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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가 망토 속에 감추고 있는 것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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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6-08, 2016 01:56에 작성됨.

프로듀서의 P는 퍼스널리티의 P 시리즈의 P가 등장합니다. 인물이 궁금하다면 한번쯤 읽어주시면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 시기상 [퍼스널리티P 시리즈] 넘어져 본 사람은 일어서는 법을 안다 의 1개월 전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 P가 찌질해 보일 수 있습니다. 아니, 찌질해 보일 겁니다. 아마도.

 

 

 

 

프로듀서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비슷하다. 대부분의 경우 그의 어마어마한 덩치에 한 번 놀라지만, 고개를 들어 언제라도 미소가 장전되는 그의 넉살 좋은 얼굴을 보면 금세 마음을 놓고 자기 자신도 모르게 같이 미소를 띠게 된다.

이것은 그가 담당하는, 혹은 그가 스카우트한 아이돌의 부모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12월 22일, 나가노 현에 위치한 사기사와 가(家).

 

“일단은 이게 이번에 나온 싱글 앨범이고…….”

“세상에, 이게 우리 후미카에요?”

“여기 보시면 싸인회 사진도 있고, 잡지에도 이렇게…….”

“여보, 이거 봐요. 어쩜 이렇게 잘 나왔는지…….”

“으음, 그 녀석한테 전화로 듣기는 했지만 이건…….”

탁자 위에 수북하게 쌓인, 문자 그대로 ‘자신’이 들어있는 상품들을 앞에 두고 후미카는 터질 듯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어올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상이, 사기사와 양의 활동 실적입니다.”

“잘 봤어요. 그나저나, 시간이 늦었는데 프로듀서 씨 자고 가지 그래요? 방이라면 있는데.”

“저는 내일도 출근이라서요.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아아, 그랬구나. 그러면 별 수 없지요.”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후미카의 어머니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당사자를 앞에 세워 둔 채, 마치 영업을 방불케 하는 자랑열전이 드디어 끝났다. 여전히 터질 듯 새빨갛게 달아오른 후미카를 한 번 바라본 뒤 프로듀서는 천천히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폐를 끼쳐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저희도 저희 딸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궁금하던 참이었으니까요. 그렇죠, 여보?”

“흐, 흠! 뭐, 딸에게 헛짓거리는 안 한 모양이군. 아무튼, 앞으로도 지켜 보겠네.”

“네, 맡겨만 주십시오.”

다시 한번 정좌한 채로 깊게 고개를 숙이고, 프로듀서는 주섬주섬 짐을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제가, 배웅해 드릴게요!”

프로듀서를 뒤따라 일어서려는 어머니를 제지하며 대신 후미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나와도 되는데.”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요…….”

“그렇다면야 별 수 없지만…….”

현관으로 나온 프로듀서는 가지런히 벗어 둔 단화를 고쳐 신고, 문을 열기 전 마지막으로 후미카에게 말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걱정하지 말고 새해 첫날까지 푹 쉬고 와. 알겠지?”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쉬는 건 좋지만 또 예전처럼 날밤 새면서 책 읽지는 말고. 1월부터 곧바로 라디오 일정 잡혀 있으니까. 알겠지?”

“네…….”

프로듀서가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후미카는 재빨리 외투를 걸치고 그를 뒤따라 나갔다.

“거참, 안 나와도 된다니까.”

“그래도……저기, 살펴 가세요…….”

“알았다, 알았어. 감기 걸리니까 어서 들어가.”

현관 밖으로까지 따라 나오는 후미카에게 들어가라는 손짓을 하면서, 프로듀서는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저기, 대문까지만이라도, 좋으니까요…….”

“그래, 그래.”

졌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면서 프로듀서는 대문을 나와 담장 앞에 세워놓은 자동차 옆으로 걸어갔다. 지금 그의 옆에 있는 검은 광택이 흐르는 자동차는 회사에서 사용하는 승용차가 아니라, 도로에 나가기만 하면 반경 10m는 강제로 안전운전 구간으로 만들어버릴 정도의 가치를 자랑하는 최고급 외제차였다. 그가 선수 생활을 하던 시절에 받았던 자동차로, 한동안은 미국에 있는 차고에 처박아놓고 다녔지만 프로듀서로써 활동범위가 넓어지게 되자 지금처럼 사적인 일로 자동차를 사용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가져온 것이었다.

