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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ckholm Syndrome - 3

댓글: 4 / 조회: 817 / 추천: 6



본문 - 11-03, 2016 17:13에 작성됨.

 
 
 
 
 
 
 
치하야는 진심으로 미안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그랬다. 사실 진심이란 것을 언제 말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남에게 말을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죄송함을 표현하는 것은 관계의 형식일 뿐 거기에 진심이 있는가는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마치 치하야가 왜 공연을 빼먹었는지, P가 왜 갑자기 버럭 하고 화를 냈는지에 대한 이유를 묻는 것과 다름없었다. 결과와 책임이 있을 뿐이었다.
 
"그럼 실례했습니다."
 
그러고 그녀는 휙 돌아서 나가버렸다. 도망치듯이 나오는 것은 아니라서 동작이 빠르진 않았지만 P의 눈에는 거의 땅을 말아서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잠깐만요, 키사라기 씨!"
"나가게 두게. 볼 일 끝났잖은가."
"하지만..."
 
하지만 치하야가 고개를 숙인 뒤에 행해야 하는 일종의 행동 규칙 같은 것이 있을 터였다. 조금 더 사장의 잔소리를 듣는다던지 하는 선택지가 말이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어야 했다.
 
"나도 아주 모진 사람은 아니네. 자네도 모질게 되지는 말게."
"네?"
"자네한테 훈계를 하느라 낭비할 시간은 없으니 어서 자네 연예인이나 챙겨."
"아, 네!"
 
P는 곧바로 문을 열고 치하야를 쫓았다. 물론 훈계라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잠깐만요."
"네?"
"저기, 아직 향후 일정 협의가..."
"그건 당신들이 전부 결정한 사항 아니던가요?"
 
이러시면 안 되죠,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이 역시 실수임이 분명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 자체가 실수였다.
 
"물론 저희들이 전부 결정했고 키사라기 씨한테 선택권이 크게 없는 건 사실이지만 역시나 그, 세부적으로 협의해야 할 게..."
"저는 전적으로 매니저님의 의견을 따르겠습니다. 그 편이 쉽지 않나요?"
 
입을 다문 채 복도를 걸으며, P는 아까부터 계속해서 자신이 왜 불안해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마 치하야의 맨션 문을 두드릴 때부터 생각을 시작했을 것이다. 치하야의 재계약을 따내었고 딱딱하긴 했지만 악수도 했고 어찌어찌 집 밖으로 나오게 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모든 것이 불안했다. 아직도 치하야가 도중에 사라지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고 이번 하루만 본보기로서 출근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의심이 든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사람들 사이의, 아니 적어도 P와 타인들 사이에는 겉으로 나오는 말의 거짓과 진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명확한 결과와 불안정한 의심이 있을 뿐이었다. 즉 어떠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확신만 있다면 타인이 어떤 속마음으로 말을 하던 간에 P는 별 상관을 하지 않았다. 이전에 프로듀스하던 아이돌들도 그러했고 회사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도 그러했으며 방금 전에 만난 사장도 그러했다.
 
치하야도 그러해야 했다. 콘서트는 실패했고 응당의 대가를 치러야 했으며 만약에 그것을 지키지 못한다면 좋지 못한 결과를 불러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면 치하야의 속마음이 궁금하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P는 지금, 치하야가 어떤 꿍꿍이인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불과 만난 지 사흘 만에.
 
"그래도 오늘 아침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네요."
"그것은 명백하게 저의 실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면 동의하시는 건가요?"
 
단색의 복도는 조금 지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도 복도 색과 똑같은 의자가 놓여 있었다. 자판기에 있는 컴프레셔가 돌아가는 소리가 낫다.
 
동의하시는 건가요. 오늘 아침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선택권이 없습니다. P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이유를 치하야는 알 것도 같긴 했다. 어찌 되었든 그는 치하야의 매니저로 내려온 것이었으며 그는 그가 상사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단 한 톨의 신뢰도 치하야한테 없었기 때문이다.
 
