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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것보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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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31, 2016 17:47에 작성됨.

 “프로듀서. 오늘도 밤 늦게까지 일해야 되는 거야?”
 이른 아침, 미키가 사무소에서 프로듀서에게 칭얼댔다. 며칠째 계속되는 스케줄 강행군 때문에 잠 잘 시간이 부족하다는 게 미키의 주장이었다. 오늘 스케줄 정리를 하고 있던 프로듀서는 미키의 응석을 적절하게 타일렀지만, 아무래도 쉽게 가실 기미가 아니었다. 그도 할 수만 있다면 미키의 스케줄을 전부 빼고 휴식을 주고 싶었지만, 이 업계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을뿐더러, 업계의 신뢰를 쌓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자기 나름대로 미키를 편하게 해주려 노력했다. 가능한 선에서 미키가 원하는 것—물론 스케줄 취소는 불가능했다.—을 해주기도 했고, 쉴 수 있을 때 최대한 쉬게 해주기도 했다.
 “미안하다, 미키. 힘든 건 알지만 며칠만 더 힘내자. 며칠 뒤면 비번 날이 있으니까 그 때까지만 참아줘.”
 스케줄 정리를 끝낸 프로듀서가 차분히 얘기했다. 미키도 이렇게 칭얼대봐야 어떻게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숨을 크게 내쉬고 어쩔 수 없이 얌전히 일정을 따르기로 했다.
 “그럼 빨리 끝내주기야. 미키, 오늘은 좀 기분이 안 좋은 거야.”
 “오늘은 오전, 오후 해서 일정이 2개밖에 없으니까, 열심히 하면 그만큼 빨리 끝날 거야. 그럼 가자.”
 프로듀서는 출발하자는 손짓을 했다. 미키는 뾰로통한 얼굴로 가방을 들고 먼저 사무소를 나섰다. 뒤따르던 프로듀서는 계단을 내려가는 미키의 모습이 불안했다. 중심을 잘 잡지 못 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갸웃하면서도 별일 아니겠지 하면서 무심히 내려갔다. 그 때 미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프로듀서는 깜짝 놀라며 미키의 손을 잡아 겨우 균형을 잡아줬다.
 “괜찮아, 미키?”
 “으응. 괜찮아. 잠시 어지러워서 그런 거야.”
 미키는 별 거 없다는 듯 프로듀서를 안심시켰다.
 “정말 괜찮은 거야? 힘들면 오늘은 쉴까?”
 “프로듀서. 그만한 배짱이 있었으면 지금 벌써 쉬고 있지 않았겠어? 정말 별 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미키가 고집을 부리며 괜찮다고 말하니 프로듀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몸 상태가 안 좋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말하라고 했다. 알았다면서 앞서 나가는 미키의 뒷모습을 본 그는 오늘 하루 무사히 지나가기를 바랐다.

 

 차로 이동하는 막간을 이용해 미키는 곤히 잠들었다. 평소에는 조수석에서 거리낌 없이 잤으나, 오늘은 특이하게도 조수석보다 누울 수 있는 뒷자석이 좋다며 그곳에서 누워 자고 있었다. 그렇지만 숨소리가 평소보다 컸다. 곤히 자는 숨소리가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살짝 가쁘게 쉬는 듯이 들렸다. 불규칙한 숨소리 때문에 프로듀서는 걱정이 됐다. 하지만 자는 아이를 깨워서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일단 도착한 뒤에 필요한 것을 준비하기로 했다. 다행히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그는 뒷문을 열었다.
 “미키. 도착했어. 일어나야지.”
 미키의 어깨를 톡톡 건드리자 미키가 힘들게 눈을 떴다. 식은땀에 헝클어진 앞머리와 짙은 홍조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여전히 숨은 가빴다. 그가 이마에 손을 대려 하자 미키는 괜찮다는 듯이 그의 손을 막았다.
 “프로듀서.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해야 되는 거야? 조금 어지러운 것뿐인 거야.”
 미키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차에서 천천히 나왔다. 위태로운 발걸음이지만 자신이 아픈 것을 숨기려는 듯이 힘을 내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프로듀서는 고집을 부리면서까지 일을 해야 하나 싶었지만 미키에게는 자존심이 있었다. ‘프로는 자신이 맡은 일을 끝까지 해내야 한다.’ 이 생각 하나가 미키를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아파도 아픈 척 티를 내지 말아야 하고, 쓰러질지언정 무대 뒤에서 쓰러지는 것이 프로라고 생각했기에, 미키는 여기서 멈추는 걸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컷!”
 오전 일정은 화보 사진 촬영이었다. 촬영 내내 미키가 걱정된 프로듀서는 안절부절하며 지켜봤지만 미키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촬영에 임했다. 다만  가끔씩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여 쉬는 시간을 많이 가지기는 했다.
 “오늘 미키 양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데?”
 사진사가 프로듀서에게 말했다.
 “감기 같습니다만 스스로 괜찮다고 해서…….”
 “그런가? 그래도 표정 연기만큼은 수준급이더군. 얼굴 홍조 때문인가? 묘한 색기가 있더구만.”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하지만 모델의 상태는 신경 써주게나. 앞으로 몇 컷만 더 찍으면 되니까.”
 사진사는 프로듀서의 어깨를 툭 치고 사진을 검사하러 갔다. 프로듀서는 쉬고 있는 미키에게 다가갔다. 이온 음료로 목을 축이는 미키는 그를 보고 방긋 웃어주었다.
 “미키가 말했지, 프로듀서? 걱정 말라니까.”
 프로듀서도 살짝 웃으면서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 미키도 싫지 않은 듯 그의 손에 얼굴을 맡겼다. 조금 전보다 힘들어하는 게 눈에 띄었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일을 하는 미키의 모습에 미안함과 고마움이 겹쳤다. 며칠만 더 참으면 푹 쉬게 해줄 수 있다, 그것이 프로듀서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것이었다.
 “영 힘들면 당장 말해줘. 병원이라도 가서 검사 받게.”
 그리고 이것이 프로듀서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이자 최소한의 일이었다. 미키는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스태프가 촬영 개시를 알리자 아무 일도 없던 듯 그는 다시 덤덤히 촬영에 들어갔다.

