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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슬픈 초상(닛타 미나미 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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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10, 2016 00:12에 작성됨.

새벽을 가르는 잔잔한 알람소리와 함께 하루가 시작된다.

 

‘어디 보자, 오늘은 등교 전 라크로스 부활동이 하나, 이후 오전에 경제학 원론 강의, 오후에 교양 지구과학 강의가 있고, 수업 이후에는 영어 학원에서 토익 강의. 저녁 먹고는 스터디가 하나 있었지? 어제보다는 널널한 걸.’

침대에서 눈만 뜬 채로, 머릿속으로 어젯밤, 자기 전에 스케줄러에 빼곡히 적었던 일정을 머릿속으로 되 내이는 그녀였다.

 

“닛타 미나미, 19세, 대학생, 취미는 자격증 취득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며칠 전에 시작한 스터디 모임에서 자신을 소개했던 것을 떠올린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그녀였다.

학생 때야 말로, 여러 가지 경험을 하여 자신만의 길을 찾기에 최고인 시기였다.

그 말대로 자신은 누구보다도 바쁘게 살아간다. 자신 안의, 자신 만의 가능성을 찾기 위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힘차게 기지개를 편다. 또 다른 새로운 하루가 밝은 것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성실하다’라는 말을 기회가 많은 그녀였다.

그럴 때 마다, 오히려 자신은 가족들에 비하면, 비교적 게으른 편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당장 지금만 해도 그렇다. 문을 살짝 열고 복도로 나서자, 두 줄기 불빛이 보인다. 한 쪽은 자신의 방의 반대쪽 방에서, 한 쪽은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쪽의 방에서.

자신의 방의 반대쪽에 있는 남동생의 방의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빛이 보인다.

자신보다 두 살 아래, 아직 고3 수험생도 아니지만, 항상 일찍 일어나 새벽 공부를 하는 남동생이었다.

수험생 때라면 남들 못지않게 열심히 했던 그녀였지만, 예전부터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그를 볼 때마다 대견함과 동시에, 한편으론 너무 무리해서 건강을 해치진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였다.

방해되지 않게 살금살금 걸으며, 계단쪽으로 내려간다.

계단쪽의 방은 문이 활짝 열려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논문을 읽으며 메모중인 아버지.

국내외로 저명한 해양학자가 된지도 오래되었지만, 그가 연구를 게을리하는 법은 결코 없었다.

그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주의하며, 살금살금 1층으로 내려간다.

 

입에 토스트를 문 채로, 라크로스 라켓과 가방을 챙겨들고 집을 나선다.

 

학교까지는 지하철로 몇 정거장이지만 그녀가 시간을 낭비하는 경우는 결코 없었다.

오늘 세미나에 필요한 책의 부분을 간략하게나마 속독(速讀)하는 그녀.

 

 

“안녕하세요!”

 

“여어” “어서와, 미나미쨩”

 

체육관 입구를 들어서며, 부원들과 인사를 나누는 미나미.

 

라크로스는 대학교에 와서 배우기 시작하였지만, 지금까지 여러 가지 운동을 하면서 기른 체력과, 타고난 센스로 빠르게 실력이 향상되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도 수고 많았어” “내일 또 보자”

 

부원들과 헤어진 후, 흐르는 땀을 닦으며, 강의실로 이동한다.

 

오늘의 1교시는 경제학 원론 강의이다.

 

약 3시간 동안 이어지는 이 수업은, 미나미 자신의 흥미보다는,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여 고른 과목이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취업에 유리한 전공인 사실 등은 차치하더라도- 경제학과 관련 금융지식은, 이 사회에서 살아 나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번 학기에 법학 개론도 듣고 있는 그녀였다.

 

수업은 봄의 훈훈한 날씨와, 노교수님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어우러져, 절로 수면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벌써 뒷자리에 앉은 많은 학생들이 하나 둘 픽픽 쓰러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지 않는다. 어젯밤에 관련 부분을 예습하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맨 앞자리에 앉아 교수님과 아이 컨택트를 하며, 가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노트에 필기를 하기도 한다.

