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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리티P 시리즈] P < 인내의 삶 >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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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22, 2016 04:07에 작성됨.

 P <인내의 삶> (上) 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

 

홑이불을 발로 밀어내고 잔뜩 미간을 찌푸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이었지만 저 멀리서 동이 트기 시작하면서 새벽의 미적지근한 공기를 서서히 달구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거실 가운데의 테이블을 바라보자 그 곳에는 뚜껑이 열려 있는 아크릴 쇼케이스가 놓여 있었다.

괜한 것을 본 탓인가, 쓸데없는 꿈을 꾼 모양이다.

“아이고, 어깨야……얘는 이럴 때만 꼭 말썽이네.”

또 그 때의 꿈이라도 꾼 것인지 왼쪽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목을 타고 머리까지 통증이 올라올 것만 같았기에, 나는 땀에 젖은 옷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곧바로 욕조로 뛰어들어가 온수레버를 끝까지 돌려 펄펄 끓는 물을 끼얹기 시작했다.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이렇게라도 하는 수밖에.

정수리를 때리는 뜨거운 물을 맞으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되뇌듯 중얼거리며 욕실의 벽에 기대어 서서 한참 동안 어깨를 주물렀다.

‘이제 네가 나설 일은 없으니까 진정해’라고.

  

뜨거운 물로 잔뜩 달아오른 몸을 찬물로 식히느라 평소보다 몇 갑절이나 길었던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이미 하늘은 밝아져 있었다. 바닥에 내팽개친 옷을 세탁조에 던져 넣으면서 한결 가벼워진 몸을 이리저리 풀었다. 고작 재활원에 한번 갔다 왔을 뿐인데 눈에 띄게 컨디션이 좋아진 것이 느껴졌다. 액정화면이 반짝거리는 개인용 휴대전화의 화면을 켜자, 린과 나오, 카렌이 보낸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표현은 제각각이었지만, 내용은 하나같이 휴가 기간동안 무리하지 말고 푹 쉬라는 내용들이었다.

 

“어디, 사고 친 건 없나.”

 

노트북을 열어 업무 메일을 확인하고 충전기에 연결해 두었던 업무용 휴대전화도 한 번 살펴보았다. 공용 메일함에는 어제 저녁 치히로가 작성한 부서 업무일지가, 그리고 업무용 휴대전화에는 트레이너의 메시지를 제외하고 다른 것은 없었다. 안도감과 허탈함이 뒤섞인 미묘한 감정을 느끼면서, 두 장째의 수건으로 젖은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며 나는 노트북과 휴대전화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자, 오늘 하루도 힘차게!”

어제와 마찬가지로 우유와 곡물가루로 아침을 때우고,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현관 앞에 서서 양 손으로 크게 박수를 쳤다.

 

  

러닝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자, 이미 다른 사람들은 모두 출근했는지 주차장이 텅텅 비어 있었다. 어제에 비하면 눈에 띄게 몸이 좋아졌기 때문일까. 생각보다 빨리 돌아온 컨디션에 취해 나도 모르게 조금 많이 달린 모양이다. 슬쩍 바라본 주차장 안에 세워져 있는 것이라곤 회사의 로고가 새겨져 있는, 지금은 내가 관리하고 있는 아이돌 부서의 승용차 뿐이었다.

몸의 관절을 풀면서 주차장을 지나 기숙사의 입구로 향하자 기숙사의 정문에서 관리인과 대치하고 있는 작은 체구의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소매가 짧은 분홍색 원피스 차림의, 어깨를 약간 덮는 다갈색 머리카락과 왼 손목을 덮고 있는 붉은 리본 장식이 인상적인 그녀는 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쿠마?”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다가가자, 공허한 표정으로 관리인과 눈싸움을 하던 그녀는 잽싸게 나를 돌아보더니 천사처럼 환한 미소를 떠올렸다.

“프로듀서씨!”

“아, 자네 왔구만.”

“잠깐만, 달라붙지 마. 땀냄새 나니까.”

“마유는 프로듀서씨의 것이라면 뭐든지 좋아하는데요?”

“그래도 안 돼.”

“두 사람, 정말로 아는 사이였군?”

“네, 저희 사무소에 있는 아이돌이거든요. 사쿠마 마유라고 합니다.”

진정시키듯 마유의 어깨를 지긋이 누르면서 나는 관리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아, 그게 말이지. 자네가 뛰러 나간 사이 이 아가씨가 찾아왔거든. 막무가내로 들여보내달라고 하길래 말이야.”

“아……알겠습니다. 이 뒤는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폐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래? 자네가 알아서 하겠다니 뭐, 그럼 나는 먼저 들어가보겠네.”

“네.”

관리인이 다시 관리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고 열심히 코를 킁킁거리는 마유를 내려다보았다.

“냄새 그만 맡아.”

“하아, 하지만…….”

“일단 여기 있어서 좋을 건 없으니까 자리를 옮기자.”

“네.”

나는 마유를 주차장 한쪽 구석에 설치된 쉼터로 안내했다. 일단 이 주변은 회사 시설이니 타인이 들어올 염려도 적었고, 거기다 비록 작은 공원이긴 하지만 숲을 등지고 있는 만큼 한여름의 햇빛 아래에서도 어느 정도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이 시간엔 무슨 일이야? 학교는……아, 저번 주부터 방학이었구나.”

“네, 프로듀서씨께서 병가를 내셨다는 소리를 듣고 병문안이라도 할까 해서 왔는데……괜찮으신 모양이네요.”

“그렇지. 피로가 조금 쌓인 걸 빼면 그다지 아픈 건 아니었으니까.”

나는 벤치에 앉아 있는 마유가 조심스레 품 안에 안고 있는 보자기를 가리켰다.

“그런데 그건 뭐야?”

“아, 이것 말인가요?”

우후후, 하고 기분 좋아 보이는 웃음을 흘리면서 마유는 앉아 있던 벤치 위에 그것을 풀기 시작했다. 보자기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아닌 2단으로 되어 있는 도시락이었다.

“프로듀서씨, 최근 계속 야근하시느라 식사를 제때 못 챙기신 것 같아서요. 그래서 만들어 봤답니다.”

“이야, 진수성찬이네. 이걸 다 혼자서 만든 거야?”

