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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마스터]Cinderella Lady - Special_Track_0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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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18, 2015 23:59에 작성됨.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346 프로덕션의 마시…."

 

달칵!

 

미처 자기소개조차 다 끝나기 전에 인터폰이 매섭게 덜컥 끊어졌다. 하긴 이 정도야 예상한 바이니 새삼스레 놀라지도 않았지만, 다음 순간 문 너머에서 쿵쿵대는 발소리와 함께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뛰쳐나와 대뜸 멱살을 붙잡는 데에 이르러서는 아무리 각오를 단단히 한 카즈키라 한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더러운 놈아! 여기가 어디라고 쫓아와!"
"켁!"

 

난데없이 멱살을 잡힌 채 붕 내던져진 카즈키가 몇 발짝은 떨어져 있는 아스팔트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말이 좋아 던진 거지, 어쨌든 키 170cm 중반의 성인 남자인데 이토록 간단히 잡아 던질 수 있을 리가 없다. 무방비로 맨바닥을 구른 탓에 온몸이 쑤셔오는 걸 참고 허둥지둥 고개를 들자, 목덜미까지 시뻘겋다 못해 검붉게 물든 덩치 좋은 남자가 이마에 핏대를 세운 채 고래고래 악을 쓰고 있었다.

 

"꺼지라는 말 들었어, 못 들었어?! 당장 안 꺼져?!"
"…선생님."

 

이 판국에 저런 반응을 보여줄 수 있는 남자라고 해봐야 뻔하다. 사사키 치에의 아버지. 아마 이번 영업의 최대 난관 중 하나.

 

얼굴만 보면 어딜 봐도 흠 잡을 데 없는 40대의 가장이지만 정작 목 아래는 무슨 운동선수 마냥 골격도 굵고 근육도 탄탄하게 잘 두드러져 있다. 젊은 시절에 무슨 운동을 한 건지 저 나이가 되도록 덩치가 젊은이 못지않다. 하긴 저 정도는 돼야 단박에 남자 한 명은 들어다 던질 수 있겠지. 방금 전에 멱살을 잡았던 아귀힘도 그렇고, 어딜 봐도 말로 풀어나가기 힘든 인상이다.

 

제기랄, 이거 임자를 제대로 만났군. 하필이면 이런 사람이 걸릴 줄이야. 하지만 여기서 패대기 한 번 쳐진 것 정도로 물러날 거였으면 애초에 오지도 않았을 거다.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나 지저분한 코트 자락을 툭툭 턴 카즈키가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는 명함이 든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으려 했다.

 

"선생님, 일단 제 말을 좀 들어주시죠. 전 346 본사의…."
"본사고 나발이고!"

 

쩌억!

 

그 순간 득달 같이 달려든 그의 손아귀가 얼굴을 힘껏 후려갈겼다. 주먹으로 맞은 건지 손바닥으로 맞은 건지 도통 분간이 안 되는 타격음과 함께 카즈키의 목이 홱 돌아가고, 단 일격에 개구리 마냥 바닥으로 철푸덕 엎어진 카즈키의 정강이에 냅다 운동화로 감싼 두꺼운 발끝이 미사일처럼 꽂혔다.

 

"아악!"
"야, 이 양심도 없는 새끼야! 너 지금 내 말이 말 같지 않냐?! 아이돌이고 나발이고, 이제 더 이상 내 딸 인생에 나타났다간 그 땐 정말 니들 다 죽여 버린다고 했잖아!"
"서, 선생님…! 일단 제 얘기를 좀…?!"
"선생 소리 집어치워! 이제 와서 그딴 소리 해봐야 통할 것 같아?!"

 

대낮의 주택가 한복판에서 난데없이 펼쳐진 일대 폭력사태에 주변의 눈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대문이나 창문 너머에서 빠끔히 고개 내미는 시선들이 삽시간에 좁은 골목 전체를 에워싸고, 시뻘겋게 부어오른 뺨을 붙잡고 일어나려던 카즈키를 벌렁 자빠뜨린 그가 이젠 아예 카즈키의 셔츠 멱살까지 잡은 채 그 위에 올라탔다.

