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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와라 유키호의 몽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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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19, 2014 14:12에 작성됨.

 

 4. 하기와라 유키호의 몽환론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여자는 하얀 빛을 내고 있었다. 날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매가 없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원피스를 입어 드러난 어깨도, 뒷짐을 지고 있는 팔도, 치맛자락 아래로 드러난 맨다리도 모두 눈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색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계절을 벗어나 내려온 천사와도 같았다. 바람도 불치 않는데 흩날리고 있는 원피스 자락은 비현실적인 감각을 더해주었다. 그녀가 천사가 아니라고 믿을 수 있었던 건 새하얀 날개 대신 챙이 넓은 하얀 모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자가 너무 큰 탓인지 챙에 가려 그녀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살며시 미소를 짓고 있는 입가만 보일 뿐이었다.

 

 나는 왠지 모를 끌림과 익숙함에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 분명 이 장면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서 오라는 듯이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들어 내밀었다. 그녀를 향해 다가가는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처음에는 망설이며 내닫았던 첫 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마지막에는 달리다시피했다. 그리고 그녀가 내민 손에 내가 손을 내미는 순간 온 세상이 하얀 빛으로 가득찼다. 모든게 사라져가는 빛 속에서도 그녀의 미소는 이상하게도 선명했다.

 

-

 

 "…또 꿈인가."

 

 눈을 뜨자 하얀 빛이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빛에 적응하지 못한 눈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못해 다시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잠시 괴로워하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자 서서히 눈의 상태가 괜찮아졌다.

 

 눈 을 다시 떠보니 역시 꿈이었다. 오늘도 같은 꿈이었다. 꿈이라는 게 다 그렇듯이 잠에서 깨자마자 꿈 속의 기억들은 모두 사라져버렸고 오늘의 꿈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인상에 깊게 남는 꿈은 기억이 나기도 했지만 이 꿈은 내용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조금 다른 것이 이 꿈의 경우에는 매일 같은 꿈을 꾸고 매일 같은 내용인 것만은 기억이 나면서도 그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치 흰 천에 싸여있는 물건을 보는 듯 실루엣만 보일 뿐이고 안에 있는 내용물은 전혀 보이지 않는 기분이었다. 매일 같은 꿈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그리운 느낌. 약간의 진전이 있는 건 같은 꿈을 계속 꾸다 보니 한 소녀가 나타나는 꿈이라는 것만은 기억해냈다는 것이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소녀가 계속해서 나오는 꿈이었다.


 

 

 "프로듀서 씨, 이거 드세요."

 

 점심 때의 쉬는 시간, 멍하니 자리에 앉아 아침의 꿈에 긴 여운에 잠겨 있을 때 유키호가 차를 내왔다. 단지 눈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향기가 흘러나왔다.

 

 "고마워, 유키호. 향이 참 좋네."

 

 내가 감사의 말을 전하자 유키호는 수줍게 미소지었다.

 

 "…무슨 일 있어?"

 

 찻잔을 받아 든 이후에도 유키호는 계속 나를 바라보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감상을 듣고 싶어서요."

 "감상인가…"

 

 나 는 꼭 차가 아니더라도 감상을 말하는 일을 항상 주저했다. 아이돌의 프로듀서인 이상 여러가지 일에 적확한 판단과 감상을 해야할 일들이 있었지만 항상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노력이라는 걸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누군가를 함부로 평가하는 것도 싫어서였다.

 

 "향이 좋고 맛있네."

 

 어디까지나 무난한 감상이었다. 간단하고 뻔한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유키호는 환하게 웃었다.

 

 "그거면 충분해요."

 

 온화한 차의 향을 음미하고 있으니 문득 생각이 나서 유키호에게 물어보았다.

 

 "유키호, 유키호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이야?"

 "꿈인가요…? 자주 꾸는 편은 아니지만…"

 

 유키호는 잠시 우물쭈물하며 망설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꿈에서는 꿈… 그러니까 제가 바라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오히려 자주 꾸고 싶은 쪽이에요. 현실에서는 이루지 못하는 일들도 해낼 수 있으니까요."

 

 꿈 은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한다. 뇌가 기억이나 정보를 제멋대로 불러오는 것인데 무의식적으로 평소에 억압되어있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 만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꿈을 꿀 수는 없다는 이야기인데. 그 소녀는 누구인걸까.

 

 "요즘 이상한 꿈을 꿔서 그래."

 "이상한 꿈인가요…?"

 

 나는 유키호에게 하얀 소녀의 꿈에 대해 말해주었다. 얼굴을 가린 채로 웃고 있는 새하얀 소녀.  

