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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리티P 시리즈] < 신데렐라 걸스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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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09, 2016 04:12에 작성됨.

<신데렐라 걸스> (上) 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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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 시작 시간을 약간 넘겨, 사장실의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던 빛의 폭포가 약간 누그러졌을 때, 프로듀서는 마지막 서류뭉치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이상, 프로젝트에 대한 브리핑을 마치겠습니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기획서를 다시 내려놓았다.

 

“처음 이 안건이 올라왔을 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부정적이었다. 분명히 매출상으로 너희들 아이돌 부서는 지난 1년간 가능성을 보였지. 타카가키 카에데, 트라이어드 프리무스, 그리고 사쿠마 마유까지. 누구 하나 빠질 것 없이 잘 팔렸고, 잘 팔았네. 솔직히 말해서 지금 나는 아주 기뻐.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구나. 내가 정말로 옳은 사람을 데려왔구나, 하고 말이야.”

“감사합니다.”

“아무튼, 처음 임원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나는 버겁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우리가 비록 시장을 장악하는 힘이 있다고는 하나, 급작스럽게 이런 일을 진행한다는 건 상당히 부담이 가는 일이야.”

 

마치 에둘러서 거절의 뜻을 비추려는 듯한 사장의 말투에 프로듀서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 갑을관계를 확실히 알고 있는 그이기에 그 이상으로 눈앞의 사람을 자극하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뭐, 이건 말 그대로 정론이고.”

 

그리고 그런 그의 인내심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사장은 자세를 편하게 고쳐 앉으며 눈 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지금 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생각이 바뀌는군. 누가 어떻게 보더라도, 이건 급작스럽게 진행되는 일이 아니었어. 비록 탁상공론이고 청사진만 그려져 있을 뿐이지만, 이 정도로 뼈대를 갖추었다면 내가 보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야.”

 

사장은 숨을 고르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이제 시대는 아이돌 전국시대다. 여기저기서 듣도 보도 못한 녀석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지고 있어. 이유는 알고 있지?”

“네. 와일드 카드 때문이죠.”

“그래. 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네 탓이라고 해야 할지……어찌되었든 그 제도 덕분에 조무래기들의 진입장벽이 상당히 낮아졌다. 그만큼 흐름이 격렬해졌어. 만약 우리가 이러한 시대의 격류를 타지 못한다면 지난 수많은 회사들처럼 우리도 그대로 역사의 골목길로 사라지게 되겠지.”

 

OK라는 말인가, 아니라는 말인가. 프로듀서는 몇 번째일지 모를 침을 삼켰다.

 

“확률은 반반이다. 대안은 없고, 들어오기 시작한 물은 벌써 우리 허리춤까지 차 올랐어. 이제 슬슬 배를 띄우지 않으면 물고기 밥이 되거나, 아니면 부두에 올라가 다른 놈들이 배를 젓는 꼬락서니를 우두커니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더 괜찮은 쪽에 배팅을 해야겠지. 그러니…….”

 

그는 턱을 긁으며 자신의 앞에 앉은 거한을 바라보았다.

 

“한번 너에게 걸어보지. 만약 이 사업을 진행한다면 넌 경쟁자가 들끓는 핏빛 바다에 뛰어들어 지금까지 우리가 해 왔듯이 정상을 노려야만 한다.”

 

“할 수 있겠나?”라며 자신을 쏘아보는 사장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프로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면 지금부터 이 프로젝트는 네 거다. 회사 입장에서는 뭐든지 도와줄 테니 어디 한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 네가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 겪어온 경험, 그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네가 찾은 신데렐라를 네가 만든 무도회장으로 인도해 봐.”

“감사합니다.”

 

이제는 한 모금밖에 남지 않은 차를 마저 다 마시고, 사장은 서류를 정리하는 프로듀서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지금 네 랭킹이 권외지?”

“네, 권외 찐따죠.”

“그럼 올 연말에 네 랭크가 어디까지 치솟는 지나 봐라. 이 찐따녀석아.”

“제가 뭐 한 게 있다고 랭크가 올라갑니까? 저 말고 다른 사람들이 올라가겠죠.”

“겸손도 과하면 기만질이다.”

“저는 진짜배기에요.”

 

피식 웃으면서 사장은 나가보라는 듯 그에게 손짓을 했다.

 

“공문서에 올리는 한자도 가끔 틀리는 녀석이 말은 청산유수네. 할 말 없으면 어서 가 봐. 일해야지?”

“네. 감사합니다.”

 

 

 

*************

 

 

 

출근을 앞둔 금요일 아침.