 

"야, 이 짐승 같은 놈들아. 너희는 그 핏덩이 같은 애를 보고 뭐 느끼는 것도 없냐?! 그 조막만한 애가 아주 피골이 상접해서 침대 위에 쓰러져 있는데, 그걸 보고서도 미안하다고 엎드려 빌진 못할망정 여기까지 쫓아와?!"
"……."
"다시 말하게 하지 마. 앙?! 앞으로 치에 인생에 다시 한 번이라도 나타났다간 그 땐 니들 정말 내 손으로 다 죽여 버릴 줄 알아! 내가 씨발 너희 정도 어찌 못할 것 같냐?! 그 잘난 건물에 아주 불 질러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니들 다 죽여 버릴 거야!"

 

코앞에서 멱살 잡힌 채 핏대까지 세우며 외치는 그의 고함에 주먹을 꽉 쥐었다. 느끼는 거? 그야 물론 있지. 어떻게 느끼는 게 없겠어.

 

그 조그만 여자아이가 무대에서 쓰러질 때까지 거쳤던 혹사를 생각하면 아직도 피가 거꾸로 솟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아이가 그런 일을 겪었으니만큼 부모가 이러는 것도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납득은 납득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사사키 치에가 쓰러진 사고를 대신하여 제공할 수 있는 조치들을 마련해 온 이상, 이젠 저들이 들어줄 때까지 난 여기 뼈를 묻을 각오라도 하고 물고 매달려야 한다.

 

일단 여기서 자신은 346의 아이돌 육성 부서 전체를 대변하고 있다. 내가 물러나면 346이 물러난다는 거고, 그 순간 블루 나폴레옹의 부활은 완전히 물 건너가는 거다. 거기서 기어코 이를 꽉 문 카즈키가 퉁퉁 부은 뺨을 우물거리더니 매서운 눈매를 번뜩이며 입을 열었다.

 

"…물론… 압니다. 선생님이 화내시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걸 안 다는 놈이…!"
"하지만 어찌 됐든… 따님 건에 대해선 저희도 확실한 해결책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 거절하셔도 좋으니 일단 제 얘기라도…."
"이 새끼가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기어코 퓨즈가 나가버린 건지 이까지 꽉 문 손바닥이 번쩍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그야말로 태양을 가려버릴 기세의 두터운 손바닥을 보자 이젠 기가 막힌 나머지 맥이 탁 풀려버렸다. 비주얼만 봐도 무시무시한 저런 손으로 얻어맞기 시작하면 이젠 정말 걸어서 도쿄로 돌아가는 건 포기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망할. 실컷 때려라. 때리는 대로 맞아줄 테니 실컷 팬 다음 화 좀 풀고 내 얘기라도 좀 들어달라고. 그렇게 다 포기한 채 다음 순간 얼굴 어디든 후려갈길 손바닥을 상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어이, 거기!"

 

삐이이이익!

 

난데없이 귓가를 찌르는 호각 소리에 한참이나 폭력의 중심에 서 있던 카즈키와 남자의 고개가 동시에 호각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휙 돌아갔다. 그러자 보이는 건 골목 어귀에 서 있는 파란 제복. 타고 있는 건 하얀 자전거. 당혹스럽다 못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중년 경찰관의 얼굴이 카즈키와 남자 쪽을 번갈아 보더니, 물고 있던 호각을 뱉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외쳤다.

 

"지금 거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일단 서로 같이 가시죠!"

 

살다 살다 경찰이 반가워지는 날이 올 줄이야. 머리털 나고 못 해본 경험 여기서 다 한 번씩 해본다는 생각에 피식 헛웃음을 흘린 카즈키의 뒤통수가 바닥에 툭 닿았다.




폭력상해 사건은 불기소가 원칙인지라 일단 눈에 띄면 합의 의사와는 별개로 경찰 조사는 필수로 들어가게 된다. 일단 가까운 파출소까지 간 뒤에야 그 사실을 깨닫고 만에 하나 그가 유치장에라도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냐는 생각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파출소장은 카즈키가 예상하던 것보다는 많이 유연한 사람이었다.

 

"소타! 님마 즉당히 해라! 니 그러다 진짜 사람 하나 잡는다 안 카나!"
"……."
"글고 거 아재도 운 좋은 줄 아소. 점마가 내 후밴데, 저 나이 묵고도 아직 성질이 저래싸서 잘못 엥기믄 진짜 단칼에 가부린다 아입니꺼."