 

3시간짜리 수업을 논스톱으로 진행한 것으로 모자라, 교수님께서는 근시일(近時日) 내에 쪽지시험을 보겠다고 선언하시고 나간다.

 

학생들이 기지개를 펴며 깨어나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점심시간인 것이다.

 

미나미는 동성 친구들과 함께 학내 식당에 식사를 하러 간다.

고등학생때 미인 대회에도 출전하여 입상했을 정도로, 그녀의 외모는 단연코 눈에 띄었다. 거기에 수업도 열심히 듣는 모범생이기도 했기에, 시샘하는 학우들이 있을 법 하였지만, 특유의 친화력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였기에, 항상 인기의 중심인 그녀였다.

 

그쯤되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성들에게도 영향력을 확장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의 타고난 성품이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즉, 아직 연애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동성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그녀였다.

 

식사를 하고, 학내 카페에서 한바탕 수다를 떤 다음, 교양 수업을 듣기 위해 캠퍼스를 바쁘게 가로지른다.

 

오후의 수업은 교양 지구과학이었다.

이 수업은 순전히 그녀의 관심사에 의해 듣게 되었다. 아버지가 해양 물리학자인 까닭에, 그녀는 항상 바다와 관련된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의 이름에 波(물결 파)자가 들어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따라서 대학에 진학하여, 아버지가 평생을 바친 과목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욕구가 강하였고, 그것이 그녀를 이 길로 이끈 것이다.

보통 교양 강의에는, 학점을 때우기 위해 대충대충 듣는 학생들이 많았으나, 그녀는 교양 과목이라고 결코 홀대하는 법이 없었다.

관심 있는 과목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호기심과 자기향상성’이 높은 그녀였기에, 어떤 과목이라도 열심히 배우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설령 아무짝에 쓸모없는 수업이라도, 그 시간에 빈둥거리는 것보다는 나을거야’

 

교양 수업을 마치고 학교 근처의 영어 학원으로 간다. 이때가 오후 5시.

 

미나미가 듣는 수업은 토익 강의이다.

강의에는 취업을 목전에 두고, 부랴부랴 스펙을 쌓으려는 예비졸업생들과, 사회에 진출해서도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계발하는 직장인들이 많았다.

미나미 같이 파릇파릇한 청춘이 이곳에 와있는 경우 자체가 매우 드문 것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이렇게 생각한다. ‘미래를 위해서라도, 시간이 많은 학창시절에 더 노력해야할 필요가 있어!’라고.

 

2시간의 강의를 마치고, 바삐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그녀.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산다.

이것이 그녀의 저녁인 것이다.

‘파파와 마마가 알면 분명 걱정하시겠지... 그래도 빠르게 해결하려면 어쩔 수 없는 걸.’

 

빠르게 해치우고 학관 강당으로 가는 그녀.

얼마 전부터 시작한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서이다.

이 세미나에서는 경제학과 법학, 그리고 여러 제반 학문을 융합하여, 사회 전반에 적용하는 것이 목적인 세미나이다.

주제의 스케일만큼, 난이도도 있었고, 미리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 이를테면 책을 읽고 발제를 준비하는 것이라던지.

‘아침에라도 간략하게나마 책을 훑어볼 수가 있어서 다행이야.’

 

사회 여러 현안에 대해 격렬한 토론이 오고간 다음,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겨 세미나는 끝이난다.

 

주제가 어려웠던 만큼, 토론에는 많이 끼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하며 시계를 바라보는 그녀.

 

아뿔싸, 전철 막차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급하게 인사를 건네고 전철역으로 달려가는 그녀.

 

한산한 밤거리를, 한 청초한 여대생이 전력으로 달려 나간다.

 

아슬아슬하게 전철에 탑승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

자리에 앉아 그대로 아무것도 안하고 있고 싶지만, 그녀에게는 할 일이 많다.