신뢰가 없다는 건 치하야한테도 좋은 일이었다. 신뢰 같은 것보다는 원인과 결과로서 서술하는 것이 조금 더 안전했다. 문제는 그 표적이 '악명 높은' 치하야가 되다 보니까 다소 고압적인 태도가 나오는 것이다. 모두 알고 있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도 사건이 일어난 후에도, 몇 장의 앨범을 냈어도 변함이 없었다. 치하야는 악명이 높았으며 그녀는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네. 그러면 바로 가 볼까요."
"...알겠습니다."
 
 
 
이후에도 치하야는 그냥 똑같은 말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음반 부서 사람들, 공연 기획 부서 사람들, 기타 등등. 치하야는 아침과 똑같은 자세와 행동으로 인사했다. 앞으로 이런 일 없겠습니다.
 
"우선은 신문 인터뷰 스케쥴이 잡혀 있습니다. 이틀 뒤인데 단독이라서 아마 아주 기다란 인터뷰일 겁니다. 아마 조금 민감한 질문 있을 것 같은데 잘 답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괜찮으시죠?"
"네."
"편하게 임하시면 됩니다. 생각하시는 거 말씀하시고."
"네."
"그리고 기사 뜨고 나서 바로 방송 스케쥴도 잡혀 있습니다."
 
P는 인터넷과 신문에서 연일 점멸하던 기사 제목들을 기억했다. '충격'이라던가 '혼돈' 같은 진부하지만 자극적인 단어들이 가득한 제목들. 가장 눈에 띄었던 건 연예 주간지 헤드라인에 대문짝하게 걸려 있는, 콘서트장에서 보인 치하야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도망치듯 내려가는 아주 희미한 뒷모습. 그리고 이렇게 쓰여 있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이 문제인가. 이렇게도 치하야는 정상적으로 보이는데. 무엇이 그녀를 여기에 묶어 두는 것인가. 묶어 놓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P가 치하야의 말에서 안심을 느낄 만큼 확실한 것인가. 이 사람이 정말 콘서트장에서 도망친 스물다섯 살 가수이긴 한 건가. 무엇이 그녀를 도망치게 만들었는가. 불필요할 정도로 궁금증이 멈추지 않았다. 그건 매니저로서 응당 알고 있어야 하는 건가.
 
아니, 알 필요가 없다. 정해진 것을 하게 하는 것이 P의 임무로서는 끝이었다. 아무런 관계도 궁금함도 필요가 없었다. 얼마나 복잡한 사정이 있던 간에 그것은 치하야의 사정이다.
 
"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일단 키사라기 씨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걸 대외적으로 알려드리려고 하는 게 큽니다."
 
전부 회사 내부 회의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러니까 일명, 징계 위원회라는 거기.
 
"네."
"솔직히 좀, 그런 태도 논란 같은 게 좀 많았으니까요.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저희는 판단했습니다."
"네."
"그러면 대충은 아시겠으니 퇴근할까요?"
"네."
"내일 모레 뵙겠습니다."
"네."
"아. 맞아 키사라기 씨. 한 가지 못 듣고 넘긴 게 있는데요."
"네."
"오늘 아침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제가 어떻게 해야..."
 
P는 그대로 말문이 콱 막혀 버렸다. 결과는 확신에서 나온다. 아니 확신은 결과에서 나온다. 성공 확률을 높이는 것은 그의 능력이다.
 
"네?"
"아닙니다. 그럼 똑같이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일 수고하셨고요, 딱 저녁 시간 직전이니까 집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시계를 흘끔 보니 5시 30분. 정확했다.
 
 
 
지하 주차장은 끔찍시리 넓었고 P는 치하야가 있는 라인의 입구를 잠시 헷갈렸었다. 운전해서 오는 동안 밴 안은 아침에 언제 그런 설전이 오갔냐는 듯이 조용했고 P는 그 동안 도대체 왜 자신이 그런 말을 했는지 곱씹었던 것이다.
 
"그러면 내일 모레 뵙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치하야는 제대로 문을 밀어서 닫았다. 그리고는 단화를 또닥거리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P는 살랑이는 푸른 빛의 머리를 지켜보았다.
 