“계속, 계속……연습했으니까요. 언젠가 운명의 사람을 만나면, 마유가 손수 만든 음식들을 대접해드리겠다고…….”

“아? 아아, 뭐……그 사람, 좋겠네. 응.”

“그렇죠? 후후훗.”

‘운명의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노골적으로 나를 바라보는 마유의 시선을 어떻게든 피하며 나는 도시락의 옆에 꽂혀 있는 젓가락을 집어 들어 밥과 함께 들어 있는 계란말이를 향해 뻗었다.

“시설은 기숙사 시설을 빌렸어?”

“네, 사감님께서 뒷정리만 잘 한다면 비어있는 시간대에는 써도 좋다고 하셨거든요. 어떤가요, 맛있나요?”

“그렇구나. 음, 맛있네. 간도 적당하고, 케첩은 없어도 될 뻔 했어.”

“프로듀서씨는 조금 싱겁게 드시는건가요?”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운동을 한 직후에는 체내에 수분량이 줄어드니까, 가능하면 덜 짜게 먹는 게 좋지. 평소엔 이것보단 조금 더 짜게 먹거든.”

“그렇군요. 메모해둬야지…….”

재빨리 손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메모하는 마유를 바라보며 나는 도시락의 내용물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샐러드는 야채의 아삭거리는 질감이 살아 있었고, 나머지 다른 반찬들 또한 만들어진 직후의 온기를 아직까지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잘 먹었다. 안 그래도 배가 조금 고팠는데, 정말 고마워.”

“마유가 나름대로 열심히 만들었는데, 입에 맞으셨는지 모르겠네요.”

“무얼, 새벽부터 일어나서 만드느라 고생했을 텐데, 맛있게 먹어주는 게 예의지.”

“눈치 채셨나요……?”

“먹어보면 다 알아. 아무튼 신경 써줘서 고맙다. 정작 나는 대회 준비하느라 네겐 별로 해준 것도 없는데.”

“괜찮아요. 마유는 프로듀서씨가 마유를 지켜봐 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큰 힘이 되니까요.”

나를 올려다보며 환한 미소를 띄우는 작은 소녀에게 나는 대답 대신 조용히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한 순간 아쉬운 듯한 표정이 떠올랐지만, 이내 그것은 환하게 떠오른 미소의 파도에 사라져갔다.

아마도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리라. 맹목적인 만큼 알기 쉬운 아이다.

한동안 내 손길을 되새기듯 눈을 감고 있던 마유는 곧바로 도시락을 정리하고 보자기를 묶기 시작했다. 손목시계를 슬쩍 바라보자, 시침이 오전 열 시를 막 넘어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사쿠마. 오늘은 오후 레슨밖에 없지?”

“네. 그래서 기숙사에 들렀다가 곧바로 사무실로 가려고 하는데요.”

“흐음, 그럼 나도 오늘은 밖에 돌아다닐 일이 있으니까, 가는 김에 기숙사까지는 데려다 주마.”

“정말인가요?!”

“그래, 뒷문 열어 줄 테니까 잠시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네!”

기숙사의 정문을 통해 기숙사로 들어간 뒤, 나는 곧장 1층의 주차장으로 연결된 다용도실의 뒷문을 열어 마유를 들어오게 했다. 감시 카메라의 사각지대인 다용도실의 가장 안쪽 자리에 그녀를 앉혀둔 뒤, 나는 곧장 방으로 올라와 땀을 씻어내고 휴대전화와 서류가방, 그리고 자동차 열쇠를 챙겼다.

다시 다용도실로 내려가자 얌전히 자리에 앉은 채 방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마유가 나를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무대에서도 저렇게 좋은 미소를 보여주면 좋을 텐데. 따위의 생각을 하며 나는 그녀와 함께 뒷문을 통해 주차장으로 나갔다.

 

 

 

***********

 

 

 

조금 시간을 되돌려, 오전 8시의 CG프로덕션의 제1별관.

가까스로 지각을 면한 치히로는 더위와 숙취로 인해 깨질 듯이 아픈 머리를 부여잡으며 사무실로 향하는 복도를 비틀비틀 걷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어떻게든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 쓰러지듯 자신의 자리에 앉은 치히로는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구입한 숙취 해소 음료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열린 뚜껑 너머로 퀴퀴한 약 냄새가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으으, 써…….”

오만상을 지으며 병 속에 든 음료를 억지로 삼킨 그녀는 크게 한숨을 내뱉으며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약 기운이 돌 때까지 조금만 쉬어 둘 요량이었다.

프로듀서의 휴가.

아이돌 부서가 생기고 나서 약 1년 반 만에 가져보는 그의 첫 공백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업무를 진행함에 있어서는 그의 공백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공백을 느끼고 자시고 일거리 자체가 그다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오늘로 2일차인데 왜 이렇게 한가하지……?”

그녀는 의자째로 몸을 돌려 스케줄 보드를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로 되어 있는 프로듀서의 휴가였다. 그 다음에 눈에 띄는 것은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의 아이돌들의 스케줄. 미성년자들의 경우는 레슨과 트레이닝으로, 연장자들의 경우는 게스트 출연이나 인터뷰 같은, 사무실의 보조가 필요하지 않은 간단한 일거리들로 채워져 있었다. 사무실 내에서 업무지분이 가장 높은 프로듀서였기에 그 사람이 휴가를 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일이 얼마나 밀려올것인지 걱정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그의 휴가가 다가오자 뜻밖에도 평소에 그렇게 넘쳐나던 일거리가 뚝, 하고 끊겼다. 마치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계획을 짜 둔 프로듀서가 미리 일정을 조정하기라도 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휴우, 이제 좀 낫네.”

약 기운이 몸에 돌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상태가 조금 괜찮아졌다고 생각한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늘은 회의도 없고, 트라이어드 프리무스와 마유는 오전 중에는 오프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시간에 출근할 사람이라 해봐야 오전 레슨이 잡혀 있는 미즈키와 후미카, 그리고 레슨이 끝난 뒤 오후에 라디오의 게스트 출연이 잡혀 있는 카에데가 전부였다. 업무의 핵심을 담당하는 프로듀서가 부재중인만큼 자신에게도 폭탄이 떨어질 것이라 각오했지만, 정작 지내고 보니 평소와 별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아니, 평소보다도 덜한 수준이었다.