하늘이 뻥 뚫린 주차장에는 슬슬 뜨거워지는 햇볕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햇빛 아래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프로듀서는 기숙사의 주차장에서 상자를 옮기고 있었다. 상자라곤 하지만 이삿짐 센터에서나 사용할법한, 성인 남성 하나는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크기의 상자였다.

 

“엇차. 이 정도면 되려나.”

 

트렁크에 두 개, 그리고 뒷좌석에 하나. 적재된 세 개의 상자를 바라본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냈다. 상자 안에 든 것은 다름아닌 기숙사의 그의 방에 있던 서류들 중 ‘스카우트 리포트’를 제외한 나머지 서류들의 일부분이었다. 비율로 치자면 여태껏 모은 자료들의 1/3정도쯤 되는 분량으로, 자료들 중 급하게 참고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들만 추려낸 것이 이 정도나 나온 것이었다.

스카우트 리포트의 경우는 최소한 자신의 후임이 정해질 때까지는 계속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을 생각이었다. 아직은 남들에게 보여줄 만한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멍석을 깔아주면 미친 짓도 하기 힘들다더니……정말로 통과한 다음이 문제구나.”

 

자동차의 시동을 걸면서 프로듀서는 운전대를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첫 출근을 앞둔 신입사원처럼 보이는 그 모습은, 마치 오늘부터 시작될 전혀 다른 나날에 대비해 앞날의 각오를 다지는 듯한 모습같아 보였다.

 

 

 

************

 

 

 

“프로듀서 씨가 늦네……보통 7시 반쯤이면 오시던데.”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자기 자리에 앉아있던 치히로는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지금 시각은 이미 8시를 넘어가는 시간. 더위 덕분에 예전보다 조금 일찍 출근한 것도 있지만, 출장이나 다른 일도 없는 평일에 이 시간이 되도록 프로듀서가 출근하지 않은 것은 그녀도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차라도 미리 끓여놓자고 생각하고, 급탕실에서 물을 끓여놓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치히로는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회사 내부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프로듀서의 프로필을 열어보았다. 회사 내부에서도 일 처리가 빠릿하기로 유명한 인사팀인만큼 프로듀서의 프로필 또한 곧바로 갱신되어 있었다. 그래봤자 기존의 이름과 나이만 적혀있던 것에서 혈액형과 생일,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가 추가된 것이 전부였지만, 그 어느 쪽이든 프로듀서의 개인정보라는 점에 있어서는 치히로의 흥미를 끌기에는 충분했다.

 

“헤에, 프로듀서 씨 9월생이었구나. A형이고…….”

 

치히로가 한창 그의 프로필을 보고 있던 그 때, 문이 열리면서 등으로 슬금슬금 문을 밀고 들어오는 프로듀서의 모습이 보였다. 치히로는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보고 있던 모니터의 전원을 껐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 어서 오세요……?”

“죄송해요. 이거 가지고 오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아직 아무도 안 왔죠?”

“네, 아직은요.”

“다행이네요……엇차.”

 

프로듀서는 자신의 자리로 다가가 사무실의 구석에 들고 있던 박스를 내려놓았다. 무게가 상당한 것인지 박스가 바닥에 닿자 쿵, 하는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뭐에요?”

“참고 자료에요. 정확하게는 이제부터 필요하게 될 자료들이긴 한데……이건 나중에 제가 따로 치울 테니까 손 대지 말고 가만히 놔둬주세요. 오늘 결산회의 끝나고 나서 말씀 드릴게요.”

 

사무실을 나서는 프로듀서의 말에 치히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는 사이 프로듀서는 두 번을 더 왔다갔다하며 한 번에 하나씩, 총 세 개의 상자를 사무실로 옮겼다. 평소에는 다소 널널하다고 생각했던 사무실의 구석이었지만, 커다란 상자가 세 개나 들어가니 그의 자리 근처는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다닐 정도로 비좁아졌다.

박스를 내려놓고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며 그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치히로는 재빨리 급탕실로 들어가 끓여놓은 녹차에 얼음을 띄워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여기, 차 드세요. 시원한 거에요.”

“감사합니다.”

 

치히로는 재빨리 자신의 찻잔을 들고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어지간한 현장직보다도 힘이 좋은 프로듀서였지만, 지금의 노동은 그에게도 상당히 힘들었던 모양인지 그는 가방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물처럼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팔을 들어올릴 때 슬쩍 보인 것이지만, 팔꿈치 언저리까지 걷어 부친 와이셔츠의 소매 아래로는 착 달라붙은 흰색 토시가 보였다.

 

“프로듀서 씨, 와이셔츠 아래에도 토시를 차고 계시네요?”