 

손에 든 경위서 두 장을 흔들어대며 버럭버럭 성을 내는 파출소장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도 힐끔 경위서의 이름을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사사키 소타(佐々木崇多)라는 이름이었구나. 통성명을 파출소에서 경위서로 하게 되다니 웃음도 안 나오는 현실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지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소장님. 이번 건은 불기소로…."
"마, 댔심더. 점마도 내 후배고 보이까 아재도 머 잘못캐싼 것도 없응께. 원래 폭력상해는 불기소인디, 내 아재 사정 들보니 딱하기도 카고 해서 함 모른 척 하겠심더."
"정말 감사합니다."
"마, 소타! 사람이 양심 있음 와서 고맙다코 인사라도 해야 안 카나! 이 아재 아니었음 니 오늘 유치장 들어갔…."
"…칫."

 

소장의 고함에 가볍게 혀를 찬 소타가 매몰차게 몸을 돌리더니 인사도 않고 파출소를 빠져나왔다. 닫는다기보단 부수는 것에 가까운 기세로 닫힌 파출소 문이 요란하게 흔들거리자 책상에 앉아 경위서 두 장을 가까운 세절기에 밀어 넣은 소장이 오만상을 쓰며 혀를 끌끌 찼다.

 

"하이고, 점마도 아직 사람이 들 댔다 안 카나. 하긴 머 딸자석 나노코 그런 꼴 봤응께 내 맘이야 모르는 건 아잉데."
"……."
"근디 아재요. 증말 게속할끼요? 점마가 후배라서 아는데, 점마 저거 생긴 대로 아주 황소고집이라 먼 말을 해도 씨알도 안 멕힐 틴디…."
"이만 가보겠습니다."
"…마, 댔다. 욕보소."

 

이젠 말릴 마음도 들지 않는지 손만 팔락팔락 흔들어 보이는 파출소장을 등진 채 재빨리 파출소를 나섰다. 벌써 저만큼 멀어져 있는 그를 쫓아 허둥지둥 걸음을 좁혔지만 등 뒤로 따라오는 자신에게 소타는 고개 한 번 돌리는 일 없었다.

 

매몰찬 태도였지만 어차피 상처받을 이유도 없다. 말이 안 통하리라는 건 알고 있었고, 어디가 됐든 몸 성하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도 예상 범위 내다. 이럴 때에는 차라리 말을 안 붙이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에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저 멀리 거뭇거뭇한 석양이 짙은 먹구름에 싸여 가려지고, 골목을 휩쓰는 스산한 바람이 몇 발자국의 거리를 둔 채 걷는 두 남자를 휩쓸었다.

 

"…어이."

 

그리고 결국 말을 꺼낸 것은 앞서가던 소타 쪽이었다. 그렇게 얻어맞고 파출소까지 끌려간 것도 모자라 기어코 대문 앞까지 쫓아온 카즈키를 향해 소타의 굳어있는 시선이 화살처럼 쏘아져 박혔다.

 

"당신 말 못 들었어? 여기가 어디라고 쫓아오는 거야!"
"말씀 좀 나누고 싶어 쫓아왔습니다."
"말쓰음? 하, 이 판국에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이건 그냥 바보인 건가, 아니면 고집인 건가. 기가 막힌 나머지 헛웃음을 터뜨린 소타가 냅다 대문을 쾅 두들겼다. 두터운 철문이 무슨 지진이라도 난 것 마냥 덜그럭덜그럭 흔들리는 광경에 카즈키의 모골이 송연해지고, 그런 그를 향해 당장이라도 또 달려들 것처럼 몸을 굽힌 소타가 물어뜯을 기세로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렇게 얻어맞고 아직 정신을 못 차렸어? 이봐, 당신 지금 이게 장난으로 보여? 당신네들 돈놀이 따라다니다가 우리 딸 잡을 뻔했다고! 넌 그 핏덩이가 불쌍하지 않냐?!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야!"
"…그 건에 대해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부모 입장에선 억장이 무너지는 일일 테니 무슨 변명도 필요하지 않다. 다시 한 번 고개를 팍 숙였다 든 카즈키가 떨리는 목젖을 억누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렇기에 그 실수를 만회하고자 하는 겁니다. 이번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겁니다."
"아, 됐고! 얼른 꺼져! 이제 네놈들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아?!"
"제 얘기를 들어주시기 전까진 못 갑니다."
"이, 이 새끼가…!"