“그럼……청소라도 좀 해 둘까.”

역시 할 일이 없으니 딴 짓을 하고 싶어지는 것일까. 프로듀서가 있었다면 “웬일로 기특한 말씀을 하시네요”라고 대꾸할만한 발언을 하면서 치히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의 구석에 놓인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잠시 후, 프로듀서의 자리 근처를 청소하던 치히로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딱히 종이가 떨어질만한 장소는 눈에 띄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장소는 한 군데 뿐.

‘이게 뭐지? 처음 보는 건데……여기서 나온 건가?’

빗자루를 잠시 옆에 세워두고 쪼그려 앉아 프로듀서의 책상 아래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책상 아래에 설치된 작은 서랍장을 가득 채운 서류더미였다.

“우와……이게 다 뭐람.”

우선 사무실의 청소를 간단하게 마무리하고, 치히로는 프로듀서의 자리 아래쪽에 쌓여 있던 서류들을 낑낑대며 테이블 위로 옮겨 두었다. 처음 봤을 때는 몰랐지만 막상 꺼내놓으려 해 보니 몇 번이나 왔다갔다해야 할 정도로 상당한 양의 서류였다.

얼핏 보기에 서류의 내용은 그녀로서도 처음 보는 내용들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프로듀서는 업무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는 딱히 숨기는 일이 없었다.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이렇게까지 숨겨놓은 것인지, 그것이 알고 싶었던 치히로는 소파에 앉아서 서류들을 천천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자세히 읽어보자, 서류의 일부는 타 부서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협조 공문이었고, 나머지 대다수는 어떤 계획을 담고 있는 기획서였다. 기획서의 경우 이미 기안이 끝난 것인지 대부분은 기밀 처리되어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CG프로덕션 내부의 거의 모든 부서가 수신인으로 설정되어 있었고, 실제로 해당 부서에 발신된 이력 또한 남아 있었다.

협조 공문의 날짜를 살펴보면, 가장 빠른 것이 작년 11월경으로 나타나 있었다. 치히로는 기억을 더듬어, 그 때쯤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떠올려 보았다.

‘……그래, 트라이어드 프리무스의 데뷔 일정이 정해졌을 때구나.’

돌이켜보면 트라이어드 프리무스의 데뷔 일정이 정해진 그 시점부터 프로듀서의 일정이 급속도로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출장이나 오디션은 도쿄 도내 혹은 요코마하나 치바로 가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 때를 기점으로 하여 프로듀서의 행동 반경이 급속도로 넓어진 것이다. 연말에 등록된 사쿠마 마유는 센다이에서 만났고, 그 직후 등록된 카와시마 미즈키는 오사카 쪽의 지방 방송사에서 만난 것이 인연이 되었다.

‘다음 주에는 홋카이도에 후쿠오카……멀리도 가시네.’

스케줄 표의 한쪽 구석에는 프로듀서의 다음 출장 지역이 적혀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 이외에도 다소 수상한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담당하는 아이돌의 머릿수에 비하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많았던 프로듀서의 야근과 잔업의 양이었다. 카와시마 미즈키는 사무소 내 최연장자인데다 방송인 경력이 있었기에 ‘방송인’으로써 활동하는 현재까지는 프로듀서가 손을 댈 만한 여지가 그다지 없었으니 제외한다 치면, 이제 막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마유와 데뷔 일정조차 잡히지 않은 후미카를 제외하면 지금까지 실질적으로 프로듀서가 담당한 인원은 타카가키 카에데와 트라이어드 프리무스의 셋을 더한 네 사람뿐. 그런데도 프로듀서의 업무량을 감안하면 고작 4인을 담당한다고 하기에는 과도한 측면이 적잖이 있었다.

근무지표만 보더라도 인사팀에서 제발 퇴근 좀 시키라는 권고가 매 주마다 날아오고, 올해 1년치 초과수당을 1분기에 다 끌어다 받았을 정도로 그는 회사에 지박령처럼 붙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담당한 아이돌이 그처럼 과도한 업무에 시달렸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신인이라고 보기에는 과도할 정도로 휴식을 챙겨 가면서, 꼭 필요하다 싶은 일에만 나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대기업 특유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한 전략이었지만 아무튼 프로듀서의 방침은 그랬다.

‘그간 그렇게 야근에 잔업을 한 게 사실은 다른 계획이 있어서였나……?’

그렇다면 그 많은 시간 동안 그는 대체 무엇을 한 것일까. 치히로는 점점 커지는 궁금증을 안고 눈 앞의 서류를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다른 서류들을 살펴보려 하는 바로 그 때, 사내 인터폰이 요란한 벨소리를 울렸다.

“네네~ 금방 갑니다요~.”

자신의 자리보다 프로듀서의 자리가 가까웠기에, 그녀는 프로듀서의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네, 아이돌 부서의 어시스턴트 센카와 치히로입니다.”

잠시 머뭇거리는 듯 하던 수화기 너머의 인물은 잠시 자신을 가다듬듯이 심호흡을 하고는 조심스레 자신을 밝혔다.

[저, 그……그러니까, 거기 아이돌 부서, 맞아?]

“네, 맞는데요?”

[으응, 나는 죠가사키 미카, 라고 하는데. 혹시 거기에 P라는 사람, 있어? 프로듀서라고 들었는데.]

“프로듀서라면 있긴 있습니다만…….”

[있습니다만……?]

“내일까지 휴가라서요.”

[에엣?! 뭐야……이번 주까지 연락 달라 해놓고 본인이 휴가?]

“저기, 급한 일이시면 휴대전화 번호 가르쳐 드릴까요?”

[어? 아, 아, 아니야! 괜찮아. 그럼 모레 내가 다시 찾아갈게. 고마워!]

“아, 끊었네……죠가사키 미카?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비프음이 흘러나오는 수화기를 잠시간 바라보던 치히로의 시야 한 켠에, 이미 업무 시작시간을 한참 넘긴 시계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아, 일해야지 일!”

아무리 일이 적다지만 이제는 슬슬 다른 사람들이 출근 할 때가 되었다. 프로듀서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자기만 알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판단한 그녀는 곧바로 테이블 위에 쌓아두었던 프로듀서의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서류를 거의 다 정리한 그녀가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한숨을 돌릴 무렵, 사무실의 문을 열고 오늘 출근하기로 되어 있는 세 사람이 함께 나타났다.