“아아, 이거요? 네, 뭐……편해서 말입니다.”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물건이었을까. 치히로의 지적에 프로듀서는 흠칫 놀라며 재빨리 소매를 내렸다. 린넨 재질로 된 와이셔츠였기에 땀에 젖은 관절부분이 훤하게 비쳐 보였지만, 에어컨 바람에 의해 금세 식으면서 그것은 다시 불투명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오늘도 외근 나가세요?”

“아뇨, 오늘은 안 나갑니다. 내부적으로 좀 처리할 일도 있고 해서요.”

 

치히로는 고개를 돌려 스케줄 보드를 살펴보았다. 보기 드물게 오늘의 오전 일정은 텅 비어 있었다. 그 대신인지 오후에는 풀타임 단체 레슨이 잡혀 있었지만. 후미카와 미즈키가 또 힘들어하겠구나, 라고 생각하며 치히로는 다시 프로듀서를 바라보았다.

 

“린 애들이랑 마유는 어떻게 하실건가요? 이제 방학이잖아요?”

“한동안은 지금처럼 여유 있게 나갈 생각입니다. 이것저것 하고는 싶지만 다음 주부터는 계속 제가 바빠서 말이죠.”

“아. 그러고 보니 다음주에 홋카이도로…….”

“네. 그 다음엔 후쿠오카랑 교토로 가기로 되어 있어요.”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전국을 돌아다니세요?”

“오디션이요.”

 

이제는 땀이 꽤나 식은 것인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축축하게 젖어 아래로 축 처져 있던 그의 앞머리가 다시 위쪽으로 일어서 있었다.

 

“도쿄 도내의 기획사들이 상반기에 한번, 하반기에 한번. 전국적으로 매 거점도시에서 한 번씩 하는 오디션이 있어요. 이번에는 우리 쪽 신인도 모을 수 있는 여건이 되어서 말이죠. 뭐, 사실은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욕심이죠.”

 

프로듀서가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그의 손목시계에서 땡땡땡, 하는 작은 종소리가 들려왔다. 오전 아홉 시를 알리는 알람이었다.

 

“쉴 만큼 쉬었으니……엇차.”

 

프로듀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찻잔을 들고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그것이 업무를 시작한다는 신호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치히로 또한 그의 뒤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잠시 후, 자신의 자리에서 모니터를 바라보던 프로듀서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왜 안되지……?”

“무슨 일이에요?”

“센카와 씨, 제 휴가 동안 업무일지 대신 작성하셨죠? 지금 메일로 다시 보내주실 수 있나요?”

“그거 매일마다 제가 메일로 보내드리지 않았나요?”

“전송에서 오류가 생겼는지 파일이 깨졌네요.”

“그랬구나……그럼 공용 메일에 올려둘게요.”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자신의 컴퓨터로 시선을 돌린 바로 그 때, 조심스레 사무실의 문이 열리면서 후미카가 모습을 나타냈다.

 

“안녕하세요…….”

“사기사와? 일찍 왔네?”

“네……조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나한테?”

 

후미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프로듀서는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혹시……지금 바쁘신가요……?”

“아니, 괜찮아. 여기서 이야기할까? 아니면 회의실로 갈래?”

“프로듀서씨가 원하는 곳이라면……어디든 좋습니다만…….”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프로듀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치히로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센카와 씨, 잠시 회의실 좀 쓸게요. 전화 부탁드립니다.”

“네, 맡겨주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갈까?”

“네…….”

 

 

 

본관과 달리 별관. 그것도 아이돌 부서가 있는 제1별관의 경우는 시스템 냉방이 아닌 각 방마다 개별냉방을 사용하고 있었다. 애초에 모든 방을 사용할 정도로 인원이 많지도 않을뿐더러, 프로듀서와 치히로를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무실이나 휴게실, 탈의실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지하의 연습실에서 보내기 때문이다.

 

“어우, 여긴 서늘하네. 너는 어때?”

“적당히 시원하네요…….”

 

회의실의 묵직한 방음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 다소 퀴퀴하긴 하지만 여름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서늘한 공기가 새어 나왔다. 햇빛이 들어올만한 창문조차 없기 때문일까. 이 정도면 부가적인 냉방은 필요 없겠다고 판단한 프로듀서는 곧바로 가장 가까운 자리를 골라 후미카를 앉히고 자신은 그 맞은편의 의자를 꺼내 앉았다.

 

“…….”

“…….”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서,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프로듀서는 후미카의 앞머리 사이로 이따금씩 보이는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녀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를 기다렸고, 후미카는 그의 안경 너머로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와 회의실의 바닥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머뭇거리듯 입술을 달싹거리기를 반복했다.

마치 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그만둔 쪽은 프로듀서 쪽이었다.

 

“……노래, 들어봤어?”

 

그러자 후미카는 화들짝 놀라면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한 목소리였지? 보컬 가이드 말이야.”