가방에서 조그마한 단어장을 꺼낸다.

오늘 토익 강의에서 배웠던 단어들이다.

 

resume 이력서

opening 공석, 결원; 개...장, 개......시

appli...can...t 지원자, 신청...자

...

...

단어장을 보다가 누적된 피로에 깜빡깜빡 조는 그녀였다.

 

핫!

졸다가 그만 내릴 역을 지나칠 뻔 했다!

 

도착역의 방송에 정신이 번쩍 들어, 겨우겨우 전철에서 내리는 그녀.

 

전철역부터 집까지는 그리 멀지는 않지만, 늦은 밤이었기에, 항상 파파가 픽업하러 오신다.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녀.

이때가 그녀에게 있어 가장 행복한 시간 중 하나이다.

 

집에 도착해서 마마와 반갑게 인사하는 미나미. 어머니도 야근으로 방금 퇴근하신 모양이다.

회사에서 높은 직급으로 승진하시더니, 야근과 주말 출근을 밥 먹듯이 하는 그녀였다.

 

“미나미쨩, 이거 하나만은 알아 둬야해.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단다.

첫 번째는 따뜻한 저녁과, 주말이 보장되는 대신에, 적게 돈을 버는 사람.

두 번째는 이것들을 포기하는 대신에, 많이 버는 사람이란다. 미나미쨩은 어떤 삶을 살고 싶니?”

 

미나미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미래에 어떻게 살까, 무엇을 하며 살까 라는 생각은 크게 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항상 다정한 어머니였지만, 이럴 때 만큼은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것이었다.

누군가 말하길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고 했던가-

여기서 큰 힘을 큰 권력, 권한으로 바꾸면 어머니에게 해당하겠지-

라고 생각하며, 미나미는 어머니를 위로한다.

그래도 장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머니의 표정이 꽤 밝아진다.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2층으로 올라가는 미나미. 슬쩍 동생 방 쪽을 보니 아직 불이 꺼져있다. 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야간 자율 학습을 하는 것이 아직 안 끝난 모양이다.

자신보다 더 열심히 사는 듯 한 남동생을 생각하며, 누나로서 응원하는 동시에, 질수 없다고 남매로서의 경쟁심을 불태우는 그녀였다.

 

가볍게 샤워를 마친 뒤에, 피로가 엄습해오지만, 아직 그녀에게는 할 일이 남아있다.

언제 있을지 모르는 경제학 원론 쪽지 시험을 대비하기 위해 다시 두꺼운 교과서를 펼치는 그녀. 책 곳곳마다 그녀의 흔적이 남아있다. 형형색색의 형광펜 표시, 포스트잇으로 정리된 필기 등등.

수요와 공급 그래프에 대해서 보던 중 깜빡 잠이 드는 미나미.

꿈속에서 그녀는 높은 위치에 있다.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열심히 산 것에 대한 대가일까?

그러다가 가파르게 내려간다. 저 밑으로. 마치 공급 곡선처럼.

자유낙하와 같은 추락에 놀라며 깨는 그녀. 시계를 보니 이미 꽤나 늦은 시간이다.

슬쩍 고개를 돌려 동생 방 쪽을 보니, 불이 꺼져있다. 동생도 들어와서 자는 것이리라.

 

아직 못한 부분이 남아있기에 더 봐야하나 고민하는 그녀였으나, 더 이상 무리하면 안된다고 생각하여, 그제서야 잠자리에 든다.

 

 

 

새벽을 가르는 잔잔한 알람소리와 함께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오늘은 등교전에 라크로스 부활동, 오전에는 인문학 교양 수업이 하나, 오후에는 법학 개론 강의, 다른 자격증 강의가 저녁 즈음에 있네. 그 사이에는 밀린 학과 공부나 숙제라도 할 수 있겠지.’

 

어제는 그만 플래너를 채우는 것을 잊고 말았다. 그 점을 생각하며 더 분발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그녀였다.

 

오늘 하루도 바쁘게, 정신없이, 그리고 ‘예정대로’ 지나간다.