 

결국 또다시 퓨즈가 풀려버린 소타가 솥뚜껑 같은 손바닥을 불쑥 치켜들었다. 거기서 또다시 각오한 듯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 물었지만, 그런 카즈키의 예상과는 달리 치켜든 손을 부들부들 떨던 소타는 이윽고 맥없이 들었던 손을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에이, 씨발!"

 

한 번은 모를까 차마 두 번이나 손찌검을 할 순 없을 것인지 애꿎은 문을 향해 욕을 퍼부으며 열쇠를 꽂아 문을 열었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재빨리 걸음을 옮겨 그의 뒤를 쫓으려 했지만, 다음 순간 문틈 너머로 매섭게 번뜩이는 눈동자를 들이민 소타가 카즈키를 향해 재차 일갈했다.

 

"어딜 들어와?! 꺼져!"
"선생님. 정말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니 설명이라도 좀…."
"됐어! 제기랄, 얼어 죽던가 말던가!"

 

쾅!

 

무시무시한 고함과 함께 대문이 매섭게 닫히고, 스산한 바람이 우뚝 선 카즈키의 몸을 한 번 쓸고 지나갔다. 괜히 느껴지는 으슬으슬한 한기에 몸을 한 번 떨고 뺨을 만져보자, 분명 보기 좋게 부어있을 뺨의 감촉이 손끝이 지나가는 곳마다 따끔하게 피부를 찔러댔다.

 

"…하아아."

 

그래, 될 리가 없다. 이건 애초에 영업조차 될 수 없었다.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일이다.

 

9살 딸아이의 안위로 눈깔이 뒤집힌 부모한테 그 관계자가 어떤 설명을 한들 통할 리가 없었다. 이건 정말 헛수고다. 앞으로 저들의 마음을 돌리려면 얼마나 더 시간과 정성을 퍼부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을 지경이다. 그런 지극정성을 들여서 차라리 설득할 수 있다는 보장이라도 있다면 뭐든 해볼 테지만, 그런 보장조차도 없다는 점에서 이건 정말 기약 없고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단 오늘은 물러나자. 얻어맞고 파출소 오락가락하고 한 걸로 나도 지금은 제정신이 아니고, 머리를 좀 식힌 다음 계속하자. 이대로는 뭘 해도 잘 안 풀릴 거야. 일단 내일 아침에 일찍 나와서 다시 한 번 찾아오자. 괜찮아. 시간은 많아. 정성을 보인다면 언젠가 저들도 알아줄 거….

 

"…으음?"

 

그 때 별안간 주머니에서 낮은 진동이 느껴졌다. 더듬더듬 안주머니에 넣어놨던 영업용 피처폰을 꺼내 펼치자 보이는 건 메일 착신 알림 1건. 무슨 일인가 싶어 메일박스를 열어보자 방금 전 도착한 걸로 눈에 보이는 것은.

 

"…카와시마 양."

 

— 이쪽은 성공.

 

다른 군더더기 하나 없는, 내용이라고는 오로지 그것 뿐인 메일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머리의 피가 싸그리 식어버렸다. 방금 전까지 떠올렸던 약한 마음들이 그 한 통으로 모조리 고개를 처박아버렸다.

 

"성공한 건가."

 

그녀는 당초 목표를 훌륭하게 완수한 모양이다. 블루 나폴레옹의 의견을 하나로 모아냈고, 아마 그 광경들을 전부 캠코더에 담았을 것이다. 역시나 그녀에게 맡기길 잘 했다. 말솜씨야 나무랄 데 없는 아나운서 출신이니, 분명 큰 어려움 없이 블루 나폴레옹의 의견을 하나로 수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나다. 내가 이 벽을 뛰어넘어야 한다.
난 이제 도망갈 수도 없다. 후퇴도 할 수 없다. 지금 여기서, 저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

 

환하게 불을 밝힌 액정 위로 한들한들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폴더를 탁 덮어 품속에 집어넣고, 가방을 발치에 내려놓은 채 허리를 곧게 편다. 한 송이 두 송이 떨어지던 눈발이 어느덧 제법 굵어져 머리에 얹히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거리가 하얗게 물들고, 입에서는 하얀 김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얻어맞고 구른 곳이 싸늘한 눈발의 냉기에 지쳐 비명을 질러댄다. 온몸 구석구석 안 쑤신 곳이 없고, 부어오른 뺨은 여전히 맵고 쓰리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 굳게 서서 문을 바라본다. 변함없이 굳게 닫혀 있는 저 문 안, 저 안에 자신이 얻어야 하는 마음이 여전히 틀어박혀 있다. 내가 사야 하는 마음이 있고, 내가 사람을 팔아야 하는 마음들이 저기에 있다.