“알고……계셨군요…...”

“그럼. 그 일을 가져온 게 누군데.”

 

후미카는 앞머리 사이로 프로듀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제 저녁, 기숙사에 돌아와 마유와 함께 노래를 들었을 때, 두 사람이 크게 놀랐던 이유. 그것은 바로 전주가 끝나고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가사를 읊어주는 목소리가 뜻밖에도 후미카 자신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착각이나 환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두 번째로 들었을 때는 누구인지는 몰라도 자신과 참 목소리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들었을 때, 그녀는 비로소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 그녀는 몇 주 전, 자신이 맡았던 어떤 일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녀가 난생 처음으로 해본 가이드 녹음. 일 자체는 생소하기는 했지만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주어진 가사를 보고, 반주만 흘러나오는 노래에 가사를 입히는 단순한 내용이었다.

정말로 단순한 일이었기에 프로듀서는 보컬 테스트를 겸해 후미카에게 비슷한 일을 몇 번인가 더 가져다 주었다. 그렇게 그녀가 녹음한 노래의 개수가 대여섯 곡 정도. 하지만, 그 많은 노래들 중에서 유독 처음에 불렀던 노래만큼은 그녀의 뇌리에 깊게 남아 있었다.

‘멈춰선 자신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간다’라는, 노래가 담고 있는 가사의 내용이 그녀 자신에게는 정말로 구구절절이 와 닿았던 것이다.

 

“좋았어?”

“좋다는 것은……어떤 부분이……?”

“노래 말이야.”

“아, 네……가사 부분가 정말로 좋은 노래였어요……그, 어디까지나 저의 주관이긴 하지만요…….”

“그래, 그렇게 느껴졌다면 다행이다.”

 

그녀의 대답에 만족한 듯 프로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거, 처음에는 다른 사람에게 갈 노래였어. 네가 했던 건 말 그대로 ‘이렇게 노래를 부르면 됩니다’하고 가르쳐주는 가이드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원래 노래를 받기로 한 가수가 작곡가가 원하는 만큼 노래를 소화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래서 저에게도 기회가…….”

“맞아. 원래는 그대로 버리려던 곡인데, 작곡가분이 개회식에서 네 목소리를 듣고 한 번에 꽂혔다고 하셨거든. 그래서 매달렸지. 어차피 버리는 거 나한테 달라고. 다시 한번 살려보겠다고.”

“그렇군요……그럼, 어제 말씀하신 말의 의미도…….”

“……지금까지 나는 많은 노래를 들었지만, 이 노래 이상으로 ‘사기사와 후미카’를 표현할 수 있는 노래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내가 어제 했던 말도 결국은 이것 때문이었지.”

 

어제 저녁, 그는 후미카에게 노래를 주면서 “너만의 노래”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지나갔던 말이었지만, 이렇게 그 내막을 알게 되자 그녀에게 있어 이 노래는 무척이나 특별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프로듀서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팔짱을 꼈다.

 

“그러고보면 그 노래의 입장에서 보면 네가 어머니가 되는 거구나. 처음으로 가사를 붙여주고,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사람이 될 테니까.”

“어머니……인가요?”

“표현이 좀 그런가? 뭐, 그냥 비유니까 크게 신경은 쓰지 말아줘. 그리고……이건 사실 비밀인데.”

 

프로듀서는 팔짱을 풀면서 후미카를 향해 살짝 상체를 기울였다.

 

”그 노래의 제목, 그건 내가 지었어.”

“……네?”

 

후미카는 흠칫 놀라 프로듀서를 올려다보았다.

 

“나랑 같이 운동하던 시절 기억해?”

“네……틈틈이 시간을 내서 제 체력단련을 도와주셨죠…….”

”그래. 그 때, 하늘을 비추던 너의 눈 색을 보고 다짐했거든. 네 노래는 가사가 어떻게 되든 반드시 너의 푸른 눈을 상징하는 이름을 붙이겠다고.”

 

다시 자세를 되돌린 그는 씨익 웃으면서 안경 너머로 보이는 자신의 까만 눈동자를 가리켰다. 후미카는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살짝 좌우로 흔들었다. 발처럼 드리워진 앞머리가 흔들려 자신의 시선에 얽혀오는 그의 시선을 다시 흩뜨려놓았다.

 

“그랬군요…….”

“뭐, 덕분에 상당히 촌스러운 곡명이 나오긴 했다만……제목은 앨범 등록 전에는 마음에 안 들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 언제라도 그럴 마음이 생기면 말해?”

 

“반짝이는 파랑이라니, 나도 참 센스 없네.”라고 중얼거리며 프로듀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후미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로서는 보기 드문 직접적인 의사표현에 쓴웃음을 짓던 프로듀서의 눈썹이 약간 올라갔다.