 

 촬영이 끝나고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미키는 뒷좌석에 누워 잠들었다. 출발하기 전에 약국에서 산 해열제를 먹긴 했지만 금방 내릴 열이 아니었기에 최대한 안정이 필요했다.
 오후 업무는 음악 프로그램 사전 녹화였다. 이 때만큼은 프로듀서도 바짝 긴장을 했다. 격렬한 안무 때문에 어지러움을 더 심하게 느낄 수도 있고, 자칫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대기실에서 미키에게 조심을 가장 중요하게 당부했다. 미키 역시 약간 긴장했는지 증세가 조금 심해진 듯 했다. 비올 듯이 흐르는 땀과 더 짙어진 홍조, 불규칙한 숨소리. 프로듀서는 당장에라도 녹화를 취소하고 병원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방송국 담당자한테는 엄청나게 깨지겠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프로듀서. 이것만 하면 오늘 업무는 끝이잖아. 빨리 끝내고 쉬면 되는 거야.”
 미키가 그의 조바심을 읽은 듯 차분하게 진정시켰다.
 “후. 미안하다. 그냥 너무 걱정이 돼서…….”
 그는 확실히 조바심을 느꼈다. 좀 더 진정할 필요가 있었다. 정신 차리자며 얼굴을 쓸어 내렸다. 지금은 미키를 믿는 수밖에 없다. 그 때 문을 두드리며 스태프가 들어왔다.
 “녹화 시작하겠습니다.”
 “그럼 가자, 프로듀서.”

 

 안무를 추는 미키의 움직임은 역시 평소보다 힘들어 보였다. 가끔씩 박자를 놓칠 때도 있었고, 어지러움 때문에 삐끗할 때도 있었다. 순간 크게 넘어질 뻔한 것도 있었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끝까지 춘 미키는 땀을 폭포수 같이 흘렸다. 그렇게 노력했지만 아무래도 디렉터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듯 고개를 저었다.
 “이래 갖고는 못 쓰겠는데.”
 디렉터가 나지막이 말했다. 프로듀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프로듀서 양반. 오늘 미키 상태가 굉장히 나빠 보이는데?”
 “예. 감기 기운이 좀…….”
 “이런…….”
 디렉터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사전에 먼저 얘기를 해줬어야지.”
 “그러고 싶었지만 미키가 끝까지 하겠다고…….”
 “됐어. 저 상태면 우리가 더 힘들어. 아픈 사람한테 무리하게 하라고 할 수도 없고.”
 그가 촬영 중단 지시를 내렸다. 프로듀서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 때.
 “디렉터님! 한 번만 다시 하게 해주세요!”
 무대에서 미키가 절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키는 자신이 녹화를 망쳤다는 불안함보다는 자신이 더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분함이 더 컸다. 아파도 온 힘을 쥐어짜서 무대를 달궈야 했는데, 그러지 못 했다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다시 기회를 달라고 말했다. 디렉터는 아픈 사람을 괴롭히는 것 같아 영 탐탁치 않았지만 고심 끝에 다시 한 번 기회를 줬다. 짧은 휴식 후에 다시 무대로 올라간 미키는 다시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촬영에 들어갔다. 아까보다 나아진 움직임을 보여주어 디렉터도 납득할 만큼 멋진 무대를 선보였다.
 “촬영 수고했습니다.”
 디렉터의 촬영 종료 신호가 떨어지자 스태프들이 일사분란하게 정리를 시작했다. 무대에서 내려온 미키를 프로듀서가 부축했다. 프로듀서는 수건으로 땀을 닦아줬다.
 “오늘 미키 어땠어?”
 미키가 그에게 물었다.
 “반짝였어. 눈부실 정도로.”
 그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미키도 활짝 웃으면서,
 “그럼 프로듀서. 미키는 잠깐 쓰러질게.”
 라고 말하고 프로듀서에게 기대며 쓰러졌다.

