고는 멀쩡한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말한 건 그것뿐이었지만 의사는 어느새 다 정리되었는지 호타루를 눕힐 자리를 안내하고 간호사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간호사들은 그녀를 침대에 눕힌 뒤에 재빨리 맥박을 짚고 동공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일련의 행동이 마치 기계처럼 정확히 파악하는 것 같이 느껴져서 내심 놀랐다.

 "왜 빠졌는지는 아십니까?"

 의사도 손을 바삐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내게 물어왔다.

 "제가 본 게 맞는다면 스스로 강에 떨어졌습니다."

 "몇 분 정도?"

 "약 2~3분 정도인 것 같습니다. 물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오기까지는."

 "서로 관계가 어떻게 되죠?"

 "아무 관련 없는 타인입니다. 하는 일 때문에 한 번 본적은 있지만요."

 "실례지만 직업이 어떻게 되시죠?"

 "아이돌 프로덕션의 프로듀서입니다."

 “당신이 구한 겁니까?”

 “네. 떨어진 걸 보자마자 바로 달려가 뛰어내렸죠. 그때 난간에 팔이랑 다리를 부딪치는 바람에 통증이 좀 있고요.”

 “그럼 신원은 알겠군요.”

 “네. 이름은 시라기쿠 호타루입니다.”

 "알겠습니다. 저쪽에 가면 부딪힌 곳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을 테니 가보세요. 당장은 검사 뒤에 상태를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저 아이가 여기 있다는 것은 비밀로 해주실 수 있나요?"

 그다지 이름을 날린 아이돌이 아니더라도 이런 사건이 밖으로 나가봤자 좋은 일은 하등 없다. 이건 나 같은 초짜라도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매스컴의 무서움은 다른 동료나 선배에게 들어서 익히 알고 있으니까.

 "보안 팀에 요청을 해두겠습니다."

 의사는 그렇게 말하며 간호사 한 명을 불러 이 사실을 전했다. 그리고 그녀는 곧장 응급실을 빠져나갔다. 이걸로 한시름 놓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일단 몸 상태를 봐야 하니 아까 의사가 가리킨 자리로 향했다.

 

 한밤중의 병원은 왠지 모르게 조용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외래환자가 많지 않아서 그런지 접수처에 사람은 한두 명밖에 없고 그나마 있는 다른 사람들은 여기에서 입원한 사람이나 그 가족들이 전부다. 어디를 가나 약의 냄새가 희미하게 물들여진 공기가 주위를 채우고 있었고 새하얀 천정과 형광등이 건물을 정갈하게 밝히고 있었다. 아니, 창백한 빛으로 비추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느낌이 든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역시 사람은 기분에 따라 주위가 달리 보인다는 게 허구는 아닌 것 같다. 그래도 계속된 혼란에서 벗어나 평온해지는 건 부정할 수 없으니 감사 인사 정도는 해두면 좋을 것 같다. 

 "그나저나 다행인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팔이랑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여봤다. 아직 욱신거리기는 하지만 약을 먹어서 조금은 나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엑스레이까지 찍어본 결과 다행히 골절 같은 건 없었다. 평소보다 갑작스럽게 많은 힘을 쓴 데다 난간에 부딪친 것과 높은 데서 떨어진 충격에 의한 타박상과 경직된 근육 때문이라고 설명을 들었다. 약이랑 물리치료를 병행하면 2주 후에 완치가 된다고 하니 일단은 한시름 놓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호타루에 대해선 좀 더 검사해야 알겠지만 일단 큰 외상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물을 너무 많이 들이마신 탓에 질식 직전까지 갔고, 저체온 증상까지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의식을 되찾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당장은 보호자와 담당 프로듀서와 연락이 되었기 때문에 내 역할은 일단 여기서 끝이다.  

 "후우..."

 모든 게 끝났다는 기분이 들자마자 몸에서 긴장이 쭉 빠져나가며 늘어져 버렸다. 이렇게까지 힘이 빠져버린 건 난생처음이다. 지금 이 기분을 간단히 말하자면... 그래, 마치 갓 빨아서 널어놓은 빨래 같은 기분이다. 

 "근데 이걸 어쩐다..."

 나는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폰을 집어 들며 고민에 잠겼다. 이렇게 물에 절여진 폰으로는 업무가 불가능하다. 수리를 맡기면 괜찮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수리가 되는 동안에는 혼선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업무용 폰은 따로 신청을 안 해놔서 수중에 없다. 경황이 없었던 건 알지만 그래도 앞일이 조금 걱정스러운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일 것이다. 당장은 선배한테서 손을 빌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느 정도 양해를 구하면 어떻게든 해결이 되겠지. 

 병원 밖을 나섰을 때 시계는 이제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원래라면 보호자의 얼굴을 보고 가야겠지만 아직 저녁도 먹지 않았고 내일 할 일도 있으니 언제까지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감사 인사 정도는 나중에 들어도 되고. 젖었던 옷은 이제 어느 정도 말라 아까보단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까 강바닥 같은 어두운 하늘이 지배하는 이 땅에선 방금 같은 긴박함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괜히 의식하게 되어버리는 건 별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어쩌면 이게 일상이란 걸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지극히 평범한 그런 것 말이다. 그리고 거기서 벗어났을 때 드는 참기 힘든 위화감 같은 것도. 그런 생각을 곱씹으면 나는 차 문을 열고 집으로 향하기 위해 올라탔다. 차 안의 공기에서 희미하게 물 내가 나는 건 기분 탓이 아니리라. 마침 뒷자리도 아직 젖어있는 상태이고. 그런 흔적만이 바깥의 일상의 냄새에서 그 사건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고 있었다. 이런 식의 자기주장은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이 아니기에 나는 병원을 빠져나가면서 창문을 열어 바깥공기가 흘러들어오게끔 하였다. 이런 기분은 왠지 익숙지가 않다. 이게 익숙해져도 될 일인지는 둘째치고서라도.


 "좋은 아침입니다."

 다음 날, 나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사무소에 출근했다. 팔의 통증은 아직 남아있지만 크게 문제 될 건 없었기에 아마 괜찮을 것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선배는 언제나 그랬듯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선배님. 죄송하지만 혹시 연락처 목록을 갖고 있습니까?"

 "있습니다만. 무슨 일로?"

 "폰에 물이 들어가서 망가져 버렸거든요. 수리는 맡겼지만 당장은 쓸 수 없어서요."

 "알겠습니다. 여기에 다 적혀있으니 참고하세요."