 

“아니에요……정말로 멋진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하하,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마운걸……아차,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센카와 씨 기다리겠다. 어서 돌아가자.”

“네…….”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정리하는 프로듀서의 모습을 바라보며 후미카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가 그 노래의 어머니라면……당신은 아버지가 되는 건가요……?”

“응? 방금 뭐라고 했어?”

“아, 아뇨……노래 가사를 조금…….”

“그래? 음, 뭐 이 정도면 되겠지. 나중에 또 쓸 테니까……그럼 나갈까?”

“네…….”

 

함께 회의실을 나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면서 그가 다행이라는 듯 이야기했다.

 

“그래도 다행이네. 혹시라도 자신 없다고 하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었거든.”

 

그러자 그의 뒤를 따라서 걷던 후미카의 걸음이 뚝 멈추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프로듀서가 뒤를 돌아보자 후미카가 고개를 숙인 채, 소맷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의 예상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죄송해요……사실은…….”

 

일자로 강하게 다물고 있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듯 흘러나온 한 마디.

그것을 놓치지 않은 프로듀서는 몸을 돌려 그녀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후미카의 표정은 처음으로 받은 댄스 레슨에서 체력 부족으로 쓰러졌을 때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손끝이 새빨갛게 될 정도로 강하게 자신의 옷자락을 쥐고 있던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풀어냈다.

 

“괜찮아. 지금까지 잘 해 왔잖아? 아직 시간은 남아 있으니까,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한 걸음씩 천천히 걸어가자. 그러면 될 거야.”

 

그녀의 손에서 손을 뗀 프로듀서는 새끼손가락을 편 자신의 왼손을 후미카를 향해 내밀었다. 그 손을 바라보던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자신의 왼손을 들어 그의 손에 갖다 댔다.

톡, 하고 두 사람의 손이 서로 부딪혔다.

 

“그럼 갈까?”

“네…….”

 

프로듀서와 후미카가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던 치히로가 반색하며 프로듀서를 반겼다.

 

“센카와 씨, 저희 왔습니다.”

“어서오세요. 저기…….”

“아! 드디어 왔구나!”

“……?”

 

문을 열고 프로듀서와 후미카가 나타나자, 소파에 앉아 있던 방문객은 반가운 듯 자리에서 일어나 프로듀서를 향해 다가왔다. 민소매 셔츠에 핫팬츠라는 파격적인 옷차림의 그녀는 염색한 것으로 보이는 분홍색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친숙한 듯 프로듀서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얏호~★ 나 기억나?”

“물론이죠. 오랜만입니다. 죠가사키 미카 양.”

 

뜬금없이 나타나 아는 척을 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당황할 법도 했지만, 프로듀서는 구면인 듯 그녀를 향해 가볍게 목례하며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미리 연락을 주시지 그랬어요. 그럼 맞이할 준비라도 해 놓는 건데.”

“에이,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괜찮아, 괜찮아★”

“뭐, 그렇다면야 이쪽이 고맙습니다만……생각은 충분히 해보셨나요?”

“응! 뭐, 나도 나름 신선하다고 생각했거든. 양립할 생각은 없으니까, 아예 이 쪽에 집중할까 생각중이야.”

“그렇군요. 그럼, 잠시 저랑 이야기 좀 하시죠. 센카와 씨?”

“네, 네?”

“응접실 좀 사용하겠습니다. 전화 좀 부탁드릴게요.”

“아, 네……혹시, 차는 필요하신가요?”

 

프로듀서는 잠시 생각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그럼 아침에 받은 시원한 녀석으로 하나, 부탁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부탁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프로듀서와 미카는 곧장 응접실로 향했다.

 

 

곧바로 소파로 향해, 평소처럼 3인용 소파의 구석에 앉아 책을 펼쳐 든 후미카와는 대조적으로, 치히로는 예전에 프로듀서가 그랬던 것처럼 응접실을 바라보며 사무실 내부를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신경이 쓰여 죽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죠가사키 미카다. 모델 부서에서도 매출로 치면 앞에서 세는 쪽이 빠르다고 할 정도로 잘 팔리는 사람이고, 나이를 감안하면 발전 가능성도 꽤나 크다고 평가 받는 대형 스타였다. 물론 잘 나갈 때의 카에데에 비하면 아직까지는 조금 모자란 수준이었지만.

대체 어떤 이야기를 했으면 저런 거물을 낚아온 것일까, 이제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던 치히로의 머릿속엔 온통 그것으로 들어차 있었다. 차를 대접한다는 명목으로 몇 번인가 들락날락거리긴 했지만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오히려 화기애애한 듯한 두 사람의 분위기만 재차 확인했을 뿐이었다.