라크로스 부원들을 만나서 반갑게 인사하고, 연습을 한다. 라크로스는 흥미롭긴 하지만 결코 쉽지만은 않다. 선배가 뭐든지 숙련에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라고 위로하지만 마음에 차지는 않는다.

오전 9시부터 시작하는 인문학 교양 수업. 교수는 형이상적인 철학 개념들을 마구마구 내뱉는다. 판서 하나 없이 오직 말로만. 이를 필기하려고 그녀는 분주한다.

 

점심 시간을 쪼개서 담당 교수를 찾아서 진로 관련 상담을 하는 그녀. 같이 밥을 먹던 동기들한테는 살짝 눈치가 보여서 어쩔 수 없었다. 이해해주기를 바랄뿐.

 

오후 법학 수업은 어렵지만, 장래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나마 들을 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수업을 열심히 듣는 그녀를 보면서 흐뭇해하던 교수는, 수업 이후에 그녀를 따로 불러, 격려와 함께 다른 학회 참여를 주선해준다.

 

머릿속으로, 솔직히 지금 하고 있는 것도 조금씩 버겁다고 생각한다.

그 반대급부로 교수가 한 말이 귀에 맴돈다. 관련 유명 인사들이나 교수들도 많이 참석한단다.

가슴속으로, ‘더 이상 일을 벌리면 무리일지도’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반대쪽에서 소리가 들린다. ‘장래에 도움이 될거야.’ ‘다양한 경험을 쌓자’ 그녀의 목소리로.

 

머리를 휙휙 저어서 ‘약한 생각’을 쫓아내고 교수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그녀.

 

교수에게 미소 지으며 인사를 드리고, 도서관으로 간다. 언제 있을지 모르는 경제학 원론 시험을 준비하는 그녀.

잘 진행되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막히기 시작한다. 거기를 고민하다 시간이 훌쩍 지난다.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본다. 또 시간이 빠듯하게 남았다.

오늘 저녁도 편의점표 간편 음식 확정이다.

간단하게 저녁을 때우고, 자격증 강의를 들으러 이동한다. 학교에서 주관하는 강의이다.

 

오늘도 긴긴 하루를 마치고, 집 근처 역에서 아버지를 만나 담소를 나눈다. 이때가 가장 행복하다.

오늘부로 어머니는 1박 2일로 출장을 가셨다. 동생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께 인사드리고 방으로 올라간다.

샤워를 하며 하루의 피로를 풀고 다시 책상에 앉는다. 아까 하던 경제학 공부가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다. 이리저리 찾아보고, 필기 한 것도 들추어보지만, 역부족이다. 결국 그녀는 내일 교수를 찾아뵈어 질문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표시를 하고 책을 덮는다.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적막한 도시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2층 주택에 살고 있는 그녀였지만, 도시 주변 근교의 언덕에 지은 집이라, 그녀의 방에서는 경치가 한 눈에 들어왔다.

 

남들에게는 잘 밝히지 않지만, 그녀의 취미중 하나는, 노래를 들으면서 이렇게 바깥 야경을 감상하는 것이다.

 

이어폰을 귀에 꼽고, 그녀가 즐겨듣는 곡을 재생한다.

 

인기 절정 아이돌인 타카가키 카에데의 ‘Nation Blue’

 

める事無いて自分信じてね

아키라메루 코토 나쿠 마에오 무이테 지분 신지테네

포기하지 말고 앞을 보며 자신을 믿어봐

 

いつもキミをてる

이츠모 키미오 미테루

언제나 너를 보고있어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노랫말이다.

 

무채색의 도시 풍경을 묘사하는 듯 하지만, 그 안에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한 신뢰를 가져라는 내용.

스스로 느끼기에도 자신감이 부족한 듯한 그녀에게는 여러 가지 의미로 다가오는 가사이다.

 

분위기에 취하면서 멍하게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그녀.