 

 “하아, 하아…….”
 병원 응급실 침대에 누운 미키는 링거를 팔에 꽂은 채 숨을 가쁘게 내쉬며 땀을 흘렸다. 그 옆에 있는 프로듀서가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 주면서 경과를 지켜보았다. 의사의 말로는 과로 누적으로 인한 몸살이라고 했다. 충분한 안정과 휴식을 하면 며칠 안에 나을 거라 했다. 그 사이 프로듀서는 타카키 사장에게 보고했다. 사장도 사태를 파악하고 미키에게 일주일 정도 휴가를 내주었다. 또한 프로듀서와 사장은 둘 다 다른 방송국이나 기자, 사진사, 녹음실에 연락을 해 사정을 얘기하고 모든 스케줄을 취소했다. 분명 큰 타격이다. 하지만 그것들보다 미키의 몸이 무엇보다 우선이었다.
용무를 마치고 프로듀서는 미키가 누운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으응…….”
 미키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는지 작은 신음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미키? 정신이 들어?”
 “프로……듀서?”
 “응. 여기 있어. 걱정 마.”
 미키는 안심이 됐는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는 프로듀서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프로듀서…….”
 그러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프로듀서도 미키의 손을 꼭 잡아주며 빨리 낫기를 바랐다. 그날은 응급실에서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 새벽, 미키와 프로듀서는 응급실을 나왔다. 밖은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둘은 집으로 가기 전에 병원 벤치에 앉았다. 프로듀서가 자판기에서 따뜻한 음료 두 잔을 사왔다.
 “핫 초코 괜찮지?”
 “응, 단 게 먹고 싶었던 참이었는데.”
 새벽은 아직 쌀쌀했다. 춥지 않을까 싶어 외투를 벗어 미키에게 걸쳐줬다. 미키는 고맙다고 말하며 핫 초코를 홀짝였다.
 “프로듀서.”
 “응?”
 “미키가 너무 고집부린 걸까?”
 미키가 미안한 듯이 조심스레 물었다.
 “음. 글쎄. 나로선 무엇보다 네 건강이 가장 최우선이었지만, 너는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일을 끝맺는 게 더 중요했겠지. 솔직히 말하면 그냥 스케줄을 전부 취소하고 널 병원에 데려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그가 커피를 한 입 마시며 얘기를 이었다.
 “그런데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어쩔 수 없더라고. 뭐라고 할까. 프로의 자존심이라고 할까? 그런 게 느껴졌어. 그래서 네 행동을 존중한 거야. 일단 어제는 그렇다고 쳐. 단.”
 “단?”
 “다음 번에 네가 아프면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고 병원으로 데려갈 거야. 아무리 고집 피워도 말야. 알겠지?”
 고개를 끄덕인 미키는 프로듀서를 빤히 쳐다봤다.
 “응? 왜 그래?”
 “프로듀서.”
 그 순간 미키가 프로듀서의 얼굴을 잡아 당기고는 입을 맞췄다. 그는 놀라서 커피를 떨어뜨렸다. 고요한 정적과 새하얘진 머릿속. 그대로 멈춘 것 같은 시간. 그리고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과 짭조름한 땀냄새.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둘의 입술이 떨어졌다.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하는 프로듀서에게 미키가 윙크했다.
 “감사 선물이야.”

 

 에필로그
 일주일 휴가를 끝마치고 미키는 사무소로 다시 돌아왔다. 한껏 밝아진 얼굴과 가볍게 보이는 몸이 푹 쉬었다는 걸 알려줬다.
 “안녕하세요인 거야!”
 “오랜만이야, 미키.”
 프로듀서도 반갑게 맞이했다.
 “자, 그럼 오늘 일정을 처리하러 갈까?”
 “오자마자?”
 미키는 소파에 앉아서 볼멘소리를 했다.
 “오늘도 또 늦게까지 하는 거야?”
 “글쎄다. 오늘은…… 밤까지 일정이 있네.”
 “또 아프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
 “그 때는 또 병원에 가면 되겠지.”
 프로듀서가 미키에게 가자는 손짓을 했다. 미키는 뾰로통한 얼굴로 프로듀서보다 먼저 사무소를 나가려다가 뒤돌아 그를 봤다.
 “또 아프면 미키를 보살펴줘야 돼,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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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지만 열심히 하는 미키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됐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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