프로듀서의 얼굴은 곧 아이돌의 얼굴이기도 하니까.

미국에서 사용하던 자동차라 그런지 그 자동차는 특이하게 운전석이 왼쪽에 있었다. 한 바퀴 빙글 돌아 프로듀서가 운전석에 들어가자, 대문 건너편에서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후미카는 또다시 꾸벅, 하고 허리를 숙인다. 7년이나 묵은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게 시동이 걸리고 전조등이 켜진다. 엑셀레이터를 밟기 직전, 프로듀서는 차창을 내려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빨리 들어가! 감기 걸린다!"

후미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묵직한 엔진소리를 높이는 자동차의 빨간 테일램프의 빛이 사라질 때까지, 후미카는 손을 흔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자동차가 완전히 사라지고, 후미카는 새빨갛게 곱은 손을 호호 불면서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코타츠가 설치된 거실로 돌아가자, 어머니가 프로듀서가 놓고 간 책자나 자신의 솔로CD를 정리하고 있었다.

“프로듀서 씨는 갔니?”

“네……”

“아버지는 서고로 가셨어. 네 노래를 듣고 싶다면서. 이러니 저러니 해도, 늘 네 이야기를 하고 다니셨단다.”

“그랬군요…….”

코타츠에 들어가 두 손을 녹이는 후미카에게, 어머니는 미리 까 놓은 감귤을 하나 꺼내주었다.

“프로듀서 씨, 좋은 사람이더구나.”

“네…….”

다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면서 후미카는 고개를 푹 숙였다.

”너를 똑바로 봐 주고, 너를 아껴주고……정말로, 우리 그이를 보는 것 같았어.”

“맞아요……아, 아니, 맞다는 건 그 쪽이 아니라.”

“내 경험상, 저런 사람은 여난(女難)이 있어. 그렇지 않니?”

후미카는 대답을 망설였다.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세 사람의 얼굴 때문이었다.

“후훗, 힘내, 우리 딸.”

“아으으…….”

자상하게 머리를 쓰다듬는 어머니의 앞에서, 후미카는 좀처럼 식을 줄 모르는 열기를 품고 점점 새빨갛게 되어갔다.

 

 

 

연말이 다가오면, 일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프로듀서의 가정방문이 시작된다.

가정방문이라지만 결국은 주로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하는 성과 보고 같은 것으로, 그 내용은 대체적으로 비슷한 편이다. 댁의 따님이 이렇게 성장했고, 이렇게 잘 나가고,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라는 것. 옆에서 보고 있는 본인 입장에서는 얼굴이 뜨겁다 못해 터져나갈 지경이지만 CD나 사진집, 잡지 등을 내밀며 입에서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늘어놓는 프로듀서나, 그것을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부모님의 얼굴을 보면 그만 하라고 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연말 휴가가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가 그에게 물어보면, 프로듀서는. “뭐, 내 입장에선 영업하는 거랑 별 차이가 없으니까” 라며 적당히 웃어넘긴다.

그렇게 가정방문을 마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아이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그는 들어올 때와는 반대로 혼자서 도쿄로 돌아간다.

아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뒤돌아서는 그의 눈빛에, 그리고 그의 발걸음에 부러움이 담기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지. 하지만 아직은, 아무도 그 사실을 눈치챈 사람이 없었다. 본인마저도.

 

 

 

************

 

 

 

후미카의 집을 나와서 고속도로에 접어들기 전, 나는 잠시 도로변에 차를 세워놓고 조수석의 가방에서 두 병 남은 스태미나 드링크 중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열고 단숨에 들이켰다. 때마침 휴대전화가 치히로의 번호를 띄우면서 진동하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프로듀서 씨? 지금 어디세요?]

“나가노입니다. 사기사와네 집에서 막 나온 참이에요. 무슨 일인가요?”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다소 실망한 듯 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뇨, 도쿄 근처에 오셨으면 같이 술이나 한 잔 할까……싶었는데요.]

나는 왼팔에 찬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 9시. 회사에 도착하면 못해도 12시는 될 것이다.

“하하, 오늘은 날이 아닌가봅니다. 애들은 휴가지만 저희는 내일도 일 해야 하니까, 과음하지 말고 적당히 드세요.”