문이 완전히 닫히는 것을 확인하자 P는 밴을 몰아서 다시 회사로 향했다. 그리고 글러브박스에서 CD를 한 장 꺼내 플레이어에 넣었다.
 
- 언제부터였을까, 웃는 걸 잊어버린 건
- 한숨이 퍼져나가 마음을 물들이네
- 짙푸른 바다 속에 구원은 있는 걸까
- 눈물에 헤엄치며 나는 노래하네
 
피아노 선율이 먼저 울려퍼지고 피아노를 대위하여 중후한 기타 리프가 들어간다. 키사라기 치하야 4집의 타이틀 곡, <빠지다>였다. 타이틀이 선공개되자마자 차트 1위를 석권했고 언론은 또 다시 그녀의 '푸름'을 극찬하였다. 평론이든 어쨌든 그녀를 칭찬하기에 바빴다. P는 자세한 음악의 해석 같은 것은 알지 못했다. 가사를 잘 썼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판매량이 말해줄 것이다. 말하자면 P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평단의 평가도 '푸름'도 가사도 아니라 차트 1위라는 그 결과였다.
 
결과, 결과, 결과. 모든 것은 결과가 좌우했다. 물론 결과를 이루기 위해 이끌어가는 과정도 무척 중요했다. 예컨대 지금 P가 도출해야 할 결과는 키사라기 치하야라는 가수의 활동을 보조하고 그것에 지장이 없도록 예의주시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을 위해 많은 설득이나 계약서 설명 같은 걸 했었고 집에 직접 찾아가서 문을 쾅쾅 두드리기까지 했으니 나름 충실하게 일에 임한 셈이다. 거기에 곡의 해석이라던가, 치하야가 연습에 게을렀던 진정한 이유라던가 하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과거형이다. P는 계속해서 치하야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했다. 어느 주간지의 기사 제목처럼, '무엇이 문제인가.' 아마미 하루카의 죽음. 여러 방송 등에서 보인 엄격한 태도. 죽음을 겪은 뒤에 그녀는 어떻게 되었는가. 어떻게 되었기에 그다지도 오만방자할 수 있는가.
 
곡은 점점 절정부로 다가가고 있었다. 간주 부분의 기타 솔로가 클리셰했다. 듣기로는 치하야가 직접 연주하면서 녹음했다고 한다. 회사에서는 밴드 세션을 염두에 두고 컨셉을 잡은 것이라고도 말한다. 신곡 발표 무대 역시 완벽했다. 당세대 최고의 보컬리스트이자 싱어송 라이터라는 찬사도 쏟아졌다. 가장 큰 문제라면 그 뒤에 있었지만.
 
모두가 시끄러운 가운데 P 쪽만 조용한 감도 있었다. 치하야의 집 앞에 가득하던 기자들은 일 주일 동안 치하야가 나오는 기색도 보이지 않자 철수한 지 오래고 그런 위인이 인터넷을 할 리가 없으니까 수도 없이 안줏거리로 나오는 치하야 이슈를 모르는 것일 수도 있었다. P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것들은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치하야는 거실 소파에 바로 뛰어들었다. 희미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코에 맴돌았다. 청소를 해 주는 사람이 매일매일 소파를 세탁하는 건 아니니까 이 정도는 허용 범위였다. 하지만 대리석 바닥은 때 하나도 없이 말끔했고 다다미 백오십 장이 넘는 집 구석구석은 걸레질한 흔적이 없는 곳이 없었다. 모두 치하야가 그렇게 하라고 지시한 사항이었다.
 
저 쪽에 시부야의 불야성이 있다. 또는 신주쿠 쪽으로 눈을 돌려 멀리 도쿄만을 내다볼 수도 있다. 거실 한가운데 움푹 파인 소파는 치하야가 주로 잠을 자는 곳이었다. 편의점을 들르는 것도 할 수 없었고 차려 놓은 것이 없으니 저녁도 먹을 리가 없었다. 이대로 잠을 자거나 작업을 하는 것이 치하야가 집에 돌아와서 하는 일이었다.
 