“안녕! 존아침!”

“안녕하세요…….”

“존아침이 뭔가요, 존아침이.”

“카에데도 한번 해 봐, 젊어 보이고 좋지 않아?”

“저는 사양할게요……하암.”

“카에데, 어제 잠 못 잤어?”

“네. 조금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요…….”

“별일이네요, 카에데씨가 하품이라니.”

“으응, 아무래도 안되겠어요. 저 레슨 시작 전까지 수면실 좀 빌릴게요.”

“네, 얼마든지요.”

나름대로 자기관리가 철저한 그녀로서는 보기 드문 그 모습에, 미즈키와 치히로는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터덜터덜 수면실을 향해 걸어가는 카에데의 뒷모습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저기 후미카? 어제 카에데씨랑 무슨 일 있었니?”

“프로듀서씨께서 기숙사에 저를 먼저 데려다 주셔서……그 뒤는 잘 모르겠어요…….”

“헤에, 그러면 그 뒤는 단 둘이 있었다는 말이지? 이거 사건의 냄새가 나는걸.”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자세한 내막을 알 턱이 없는 미즈키는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

 

 

 

 

“수고하셨습니다. 휴가 중이실 텐데 이렇게까지 와 주시다니……대접이 시원찮아서 죄송하네요.”

“별 말씀을요. 이제부터 함께 하게 될 중요한 동료들인걸요. 조금만 더 수고해주십시오

“네, 여러분께 폐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건물 밖으로까지 배웅을 나온 양성소의 원장과 악수를 나누며 나는 주차장에 세워 둔 자동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운전석에 앉아서 시동을 걸자, 미리 전원이 들어가 있던 라디오에서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늘의 게스트를 모시겠습니다. 요즘 대세의 인물이죠? “신록의 숙녀” 타카가키 카에데씨 입니다!]

[안녕하세요, 소개받은 타카가키 카에데입니다.]

[하하하, “숙녀”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굉장히 우아하신 분이네요. 매번 TV에서만 뵈었는데, 실제로 이렇게 뵙게 되니 굉장히 영광입니다.]

[고마워요. 저도 학생때부터 이 방송의 팬이었답니다. 엽서도 자주 보내곤 했었어요.]

[이야, 이것 참 영광인데요. 그럴 줄 알았으면 미리 엽서라도 좀 모아 놓을 걸 그랬나요? 하하하!]

나름대로 오랜 역사를 가진 방송에 출연하는 것이었기에 긴장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나름대로 잔뼈가 굵어진 그녀에게는 기우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능숙하게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그녀의 방송을 들으며 나는 기숙사를 향해 차를 몰았다.

오전에는 765프로덕션에서 다음 달에 있을 체육대회 이벤트의 트레이닝 일정에 대해 간단한 회의를 하고, 오후에는 양성소의 신인 후보생들의 상태도 점검해볼 겸 협력관계에 있는 모든 양성소를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간단하게 끝낼 생각이었는데, 정작 현장에 도착하고 보니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일정을 마치자,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이미 하늘에 반짝이는 샛별이 보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면 오늘부터 해안가에서 진행하는 여름 페스티벌도 보러 갈 생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교통 사정이 너무 좋지 않아서 방송을 녹화해두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다녀왔……흠.”

휴가 중이었음에도 업무 비슷한 것을 했기 때문일까. 방으로 들어서면서 나는 자신도 모르게 사무실에 들어설 때처럼 인사를 던지려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라는 외로움의 반격을 받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땀에 절어버린 옷을 세탁조에 대충 던져 넣고, 미지근한 물로 흘러내린 땀을 씻어내린 뒤 나는 곧장 자료실로 향했다. 어제에 비하면 꽤나 정리가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잉여 자료들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어디, 오늘 날밤을 까면 내일까지는 정리가 다 되겠군.”

어차피 내일도 휴가이고, 내일은 딱히 할 일도 없겠다, 슬슬 한 번 끝장을 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나는 목을 빙글빙글 돌려 목과 어깨를 풀었다.

 

 

 

*************

 

 

 

 

방음유리 너머에서 컷 사인이 떨어졌다.

방송 중을 알리는 전등이 꺼지고, 건너편 자리에 앉아 있던 진행자가 헤드폰을 벗으며 마이크를 밀어낸다. 그 모습을 보며 카에데는 그가 하는 것처럼 마이크를 밀어내고 헤드폰을 벗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수고하셨습니다. 역시 타카가키씨가 계시니까 청취자분들 반응이 아주 좋네요. 고마워요.”

“아뇨. 오히려 저야말로……함께 해서 영광이었습니다.”

“하핫, 다음에 또 뵈었으면 하네요. 함께 해서 즐거웠어요.”

진행자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카에데는 방음문을 열고 녹음실을 나왔다. 기재를 정리하는 스태프들에게도 그녀는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여러분,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아, 타카가키씨도 고생했어요.”

“아, 카에데 양?”

카에데가 몸을 돌려 방송실을 나가려는 순간, 저 멀리서 지시를 내리던 스태프 하나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 다음에 우리 회식 있는데 동행하실래요?”

“아……죄송해요. 저도 사무실 일정이 있어서…….”

“하하, 그래, 바쁜 사람이었지. 참. 미안해요, 괜한 이야길 꺼내서.”

“아니에요. 신경 써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녀가 방송실을 나서고, 서서히 닫히기 시작하는 방음문을 바라보며 스태프 중 하나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아깝네. 번호라도 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생각이었냐? 그럼 포기하는 게 좋을걸?”

“왜요?”

“네가 저쪽 프로듀서 성깔을 안 봐서 그래. 자기네 애들은 무시무시하게 감싸고 돈단 말이지.”

“그 정도에요?”

“다른 애들은 몰라도 CG프로는 건드릴 생각도 하지 마. 요전에도 K기획사에서 쟤네 3인조 유닛 잘못 건드렸다가 프로젝트 하나를 그대로 날려먹었거든. 사장이랑 같이 들이닥쳐서 개판을 쳐 놨던데.”

“와, 그 사람 성깔 있네요. 그렇게 안 봤는데.”