 선배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수첩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가 펼쳐준 페이지에는 내가 원했던 연락처들이 빠짐없이 적혀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다른 종이에 옮겨 적었다. 수리를 맡긴 곳에선 연락처나 다른 정보들의 복원은 쉽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참에 업무용 전화도 신청해놓을까도 생각 중이고. 하지만 오늘 촬영을 나가게 되면 어떻게 될지 조금 걱정스러운 건 사실이다.

 "그런데 폰에 물이라니... 어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 별일 없었습니다. 그저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강물에 빠뜨렸던 것뿐입니다."

 어제 있었던 사고에 대해선 일단 침묵을 지키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렇습니까. 앞으로는 조심해주세요. 여차할 때 연락할 수단이 없어지는 건 저희에겐 큰 사고니까요."

 "죄송합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선배는 내 대답에 만족한 듯이 예라고 짧게 대답한 후에 오늘 내가 처리해야 할 서류를 정리해준 뒤 로케현장으로 향하기 위해 사무소를 나섰다.

 "어디보자..."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책상에 앉았다.

 어젯밤의 일은 처음부터 없었던 일같이 느껴질 정도로 평소대로의 일상이 나를 굴리고 있었다. 기자들이 아직 냄새를 맡지 못했는지 연예 뉴스에는 언급조차 없고, 간간이 들리는 대화 속에서도 그에 관한 이야기는 오가지 않았다. 다만 내게 주어진 건 정말로, 진실로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나날이었다. 아무리 좁은 세계라지만 일언반구의 언급조차 없으면 아무도 사실을 모르고, 불미스러운 일들도 그저 지나가는 것에 나는 내심 안심할 수 있었지만 다시금 피부에 실감 나게 와 닿았다. 누군가의 생사가 오가던 시간이 있더라도, 누군가의 입으로 오르내리지 않는다면 그저 공허 속에서 외치는 메아리 같은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나의 입막음이 운 좋게 성공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뭔가 착잡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봐도 되는 것인가? 잘 풀렸다고 안심하기에는 역시 마음이 무겁다. 

 "음?"

 사내메일을 통해 내게 뭔가가 날아왔다. 총 두 통으로 하나는 부장에게 서였고 다른 하나는 전무였다. 부장이 보낸 메일은 어제 갔었던 현장에 대해서였다. 담당 책임자들이 부장에게 직접 메시지를 전달한 것을 그 곳에 있었던 관련자들에게 뿌린 것이었다. 내용을 대충 요약하자면 이번 수록은 완전히 없던 일이 되었다. 이유는 자세히 설명하기 곤란하여 간단히 전하자면 감독과 조연출, 담당 프로듀서가 불미스러운 일에 엮이게 되어 이 이상 진행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뉴스에서."

 오늘자 뉴스에 들은 것과 비슷한 걸 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몰라 인터넷에서 뉴스를 뒤적거리며 찾아보니 역시 낌새가 비슷한 기사가 하나 눈에 띄었다. 대충 보면 흔히 말하는 무명 아이돌에게 접대 비슷한 걸 받은 게 들킨 것이다. 본명은 적혀있지 않았지만 어제 상황과 방금 온 메일과 대조해보면 그 사람일 확률이 높다. 이런 게 들켰으니 어제 그 사단이 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 업계에서 일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는 어둠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일단 수록에 나갈 일 없이 사무실에 짱박히게 된 건 지금으로선 다행이지만, 누가 접대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런 일을 해야만 했던 아이만 불쌍한 꼴이 되고 말았다.

 "다음은 전무에게서인가."

 부장이 보낸 메일을 닫고 나는 바로 전무가 보낸 것을 열었다. 내용의 앞쪽은 어제 일에 대한 말이었는데 부장이 했던 말이랑 거의 비슷했다. 차이점이 있자면 그 사람들의 이름과 직함을 직접 거론하고 혐의가 확정될 때까지 그들의 명의로 된 일이나 관계된 일을 받지 말라는 소리였다. 만약 혐의가 사실이라고 판명되면 블랙리스트로 등록할 거라는 말은 덤이다. 그런 반응은 당연하다고 말해야겠지. 애초에 그 사람들이 다시 나올 수나 있을지 의문이지만. 그리고 진짜 내게 보낸 건 뒤편에 쓰여 있었다.

 "오디션을 도와달라고?'

 그 내용은 바로 한 달 뒤에 있을 공개 오디션에 대한 일거리였다. 물론 내가 심사대에 불려가는 건 아니고 단지 준비과정과 원서정리를 하고, 그리고 당일엔 옆에서 심사위원의 보조를 맞추며 연습생들을 인솔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었다. 뭐, 아직은 말단이니 이런저런 일에 불려가는 것쯤이야 예상은 했다. 그리 부담도 가지 않을 일이고 오디션의 전체과정을 참관하는 것은 좋은 경험이 될 테니 그리 손해도 아닐 테고.

 "일단 한다고 해둘까."

 나는 마음을 굳히고 전무에게 답장을 보냈다.

 

 "음?"

 오전 중에 처리해야 할 서류가 대충 정리되고 점심이 가까워지던 때에 사내메일을 통해 내게 뭔가가 날아왔다. 발신자는 부장이었다. 내용은 간단히 말하자면 할 얘기가 있으니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내게 뭔가 맡길 일이 있는 건지 어딘가 문제가 생겨서 부른 건지는 몰라도 이 시간대에 불린 건 처음이다. 내심 별일 아니기를 기대하면서 나는 사무실을 나섰다.

 "아, 왔군."

 방에 들어서자 부장이 나를 알아채고 이쪽으로 오라는 듯 손짓했다. 정돈이 잘 되어있고 창문 쪽에 이름 모를 분재가 놓여있는 방 안에는 부장 말고도 한 사람 더 있었다. 회사 내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다. 나는 간단히 묵례를 하고 부장의 맞은편에 앉았다.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하네. 여기 있는 이분이 자네를 만나고 싶어 해서 말이야."

 부장은 그렇게 말하며 같이 앉아있던 사람을 소개해주었다. 받아든 명함에는 이름과 함께 프로덕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직책은... 나와 같은 프로듀서였다. 

 "혹시 어제 일에 관련된 분이십니까?"

 "어제 일이라뇨?"

 "그... 강가에서 구해준 여자아이 말입니다. 사실 제가 걔 담당이거든요."

 "아."

 어제 보이지 않았던 그녀의 프로듀서가 바로 이 사람이었던 건가?

 "어제 일에 대해선 정말로 면목 없습니다. 저희 소속의 아이가 멋대로 그런..."

 "아닙니다. 시라기쿠 양이 무사하다면 전 그걸로 됐습니다."