 

"팔아야 하는 것은 사람."

 

그러므로 사람을 팔고 싶다면, 세상의 마음을 얻어라.
열정만으로는 부족하다. 너의 진심을 도구로 사람을 팔아라.

 

"그리고 고객은… 온 세상."

 

지금 눈앞에 있는 저 사람들이, 바로 나의 고객이다.

 

2월의 오사카. 하늘을 하얗게 물들이며 쏟아지는 눈발에도 아랑곳 않고 우뚝 선 카즈키의 발끝은, 요만큼의 요동도 보이지 않았다.




"여보."

 

저녁 식사를 거치고 잠자리에 들기까지 집안을 감돌던 거북한 침묵을 깨고, 처음으로 아내인 사사키 미사토(佐々木美里)가 입을 열었다. 막 이불을 들추고 침대 안으로 들어간 소타가 어깨를 움찔 떨더니, 잡아당기려던 스탠드 줄을 놓고 힐끔 미사토를 돌아봤다.

 

"왜?"
"…일단 만나라도 보는 게 어때요?"
"뭐어?"
"밖에 눈도 오고 있고… 그리고 혹시 모르잖아요?"

 

벌써부터 맘 약한 소리를 늘어놓는 아내의 모습에 이마를 딱 짚었다. 하여튼 이 사람은 이게 문제야. 다른 것도 아니고 딸이 걸린 문제인데 벌써부터 마음 흔들려서 이 모양이라니, 이 사람은 대체 왜 이렇게 착해빠진 거야. 그거 보고 결혼한 거긴 하다만 이건 너무하잖아.

 

"하아, 여보. 맘 약해지지 마. 저 놈 밖에서 얼어 죽으면 저 놈 탓이지 우리 탓이야?"
"하지만 저렇게까지 지극정성이잖아요. 저렇게까지 공 들이면 어쩜 정말 제대로 된 사람일 수도…."
"아, 제대로 되긴 뭘 돼?! 시끄럽고, 더 이상 그 놈 신경 쓰지 마."
"여보, 그러지 말고….
"시끄럽다 했잖아! 저런 놈은 한 번 얘기 들어주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어! 신경 끄고, 당신도 맘 굳세게 잡아! 저 놈 들여보냈다간 당신도 아주 혼구멍이 날 테니까!"
"……."

 

저렇게까지 굳세게 말하면 더 이상 설득할 수도 없다. 평소에는 무난하게 좋은 사람이지만 아직도 젊은 시절의 욱 하는 성질이 종종 보이곤 하던 남편이고, 특히 치에와 관련된 일이라면 아주 쉽게 이성을 잃어버리는 다혈질 딸 바보다. 이미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적어도 그의 마음은 절대로 돌릴 수 없다.

 

설령 내가 허락해도 그가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터이니 이젠 이 문제를 더 붙잡고 늘어질 수도 없다. 인정사정없는 것 같긴 하다만 어쩔 수 없는 일일 테지. 결국 울적하게 고개를 끄덕인 미사토가 살그머니 침대 안으로 들어오더니 훌쩍 등을 돌렸다.

 

"…잘 자요."
"그래. 내일 치에 보러 가자고."

 

월요일에 퇴원하니 그 때 나오면 일단 맛있는 거라도 사줘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소타가 막 스탠드 줄을 잡아 다시 잡아당기려 할 때, 별안간 찌를 듯한 전화벨 소리가 침실을 가득 메웠다. 때르르르릉!

 

"…으음?"
"이런 시간에 전화…?"

 

평소 같았으면 인상이라도 썼을 테지만, 딸이 병원에 있으니만큼 어떤 전화라 한들 함부로 흘려보낼 수 없다. 허겁지겁 일어나 옆에 뒀던 휴대전화를 집어 들자 낯선 착신 번호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사리나나 히나 건 아니고, 다른 병원 관계자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귓가에 가져다 대자, 사랑스럽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 …아빠.
"치에? 무슨 일이니, 어디 아파?"
— 으응. 그냥 아빠 목소리 듣고 싶어서.