[네~ 프로듀서 씨도 무리하지 말고 안전운전 하세요.]

“네. 걱정 마세요.”

휴대전화를 콘솔박스 옆에 걸어둔 거치대에 꽂아놓고, 나는 실내등을 켜고 수첩을 펼쳤다. 아직은 드링크의 효과가 덜 퍼진 듯 나른한 느낌이 남아 있었다.

최근 1주일간 업무량을 줄인 대신 남는 시간을 모조리 이동에만 할애한 결과 생각보다 안정적으로 가정방문을 마칠 수 있었다. 자취를 하고 있는 미나미의 경우는 원래 히로시마까지 동행을 해야 했지만, 본인의 의지로 남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별 수 없이 나만 따로 내려가서 부모님을 뵙고 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라이브 의상 건으로 길길이 날뛰시는 아버지 덕분에 하필이면 히로시마 앞바다에 수장(水葬) 당할 뻔 하긴 했지만. 가급적이면 다음부터는 미나미와 함께 가야겠다고 다짐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어휴, 그 때만 생각하면 진짜……정말로 기가 강한 분이셨지.’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치히로가 꽤나 고생을 했지만, 그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것을 잘 챙기는 사람이니까 별 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올해는 사람이 없어서 이 정도지만, 연습생들까지 받고 나면 내년엔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걱정도 떠오른다. 당장 양성소에서 특별채용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 중에서는 쿠마모토나 관서 출신들도 꽤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슬슬 매니저 팀을 따로 구성해야 할 필요성도 느껴지고 있었다.

드링크의 효과가 올라오는 듯 점차 의식이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마지막으로 명단을 살펴보던 중, 수첩에 적혀 있는 한 이름이 내 시선을 잡아 끌었다.

“아나스타샤.”

낯선 울림을 담은 그 이름을 불러 보았다. 아직 CD나 솔로 데뷔는 하지 않았지만, 독특한 외모로 인해 잡지나 화보 쪽으로는 빠르게 인지도를 늘려가고 있는 아이였다.

‘그러고 보면, 그 아이도 고향이 꽤나 멀었지.’

생각을 수첩과 함께 접어 넣고 나는 다시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남자의 심장을 자극하는 엔진의 진동이 스티어링을 타고 올라온다.

“자, 힘내서 가 보자고. 빨리 가서 자야지.”

나가노에서 도쿄까지 약 2시간 30분. 자신을 격려하듯 혼잣말의 볼륨을 올리며, 나는 가속페달을 누르는 발에 힘을 주었다.

 

 

다음 날, 평소보다 다소 무거운 발걸음으로 사무실에 출근하자 먼저 와 있던 치히로가 나를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프로듀서 씨. 오늘은 제가 먼저 왔네요?”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어제는 일찍 들어가셨죠?”

”그건 제가 해야 할 말 같은데요……어제 몇 시에 도착하셨어요?“

“어어, 새벽 1시였나……? 도내로 진입하는데 갑자기 차가 막혀서 말이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4일 전에는 히로시마, 엊그저께엔 센다이, 그리고 어제는 나가노. 4일 내내 운전대만 잡고 있었으니 어깨가 내려앉을 만도 하지.

“고생하신 프로듀서 씨에게, 센카와 특제 녹차를 하사하겠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 나는 묵직한 뒷목을 꾹꾹 눌렀다. 내 책상 위에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녹차를 올려다놓으며 치히로는 스케줄 보드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용케도 일정을 다 정리하셨네요.”

다소 난잡하게 적혀 있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12월의 마지막 1주일간은 카에데와 트라이어드 프리머스, 뉴 제너레이션을 제외한 다른 인원의 일정은 대부분 빠져 있었다. 겨울 라이브가 끝난 직후에 휴식 차원에서 기획한 것도 있지만, 이제 내년이 되면 올해보다도 훨씬 바빠질 것이므로 사실상 올해의 연말이 고향에서 가족과 보내는 마지막 연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뭐, 덕분에 이쪽은 계속해서 야근의 연속입니다만.”

“앞으로 새로운 아이들이 들어올 때마다, 계속 이렇게 하실 건가요?”