 

“아아, 무슨 이야기 하는 건지 듣고 싶다……두 사람 사이 되게 좋아 보이던데…….”

 

그 말을 꺼낸 바로 그 때, 치히로의 귓가에 툭, 하고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려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자 소파 아래에서 책갈피를 줍고 있는 후미카의 모습이 있었다.

 

‘별일이네, 평소 같았으면 떨어뜨렸다고 바로 주울 리가 없는데…….’

 

의외라고 생각하며 치히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의 후미카였다면 책을 다 읽거나, 프로듀서의 호출 등으로 책갈피가 필요할 때가 되어야 부리나케 그것을 찾았을 텐데.

 

 

두 사람이 응접실에서 나온 것은, 한 시간 정도가 지나 오전 10시가 될 무렵이었다.

 

“이야기 즐거웠어. 그럼 나중에 또 찾아올게★”

“네, 가능하면 손님 맞이할 준비는 할 수 있게 미리 연락은 해 주세요.”

“응, 알았어★ 그럼, 안녕!”

 

사무실의 문 너머로 미카의 모습이 사라졌다. 폭풍이 휩쓸고 간 듯, 다시 조용해진 사무실을 둘러본 치히로는 고개를 돌려 프로듀서를 바라보았다.

 

“죠가사키 양은 언제 만났어요?”

“어……그러니까 2주 전 쯤인가? 시부야에서 만났죠. 습관적으로 스카우트를 한다고 했는데, 알고보니 모델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것도 타카가키 씨랑 같은 부서였을 줄이야.”

“하긴, 카에데 씨랑 만난 뒤로 패션잡지 쪽은 잘 안 보시죠?”

“그렇죠. 그 쪽에는 이젠 더 볼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모델 부서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프로듀서는 약간 미간을 찡그리며 팔짱을 꼈다.

 

“그나저나 저는 결정하는데 한 달 정도는 잡고 있었는데 1주일도 안 지나서 결정을 내릴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이 나라 여자애들은 다 행동력이 저렇게 좋은건가…….”

“글쎄요. 그것보다는 프로듀서씨의 말빨이 좋은 게 아닐까요? 이번엔 또 뭘로 꼬셨어요?”

“꼬셨다뇨. 그냥 하던 대로 명함 주고 새로이 즐길 수 있는 일을 찾아보지 않겠냐고…….”

“네, 네. 잘 들었습니다. 이 프로 작업꾼 같으니.”

“그런 거 아닌데…….”

 

프로듀서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던 그 때, 기다렸다는 듯 그의 손목시계에서 또다시 땡, 땡, 하는 타종소리가 들렸다.

 

“이런, 벌써 시간이……센카와 씨, 저 잠시 나갔다 올게요. 저 찾는 전화 오면 바로 휴대전화로 연결시켜주세요.”

“네? 또 외근 나가세요?”

“아, 아니요. 오늘 결산회의랑 다음주 출장 관련해서 다른 부서에 자료가 좀 필요해서요. 점심시간 전까지는 돌아올테니까요.”

“네. 맡겨주세요.”

 

프로듀서는 자신의 자리에서 두툼한 서류봉투를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

 

“뭔진 몰라도 엄청 바빠 보이시네…….”

 

사락, 하고 후미카가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치히로는 고개를 돌려, 사무실의 구석에 쌓여 있는 세 개의 박스를 바라보았다.

 

 

 

************

 

 

 

오후 여섯 시.

아이돌 부서의 회의실에는 센카와 치히로를 포함한 부서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든 사람이라고 해봐야 트라이어드 프리무스의 3명과 마유, 후미카, 카에데, 미즈키를 더한 7명. 그리고 프로듀서와 치히로를 합한 9명이 전부였지만.

매주 금요일 저녁에 있는 결산회의를 위해 본관의 대회의실에 있을 프로듀서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회의실의 커다란 원탁에 앉아 저마다 잡담을 나누거나, 취미를 즐기는 등 저마다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개중에서도 가장 앞에 앉아 있는 성인 3인방은 언제 또 술자리를 가질 것인지 계획을 짜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솔로 데뷔라는 경사도 있었으니까.

잠시 이야기가 멈춘 틈을 타, 시계를 슬쩍 바라본 카에데가 중얼거렸다.

 

“프로듀서가 늦네요. 결산회의는 지금쯤 끝났을텐데.”

“아, 오늘은 조금 오래 걸린대요. 부서장들 사이에서 발표할 일이 있다고 해서.”