 역시 이런 구도로 흘러가겠지. 이런 흐름이란 것은 대충 예상했다.

 "그건 그렇고 시라기쿠 양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오늘 낮에 의식은 되찾았습니다. 오후에 정밀검사를 받을 예정이지만 겉으로 봐선 크게 이상은 없다고 하더군요."

 "그렇습니까."

 그 말을 듣고 나는 내심 한시름 놓았다. 처음엔 정말로 어떻게 되어버리나 했다.

 "만약 치료비가 필요하시다면 저희가 부담하겠습니다. 여러분에게는 큰 폐를 끼쳐버렸으니까요."

 "거기까진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이제 그녀는 어떻게 되는 거죠?"

 "아마 당분간은 치료와 요양에 전념할 것 같습니다..."

 그저 경과를 말하는 것뿐이었지만 뒤에 말꼬리를 흐리는 게 뭔가 좀 걸렸다.

 "뭐, 그런 일도 겪었으니까요. 당분간 쉬게 해두는 것도 좋겠죠."

 부장이 살짝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의 성격상 이런 불미스러운 이야기는 별로 듣고 싶지 않을 것이다.

 "부장님께선 알고 계셨습니까?"

 "조금 전에 말이지. 그나저나 그런 큰일이 자네에게 일어날 줄이야. 말하지 않은 이유는 알겠다만 그래도 귀띔은 해줬으면 병가 정도는 내줄 수 있는데 말이지."

 "배려는 감사합니다만 일에 지장이 생길 정도는 아니니 괜찮습니다.

 "그런가. 나중에라도 뭔가 일이 생긴다면 말해주게."

 "알겠습니다."

 내 대답에 부장은 만족하듯이 미소를 짓고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점심때도 다 됐고 하니 슬슬 나가볼까? 자네들은 어떻게 할 텐가?"

 "아,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른 일이 있어서요."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알겠네. 그럼 먼저 가보게나."

 부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뒤에 방을 나섰다. 살짝 잰걸음인 걸 보니 급한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부장은 그 모습을 끝까지 보고나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저 사람 어때 보이는가?"

 "음... 평범해 보입니다만."

 "그렇군... 조만간..."

 "네?"

 끝 부분이 잘 안 들렸다.

 "아무것도 아닐세. 그러고 보니 자네 다음 달에 있을 오디션 스태프로 일하러 가던가?"

 "네, 일단은."

 "그러면 보러 오는 연습생들을 유심히 봐두게. 비록 보조하러 가는 것이지만 자네에게도 꼭 필요할 걸세."

 "...알겠습니다."

 내 대답에 만족스러운 듯이 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서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내가 그 일을 맡게 된 건 저분의 입김이 큰 것 같다. 기대를 받는 건 좋은 일이지만 이게 내 노력의 결과물인지는 잘 모르겠다.

 "저... 혹시 이번 일은 상부에 보고할 겁니까?"

 "음? 이건 내 선에서 끝난걸세. 자네가 매스컴에 타지 않았다면 굳이 위까지 올릴 필요는 없겠지."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그때 병원에 말해두길 잘했다. 매스컴은 여간 성가신 존재가 아니니. 지금까지 냄새를 맡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기적일 따름이다... 아니면 이미 맡고서 밑 작업을 하고 있거나.

 

 나는 밥을 먹을 때는 혼자 먹는 걸 선호한다. 이유 같은 걸 굳이 얘기하자면 조용하고 다른 걸 생각할 여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혼자 밥 먹는 거로 유명한 만화가 있지 않은가? 아마 나도 거기에 나오는 이유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비록 맛있는 음식에 대한 감탄이 별로 좋지 않더라도 말이다.

 "음... 이번 건 나쁘지 않네."

 오늘의 점심은 근처 편의점에서 사 온 샌드위치다. 점심은 가볍게 먹으면 된다는 주의이기에 어지간하면 간단히 때울만한 걸 찾는다. 주로 이런 샌드위치라던가 빵이라던가, 간단한 백반 정식 같은 것 말이다. 편의점 도시락은 너무 배부르기에 사양이다. 딱 약간의 출출함이 있는 게 좋다. 다이어트를 위해서가 아닌, 그냥 나의 버릇 같은 거다.

 "여기 아메리카노 한 잔 나왔습니다."

 나는 카페 메이드가 가져온 커피를 간단히 감사인사를 하고서 받았다. 어째서 회사 내부에 메이드 카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도 레슨의 일환이라면... 별수 없겠지. 워낙에 개성 넘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니까.

 카페의 풍경은 여느 곳과 그다지 다를 바 없다. 안에서는 커피의 향이 풍기고 메이드 복을 입은 점원이 서빙하고, 외부의 목제 탁자와 파라솔은 뭔가 이국적인 분위기가 풍긴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하거나 옆에 아직 김이 솟아오르는 커피를 둔 채 밀린 업무에 몰두하거나 한다.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여기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이돌과 프로듀서이며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우사밍 성인이 명물인, 만약 일반인이 본다면 감탄사를 내지르며 포토타임을 가질 그런 곳이란 거. 나의 점심 풍경은 언제나 이렇게 똑같다. 지루할지도 모르지만 어찌 보면 특별하다고도 볼 수 있다. 나로서는 그 편이 가장 좋다. 

 "...네, 얘기는 해두었습니다."

 건너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나와 부장님과 같이 있던 그 프로듀서다. 조금 거리가 있어서 완벽하진 않지만, 어렴풋이 내용은 엿들을 수 있었다.

 "어쩔 수 없... 이것도 모두를 위해서니까요... 현재로선 더는... 네... 네... 그럼 수속은 제가 밟겠습니다... 악연은 깨끗하게 끝내야죠..."

 내용은 생각보다 의미심장했지만 말투를 보면 조금 서두르는 것 같았다. 비록 저쪽에선 내가 보이지 않을 위치이긴 하지만 내 시선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집중하고 있다는 것도.

 "알겠습니다. 그럼 좀 이따 뵈도록 하죠."

 내가 들은 건 거의 막판이었는지 얼마 안 가 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마치 큰일이 끝난 듯이 몸에서 긴장이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가끔 보이는 모습이라 딱히 흥미가 생기거나 한 건 아니지만...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든다.