“생긴 거랑은 다르다 이거지. 그러니까 CG프로는 신경 꺼. 알겠지?”

“네…….”

이제는 완전히 닫힌 방음문을 바라보며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스튜디오를 나오기 전, 1층의 화장실에서 모자를 눌러 쓰고, 알이 큰 안경으로 가벼운 변장을 한 카에데는 스튜디오의 뒷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 나왔다. 해는 이미 서녘으로 떨어진 시각이지만, 아직 채 식지 않은 한여름의 후끈한 공기가 익숙하지 않은 차림새를 한 카에데의 땀샘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길 가에서 손을 내밀어 택시를 잡은 그녀는 택시에 올라타 곧장 자신의 맨션 주소를 불렀다.

룸미러로 자신을 보는 택시기사와 한 순간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곧바로 시선을 돌려 운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런 기사의 모습을 보며 카에데는 내심 안도와 실망감이 뒤섞인 한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잠시 후,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카에데는 택시에서 내려 가로등이 불을 밝히고 있는 맨션의 입구로 걸어갔다.

아이돌인 타카가키 카에데는 언제나 눈부시게 빛난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반짝이는 의상을 입으며 언제나 반짝인다. 하지만 화장을 지우고, 의상을 벗고, 현장을 떠나면 아이돌 타카가키 카에데는 그냥 타카가키 카에데가 된다.

간단한 변장만으로도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빛나는 거리를 지나, 집으로 향하는 길을 혼자 걷고 있으면 마치 이 세상에서 혼자가 된 것 같은 쓸쓸함과 적막감이 몰려온다. 그 적막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 이야기를 내게 전해왔다.

‘프로의 삶은 인내의 삶. 스포트라이트가 꺼졌을 때의 쓸쓸함을 알아야 합니다.’

‘쓸쓸함……그 사람이 걷는 길은 이런 모습일까.’

맨션의 입구를 지나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평소라면 엘리베이터를 사용했을 테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어둠에 잠긴 이 복도를 조금이나마 더 느끼고 싶었다.

어제 저녁, 프로듀서와 헤어진 뒤 그녀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선수시절의 그에 대한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늦은 새벽까지 그의 이야기를 찾아 다니던 그녀는, 7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인터넷의 바다 깊숙한 곳에 있던 어떤 기사를 찾기에 이르렀다.

비록 영어로 적혀 있었기에 내용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브라우저의 번역 기능을 통해서 가까스로 읽을 수 있었던 그 기사에는 담담한 어조로 그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거의 한 시간 가까이를 투자해 그 기사를 끝까지 읽은 그녀는, 그때가 되어서야 헤어지기 전에 프로듀서가 자신에게 했던 말의 의미, “나의 시간은 이미 끝나버렸으니까요.”라던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에게 던졌던 질문이 얼마나 잔인한 것이었는지도 그 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깨달을 수 있었다.

‘저는 빛을 충분히 즐겼으니, 이제는 쓸쓸함에 익숙해져야 할 때입니다.’

그 말을 자신에게 하면서, 그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그녀는 자신이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눈 앞을 바라보면 굳게 닫혀 있는 강철의 문이 보인다. 가방 속에서 열쇠를 꺼내려다가 멈칫한 그녀는 빙글, 몸을 돌려 다시 어둠이 가득 찬 복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언제부터 나는 이렇게 적극적인 여자가 되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여보세요……? 아, 네. 저예요, 카에데. 네. 저기, 다름이 아니라, 저를 조금 도와주셨으면 하는데요…….”

 

 

 

*************

 

 

 

지금까지 갱신할 여유가 없어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스카우트 레포트를 갱신하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자료들을 모아 파일로 정리했다. 문득 뒷목이 뻐근하다는 느낌이 들어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미 밤 10시를 넘어가고 있는 시각. 그 때, 내 방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업무용 휴대전화의 벨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트러블?”

이 시간에 업무용 전화로 전화가 들어올 일이라면 대개 9할은 트러블 혹은 클레임이었다. 트러블이라고 하기엔 오늘은 카에데를 제외한 다른 인원의 일은 없었으니, 이 경우는 아마도 클레임이겠지. ‘또 골치 아파지겠구나’라고 생각하며 나는 곧장 내 방으로 달려가 휴대전화의 덮개를 열었다. 처음 보는 번호가 찍혀 있었다.

“네, CG프로덕션 아이돌 부서의 프로듀서 P입니다.”

 

 

‘연예인’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바로 롯폰기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이 롯폰기를 세 블록만 지나가도 그 사이에 있는 기획사의 수는 두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별들의 전쟁터. 전쟁에서 이긴 별은 높이 빛날 것이고, 그렇지 못한 별은 한줌의 먼지로 사그라질 것이다.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골목 사이를 누비며 나는 내게 연락을 주었던 가게를 찾아갔다.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번쩍번쩍한 의상을 두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한 번씩 나를 흘깃 바라보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들은 곧바로 내게 흥미를 잃고, 흘러나오는 재즈음악에 몸을 맡기면서 술이라는 반찬을 곁들여 저마다의 테이블로 시선을 되돌렸다. 깊숙한 곳에 위치한 카운터를 향해 걸어가자, 말끔한 유니폼을 입고 있는 점원이 기다렸다는 듯 나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어서오십시오. 일행이 계신가요?”

“아뇨, 조금 전에 연락 받고 온 사람입니다.”

“관계자분이신가요?”

“네, 여기…….”

내가 내민 명함을 받은 점원은 내 옷차림을 위아래로 유심히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원증을 달고 온 것이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역시 업계의 정글. 한낱 점원조차 이러한 상황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받은 듯 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 쪽으로.”

점원의 안내를 받으며 도착한 개인실에는 인사불성이 된 한 여인이 쥐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어깨를 살짝 덮는 연녹색의 머리칼과 민소매 드레스 아래로 뻗어나온 늘씬한 팔다리가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내 시선을 잡아 끈 것은, 그녀의 앞에 쌓여 있는 몇 병이나 되는 맥주와 와인 병이었다.

“……많이도 먹었네. 이거 전부 다 이 사람이 혼자 먹은거에요?”

“네.”