“설마요. 제 손으로 감당이 안 된다 싶으면 매니저를 붙이던지 해야겠죠. 뭐, 그래도 지금은 모두들 제 손이 닿는 곳에 있으니까……가능하면 제가 다 해주고 싶어요.”

내 말을 들은 그녀가 훗, 하고 웃는다.

“그런 말씀 하실 줄 알았어요. 일단은 저도 어시스턴트니까 마음껏 부려주세요? 저번처럼 무리해서 쓰러지거나 하면 오히려 곤란해지니까요.”

“오호라, 그렇게 나오셨다 이거죠? 그럼 아주 알차게 부려먹어 드리죠.”

“네에, 기대하고 있을게요.”

배시시 웃으면서 나는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의 페이지를 넘겼다. 12월 말부터 1월 첫 번째 주말까지는 텅 빈 달력에, 본가가 도쿄가 아닌 사람들 중 두 명의 이름과 스케줄이 표시되어 있었다. 하나는 닛타 미나미.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아나스타샤였다.

“센카와 씨.”

“네?”

“닛타는 요즘 좀 어떻습니까?”

“글쎄요……제가 보기에는 이제 다 회복된 것 같던데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솔직히 좀 과하게 독을 품은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그 때, 사무실의 문이 가볍게 열리고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가 들어왔다. 윤기가 흐르는, 찰랑거리는 눈부신 은발과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가 인상적인 소녀. 아나스타샤는 반갑게 웃으면서 이국의 언어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Привет……아, 안녕하세요.”

“아나스타샤? 일찍 왔네. 아직 촬영까지는 조금 남았는데.”

“да(네)……일찍 눈이 떠져서요. 오늘은 기숙사가 조용해서, 조금 одино́кий……아, 쓸쓸했습니다.”

“아아, 그렇지. 사기사와나 사쿠마나 모두 고향으로 갔으니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나는 크게 박수를 한 번 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좋아, 그러면 일찍 온 만큼 조금 빨리 현장으로 가 볼까? 운이 좋다면 빨리 끝낼 수도 있을 테니.”

 

 

예정 시간보다 30분 가까이 빠르게 스튜디오에 도착한 우리는 곧바로 촬영장으로 향했다. 분주하게 촬영 준비를 하던 스태프중 몇몇이 우리를 알아보고는 인사를 건네왔다. 그 가운데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지시를 내리던 감독이 나를 발견하고는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뭐야? 왜 이렇게 빨리 왔어?”

“혹시나 빨리 끝내고 빨리 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흐음, 뭐, 지금 준비하는 거 봐서는 예정보단 조금 당길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일단 의상담당 보내줄 테니까 대기실에서 준비하고 있어.”

“네. 가자. 아나스타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 뒤를 총총 따라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의상담당이 우리보다 한 걸음 빨랐던 모양이다. 대기실에 놓여진 이번 촬영 의상을 보고 가장 먼저 드는 감상은 “이거 춥지 않을까”였다.

“괜찮습니다, 홋카이도……랑 러시아, 추운 곳이에요. 제가 자라온 곳이니까, 저는 추운 건 괜찮습니다.”

“아, 하지만 차가운 건 싫습니다.”라고 덧붙이는 아나스타샤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주고, 나는 다 갈아입고 나면 들어온다는 말을 남기고 대기실 밖으로 잠시 나왔다.

“아이고, 힘들다 힘들어.”

이제는 거의 입버릇이 된 말을 중얼거리면서, 나는 아직 여독이 덜 풀린 듯 다소 멍한 머리를 일깨울 겸 자판기에서 차가운 캔커피를 꺼내어 뚜껑을 열었다.

그러고 보면 아나스타샤를 스카우트 한 것이 8월의 단합대회가 끝난 직후였으니 이제 곧 5달째가 되어 간다. 홋카이도를 떠나올 때도 고향에 꽤나 강한 애착을 보였던 아이였는데 아이돌 활동을 시작한 이후부터는 매일매일 새로운 것에 놀라워하고, 즐거워하는 모습밖에는 보여주지 않았다. 주위의 동료들이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가는 지금 이 때, 혹시 그 아이도 고향을 그리워하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때, 대기실의 문이 살짝 열리고 아나스타샤의 머리가 조심스레 밖으로 나왔다.

“프로듀서……?”