 전화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마시던 커피를 비우고 자리를 떴다. 그가 나간 길은 내가 정면에서 보는 시선이었기에 둘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아까 그 느낌을 제외하면 마주치더라도 딱히 할 이야기가 없다. 그런 어색한 분위기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니 이 편이 훨씬 낫다고 볼 수 있겠지. 기껏 사 온 샌드위치가 맛이 없어진다면 아깝지 아니한가? 간단히 때운다고는 하지만 맛이란 건 생각보다 중요한 요소다. 아직은 씁쓸한 커피의 맛을 중화시키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릴 때던 어른이 되던 쓴맛은 쓴맛이다. 절대 익숙해질 일은 없을 정도로. 어쩌면 익숙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샌드위치를 다 먹은 뒤에 나는 근처에 있는 공원에 터벅터벅 걸어 도착했다. 회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이곳은 사내 휴게실 외에 생각 없이 푹 쉴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다. 온갖 서류작업에 치이고 선배의 영업에 따라가다 보면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일 때가 많아 쉬는 시간이 부족해질 때가 있기 마련이기에, 이런 곳이 하나둘 쯤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안거리인지 모를 사람은 모를 것이다. 골든위크 직전의 날씨는 정말로 맑고 춥지도 덥지도 않은 기온이라 내게는 딱 맞는 날이다. 이번에는 내내 맑다고 일기예보에서 그랬으니 기대를 걸어 봐도 좋을 것 같다. 

 "이런 곳에서도 촬영을 하는구나."

 내가 앉은 벤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잡지촬영이 시작되고 있었다. 누가 주인공인지는 스태프들에 의해 가려져 보이지는 않지만, 이 공원에서 뭔가를 찍는 건 처음 보기에 조금 신기한 풍경이었다. 여기가 배경으로 쓰기에 그렇게 적당한 곳이었나? 평범한 공원 배경을 원한다면 또 모를까. 덕분에 지나가던 사람들도 놀라거나 신기해하며 한두 명씩 잠깐 눈을 흘깃하거나 조금 떨어져서 구경하거나 했다. 그나마 다행이게도 그들 중 카메라를 들거나 한 건 없었다. 분명 사전에 제지하거나 했겠지.

 "오? 누군가 했더니...!"

 촬영장 쪽에서 누가 나를 알아보고 빠르게 뛰어왔다. 분명 선배가 맡았었던 아이돌 중 한 명이었는데...

 "아, 혼다. 오늘 네가 촬영하는 거였어?"

 그래, 갈색빛 단발에 저렇게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는 아이돌은 내가 아는 한 혼다 미오 밖에 없다.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대해주기에 내가 많이 얘기를 나눠본 몇 안 되는 아이돌 중 하나다.

 "나랑 아짱이랑 같이. 감독님이 산책하는 느낌의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셔서."

 "아아 그래서..."

 그 둘의 조합이면 그럴 만하다.

 "근데 프로듀서는 여기서 뭐 해? 산책?"

 "뭐... 그런 셈이지. 점심 먹고 소화할 겸."

 "혹시 오늘도 샌드위치였어?"

 "그거밖에 더 있나."

 "헤에... 역시 꽤 적게 먹는구나."

 "원래 점심은 그렇게 먹어."

 "그럼 아침이나 저녁은?"

 "아침은 냉장고에서 대충 꺼내먹거나 과일로 때우지. 저녁은 간단한 거 만들어 먹거나, 라면 아니면 도시락. 가끔 외식 정도이려나."

 내가 생각해도 너무 적당히 때우는 것 같지만 요리는 잘 못 하니 어쩔 수 없다.

 "그런 거로 괜찮아? 좀 더 잘 챙겨 먹어야 건강에도 좋다고."

 "지금까지 탈이 나거나 하진 않았으니까 괜찮겠지. 원래 이렇게 먹고도 잘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법이라고."

 "그렇다면 상관없겠지만. 그나저나 담당 아이돌은 정해졌어?"

 "아직."

 "그래? 이상하네... 여기에 온 지 꽤 된 것 같은데. 미다스의 손도 거기까진 못 미치는 거 아냐?"

 "모든 건 다 때가 있는 법이야. 그때가 되면 알아서 찾아오겠지 뭐."

 적어도 내가 아는 한 말이다. 예외는 있을지 몰라도.

 "그래도 혹시 필요하다면 이 미오짱을 불러줘! 어쩌면 내가 칠석의 까치가 될지도 모른다고?"

 "칠석의 까치... 그럼 그땐 머리를 살포시 지르밟아주면 되는 건가?"

 "아... 그건 좀 그럴지도. 그럼 큐피드가 되어 주는 건 어때?"

 "어느 쪽이든 아이돌이 아닌 사랑과 관련된 족속인 것 같은데..."

 돌아온 대답은 물론 그런 세세한 건 신경 쓰지 말고라는 말이었다. 예상한 대답이긴 했지만 역시 이땐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게 낫겠지.

 "그럼 그때가 되면 한 번 부탁해 볼까나?"

 "오! 맡겨만 두라고!"

 그럴 때가 정말로 올지 안 올지는 둘째 치더라도 저 자신감 같은 건 어디서 나오는지, 나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왠지 대놓고 물어봐도 대답해줄 것 같기도 하니 말이다.

 화보나 앨범촬영의 참관은 생각보다 자주 있는 편이다. 이 세계에서 홍보라는 것은 삼시 세끼 챙겨 먹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기에 아이돌의 얼굴은 그만큼 많이 팔려나간다. 더욱이 홍보에 박차를 가해야 하는 물오른 신인이나 신곡을 본격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하는 경우에는 스케줄에서 촬영이 없는 날이 없을 정도니까. 물론 유명해졌다고 해서 덜하거나 하진 않지만. 이번에는 우연이긴 하지만 시간은 아직 남아있고 오후에 검토해야 하는 자료의 양도 많진 않아 공원에서의 촬영에 참관해보기로 결정했다. 혼다의 힘을 빌려서 잠시 동안이지만 선배의 허락은 맡아뒀다. 물론 적다고 보긴 힘들기에 돌아가면 정리를 빡세게 해야 하겠지만...

 "자, 여기 보시고요!"

 감독의 능숙한 주문과 그에 따른 피사체의 행동은 물 흐르듯이 흘러가서 마치 베테랑의 관록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보다 어린데 베테랑의 관록이라니 조금 어감이 이상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살아온 세계가 지금까진 달랐다고 본다면 이치에 맞는다고 볼 수 있겠지. 사람이란 건 그런 존재이니까.

 "오케이! 그럼 이번엔 약간 위로 구도를 올려서 찍을 테니 자세 좀 취해주세요!"

 뭔가 애매하고 추상적인 주문이지만 역시 한 폭의 그림이 되는 느낌의 사진이 나왔다. 보통 수십장 씩 찍어서 잡지나 화보에 낼만한 것을 몇 장만 추슬러내기는 하지만 이건 내가 봐도 당장 쓸 수 있을 것 같다. 감독의 의중은 어떨지 몰라도.