 

말은 그렇게 하다만, 딸이 얼마나 조숙한 아이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소타로서는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었다. 어느새 나란히 침대에서 일어나 옆으로 바싹 다가온 미사토에게 살짝 눈을 돌린 소타가 살짝 몸을 숙인 채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는 거니? 아빠한테 말해보렴."
— 으응. 이건 내일 엄마랑 아빠한테 직접 얘기할래.
"…뭐 고민하는 거 있어? 엄마 바꿔줄까?"
— 그런 건… 아니에요.
"하아… 치에. 뭔진 모르겠지만, 아빠한테 솔직하게 말해볼래?"

 

이런 걸 숨기는 아이로 키웠던 적도 없고, 할 말이 있으면 바로바로 하던 아이다. 그런데 이런 아이가 갑자기 자기들 앞에서 이리저리 말을 돌려대면 보통 용건이 아니라는 얘기다. 뭔지는 몰라도 내일까지 기다려도 될 만한 일은 절대 아닐 것이다.

 

물론 그 용건이라는 게 뭔지는 자신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기도 싫은 그런 끔찍한 가정들 따윈 잠깐이라도 치워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바람도 무색하게, 잠깐 뜸을 들인 후 한 번 숨을 몰아쉰 딸의 대답은 그런 아비의 기대를 무참하게 배신하고 말았다.

 

— …아빠, 나… 블루 나폴레옹 계속하고 싶어.
"뭐, 뭐…?!"
— 나, 더 큰 데로 올라갈 수 있다고 들었어. 그러니까….
"…치에야. 네가 무슨 얘길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거기에 귀 기울일 필요 하나도 없단다."

 

이 미친 새끼가! 우리로도 모자라 이젠 치에까지 만나본 건가! 분명 면회 제한도 걸었을 텐데?!

 

도대체 어딜 어떻게 비집고 들어가서 착한 딸을 홀려낸 건지는 몰라도, 이건 더 이상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이마에 튀어나온 핏대를 꾹꾹 누르며 한 순간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은 소타가 전화기를 으스러뜨릴 듯 붙잡은 채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그놈들 다 나쁜 놈들이야. 그 사람들 쫓아가면 치에 아야 해요! 치에 착한 아이지? 엄마아빠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지?"
— 하, 하지만 사리나 언니도 히나 언니도 한다고 했고, 그리고 미즈키 언니도 새로 들어와서….
"그 미즈키가 누군진 몰라도, 분명 치에를 많이 괴롭게 할 거야. 치에야, 이건 아빠가 하자는 대로 하자. 치에, 착한 아이지? 그러니까 엄마 아빠 말 잘 들으면 앞으로…."
— 그, 그럼 그냥 나 나쁜 아이 할래!

 

…뭐? 순간 상상도 못한 대답에 부모의 표정이 얼어버렸다.

 

"치, 치에야…?"
— 나, 나 나쁜 아이가 되어도 좋아! 하지만 정말로 하고 싶어! 블루 나폴레옹, 언니들 모두랑 같이 계속해서 더 큰 데까지 가고 싶어!
"저, 저기 잠깐만… 얘…?"
— 내가 정한 거야! 나, 정말 블루 나폴레옹 계속하고 싶어! 오늘까지 엄청 아프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계속 하고 싶어! 모두랑 다 같이, 엄청 크고 반짝반짝 빛나는 데서 춤추고 싶어!

 

그 착한 딸에게서 들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해본 대답이었다. 당황한 나머지 대답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부모는 허우적대고, 전화 너머 악에 받친 딸의 목소리가 부모의 귓가를 왱왱 울린다. 지금껏 부모도 몰랐던 마음들이 자식의 입을 타고 전해진다. 평생 들을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마음들이 온힘을 다해 귓가를, 마음을 울린다.

 

— 그러니까 엄마, 아빠! 부탁할게요! 나 정말 노래하고 싶어!
"……."
— 언니들이랑 같이 노래하고 춤추고,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충격에 얼어버린 부모 중 누구도 차마 먼저 입을 열 수 없었다.

 

생전 딸을 키우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외침에 놀라버린 탓에, 마땅히 해줄 말조차도 떠오르지 않았다.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처음으로 부모가 모르는 말을 입에 담았다.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혼란으로 꽉 차버린 나머지, 한심하게도 뭐라고 해줄 말조차도 찾을 수 없었다.

 

"…일단 내일 얘기하자."

 

결국 소타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어떻게든 날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파자마 앞섶을 꽉 움켜쥐었다.