“아, 벌써 다 갈아입었어?”

“네. 이번 의상은, удо́бный……아, 편합니다. 입기에도, 움직이기에도.”

아나스타샤를 따라 대기실로 들어간 나는 의상을 입고 빙글 한 바퀴를 도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가만히 세워 두었다. 이번 의상은 기장이 짧고 여기저기 나풀거리는 장식이 많이 붙은 드레스로, 그렇게 빙글빙글 돌았다가는 여기저기 보여줘서는 안 되는 부분이 마구 노출되는 디자인이었다.

“……이 옷을 입는 동안에는 가급적이면 작은 움직임으로 연기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방금 전처럼 큰 움직임은 자제하고. 알겠지?”

“작은 움직임……? 알겠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후미카보다도 더욱 푸른 눈동자를 깜박거리면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사의 주문에 따라 의상을 입은 아나스타샤가 자세와 표정을 바꾸어 간다.

이번 촬영의 주제는 ‘눈의 요정’이라고 한다.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고, 러시아 태생인 아나스타샤에게는 거의 그녀를 위해 선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주제였다. 실제로도 그녀의 표정이 바뀌고 자세가 바뀔 때마다, 사진사는 셔터를 누르기에 앞서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에서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내 본능이 경고하는 무언가가

평소의 그녀와는 다르다. 웃고 있지만, 무언가가 빠진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 분명히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말하기는 힘들었다. 마치 조금 전까지는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처럼, 개략적인 이미지는 떠오르지만 명확한 정의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치밀어 오르는 답답함에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나는 나는 촬영장 한 켠에서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좋네~좋아.”

“……?!”

그 때, 바로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내 옆에 온 것인지, 연출담당을 맡고 있는 30대 초반의 여성이 내 옆에서 함께 촬영을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혼혈이라고나 할까, 아나스타샤 양은 찍을 때마다 느낌이 달라서 좋아.”

그녀가 옆에 와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을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그 정도입니까? 다들 그런 이야기를 하기는 했습니다만…….”

나는 홋카이도에서 우연히 아냐를 만났던 그 때를 떠올렸다. 로케이션 촬영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 간 것이었는데, 기차역에서 나오자 마자 가장 먼저 마주친 사람이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

“처음 봤을 때는 정말 놀랐단 말이야. ‘슬슬 색다른 아이는 없으려나~’ 하고 있었는데 마치 히든카드처럼 어느날 갑자기 짠!하고 저런 재목이 나타나다니.”

“그러게요. 정말 저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요.”

“역시 P씨, 겸손하네.”

“겸손이 아니라 사실인걸요.”

잠시 대화가 멈추고, 우리는 조용히 촬영장을 바라보았다.

“저기, 혹시 연말에 일정 있어?”

“무슨 일입니까?”

“으응, 별 일은 아니고, 이번에 미팅을 하려고 하는데 사람이 부족해서 말이야……P씨 정도면 차고 넘칠 거라 생각하는데, 혹시 생각 있어?”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나는 펜라이트를 꺼내 일정을 확인하는 척 수첩을 펼쳐 일부러 페이지를 팔락팔락 넘겼다. 이 쪽도 외로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억지로 만나는 건 취향이 아니다.

“죄송합니다. 힘들 것 같네요.”

“아하하, 역시. 일이야?”

대답 대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그럴 거라 예상은 했어. 그래도 아쉽긴 하네. 그럼, 다음에 또 봐.”

그녀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자신을 부르는 촬영감독을 향해 걸어갔다.

 

촬영이 끝나고 아나스타샤를 대기실로 돌려보낸 뒤, 감독의 옆에서 샘플로 받을 사진을 체크하고 있자니 마침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감독이 무릎을 탁 때리며 나를 올려다 보았다.

“P씨, 연말에 사무소 일정 다 비워놨다면서?”

“네, 전부는 아니지만요.”

“그럼 연말에 시간 있어? 내가 좋은 곳 알고 있는데.”

감독은 손으로 잔을 감싸 쥐는 듯한 시늉을 하면서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한 잔 어때? 라는 행동이다.

“죄송합니다만, 마음만 받아둘게요. 아이들 일정은 비어도 제 일정이 빈 건 아니라서.”

“에잉, 또 회사 일이야?”