 

 "프로듀서 씨, 그거 아세요?"

 "응? 뭔가 있는 거야?"

 "누군가의 꿈을 꾸는 건 그 사람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래요."

 

 그리워하기 때문인가. 그럴 법 하다.

 

 "다만 자신이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지 그 사람이 자신을 그리워 하는 지는 알 수 없지만요."

 

 뭔가 분위기 있는 말이네.

 

 "그러면 누군가가 날 그리워하고 있다는 건가? 하하하…"

 "그럴…지도요."

 

 미묘하게 유키호의 목소리가 작아지는 것 같다. 무슨 이유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프로듀서 씨."

 

 이번엔 유키호가 나를 불러왔다.

 

 "프로듀서 씨는 자신의 인생을 선택한다고 생각하세요?"

 "응? 당연한 거 아냐?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하는 거지."

 

 내 이야기도 뜬금없었지만 유키호의 이야기도 너무 갑작스러웠다.

 

 "사람에게는 정해진 운명이라는 게 있을 수도 있고… 항상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기에는 현실의 문제들이 있잖아요? 그럴 때 프로듀서는 자신의 선택을 밀고 나가는 편인가요?"

 

 뭐야, 고민이라도 있었던 건가. 현실의 벽에 막혀서 하기 힘든 일이라…

 

 " 내 말이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해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물론 이런 저런 이유들로 실패하거나 좌절할 수도 있지만 일단 해 보는게 좋지 않을까. 해보고 안 되면 그때 가서 생각해도 괜찮은 거니까.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나중에 가서 후회만 남을 거라고 생각해."

 "…그런가요."

 

 유키호는 무엇인가 결심한 것처럼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했다.

 

 "사실은 저도 요즘 이상한 일이 있어요. 프로듀서 씨처럼 꿈을 꾸는 건 아니지만 가끔씩 가슴이 두근거리고, 답답하고, 찌를 듯한 아픔이 느껴지는 걸요."

 

 …잠깐, 이거 무슨 이야기?

 

 "무슨 뜻인지는 저 자신도 잘 알고 있어요."

 

 유키호는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프로듀서 씨와 함께 살아가고 싶다고."

 

 침착함을 유지하려 하고 있었지만 유키호는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생각해봤지만… 역시 제가 아이돌이 된 것도 아마 프로듀서를 만나기 위해서 된 걸 거에요."

 "유, 유키호…"

 

 유키호가 싫은 건 아니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다. 프로듀서와 아이돌의 관계라던가 그런 것 이전에 유키호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할 줄은 전혀 몰랐다. 예상도 못한 일이었다.

 

 "프로듀서 씨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나 즐거워서, 그래도 그 순간의 행복한 기분은 꿈처럼 잠시 뿐이죠. 다시 시간이 지나면 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아요."

 "아, 알겠으니까 유키호… 일단 진정하고…"

 "죄, 죄송해요…."

 

 유키호의 감정도 보통이 아닌 듯 했다. 간신히 참고 있던 눈물도 제멋대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유키호의 마음은 잘 알겠으니까…."

 

 그 후로도 유키호를 진정시키고 달래는 데 한참이나 걸렸다. 무턱대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성격의 주제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넘어가는 식으로 적당히 대답해서는 안 될 거라는 생각에 결국 답변을 해 주지는 못했다.

  

-

 

 또다시 꿈이었다. 여전히 하얀 소녀의 꿈이었다. 이번에는 눈 대신에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분홍빛 눈이 쏟아지는 아래에서 하얀 원피스의 소녀는 여전히 챙이 큰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나를 그리워 하는 사람. 내가 그리워 하는 사람. 오늘이야말로 그녀가 누군지 알고 싶었다. 꿈은 자신이 보고,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나타나지 않으니까 그녀도 분명 내가 아는 사람일 거다.

 

 이번에는 곧바로 그녀에게 달려갔다. 주저하지 않고 바로 뛰어갔다. 소녀는 살짝 웃으며 어서오라는 듯 손짓했다. 이윽고 손이 맞닿은 순간.

 

 "프로듀서 씨."

 

 나머지 한 손으로 모자를 들어올린 소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가. 나도 모르고 있었던 내 감정은 이런 뜻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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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기 전에 어찌어찌 수습했습니다. 이래저래 엉망이네요. 유키호가 이렇게 쓰기 힘들 줄이야...

소재는 온다 리쿠 씨의 소설인 '몽위'와 '몽환 ~ A True love tale' 이라는 곡.

사실 생일에 맞춰 쓰려고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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