 

학교 생활, 대인 관계에 대한 표면적인 생각부터 시작하여, 조금씩 생각의 깊이가 생긴다.

경제학의 풀리지 않던 문제를 고민하던 생각은, 어느새 ‘나의 노력이 부족했나?’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법학 교수님이 그렇게 좋은 자리를 주선 해주셨는 데에도 잠시나마 주저했던 것은 자신의 좋은 조건 때문에 나태해진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이어폰을 귀에서 빼면서 다시금 다짐하는 그녀. ‘좀 더 노력하고, 다양한 경험을 해보자.’라고.

 

남동생 방을 보니 불이 꺼져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이 꽤나 지난 모양이다.

 

플래너에 다음날 할 것을 간단히 적은 뒤, 그녀도 드디어 긴긴 하루를 끝내고 잠자리에 든다.

 

 

 

새벽을 가르는 잔잔한 알람소리와 함께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어야했다.’

 

어쩐 연유인지, 알람은 울리지 않았고, 최근 며칠간 수면이 부족했던 미나미는 간만에, 정말 오랜만에 늦잠을 자게 되었다. 항상 아침에 깨워주시던 어머니도 출장으로 안 계셨고, 아버지 역시 논문 삼매경에 빠져서 딸이 늦게 일어나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는, 빠르게 씻고 메이크업을 하면서 머릿속으로 하루의 일정을 프리뷰(preview)한다.

 

‘오늘 역시 라크로스부 활동이 있는데... 지금 시간이면 빠듯할지도. 그리고 오전에 경제학 원론 수업이 있고, 오후에는 인문교양이 있겠지. 오늘은 영어 학원도 있네. 그 이후에는 조금 쉴수 있을지도.’

 

부랴부랴 역으로 달려가며 생각하는 그녀였다.

 

그러나 그 뒤부터 하나하나씩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지하철을 눈앞에서 놓친 그녀는, 결국 다음 열차를 타게 되었고, 라크로스부 활동에 지각하게 되었다. 평소에 항상 미리 도착해서 기다리는 그녀였기에, 부원들은 의아하게 생각하였고, 미나미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사정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어찌 부활동을 마치고, 경제학 원론 수업이 있는 강의실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오늘의 교수는 평소의 두꺼운 전공서적을 끼고 오지 않고, 대신 한 뭉큼의 시험지만을 들고왔다.

 

예고되었던 쪽지시험은 바로 오늘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미나미는 꽤나 당황하였다. 아직 해결 못한 부분이 있었고, 오늘 수업이 끝나는 대로 교수를 찾아가 질문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악재가 겹친다고, 시험은 미나미가 고전했던 그 부분을 위주로 출제되었고, 미나미는 참담한 심정으로 시험지를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점심을 먹으러 가면서 동기들의 대화주제는, 당연하겠지만, 그 시험에 관한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랄까, 모두에게 어려웠던 부분인지, 시험을 잘 치른 사람은 소수인 듯하였다.

그래도 그것이 미나미에게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항상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던 그녀였기에,

항상 남들의 모범이 되는 그녀였기에.

그녀는 이번 시험을 잘 쳤어야했다.

좀 더 노력해서 그 부분을 이해했어야했다.

 

결국 그녀의 노력부족이었다.

 

지금의 미나미는 그걸 뼈 아플정도로 통감할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는 하하호호 하면서 친구들하고 대화에 어울리고 있었지만.

 

이어지는 오후 수업도 만만치는 않았다.

 

아침에 허둥지둥하다가, 실수로 교양 수업 교재를 깜빡한 것이었다.

 

수업을 열심히 들으려고 발버둥 쳤지만, 오늘의 교수님은, 더욱 불친절한지라, 현대철학을 다루면서도 판서 하나 없이, 주절주절 이야기를 할 뿐이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 이 유명한 경구(警句)는 헤겔이 그의 저서인 《법철학의 원리》에서 말한 겁디다. 이 의미는 철학은 앞날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현상이 일어난 뒤에야 비로소 역사적인 조건을 고찰하여 철학의 의미가 분명해질 수 있다는 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혹은 황혼을 시간대에 대한 비유로 해석하여 '지혜와 철학이 본격적으로 필요할 때는 세상이 어둠에 휩싸이고 인간성이 사라져갈 때' 라고도 해석할 수도 있죠. ...”