바닥이며 벽이며 모든 것이 대리석의 허연 색이었다. 물론 옆집들은 도배를 새로 하거나 나름 디자인 가구를 놓거나 해서 색감을 살린 듯하지만 치하야는 모르는 이야기였다. 단지 녹음실과 작업실이 들어갈 만한 큰 안방이 있는 집을 원했고 안방의 크기가 점점 커지다 보니 이렇게까지 큰 맨션에 살게 된 것이다. 색깔이 있는 곳이라면 현관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쓰레기봉투의 노란색 뿐이었다. 무대 의상이 가득 차 있는 옷방과 세면실, 온갖 장비들이 단내를 풍기는 작업실, 그리고 이 소파. 치하야는 그걸로 충분했다.
 
덕분에 집 안은 고요함과 공허함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아무런 장식품도 없이 맨들맨들할 뿐인 바닥은 넓기만 했으며 거실에 소파와 함께 있는 것이라곤 치하야가 덮고 있는 붉은 색 담요 뿐이었다. 난방을 세게 틀어 살짝 후끈한 공기 속에서 치하야는 무심코 담요의 냄새를 훅 맡았다.
 
- 그 때는 무슨 말이 필요했을까.
- 넘쳐흐를 정도로 너무나도 많았는데.
- 말하지 못하고 신음만이 흘러나왔어.
- 계속해서 울기만 했어. 비명만 질렀어.
- 차갑게 식어 가는 몸뚱이를 눈물로 더럽혔어.
- 나한테 다시 한 번 기회를 줬잖아.
- 다시 한 번...
- 다시 한 번.
- 너마저도.
 
 
 
- 하루카.
 
 
 
잠결에 정전기처럼 흘러간 생각이었지만 치하야는 이내 눈을 떴다. 그리고는 누운 채로 머리를 싸매었다. 머리를 싸맨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치하야는 약을 먹을 시간을 놓쳤음을 떠올렸다. 저녁에 한 번 더 알약을 삼켜야 했는데 그것을 놓친 것이다. 아주 조금 체내 성분비가 변했을 뿐인데 이상한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는 건 조금은 용량을 늘리는 것을 의사하고 상담할 필요가 있음을 뜻했다.
 
타카츠키 야요이든 호시이 미키든 연락이 끊긴 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들에게 악의는 없었다. 악의가 있었다면 치하야한테 있었을 것이다. 무엇이든 전부 오래되고 낡은 상태였다. 새로운 것은 그녀의 작업실에서 먼지 하나 없이 반짝이는 수많은 음향 장비들 뿐이었다. 모든 것은 오 년 전으로부터 넘쳐나왔고 넘쳐나온 것들은 앨범이 되었고 목소리가 되었고... 치하야의 손에 들려 있는 알약이 되었다. 옛 동료들과 옛 이야기를 하기에는 치하야는 너무나도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상이 좋아져가지고는 알약을 스무 개씩 삼킨다고 해서 사람이 죽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단지 죽은 듯이 며칠 동안 잠을 자다가 일어난다고 한다. 다행히 기적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날이 콘서트 당일이었다. 잔뜩 잠긴 목에서는 쇳소리만이 겨우 나왔고 땀이 흥건한 등허리는 빳빳하게 굳어져 있었다. 하지만 치하야는 이것을 핑계 삼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단지 자신이 부주의했을 뿐이고 자신이 쓸데 없는 생각을 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자면, 결과가 중요한 것이다. 개개인의 사정을 따지기에는 서로에게 민폐가 될 뿐이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치하야도 이제는 핑계 안 대도록 약도 제 때 먹고 제대로 일도 나가야 한다. 이 지긋지긋한 생각도 결국은 끊을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잘 끊어냈다. 단지 아주 가끔씩 이럴 뿐이다.
 
인터뷰 일은 내일 모레. 치하야는 물을 부어 약을 한 알 삼켰다. 약 성분이 몸에 퍼지면 또 노곤해지면서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을 것이다. 치하야가 바라는 바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과제와 시험과 이것저것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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