점원의 대답에 나는 나도 모르게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세히 보면, 그녀는 인사불성이 된 상태였음에도 마치 ‘이 번호로 연락해주세요’라고 광고라도 하려는 듯, 내 이름과 번호가 적힌 명함을 꼬옥 쥐고 있었다. 나는 카에데의 짐을 챙기면서 내 옆에 서 있던 직원에게 챙겨 온 카드를 건네었다.

“우선 대금은 이걸로 결제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카에데의 짐을 얼추 챙긴 뒤, 축 늘어진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자니 직원이 영수증을 가지고 돌아왔다. 보기보다는 저렴하게 찍힌 가격표를 보며 신기하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대충 서명을 하고 카드를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나는 가방을 메듯 그녀의 한쪽 팔을 잡고 부축하듯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어차피 회사 소속임을 알리는 명찰을 차고 있고, 만의 하나까지 조심하기 위해 셔츠 위에 스태프용으로 제작된 회사의 로고가 들어간 조끼까지 챙겨 입고 있었다. 이 정도면 주간지에 찍히더라도 심부름 나온 회사 직원 A로 보일 것이다.

가게 앞에 세워둔 차의 뒷좌석에 최대한 옷매무새가 망가지지 않도록 그녀를 밀어 넣고, 직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나는 곧바로 운전석으로 향했다. 운전석에 앉아 다소 거칠어진 호흡을 정리했다. 아직 회복되지 않은 어깨가 욱신거리며 자신의 존재감을 어필한다.

“휴가 끝나거든 과음에 대해서도 주의를 좀 줘야겠네. 매번 내가 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시동을 걸고, 큰길로 접어들어 방향을 그녀의 맨션 쪽으로 돌리는 순간,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아직은 운전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프로듀서씨의 방으로 부탁드릴게요.”

“……?”

자고 있어야 할 사람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온다. 거기다 그녀의 목소리는 뜻밖에도 또렷한 목소리였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곧바로 내뱉었다.

“취한 거 아니었습니까?”

“취했었죠. 조금 전 까지.”

“꽤나 많이 마신 것처럼 보였는데요.”

“가슴 속에 무거운 게 있으니, 좀처럼 마셔도 취하질 않았어요.”

신호에 걸린 틈을 타서 나는 잠시 안경을 내려놓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요컨대 취한 척 한 그녀의 연기에 속았다는 이야기다.

어쩐지 요금이 작게 찍히더라니. 가게도 한통속이었던가.

“연기 실력이 많이 늘었네요.”

“네에, 누구씨 덕분에 많이 늘었지요.”

“꼭 제 방으로 가야만 합니까?”

“그럼 제 집으로 가실래요?”

“…….”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듣고 싶은 이야기도요.”

룸 미러를 통해 바라본 그녀의 눈은 조용히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나는 그녀가 무언가를 준비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언제 준비한 것인지 카에데는 통금시간 이후 남자 기숙사의 출입을 허가한다는 내용의 허가서까지 가지고 있었다. 사장의 직인까지 들어가 있는 확실한 진품이었기에, 그것을 보고 어리둥절해하는 관리인을 뒤로 한 채 그녀는 의기양양한, 하지만 다소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는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내 방의 현관문을 열자, 그녀는 나보다 한 발 먼저 냉큼 안으로 들어갔다.

“실례하겠습니다.”

“실례하세요.”

나 혼자 있던 상황이었기에 손님을 들이기에는 방 상태가 약간 어수선했다.

“잠시 정리 좀 할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네.”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켜둔 거실에 그녀를 앉혀두고,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면서 나는 방에 들어가 여기저기 흩어놓은 서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대충 정리를 마치고 다시 거실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땡, 하고 포트의 스위치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곧장 작은 주전자에 홍차 티백을 던져 넣고 펄펄 끓는물을 가득 채워 찻잔과 함께 들고 갔다.

테이블에 주전자와 찻잔이 담긴 쟁반을 내려놓자,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크게 하품을 하는 카에데의 모습이 보였다.

“피곤해 보이시네요.”

“역시,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아니, 그렇게 대놓고 하품을 하시면 당연히.”

내 말허리를 끊으며, 그녀는 테이블에 웅크리듯 엎드려 나를 올려다 보았다.

“프로듀서, 저 어제 잠 못 잤어요.”

“그랬습니까?”

“오늘은 트레이너한테 혼났어요. 정신이 다른 데에 가 있다고, 전혀 집중을 못 한다고요.”

“별 일도 다 있군요.

“뭐 때문이라고 생각하세요?”

“으음, 술을 안 먹어서 그런가?”

짐작가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지만, 나는 일부러 잡아떼듯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자 “부부-“하고, 마치 버저소리를 흉내 내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그녀는 손을 뻗어 내 이마를 콕콕 찔렀다.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세요?”

“글쎄요.”

여전히 엎드린 자세로, 두 뺨을 약간 부풀리며 그녀는 자신의 휴대전화의 액정을 켜고 나를 향해 내밀었다. 휴대전화의 화면에 떠오른 것은, 내 이름이 적혀 있는 수많은 신문 기사들이었다.

온통 영어로 된 기사들 뿐이었을 테니, 아마도 찾는 것도 찾는 것이지만 읽는 것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걸 또 찾아봤어요? 뭐 하러 찾아봤어요. 쓸데없이.”

“쓸데없는 게 아니에요. 다른 사람도 아닌 프로듀서의 일이니까요.”

“그저,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당신에 대해서.”라 말하며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프로듀서, 제 생일은 언제죠?”

“6월 14일이죠.”

“제 고향은요?”

“와카야마. 매실이 특산물이죠.”

“제 별자리랑 혈액형은요?”

“쌍둥이자리에 AB형이죠.”

그러자 “정답!”이라고 말하며 몸을 일으킨 그녀는 활짝 웃으면서 짝짝 손뼉을 쳤다.

“아니, 이거는 프로필에 다 나와 있는 거잖아요.”

“그럼, 프로듀서가 저한테 같은 내용으로 물어봐 주실래요?”

“……?”

“어서요.”

술기운에 하는 장난이라고 보기엔 그녀의 눈빛이 진지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제 생일은 언제일까요?”

“몰라요.”

“제 고향은요?”

“몰라요.”

“제 별자리랑, 혈액형은요?”

“몰라요.”

즉답의 연속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조금씩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군. 이런 의도였나.