“네. 이번 기회에 연습생들 관리나 좀 해보려고요.”

“뭐, 그렇다면 별 수 없지……일도 적당히 해. 그러다 또 쓰러질까봐 내가 더 무섭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음, 일단 이 정도만 해서 보내주시면 저희 쪽에서 한번 더 확인해서 회신 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럼 다음주……는 우리가 쉬니까, 설날까지 보내주면 다음날에 바로 작업 시작할게.”

“알겠습니다.”

“쩝, 정말 아까운데……어떻게든 안 되겠어?”

“아하하, 이쪽은 실질 가용인원이 저 뿐이라서요. 힘들겠네요.”

“씁, 그럼 어쩔 수 없지. 조심해서 들어가게.”

여전히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촬영감독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나는 대기실로 돌아갔다.

대기실에 도착하자, 이미 아나스타샤는 원래의 스웨터와 파카 차림으로 돌아가 있었다. 대기실의 책상에 앉아 항상 가지고 다니는 천문학 잡지를 읽고 있던 그녀는 내가 들어오자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 협의가 조금 길어져서.”

“Нет, 괜찮습니다. 그럼, 이제 돌아가나요?”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막 11시를 넘긴 참이었다.

“응. 일단 돌아가자.”

 

사무실로 돌아온 뒤, 나는 치히로에게 아나스타샤와 함께 식사를 해 줄 것을 부탁했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나가서 먹고 싶었지만, 최근 며칠간 계속 운전만 하다 보니까 바이오리듬이 흔들린 것인지 식사패턴도 상당히 불규칙해져 있었다. 스태미나 드링크에 빨대를 꽂아 쭉쭉 빨아먹으며 나는 응접실 소파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기숙사가 조용해서, 조금 쓸쓸했습니다.’

‘괜찮습니다. 홋카이도……랑 러시아, 추운 곳이에요.’

 

그렇게 말하던 아나스타샤의 표정에 한 순간 드리워진 그림자. 그리고 설원을 배경으로 한 사진을 찍으면서 그녀의 눈에 스쳐 지나간 어떤 감정의 정체가 계속해서 신경이 쓰였다. 아니, 신경이 쓰였다는 수준을 넘어서 굉장히 찝찝했다.

분명히 나도 저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을 터인데, 쉽사리 그 정체가 확실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내 머리가 저것을 생각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내 잡념을 쫓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때마침 탁자 위에 올려둔 업무용 휴대전화가 맹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액정에 떠오른 번호를 보니, 조금 전 아나스타샤의 사진을 촬영했던 잡지사의 연예부 기자였다.

“네, CG프로 아이돌 부서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K잡지 연예부 기자 S입니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신가요?”

[다름이 아니라, 당사의 아나스타샤 양에 대해서 독자 분들의 반응이 너무 좋아서요. 부록으로 사진 몇 장이랑 짧은 인터뷰를 하나 싣고 싶은데요. 혹시 괜찮을까요?]

“일단은 한번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지금은 식사시간이라 사무실에 없거든요.”

[그렇군요. 그럼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하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네, 수고하십시오.”

통화를 마치고, 나는 휴대전화를 다시 탁자 위에 올려놓고 다시 소파 위에 드러누워 수첩을 펼쳤다. 조금 전에 느꼈던 찝찝한 감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내 머릿속에는 온통 일 생각이 들어찼다.

잠시 후, 식사를 마치고 치히로와 아나스타샤가 함께 돌아왔다.

“저희 다녀왔어요~.”

“식사 맛있게 드셨습니까.”

“아, 응접실에 계셨구나. 네, 덕분에요.”

“아나스타샤?”

“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파카를 옷걸이에 걸어놓던 그녀는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할 이야기가 있는데, 이따가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ничего́……아, 괜찮습니다.”

나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점심시간은 앞으로 20분 정도 남아있었다.

“그래, 그러면 점심시간 끝나고 내 자리로 와줘.”

“네.”

 

 

다음 날 오후 1시. 나와 아나스타샤는 어제 왔던 스튜디오의 대기실에 앉아서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상은 어제 촬영했던 의상을 그대로 다시 입은 상태였다.

“미안하다, 레슨 마치고 쉬어야 할 시간인데.”

“Нет, 딱히 할 것도 없었어요. 괜찮습니다.”