 "당신, 처음 보는 얼굴인데 혹시 신인 프로듀서인가?"

 감독이 갑자기 이쪽을 보며 말했다.

 "아, 네. 담당 아이돌은 아직 없습니다만."

 "그렇군. 그럼 잠깐 이쪽으로 와보게."

 그리 말하며 내게 손짓을 하기에 궁금해서라도 한 번 가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그가 보라고 한 건 물론 이번 촬영을 통해 얻은 사진들이다. 생각보다 가공이 안 된 날 것인지라 신기하다는 감각이 내 주위를 계속 맴돌았다. 그리고 어째 질문이 대충 예상된다. 

 "당신이 보기엔 어떤가?"

 "어느 것도 다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런가? 그럼 이 중에서 표지로 쓸만한 한 장만 골라봐봐. 의견을 좀 듣고 싶군."

 표지라... 잡지는 일을 익히기 위해 읽고 있기는 하지만 그리 빠삭하진 않다. 뭔가 비스름하게 적당한 걸 고르면 되려나? 

 "음... 이 사진이면 어떨까요?"

 내가 고른 건 큰 나무 하나와 주변 경관을 뒷배경으로 두고, 둘이 손을 맞잡고 밀착시키며 미소와 함께 정면을 바라보는 샷이었다. 무난하기도 하고 사이좋기로 유명한 저 두 사람이면 이런 구도가 개인적으로 어울린다. 왜 이 사진을 골랐는지에 대한 질문은 이 생각과 함께 받아쳤다.

 "이 정도면 확실히 무난하긴 하지. 좋아, 고맙네."

 감독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촬영에 들어갔다. 아따 본 양으로 봐서 표지뿐만 아니라 잡지 한 파트를 전부 차지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주제가 어떤 것인지는 말 안 해줄 것 같고... 조금만 더 지켜보자.

 촬영을 견학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사진 하나를 위해 온갖 담당과 인물들이 모여드는 건 꽤나 신기한 광경이다. 대체로 괜찮은 조명과 비싼 카메라 하나로 해결되는 줄 알지만 여기에 와보면 분명 생각을 고쳐먹을 것이다. 데뷔 직전이나 연습생의 사진을 찍을 때도 허투로 찍는 법이 없다. 메이크업을 확실히 하고 의상도 맞추며, 포즈설정과 자세교정은 또 다른 요소다. 우리가 아는 조명과 촬영 그 자체는 이 이후에나 진행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곳이 바로 프로의 세계라는 걸 실감하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 자체가 아직 내가 초짜라는 걸 증명하는 걸지도 몰라도 누구나 이럴 때는 있는 법 아니겠는가?

 "좋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이동해서 촬영하겠습니다."

 감독의 말과 함께 이 장소에서의 일은 일단락되었다. 스태프들은 일사천리로 장비이동을 위해 정리하기 시작했고 피사체가 되었던 아이돌 둘은 담당 프로듀서에게로 갔다. 이동하는 것까지 따라가려면 역시 시간이 빠삭해지므로 오늘은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럼 전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가기 전에 먼저 감독이랑 선배 프로듀서에게 인사는 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런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당신 담당 아이돌을 촬영했으면 좋겠군."

 "아직 담당은 없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좋아. 거기! 조명은 조심히 들어 옮겨!"

 감독은 그리 말하며 일어서서 슬슬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잠시 촬영은 쉬는 중이지만 이 사람들의 휴식은 아직 멀었다. 자, 그럼 다음은 선배님들에게...

 "오? 이거이거 미다스이 손 아닌가? 여긴 어쩐 일이야?"

 나를 먼저 알아본 건 타카모리의 담당인 선배였다. 다른 분은 전화하느라 바빠서 목례로 그쳤다.

 "점심을 해결하고 잠시 돌아다니는 중이었습니다. 우연히 혼다랑 얘기해서 촬영하는 걸 알았고요."

 "아아... 시간은 괜찮았나봐?"

 "잠시 허락은 맡아놔서 괜찮습니다. 그것도 지금 돌아가 봐야 하지만요."

 "그거 다행이군. 혹시 돌아가는 길에 이걸 부장님에게 전해줄 수 있어? 딱히 급한 건 아닌데 오늘은 아무래도 사무소로 돌아가기엔 글러가지고."

 그는 그렇게 말하며 책상 위에 있던 서류 하나를 내게 건네주었다. 두툼한 것이 뭐가 들었나 궁금해진다.

 "알겠습니다. 부장님께 직접 전해드리면 되는 거죠?"

 "그래. 휴우, 살았군... 나중에 시간 되면 한턱낼게."

 "그럼 사양 않고 받아두도록 하죠."

 보답은 착실히 받아두어야지.

 "타카모리 씨는요? 선배님 쪽으로 간 줄 알았는데."

 "음? 아, 잠시 저쪽에 불려 갔어. 곧 올 거야."

 "그렇습니까."

 "왜? 너 혹시 아이코 짱 보려고 온 거야?"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래애? 말해두겠는데 아이코 짱은 내 담당이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저렇게까지 강조하는 걸 보니 나름의 자부심 같은 게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장난치는 걸지도.

 "아아~ 나도 너처럼 미다스의 손이 있었으면."

 "왜 그러시죠?"

 "요새 일 처리가 잘 안돼서 말이야. 전무님이 무슨 바람이 부신 건지 내가 낸 기획은 다 꼬투리 잡고 빠구먹이더라고? 그야 완벽한 기획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유도리 있게 봐줄 수 있잖아?"

 "아... 네..."

 이럴 땐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들어주는 게 나으려나?

 "이래서야 다음 기획 자체가 어떻게 될지 걱정이다. 일단 다시 고치고 있지만 통과할지는... 그러니 조금만 기를 나눠주면 안 되냐?"

 "그런 건 요리타 씨나 타카후지 씨에게 부탁하시면..."

 "그래도 어떻게 아이돌에게 염치없이 비냐?"

 내 염치는 얻다 팔아먹었는지.

 "프로듀서 씨~"

 멀리서 타카모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었지만, 부른 목소리도 그렇고 오는 속도도 그렇고 뭔가 슬로모션 같은 게 깔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게 소위 말하는 유루후와 오라란 것일까...

 "아이코 짱! 저쪽에서 뭐래?"

 "다음에는 단독 샷을 찍는 거로 바뀌었대요.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볼게요."

 "괜찮아! 너는 내가 보증하는 최고의 아이돌이야! 잘할 수 있고말고!"

 뭔가 텐션이 바뀌었다.