카에데는 자리에서 살짝 몸을 일으켜, 나를 향해서 상체를 기울였다.

”우리, 동료 맞죠?”

“물론이죠.”

“그렇다면, 말해주세요.”

“이미 다 보셨지 않습니까.”

나는 그녀의 휴대전화를 가리켰다.

“당신이 겪었던 일을 당신의 입에서 직접 듣고 싶어요. 당신이 겪었던 고통이나 외로움을, 내가 함께 나누고 싶어요. 안 되나요?”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어째선가요.”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저는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고 내 이야기를 풀어 놓았습니다. 그 결과가 이거에요.”

나는 액정 화면 위로 여전히 그 기사를 띄우고 있는 카에데의 휴대전화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털어놓은 이야기는 가십거리가 됐습니다. 들키고 싶지 않았던, 부끄러운 과거는 예쁘게 포장되어 잘 팔리는 안주거리가 되었지요.”

“…….”

“거기다, 남들 앞에서 자랑스레 꺼낼 이야기도 아니거든요.”

대화가 멈추었다. 방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에어컨이 송풍 모드로 전환되었다. 잠시간의 침묵을 깨고, 휴대전화를 빙글빙글 돌리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런가요. 프로듀서의 뜻이 정 그렇다면…….”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고는 결심을 다지듯 작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다시 나를 올려다 보았다.

“저는, 아이돌을 그만두겠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나는 퍼뜩 시선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색이 다른 두 개의 눈동자가, 단호한 의지의 빛을 품고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프로듀서는 한때 길을 잃고 헤매던 저에게 등대가 되어 주었어요. 지금도 저는 당신이 비추어준 빛을 따라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는 그 등대가 비추어 주는 빛이 진짜인지, 아니면 가짜인지를 확신할 수가 없네요.”

“아니”라고 덧붙이며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이 정말로 등대인지, 아니면 등대인 척 하는 다른 무언가인지, 저는 이제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저는 다시 방황하는 쪽을 택하겠어요. 그 끝이 낭떠러지일지도 모르는 길을 따라가느니, 차라리 방황하는 게 더 나을 거에요.”

“진심……인가요?”

“프로듀서가 하기 나름이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여쭐게요. 정말로 이야기를 하지 않을건가요?”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저런 무기를 꺼내는 것은 반칙이 아닌가. 자신을 앞에 두고 열심히 저울질을 하고 있는 내 마음을 눈치챈 것인지, 카에데는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속삭이듯 이야기한다.

“저는 결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저버리지 않을 거에요. 맹세할게요.”

“……사람의 마음이란, 처한 상황에 따라서 너무도 쉽게 바뀝니다. 그래서 저는 그 녀석을 믿지 않아요. 사람을 통제하는 것은 상황이지, 개인의 의지 따위가 아닙니다.”

O냐 X냐, 연거푸 저울질을 하던 나는 마침내 생각을 굳혔다. 여기까지 와 버린 이상, 되돌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당신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저에 대한 이미지를 크게 뒤틀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 저라는 사람이 불쾌해지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저를 대신할 프로듀서는 우리 회사에 널렸으니까.”

그녀는 고개를 들고 자세를 곧추세웠다.

“기사에 나와있는 부분은 빼고 말할게요. 9살에 이민을 갔다던가, 13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던가,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이미 다 알고 계시잖아요?”

카에데는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가슴 속 깊숙한 곳에 숨겨둔 상자를 다시 파냈다. 온갖 구질구질한 것들이 모여 있는 상자의 속을 바라보자, 금방이라도 위액이 역류할 것만 같았다. 화장실로 달려가서 한바탕 구토를 하고 싶었다.

'이 사람에게마저 뒤통수를 맞는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나는 두 어깨에서 힘을 뺐다. 절로 한숨이 나오면서 척추가 구부정하게 구부러졌다.

 

 

**********

 

 

평소의 척추를 곧게 편 자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구부정한 자세로 웅크리듯 앉은 프로듀서는 시선을 내리깔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지만……저는 뒤끝이 있는 쪽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무엇이든 쉽게 포기하질 못해요. 무엇이든 말이죠.”

“그게 무슨 말인가요?”

“저는, 무엇이든 많이 기억하려고 했습니다. 9살에 헤어진 어머니의 얼굴, 9살 때 떠나온 고향의 풍경, 13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목소리……많은 것을 기억하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어머니의 얼굴도, 고향의 풍경도, 아버지의 목소리도.”

프로듀서는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어제, 제가 오므라이스를 하면서 했던 이야기, 기억하시나요?”

“’어릴 적에 아버지께서 자주 해주셨다’고 하셨죠.”

“정확합니다. 하지만 말이죠, 사실 그 레시피, 5년째 계속 바뀌고 있어요.”

“…….”

“아버지가 그것을 어떻게 해 주셨는지, 안에는 무엇이 들어갔었는지. 이제는 그것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온 증거가, 살아있다는 증거가 사라져가는 기분이에요.”

그 때, 프로듀서는 주전자 안에 홍차 티백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황급히 뚜껑을 열고 티백을 꺼냈지만, 너무 많이 우려낸 찻물은 쓴 것을 넘어 텁텁하기까지 했다. 찻잔에 차를 조금 따라내고 한 모금 마셨다. 입안을 휘젓는 씁쓸하면서도 텁텁한 감촉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6년 전, 병상에서 일어난 뒤, 저는 재활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헐리우드로 뛰어갔습니다. 뭐든 하고 싶었어요. 아니, 뭐라도 해야만 했습니다. 내가 살아있기 위해서. 그리고 또 다른 꿈을 위해서.”

“프로듀서, 인가요.”

“그 때는 프로듀서보단 매니저였죠. 매니저 일은 그저 나 자신에게 녹이 슬지 않도록 하는 일에 불과했어요. 비록 쫓겨나듯 물러나긴 했지만, 저는 단 하루도, 단 한 순간도, 그라운드를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리워하고 있었죠. 그래서 저는 아마추어든 뭐든 가리지 않고, 야구를 접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녔습니다. 신기하죠? 왜 하필 야구였을까요? 제 인생을 송두리째 뺏어간 것도 야구였는데.”