 

결국 점심 직후의 식곤증까지 겹쳐서 그녀는 꾸벅꾸벅 졸고 만다. 맨 앞자리에서.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 무신경한 철학과 교수도 그걸 보고는 아마 잠깐이나마 놀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수업이 끝난 직후에, 터덜터덜 강의실에서 나오는 그녀의 표정은 “낭패” 그 자체였다.

 

모든 것은 자신의 잘못이다. 자신이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다. 자신이 좀 더 노력했어야했다..

 

사춘기 때부터, 그녀는 어렴풋하게 깨닫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문제는, 외부에서부터가 아니라, 자신에게서 온다는 것을. 그말은 즉, 문제의 해결책 또한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녀만의 ‘진리’ 때문에, 그녀는 문제가 생겼을 때, 비난의 화살을 그녀 자신 쪽으로 돌렸다. 그녀 자신이 모든 문제를 떠안으려고 하였다.

그러한 해결방식은 한층 성숙된 의식을 가질 수 있게 하였으나, 필연적으로 오늘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을 만들어내고 만들었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뒤의 마음가짐과 행동이다.

미나미의 이러한 사고방식 때문에, 그녀는 냉정하게 사태를 돌아보고, 반성하고, 해결할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평소의 완벽주의적인 성격은 이런 데에서 독이 되었다. 작은 실수라면 얼마간의 노력을 들여 원상태로 복구할 수 있으나, 이렇게 여러 가지 일이 복합적으로 일어나면 도무지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며 겨우겨우 영어 학원으로 향하는 그녀.

 

멍하게 강의를 듣고 겨우 집으로 돌아온 참이다.

아버지에게는 오늘 있는 일을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언제나 집안의 장녀로서, 훌륭한 모습만을 보여준 그녀이기에, 그녀는 항상 가족들 앞에서 훌륭한, 완벽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였다.

아까까지의 감정의 격류는 사그라들어, 조금 여유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기에, 별 일 없었다고 말하며 웃었다. 약간은 인위적이지만.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는 무언가 있음을 직감하였으나, 그녀를 믿었기에, 미소로 답하고 따로 캐묻거나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학원이 일찍 마쳐서 간만의 여유가 있는 참이다. 그녀는 조금씩 인적이 드물어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あの日見って 全力ってきた

아노히 미타 유메오 옷테 젠료쿠데 하싯테키타

그 날 봤던 꿈을 쫓아 전력으로 달려왔어

 

そんないずっといて

소은나 오모이 즛토 카가야이테

그런 감정이 계속 빛나며

 

った たちは それがそこにあるとじてた

유메오 옷타 보쿠타치와 소레가 소코니 아루토 신지테타

꿈을 쫓던 우리들은 그것이 그곳에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지

 

오늘도 그녀의 이어폰에서는 Nation Blue 가 재생된다.

 

읽을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작품이 좋은 문학 작품이라고 한다면,

들을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곡이야 말로 명곡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그녀.

그녀에게 있어서는 이 곡이 바로 그 곡이다.

 

솔직히 말하면 가사를 많이 들어도 완벽하게 주제의식은 잘 모르겠다.

이전까지는 ‘너’와 ‘나’라는 대화형식을 빌리지만, 사실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것-자신감을 가져라고- 이라고 생각했지만,

 

최근에는 이 노래는,

꿈을 쫓고 있던 화자는 냉혹한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하고 만다.

그러나 코러스 부분에서 다른 한명이 앞에서 이끌어주며 조언해준다. 포기하지 말라고, 자신을 믿어라고.

이렇게도 해석이 되는게 하는가 싶기도 한 것이었다.