 "후후, 프로듀서 씨도 참... 아, 안녕하세요. 타카모리 아이코라고 합니다."

 그녀가 내 쪽을 향해 인사를 건네 왔다. 서로 초면이라 그런지 이름도 대면서 말이다.

 "일 수고하셨습니다. 담당 프로듀서께는 언제나 신세 지고 있습니다."

 너무 딱딱하게 답해버렸다고 생각했을 땐 이미 늦었다. 역시 이런 것도 무의식중에 배워버린 건가...

 "아니에요. 저야말로... 오늘은 어쩐 일이신가요?"

 "촬영 견학차 왔습니다. 아직 신입이라서요."

 "그러셨군요."

 그리 말하며 살며시 미소를 짓는 저 모습을 보니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이 오라는 남다르다.

 "신입, 얼굴 풀어진 것 같은데?"

 타카모리 옆에 있던 선배가 태클을 걸어왔다. 딱 타이밍 좋게 말을 끊는다.

 "그러진 않았습니다만."

 "흐응... 됐어, 숨길 필요 없어. 솔직히 아이코 짱을 보고 풀어지지 않을 사람은 없으니까."

 그건... 인정해야겠다. 아니, 인정하지 않고선 못 배기겠다. 그래야 저 팔불출 선배를 이해할 테니까.

 "그나저나 시간 괜찮아?"

 "네?"

 선배의 말에 시계를 들여다보니 예상보다 시간이 무진장 지나버렸다. 늦진 않겠지만 꽤 아슬아슬한 라인이다.

 "우왓! 벌써 이런 시간...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수고해! 아까 서류 잊지 말고."

 "조심히 가세요."

 후방에서 들려오는 배웅을 뒤로하고 나는 잰걸음으로 사무소를 향했다. 공원에는 정오를 한참 지나 따뜻해져서 그런지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오거나 조깅같은 걸 하는 사람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봄의 기운이 절정을 이루는 4월 말의 나날은 곧 있을 골든 위크의 준비라도 하듯이 포근해지면서 사람들을 밖으로 끌어내려 하고 있다. 사람들은 기꺼이 그 낚싯바늘에 걸려 위로 올라가려 하고 있고 말이다. 봄이란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가장 강력한 마약 중 하나일지도.

 사무실에 도착해보니 선배는 어딘가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손에는 두툼한 노트북 가방과 스케줄을 적은 수첩을 들면서 여러 가지를 마지막으로 체크하는 듯 했다.

 "지금 막 돌아왔습니다. 어디 가십니까?"

 "아, 버라이어티 방송에 관해서 저쪽 PD와 상담하러 가야 해서요. 오늘은 사무실에 늦게 도착할 것 같으니 할 일 끝나면 먼저 가셔도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일 열심히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럼..." 

 그 말을 끝으로 선배는 사무실 밖을 나섰다. 평소에도 바삐 움직이는 편이지만 오늘은 뭔가 좀 더 일이 많아진 듯하다. 그만큼 인정받았다는 소리겠지.

 "후우... 그럼 먼저 이걸 전해주러..."

 손에 서류의 감촉이 느껴지며 잠시 그 기억을 상기시켜주었다. 그 사람 말대로라면 나중에 내거랑 한꺼번에 전해줘도 되겠지만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 생각났을 때 바로 해두는 게 좋은 법이다.

 각자 사무실이 있는 구조는 남들의 직접적인 간섭을 덜 받는다는 큰 장점이 있지만, 뭔가를 올리러 갈 때 직접 걸어서 상급자의 방으로 가야하는 불편함이 존재한다.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무조건 각 사무실이 있는 게 좋은 거 아니냐며 핀잔을 듣지만 솔직히 일반적인 경우를 경험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전에 일했던 곳도 개인 사무실 하나를 제공받았고 말이다. 비록 국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는 대기업이었긴 해도 나의 경우에는 아마 파격조건이었다고 생각한다.

 "음? 안 계시나..."

 부장실에 도착해 노크를 해보았지만 반응이 없었다. 아직 돌아오시지 않은 걸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전화도 없으니 연락을 취할 수도 없고... 일단은 돌아갔다가 나중에 찾아와볼까?

 "너는... 여기엔 어쩐 일이지?"

 옆에서 갑자기 낮은 톤의 여성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

 "아, 전무님. 그... 이 서류를 부장님께 전해드려야 해서요."

 그야 이 아이돌 사업부의 총괄인 전무니 기억해야만 할 수밖에. 이렇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 볼일을 말해야 한다.

 "안의 내용은?"

 "그게 다른 선배님의 부탁을 받고 가져온 것이라 내용물은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잠시 내가 볼 수 있을까?"

 "네, 여기 있습니다."

 나는 그리 말하며 전무에게 서류를 건넸다. 그러자 그녀는 능숙하게 내용물을 꺼내 눈동자를 굴리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저 뚫어지는 듯한 시선 때문에 묘하게 긴장되어버린다. 일종의 압박감 같은 걸지도... 

 "이건 내가 처리하도록 하지. 그래도 되겠지?"

 "아... 딱히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직접 한다는 걸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선배에겐 죄송하지만 잘 넘어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군, 그럼 그렇게 알도록. 그리고 이건 자네에게 받아둬야 할 서류네. 비록 보조이긴 하지만 기본적인 사항은 따로 적혀있으니 알아두도록."

 "그 오디션에 관한 건입니까? 숙지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 서류를 받아들었다. 두께는 좀 있어 보인다.

 "그럼 난 먼저 가도록 하지. 앞으로도 열심히 해주게."

 그 말을 끝으로 전무는 부장실 입구를 뒤로했다. 


 서류작업이란 건 생각보다 양이 많을 때도 있지만 한참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장점도 있다. 뭔가에 집중해서 한다는 건 그만큼 그 사람의 생체시계를 정지시키는 역할도 맡는다고 생각한다. 그 증거는 바로 이곳에 있다. 서류작업을 다 끝냈더니 어느새 해가 져버린 사무실에 앉아있는 자신이야말로 그 증거다. 이런 일만으로 하루를 꼴딱 지새우다니... 선배는 지금까지 어떻게 혼자 다 해왔냐는 의문이 드는 건 당연하다고 봐야겠지. 게다가 나머지 절반은 선배의 몫으로서 남아있다. 로케와 영업을 뛰고, 장소를 옮겨 다니며 아이돌들을 케어하는 시간을 따지자면 도저히 빠르게 끝낼 수 있는 양이 아니다. 거의 초인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영업 뛰는 세일즈맨의 감각일까나?

 "후아아... 암..."