“P군이 직접 발표한대? 그럼 뭐 새로운 사업이라도 하나 시작하려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던가. 미즈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회의실의 문을 열고 높이 쌓인 서류뭉치를 양 손으로 든 프로듀서가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회의가 조금 길어져서…….”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프로듀서는 곧장 자신이 들고 온 종이를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거 다 받으시는 대로 곧바로 시작할게요. 오늘은 조금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서, 이렇게 부득이하게 여러분들을 모두 모으게 되었습니다.”

 

원탁 주위를 빙빙 돌면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종이를 나누어준 프로듀서는 곧장 단상으로 올라가, 미리 준비된 빔 프로젝터와 연결된 노트북에 주머니에서 꺼낸 USB를 꽂았다. 곧바로 새 창이 열리자, 프로듀서는 기다렸다는 듯 그 안에서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실행시켰다. 파일이 실행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프로듀서는 곧바로 일동을 돌아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선은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씀 드릴게요. 우선 이번 달 말에 카와시마 씨와 사기사와 양의 데뷔무대가 정해졌습니다. 8월 말에 있을 H방송국의 가요 프로그램이에요. 두 분 모두 서면 테스트는 통과하셨으니까, 방송 1주 전에 있을 오디션과 본방만 준비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프로듀서는 자신의 등 뒤로 빔 프로젝터가 비추는 달력을 11월의 달력으로 바꾸었다. 그리고는 체크표시가 되어 있는 11월을 초록색 레이저 포인터로 가리켰다.

 

“그리고, 우리 아이돌 부서가 참가하는 라이브는 11월 말에 있을 어텀 페스티벌이 마지막입니다. 올해는 크리스마스 라이브와 신년 라이브는 참가하지 않을 계획이에요.”

“에?”

“어째서?”

 

술렁거리는 트라이어드 프리무스에게 진정하라는 제스쳐를 취하면서, 프로듀서는 곧바로 슬라이드를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그러자, 멋들어진 문체로 세 개의 단어가 적혀 있는 슬라이드가 나타났다.

 

[Project Cinderella Girls]

 

“우리 아이돌 부서는 올해 11월부로 독립 프로젝트인 ‘신데렐라 걸스’로 승격됩니다.”

“독립 프로젝트?”

“네, 독립 프로젝트요. 지금까지 우리는 그저 하나의 부서에 불과했습니다. 기존에 함께 협업하던  트레이닝 부서, 매니지먼트 부서와 마찬가지로요. 그래서 다 제각각이었죠. 하지만 독립된 프로젝트로 승격되면서, 기존에 함께하던 트레이닝 파트와 매니지먼트 파트가 모두 우리 쪽으로 흡수되었어요.”

“그 말은 우리가 그만큼 커졌다는 뜻이야?”

 

미즈키의 질문에 프로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이제부터는 미리 잡혀있는 스케줄과 11월까지의 정기 라이브 일정만 소화할 예정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해서 일정을 잡아드리고 싶지만, 인원 보충을 위해 다음주부터는 제가 매 주마다 전국 각지로 오디션을 보러 가게 됐어요.”

 

프로듀서의 조작에 따라 화면이 또다시 넘어갔다.

 

“이미 5개 양성소와 협의가 되어 있고, 그들의 협조를 받아 여러분들의 후배이자 동료들이 착실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11월 말까지 가능한 많은 인원들을 모으는 게 첫 번째 목표이고, 내년 3월, 히나마츠리 라이브까지 그들을 모두 데뷔시키는 것이 두 번째 목표입니다.”

 

프로듀서가 잠시 말을 멈춘 사이, 카에데가 손을 들었다.

 

“네, 타카가키 씨. 말씀하세요.

“현행 아이돌 부서와 새로 개편되는 단독 프로젝트의 차이점이 있나요?”

“네, 있습니다. 우리가 단독 프로젝트로 분리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세 번째 목표도 가시권에 둘 수 있게 되었어요.”

 

그는 또 다른 슬라이드를 펼쳤다.

마치 밤하늘처럼 새까만 배경 위로 새하얀 글자가 한 글자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른 회사의 개입 없이, 순수하게 우리가 만들고 우리가 진행하는 첫 번째 단독 라이브. 제 개인적인 세 번째 목표이자, 프로젝트의 첫 번째 목적입니다.”

 

밤하늘에 별이 떠오르듯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떠오르는 글자들은 마침내 모두 모여, 두 개의 단어를 만들었다.

[신데렐라의 무도회(가칭)]

 

”오직 여러분들만을 위한 무대. 내년 8월, 무도관 매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무도관......!”

“합동라이브라면 몇 번인가 해 봤는데, 우리들 단독으로도 가능해?”

“물론이죠. 할 수 있어요. 아니, 하도록 만들 겁니다. 그러려고 시작한 계획이니까.”