 

"내일 엄마아빠 보고 얘기하자꾸나. 알겠지?"
— 으, 으응. 미안해요. 아빠.
"그래, 우리 딸. 사랑한다. 내일 보자."

 

뚝.

 

놀란 듯 허둥지둥 전화를 끊어 침대 위로 내던졌다. 누구 하나 함부로 입을 열 수 없는 침묵. 무엇보다 진지하고 무게감 있는 침묵이 두 부부가 나란히 앉은 침대 위를 무겁게 짓눌렀다.

 

치에가 얼마나 착하고 조숙한 아이인지는 누구보다 자신들이 제일 잘 안다. 지금껏 9년 동안 저 아이를 키워오면서 뭐 사달라는 말 한 번 들어본 적 없다. 너무나도 조용하고 조숙하면서도 생각은 웬만한 어른 못지않게 깊어서, 때로는 도저히 9살 여자아이를 기르는 것 같지 않아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9살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조숙한 딸은 언제나 우리 내외의 자랑이면서, 때로는 너무나도 어른스러운 모습 때문에 부모를 걱정하게 만드는 조금은 곤란하기까지 한 아이였다.

 

'그런데….'

 

그런 아이가 처음으로 우리에게 떼를 썼다. 9년 만에 처음으로 우리에게 뭔가를 하고 싶다고 강하게 졸랐다.
블루 나폴레옹을 계속하고 싶다고, 그 모양이 되면서까지 더 크고 멋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딸의, 그 조숙했던 딸의 부탁이다. 이걸 대체 어떤 말로 물리쳐야 옳단 말인가.

 

"…나가 볼게요."

 

결국 침묵을 깨고 미사토가 몸을 일으켰지만 소타는 붙잡지 않았다. 조용히 옷장을 열어 가디건을 꺼내 걸친 아내가 문가에서 살짝 몸을 돌려 남편을 바라봤다.

 

"물론 아마 돌아갔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니까."
"……."
"다녀올게요."

 

달칵. 문을 닫고 침실을 나섰다. 남편은 붙잡지 않았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복도를 가로질러, 대충 두터운 슬리퍼를 꺼내 신고 문을 열자 대번에 굵직한 눈발이 미사토를 반겨주었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머리에 쌓이기 시작한 눈을 툭툭 털어 치우며 뜰을 지나 대문 앞에 선다. 슬슬 시려서 곱기 시작한 손으로 몇 번이고 문고리를 미끄러뜨린 끝에, 겨우 잠금장치를 달칵 열고 슬쩍 대문을 연다.

 

그러자 눈앞에 드러난 것은.

 

"…세상에…!"

 

온몸에 하얀 눈이 쌓인 채 대문 앞에 우뚝 서있는 사람의 형상.

 

처음 왔을 때 봤던 자세 그대로, 한 치의 요동도 없이 그 자리에 서있는 모습 앞에선 이젠 기가 질려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깨도 머리도 발등도 눈에 잔뜩 쌓여 있고, 하얗게 질린 얼굴은 입술만 파랗게 물들어 있어 이젠 그냥 동사한 시체나 마찬가지다. 간헐적으로 뿜어지는 하얀 입김조차 없었다면 그 자리에 선 채로 얼어 죽었다고 착각해버릴 지경이었다.

 

"맙소사… 당신, 지금까지…?"

 

말 그대로 눈사람이 된 채 몇 시간이고 그 자리에 붙박여 있는 상대의 모습에 미사토의 입에서 기가 막힌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그 모습에 비로소 앞머리에 쌓은 눈을 부스스 털며 고개를 든 눈사람, 카즈키의 입에서 당장이라도 죽을 듯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서, 서, 선생님이… 제, 제… 마, 말을… 들어 주, 주실… 때까지…."

 

곧 죽을 것 같은 눈을 하고, 곧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곧 죽을 것 같은 목소리를 하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꼿꼿하고 굽힘 없는 모습으로, 번뜩이는 불꽃이 타오르는 눈을 쳐들고.

 

"저, 전… 아무데도… 모, 못 갑니다…!"

 

쏟아지는 눈조차 얼려버릴 수 없는 열정이, 이를 꽉 깨문 채 자신의 고객을 바라봤다.


세상 모든 영맨이 다 이러진 않습니다.

즉, 이런 예가 아주 없다는 건 아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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