 온몸이 갑자기 뻐근해지는 바람에 난 반사적으로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관절 마디마디에 나오는 소리는 학창시절에도 경험한 적이 없었는데... 나도 슬슬 몸이 낡아가고 있는 건가?

 "아니, 아직 20대 후반인데 이런 소릴 하면..."

 벌써부터 늙은이가 되는 건 사양이다. 정말 진지하게 운동을 고려해봐야겠다. 계속 앉아있다간 몸이 그대로 굳어버릴 것 같으니까.

 "그럼 가볼까."

 본격적인 퇴근 전에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가져야겠다. 커피는 아까 마셨으니까 적당히 달달한 음료면 충분하겠지. 카페인을 너무 자주 몸에 받아들이는 것도 그리 좋은 건 아닐 테니까.

 적당히 시원한 바깥바람은 실내에서 찌든 공기를 머금은 나를 덮쳐 정화해가기 시작했다. 폐에서 교환되는 산소의 분자 하나하나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기분이 좋은 바람이었고 그에 따라오는 아주 옅은 꽃의 향기는 낮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카페까지 가는 길은 그리 멀진 않지만 왠지 이 걸음이 좀 더 길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정도의 욕심은 구두쇠 신이라도 좀 봐주지 않을까? 

 "여기 초코 스무디 하나요."

 나는 내 쪽으로 다가오는 점원에게 음료 하나를 주문한 뒤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앉았다. 해가 완전히 떨어졌지만 야외 테이블에는 드문드문 사람이 저마다 커피나 음료를 만끽하고 있었다. 조명은 너무 눈부시지 않은 밝기로 주위를 채워주고 있어서 야외임에도 불구하고 실내와 다를 바 없는 분위기를 유지시키고 있었다. 저녁의 야외 테이블은 오늘이 처음이었기에 이 풍경에 내심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이걸 누가 인테리어 했는지 몰라도 상 한 번 받을 자격은 충분할 것 같다. 

 "역시 그래도 하늘은 그냥 까맣네."

 하긴... 도심의 하늘은 기대해선 안 될 일이다. 드문드문 보이는 구름을 제외하면 문명의 이기에 의해 어중간하게 어두운 밤하늘에선 별 따위 보일 리가 없다. 달... 정도면 모르겠다만.

 "여기 초코 스무디 나왔습니다."

 점원이 그렇게 말하며 연한 초코의 색을 띤 유리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거기에 하얀 접시에 담긴 허니토스트가 어느새 딸려왔다.

 "이건 주문한 적이..."

 "서비스에요. 늦게까지 수고가 많으시니까요."

 "아,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잘 구워진 식빵 위에 눈처럼 하얀 생크림, 그리고 진한 금색을 띠고 있는 꿀이 그 위부터 흘러내려간 모습은 보기만 해도 군침을 자아내는 수준이다. 이런 운만큼은 놓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음!"

 맛은 역시 기대했던 대로다. 달고, 달고, 그냥 달다. 그런 단순함이 내게 있어선 오히려 장점이다. 단 것에는 다른 게 들어갈 필요가 없다. 오로지 달기만하다면 장땡인 것이다. 특히 혀를 완전히 멜트다운시켜버릴 그런 자극적인 달콤함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이 정도라면 재충전으로서는 충분하고도 남는다고 말할 수 있다. 어차피 저녁도 집에서 대충 때울 거, 칼로리는 딱히 상관없겠지.

 "그러고 보니 집 앞에 디저트 카페가 새로 생긴다고 했었나..."

 학교 다닐 적엔 돈이 되면 그런 가게를 찾아서 여러 가지를 맛보는 게 하나의 취미였었다. 졸업 이후로는 그렇게까지 자주 찾아다니진 않게 되었지만 이렇게 집 가까이에 생긴다면 한 번 가보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다. 조만간 날을 잡아봐야지. 아무리 골든 위크에도 일이 있다고는 하지만 하루 이틀도 쉬지 못하랴? 이 회사가 그렇게까지 악덕이 아님을 한 번 믿어보자. 어쩌면 담당이 없는 내게는 할 일이 없을 수도 있을 가능성이 존재할지도 모르니까.


 집으로 가는 길은 어제와는 별로 다를 바 없다. 내게서 어떤 일이 일어나건 간에 세상과 일상은 별 불평이나 변화 없이 굴러간다. 뻔하다면 뻔한 일이고, 그런 걸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멍하니 운전을 하다보면 여러 상념이 떠오르는 법이다. 예를 들면 변화 없는 일상의 기묘한 변화의 감각이란 게 말이다. 어차피 나 혼자만의 생각이고 잡념일지고 모르지만 세상 보는 눈이란 본래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오늘 저녁은... 그냥 라면으로 때워야겠다."

 요컨대 아까만 해도 편의점 도시락으로 때우려던 생각이 이리 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같은 즉석식품이라도 영양도 다르고 맛도 다르다. 물론 가격대도 다르고. 같은 일상이라도 이런 약간의 변화란 게 있는 법이다.

 또 예를 들자면 지금 지나가고 있는 다리의 한복판도 마찬가지다. 이런 어디에서나 볼법한 평범한 다리에서 사람이 떨어질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특히 조금이나마 아는 사람이 말이다. 매일 아무생각 없이 지나가던 다리가 그런 약간의 변화만으로도 그 인상이 달라져버린다. 그리고 그 인상은 지금도 조금씩 쑤시는 한쪽 팔과 다리가 상기시켜주고 있다. 오늘은 늦게 끝나는 바람에 치료받으러 가지 못했다. 내일부터는 착실히 다녀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치료받으면서 푹 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녀가 어떤지 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다녀왔습니다."

 아무도 없을게 당연한 공허 속의 집안에 나는 내 존재를 알리듯이 목소리를 내며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왔다. 불이 켜진 집안의 풍경은 작고 평범한 1LDK짜리지만 혼자 살기에는 조금 넓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아마 2~3인 가구를 상정하고 만든 것이겠지. 사무소에서 좀 거리가 떨어져 있긴 하지만 그래도 싼값에 이런 집은 구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니까. 언젠가 가까운 데로 이사한다 하더라도 당장은 만족하는 게 현명하다. 

 나는 안방에 대충 옷을 벗어 던지고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뒤에 냄비에 라면 1인분치 물을 올려놓고 불을 지폈다. 이리하면 간단히 씻고 나왔을 때 펄펄 끓는 상태가 되어 면을 투입할 수 있다. 손과 발을 닦고 가볍게 세안을 하는 그 시간 동안 말이다. 본격적인 욕조나 사워기행은 느지막이 해도 되고. 

 "푸하!"