 

어느덧 거의 텅빈 밤거리. 가로등만이 깜빡거리며, 삼삼오오 젊은이들이 은밀하게 어둠속으로 잠기는 것이었다.

 

문득 그녀는 생각한다. ‘지금 내 상황은 어떻지.’ 하고.

 

지금껏 그녀도 꿈을, 미래를 바라보며 힘차게 달려왔다.

 

아니,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 듯.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단순한 미래상 이었을 뿐이니까.

 

사실 지금까지 그녀는 아직까지도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찾을 수가 없었다. 이를 찾기 위해서 학창시절에는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학생회 활동도 병행하였다. 그녀의 취미란에는 당당하게 자격증 취득이라고 적혀있었고, 철들기 이전부터 많은 자격증을 취득해왔다.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닿으면 망설이지 않고 도전하였다. 물론 힘들었다. 하루에 몸이 10개라도 모자란 날도 많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은, ‘더 나은 미래’라는 달콤한 꿈이었다. 장기 계획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있는 일들을 처리하고, 기회를 잡아서 열심히 한다면 무언가 되어 있을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장래를 대비하며 열심히 사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아니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아니야, 아니야, 오늘은 그저 안 좋은 일이 많이 겹쳐서 컨디션이 안 좋아서 이런 생각까지 나는걸 거야. 나는 잘 하고 있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그렇게 많은 활동을 했건만, 너는 아직도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알수가 없잖아?

평범한 회사원?

학자?

운동 선수?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려보겠지만, 지금의 너는, 그 어떤 것도 구체적으로 잡을 수가 없어. 그만 인정하라구‘

 

‘아니야... 그렇다면 난 지금까지 대체 무엇을 위해...’

 

속에 두 명의 자아가 싸우는 것 같다.

 

단순한 컨디션 저하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힘들다. 아프다. 고통스럽다.

 

“내게도, 노래의 화자에게처럼, 이런 인도자가 있으면 좋을텐데...”

무심코 생각을 소리내어 말하게 되어버린다.

 

자신의 우상인 파파도 물론 좋다.

하지만, 가족은 가족. 오늘 있던 안좋은 일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나인데...

 

“난, 정말 어떻게 해야하는 거야...”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의 뺨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을까.

 

내일의 예정이 무엇이건 간에, 그녀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침대로 뛰어들었다.

 

 

 

 

그 다음날도 똑같이 일어났다.

똑같이 오늘 하루 일정을 확인한다.

똑같이 등교하기 위해서 집을 나선다.

똑같이 라크로스 채를 옆에 들고 지하철 역까지 걸어간다.

 

모든 것이 똑같다. 나에게 있어서는.

 

지하철을 멍하게 기다리는 것까지도.

 

 

그러나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다.

 

돌아보니 왠 거구의 사내. 인상도 사나워서 아침의 지하철 역같은 공공장소가 아닌 곳에서 말을 걸어왔다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른다.

 

“저...저기...”

그가 살짝 더듬거리며 말하였다.

 

“네?... 무슨 일 이시죠?”

무슨일인가 싶어서 대답한다.

 

“저기... 혹시 아이돌에 흥미 없으십니까?”

 

‘뭐, 아이돌?

아이돌이라고 하면, 그... 타카가키 카에데 같은?

내가?’

 

갑작스러운 말에, 순간적으로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쳤으나, 조금만 찬찬히 생각해보니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상황인가 싶어 조소가 절로 나오려고 하였다.

내가 그렇게 어수룩해 보였을까?

 

“아, 그… 의심스러운 권유라면 사양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부 활동을 가지 않으면 안돼서...

실례하겠습니다.”

 

그래도 예의를 갖춰서 거절한다.

그 말을 하는 동시에 막 지하철이 들어온다는 안내 방송이 나와서, 나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앞으로 나선다.

 

그가 뒤에서 다시 말을 건다. 대체 뭐하는 사람이람.

 

“저기...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돌아보니 두 손으로 공손하게 명함을 내미는 그.

 

일단 명함은 받아보자.