프로듀서는 잠시 말을 멈추고 또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저는 성격장애를 가지고 있어요. 강박성 성격장애라고도 하죠.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남들에게 이상적으로 보이도록 나 자신을 연기하는.”

그것은 카에데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의 은퇴를 다룬 가십 기사의 막바지에 짤막하게 적혀 있던 내용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녀는 여기서 그의 말을 멈추었어야 했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야구는 그 수단이었습니다.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는 저는 그 누구보다 강하다고 인정받았으며, 그 누구보다 돋보였으니까요. 그라운드에 서 있는 동안, 저는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인정받는 대 스타였습니다.”

잠시 말을 멈추고 그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카에데는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미련이 남을 수밖에요. 아니, 미련이 아니라 집착이라고나 해야 할까요. 내가 가장 잘 하는 게 그것이고, 내가 할 줄 아는 게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단합대회에도 그렇게 열심히 준비하신 건가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에데는 최근 며칠간 프로듀서가 훈련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매일매일 진땀과 신음을 흘리며 이를 갈고, 트레이닝이 끝날 때가 되면 바닥에 쓰러져서 일어나기도 힘들어하던 그였지만, 신기하게도 그것을 귀찮아하거나 싫어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강도 높은 훈련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절반은 여러분을 위해,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저의 욕심이었죠. 그것이 내가 가장 잘 하는 것이고, 내가 여러분에게 가장 확실하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이야기는 거기서 끊겼다. 프로듀서가 권하지는 않았지만, 카에데는 스스로 주전자에 든 쓰디쓴 홍차를 찻잔에 따른 뒤 한 모금을 마셨다. 입 안을 유린하는 강렬한 쓴맛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그녀를 더 괴롭게 하는 것은,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남자의 표정이었다.

언제나 웃고 있는, 웃음밖에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 처럼 잔뜩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 때가 되어서야 그녀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깨달았다. 단순히 호기심을 채우고 싶었던 자신의 행동이, 그에게 있어서 얼마나 잔혹한 인질극이었는지를 깨달았다.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또다시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또다시 쓴맛이 입안을 유린했지만, 이번에는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어떻게든 참아 내었다. 전혀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경솔한 행동을 했던 자신에 대한 벌이었다.

프로듀서는 곁눈질로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각.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휴대전화와 자동차 열쇠를 챙겼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데려다 드릴게요.”

아까와는 달리 단호한 어조로 프로듀서는 잘라내듯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그런 그의 분위기에 휩쓸린 것인지, 카에데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목요일이 꽤 빨리 돌아왔군요.”

카에데의 맨션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던 프로듀서가 입을 열었다. 

“다음에 볼 땐 목요일에 보자고 해놓고선 말이죠.”

“죄송해요…….”

“죄송할 게 뭐가 있습니까? 쓸데없이 신비주의로 간 제 잘못이죠.”

카에데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프로듀서를 바라보았다. 회복한 것인지, 아니면 가슴 속에 담아둔 것인지. 프로듀서의 얼굴은 평소의 서글서글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잠시 이야기를 멈춘 그는 곧이어 신호를 받아 잠시 정차했을 때 다시 입을 열었다.

“9월 24일.”

“……?”

”제 생일입니다.”

“9월 24일이요.”

“고향은 기억이 안 나지만, 혈액형은 A형이고, 천칭자리에요.”

“그렇군요. 천칭자리…….”

그 나름대로 사람을 균등하게 대하려 노력하는 프로듀서의 모습을 떠올리면, 어쩐지 별자리와 사람의 이미지가 비슷하게 느껴졌다.

대화는 거기서 멈추었다.

다시 그가 입을 연 것은 카에데의 맨션에 도착해서 그녀가 내리기 직전에 감사의 인사를 전할 때였다.

“고마워요. 제 억지에 어울려 주셔서…….”

“타카가키씨.”

“네?”

“저는, 다시 일어선 게 아닙니다.”

“……?”

조수석에서 막 내릴 채비를 하던 카에데는 고개를 돌려 운전석의 프로듀서를 바라보았다.

“다시 일어선 게 아니라 그저 잊혀지고 사라질 게 두려워서 쓰러지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과거에 휘둘려 살지 마세요. 과거의 당신은 과거의 당신이고, 지금의 당신은 지금의 당신입니다.”

자동차의 실내등 아래로 드러난 그의 옆모습은 어째서인지 그녀가 알고 있던 프로듀서보다 몇 살은 더 먹은 것 같은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도 그가 3살 연상이기는 하지만.

“……고마워요. 드릴 말씀이라곤 고맙다는 말 밖에 없네요.”

“그 정도로도 충분하죠.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네, 다음에 뵐 때는 사무실에서 뵙기를.”

“꼭 그렇게 해주세요. 내일도 레슨이 있으니까 바로 주무시고요.”

“네.”

그녀를 돌아보며 씨익 웃는 그의 얼굴은 종전의 무게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느 샌가 평소의 프로듀서로 돌아와 있었다.

 

잠시 후, 멀어져 가는 승용차의 테일램프를 바라보며, 카에데는 그가 자신에게 해 주었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프로는 인내의 삶입니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빛나는 때가 있는가 하면, 그 네온사인이 꺼져 있을 때도 있습니다. 빛나던 때의 화려함보다도, 빛이 사라졌을 때의 쓸쓸함을 곱씹을 줄 알아야 하는 것이 프로에요. 저는 빛을 충분히 즐겼으니, 이제는 쓸쓸함에 익숙해질 때입니다.]

그 이야기도 결국은 거짓이었다. 충분하긴 뭐가 충분하다는 것인지. 그가 빛나는 세상을 누린 시간은 쓸쓸함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쳐온 15년이라는 세월에 비하면 너무나도 짧은 시기였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통해 카에데는 자신의 집으로 올라갔다. 어두운 복도를 걸어가면서, 그녀는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정상이 되자.

빛나는 정점에 올라서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말하자.

저 사람이 나의 프로듀서다.

재투성이 처녀를 무도회장까지 안내해 준 나만의 마법사라고.

“기대해주세요. 제가, 당신에게 또 다른 빛나는 세계를 보여 드릴테니.”

듣는 사람 하나 없는 그녀의 작은 독백이, 어두운 맨션의 복도로 퍼져나갔다.

 

 

 

 

P <인내의 삶>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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