 아직 찬물세안은 조금 차갑다. 오히려 이 편이 피곤해진 정신을 말끔히 깨워주기도 하지만 아직까지도 차갑다면 따뜻해진다는 골든위크 직전 봄 날씨로선 뭔가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 부디 그날이 시작할 땐 추워지지 않기만을... 그리고 세안 비누를 하나 더 사놔야겠다. 비축분이 이제 없으니까.

 인스턴트 돈코츠 라멘의 향이 집안에 퍼지는 걸 느끼며 나는 조그만 라디오의 전원을 올렸다. 주파수는 미리 맞춰놨기에 조정할 필요 없이 원하는 방송이 음악과 함께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여러분들은 혹시 봄을 좋아하시나요? 매우 때늦은 물음 같지만, 이맘때쯤이면 저는 왠지 제대로 봄을 느낄 수 있는 것 같거든요. 벚꽃이 한창 필 때만 해도 아직 퇴근하기 싫은 동장군이 잔업을 할 때가 있잖아요? 다들 봄옷을 입고 왔다가 대략 낭패를 보기도 하고 말이죠. 그래서 저는 골든위크가 가까워지는 이맘때를 봄의 절정이 시작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제 추위가 완전히 물러가고 초목이 그 색을 본격적으로 뽐내는 걸 보고 있으면 더욱이 실감 나요."

 그리 질 좋은 라디오는 아니지만, 그 나긋하고 감미로운 목소리는 품질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선명하게 나의 고막에 스며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금 새로이 기분을 다 잡으며 퍼스널리티 타카가키 카에데가 여러분께 첫 곡을 드리겠습니다. 부디 즐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낯설지 않은 노래 하나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예전에 출시되었던 그녀가 부른 노래다. 솔로는 아니고 한 그룹을 이룬 것이지만 그 음색은 어디 가지 않는다. 거기에 정상의 오른 그녀의 초창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곡이기도 하다. 내가 아직 프로듀서로서 일하기 전이라 내막 같은 건 알 수 없지만. 

 "후우... 음... 이 정도면 되려나."

 끓여진 면을 맛보고 다 되었다고 판단한 나는 불을 끄고 냄비 째로 식탁으로 가져갔다. 약간 설익은 듯한 느낌의 꼬들꼬들함이 취향이기에 끓이는 시간은 남들에 비해 조금 빠른 편이다. 

 "...좋아."

 이번에도 딱 맞춰지게 조리되었다.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확실하게 늘어난 건 이 라면을 끓이는 실력이다. 다른 요리는 못하더라도 이거 하나는 아마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떠셨나요? 저는... 뭐랄까 조금 감회가 새롭네요."

 노래가 끝나고 그녀는 곡의 이름을 다시금 부르며 코멘트를 이어갔다. 들으면서 옛 생각이 난 건지 목에서 가다듬어지는 그 목소리는 조금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했다. 그 속내야 내가 알 리가 없지만 아마 좋은 추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라디오는 이런 면에서 좋다고 생각한다. 마치 옆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들리는 말소리는 집안에 울려 퍼지며 주위의 적막함을 물리치고 있었고, 사람들이 보내는 사연 속에는 여러 인간군상이 섞여 들어가 있었다. 티비에선 느낄 수 없는 라디오 특유의 색이다. 물론 티비를 틀어놓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약간 구시대적이더라도 역시 라디오를 좀 더 선호한다. 

 "아, 맞다. 청소..."

 오늘까지가 쓰레기 배출 날이었던 걸 잊을 뻔했다. 이 맨션은 쓰레기를 내놓는 날짜가 따로 정해져 있기에 그 시기를 놓치면 다음 날짜까지 집안에 쌓아두어야 한다. 그건 사양하고 싶다. 이것만 다 먹으면 바로 나가야지.

 낮의 포근함은 어디론가 사라진 채 구름 없는 밤의 날씨는 좀 쌀쌀했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창백한 하늘 아래 보이는 것은 불 켜진 건물과 가로등이 전부였다. 이 시간이면 이웃이 만들어준 밥그릇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길고양이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기에 기분이 뭔가 좀 묘하다. 이리도 조용한 밤은 정말로 오랜만이다. 

 "후우..."

 쓰레기를 버리고 편의점을 향해 걸어가는 길, 장막이 깔린 주택가에 둘러쳐진 공간에는 밤공기 특유의 냄새가 녹아 들어있었고, 빈 길가에 울리는 타박타박 발소리는 약간은 리드미컬하게 들리고 있었다. 밤에 돌아다니는 건 이런 색다른 맛이 있기에 밤 산책 같은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난 역시 어두워서 사양하고 싶다. 해가 떠오르는 새벽녘이면 나름 괜찮을지도 몰라도... 갑자기 편의점이 생각난 건 생각보다 간단한 이유에서였다. 새로 비누를 사는 둥, 라면을 더 채우거나, 술이나 과자 같은 거 여러 가지 말이다. 원래 담배도 하나 있어야 하겠지만 현재는 금연상태다. 생각만큼 따라주진 않을 거라 생각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포기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만약 절약정책을 펼친다면 이만한 것도 없겠지. 

 편의점 자체는 어길 가던 그냥 익숙한 풍경이다. 프렌차이즈인 이상 인테리어의 한계란 게 존재하겠지만 정말로 수도권이든 지방 저 구석이든 편의점이라는 장소는 낯설지가 않다. 오히려 익숙하다 못해 질리기까지 한 풍경이다. 괜한 생각인거쯤은 알고 있지만 원래 이런 상념이라는 건 불현듯 떠오르기 마련이지 않는가?

 "비누가... 비누가..."

 원하는 물건을 골라 파란색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는다. 이런 단순하고 간단한 과정을 통해 바구니와 그걸 들고 있는 왼팔의 무게감이 더해져간다. 오면서 머릿속으로 정리한 리스트에 의하면 이번 건 제법 무거울 것이다. 한 번 오면 3~4일치 식량을 사들이고 있으니 뻔할 뻔자지만 말이다. 식량이라고 해도 별 거 없다. 참치캔같은 통조림이나 프라이팬에 바로 구울 수 있는 냉동식품, 봉지라면, 10판짜리 달걀이나 편의점 도시락, 빵과 우유 등등 간단히 해먹을 수 있는거 위주다. 누가 말했었나? 남자의 요리라는 말. 아마 그런 정의에 부합할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짐에 누가 찾아왔을 때 할 만한 대접은 아니다. 그럴 땐 근처에서 치킨이나 피자 같은 걸 싸들고 와야지. 찾아올 사람은 동생이나 친구 몇 명을 제외하면 별로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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