 

술렁대는 아이돌 일행과는 달리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치히로는 사무실의 구석에 쌓여 있던 그의 자료를 떠올렸다. 손 대지 말라고는 했지만, 사무실의 구석에서 그렇게 존재감을 과시하는 물건을 못본 체 하고 다닐 정도로 그녀는 신경이 두꺼운 편이 아니었다. 결국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치히로는 조심스레 자료의 뚜껑을 슬쩍 들춰 보았다.

그 자료는 다름아닌 그가 직접 현장을 뛰면서 모은 자료들이었다.

카에데를 만나기 3개월 전. 그러니까 아이돌 부서가 갓 설립되고 프로듀서가 입사한 11월부터 시작하여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혹은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라이브 공연장이나 스테이지, 혹은 방송사까지 돌아다니면서 그가 모은 정보로, 그 범위는 작게는 판매하는 기념품의 가격이나 구성에서 시작해서, 크게는 무대의 구성이나 음향, 조명연출 등 직접적인 연출 기술에 대한 부분과 마케팅 전략까지를 포괄하고 있었다. 개인이 만든 것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방대하면서도 구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는 그것을 프로듀서는 그저 '참고자료'라고 했지만, 그녀의 눈으로 보기에 그것은 참고자료의 수준을 까마득하게 넘어선 것이었다.

 

‘이걸 준비하느라고 계속 바빴구나……그것도 혼자서…….’

 

치히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전달사항을 마친 프로듀서는 프레젠테이션을 종료하면서 원탁에 앉아 있는 일행들을 둘러보았다.

 

“자, 그럼 오늘의 전달사항은 여기까지입니다. 질문 있으신 분?”

 

회의실 내부에 정적이 흘렀다. 프로듀서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없군요. 좋습니다.”

 

손에 쥐고 있던 레이저포인터를 다시 품 속으로 되돌리며 그는 일행을 돌아보며 힘주어 말했다.

 

”오늘 제가 말씀 드린 것은 어디까지나 초안이고 청사진이며 이상론일 뿐입니다. 회사의 방침, 업계의 사정, 혹은 기타 다른 사유로 얼마든지 계획은 바뀔 수 있어요. 그 때가 되면 제가 다시 말씀을 드릴 테니,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해 오셨던 대로 자신을 다듬고, 팬들을 위한 최고의 미소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만 해산!”

“”수고하셨습니다!!””

 

 

 

**********

 

 

 

 

“하아…….”

 

모두가 돌아간 사무실에서 홀로 남아 뒷정리를 하던 나는 문득 눈에 들어온 물건을 보고 손을 멈추었다. 오늘 아침, 사무실의 구석에 쌓아 둔 커다란 박스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월요일부터는 출장이고……별 수 없지, 내일 잠깐 와서 치워둘까.’

 

어디까지나 주관이 들어간 보고서였기에 작정하고 훔쳐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회사 사람들에게 보여줘서 득이 될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여차하면 산업스파이로 찍혀서 두 번 다시 스테이지 근처는 발도 못 붙이는 꼴이 날 수도 있었다. 가능하면 빠른 시일 내에 정리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오늘 하루만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면서 나는 멈추었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세운다. 실제로 벽에 부딪히기 전까지는.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내가 배운 것들, 내가 알게 된 것들은 어디까지 먹혀 드는 걸까?

나는 어디까지 그녀들과 함께 나아갈 수 있을까?’

 

이러한 생각을 가지면 가질수록, 지금까지 “문제 없다.”라고 굳게 믿어왔던 내 가슴 속에 불안감이 뭉게뭉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무르기에는 나는 너무도 멀리 와 버렸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나는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너버린 몸이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걸어온 것과는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길. 남들의 앞에 서서, 그들의 앞길을 이끈다는 행위의 무게감이 뒤늦게서야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보면, 내가 지나온 길을 제외한 다른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북극성의 별빛조차 보이지 않는 오리무중의 복판에서, 나는 자신을 다잡듯이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되돌아 갈 수 없는 길이라면 아예 끝까지 나아가서 그 끝을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지. 어디 한번 끝까지 가 보자.”

 

문득 올려다본 석양이 저무는 하늘에는 별빛이 반짝이고 있었다.내 걱정이 무색해질 정도로 밝게.

 

---------- <신데렐라 걸스> 끝.

 

 

프로듀서의 빅-픽처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적고 보니 왠지

본격적으로 등장인물이 늘어나기 시작한다는 광고를 게시물 2개에 걸쳐 장황하게 늘려 적은 꼴이 되었네요.

어찌되었든, 이 이야기를 기점으로 등장인물들이 이래저래 늘어날거에요.

그 아이들 하나하나가 모두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테지만 작가의 능력이 그 아이들을 모두 커버칠 수 있을지는 불명입니다.

 

그럼, 다음 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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