나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슬쩍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불리는 날이다.

“아나스타샤, 크리스마스에 약속 없어?”

“내일은, 저녁에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습니다. 그 이외에는, 없네요.”

“영화? 누구랑?”

“미나미, 입니다.”

그 이름을 듣고 나는 진심으로 미소를 지었다.

“잘 됐네. 요새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미나미, 요즘 너무 열심히 합니다. 그러다 쓰러질 것 같아서, 제가 보러 가자고 했어요.”

나는 습관적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손을 멈추었다. 기껏 정리한 머리를 흩뜨릴 수는 없으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을 네가 대신 해주네. 정말 고마워.”

“ничего́, 괜찮습니다. 프로듀서, 언제나 우리를 신경 써주느라 바쁜 것, 알고 있어요.”

“그런 건 몰라도 돼.”

한 달 전에 있었던 올해의 마지막 정기 라이브 이후, 잔뜩 독이 오른 미나미는 자진해서 레슨과 트레이닝을 반복해서 받고 있었다. 그녀 혼자서 놔두기에는 또다시 오버워크로 탈이 날 것 같아서, 나는 일부러 그녀의 스케줄과 아나스타샤의 시간표를 조금씩 겹치도록 하고 있었다. 같은 일정을 소화하고 있으면 기본적으로 남을 잘 챙기는 미나미의 성격 상 혼자서 치고 나가는 일이 조금은 완화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훌륭하게 맞아떨어져, 지금은 휴일에는 곧잘 서로 어울려 다니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프로듀서는, 크리스마스에 일정이 있나요?”

“어? 나? 나야 뭐, 언제나처럼 잔업이지.”

“안 되요, день о́тдыха……아, 휴일,은 소중한 겁니다. 프로듀서, 꼭 쉬어 주세요.”

“그……”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해요! 업무회의가 길어져서…….”

무언가 대꾸를 하려던 찰나, 대기실의 문을 활짝 열고 기자와 사진사가 들어왔다. 정말로 미안한 듯, 기자는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 죄송하다는 말을 거듭했다. 내가 기자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나보다 먼저 그에게 손을 흔들면서 아나스타샤는 차분한 어조로 대꾸한다.

“ничего́, 아, 괜찮습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았어요.”

“그, 그런가요……아무튼, 정말 죄송합니다. 바로 사진 촬영하고 인터뷰 시작할게요!”

기자와 나는 한 걸음 물러서서 사진사의 요구에 따라 그녀가 포즈를 취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 때, 가슴팍에 넣어둔 업무용 휴대전화가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실례지만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은데……인터뷰 내용은 어제 저녁에 보내주신 그대로죠?”

나는 어제 저녁에 받은 인터뷰의 질문 내용을 떠올렸다. 다소 신경쓰이는 몇 가지 질문이 있기는 했지만, 아나스타샤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질문에, 기자는 턱을 쓰다듬으며 열심히 셔터를 연타하는 사진사를 바라보았다.

“네. 그렇긴 합니다만......피사체가 워낙 좋다 보니까 사진이 몇 장 더 들어갈 것 같은데……아마 볼일 보고 오셔도 될 것 같아요.”

나는 아나스타샤가 다음 포즈를 취하는 틈을 타 그녀에게 잠시 전화를 하고 오겠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조용히 대기실 밖으로 나가 휴대전화를 열었다.

“네, CG프로 아이돌 부서의 프로듀서 P……아, 단장님이시군요. 네, 아뇨, 괜찮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이런, 죄송합니다. 통화가 길어……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10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통화를 마치고 대기실로 들어간 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어, 저, 저기, 이거는 말이죠? 그러니까…….”

“프로듀서……!”

당황하는 기자를 앞에 두고, 푸른 눈망울에서 보석같은 눈물을 흘리며 아나스타샤가 울고 있었다.

 

 

 

<[퍼스널리티P 시리즈] 마법사가 망토 속에 감추고 있는 것 (下)에서 계속됩니다>

 

 

 

오랜만에 또다시 졸작으로 뵙습니다.

이번 이야기의 주역은 아냐짱이에요. 시작은 좋았는데 왜 얘를 골랐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스파시ㅂ......아니, спасибо, 고맙습니다, 네이버 러시아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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