 

‘346 프로덕션 소속 프로듀서’

 

그것을 보고 살짝 놀란다.

뭐야? 정말 프로듀서인가? 연예계의?

 

조금은 흥미가 생기는 것을 느낀다.

 

내가 스테이지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텔레비전에 나온다.

마치 타카가키 카에데처럼.

 

기억하기로 그녀도 같은 기획사라고 들었다.

잘 된다면, 그녀와 같은 무대에 설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한 일전에 별 준비 없이 나간 미인 대회에서 수상했던 걸 떠올린다.

노래는... 친구들하고 가라오케에 갔을 때, 남들에게 꿀리는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댄스도... 레슨을 받으면 되겠지?

그러나 동시에, 이번에 새로 시작한 학회를 생각한다.

곧 있을 자격증 시험을 생각한다.

밀린 학과 공부를 생각한다.

무작정 새롭게 시작한 일과, 기존의 일들이 내 맘을 무겁게 억누른다.

 

솔직히 속으로도, ‘더 이상은 무리’ 라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간만에 두근거리기는 했지만.

어쩌면 이 사람이 내가 그토록 바랬던 인도자 일지도 모르겠지만.

잠깐 빛이 비추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나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단순한 흥미 때문에 확정된 미래가 흔들려서는 안된다.

 

지하철 문이 열린다. 사람들이 타고 내리기 시작한다.

 

어서 내 생각을 전해야한다.

 

“아이돌 사무소의 프로듀서 씨.. 였습니까

정말로 예능관계자 분이셨네요…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저, 아이돌에 흥미는…“

미소를 지으며, 하지만 어쩔수 없다는 표정으로.

 

“잠시라도 이야기를... 할 수는 없겠습니까.”

 

그가 곤란해하며, 뒷목을 가볍게 잡는다. 정말 아쉽다는 듯이.

 

나는 대답 대신에 싱긋 웃어보이고 지하철에 탑승한다.

 

문이 닫히고, 그가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는 모습을 본다.

 

지하철이 역을 떠난다. 왠지 모르겠지만 가슴 한켠이 너무나 아프다.

 

 

“미나미쨩! 조심해!”

“아야야... 죄...죄송합니다”

아침의 그 일 이후로, 하루종일 멍 했나보다. 라크로스 부에서도 나도 모르게 멍하게 되어, 공에 맞는 일도 많았다. 평소의 나 답지 않게.

 

“미나미쨩, 괜찮아?”

 

점심을 먹으며, 동기 한명이 걱정스레 물어온다.

 

내 심정이 표정으로까지 드러나는 모양이다.

 

“응? 으응... 괜찮아... 후훗”

나는 애써 괜찮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한다.

 

오늘도 똑같은 하루가 진행되었다.

 

일정을 마무리하며 학원에서 나오는데 파파에게서 문자가 온다.

 

 

‘미나미, 오늘은 학회의 일이 늦게 마쳐서 아직 귀가하지 못했다.

저녁은 먹었으니 걱정하지 말고.

오늘은 픽업하러가기 어려울 것 같다. 택시라도 타고 들어오려무나.’

 

오늘같은 날에는, 파파와 대화를 하고 싶었는데.

 

“있죠 파파? 오늘 아침에 역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났지 뭐에요.

저보고 아이돌에 관심이 없냐고 하더라고요 후훗.

 

솔직히 말하면... 좀 두근거리긴 했어요.

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우선은 거절했는데...

제게 다시 기회가 온다면 전 어떻게 해야 할까요?”

 

파파라면 날보고 어떤 조언을 해주셨을까.

철 든 이후로, 내가 어떤 활동을 하든 항상 묵묵히 지원해주시는 부모님들이셨다.

 

특히, 파파는 내게 중요한 순간마다 항상 도움이 되는 조언을 아껴주지 않으셨다.

지금이 어쩌면 그 순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 근거는 없지만.

 

오늘 같은 날에 파파를 만날 수 없다니. 솔직히 아쉽다고 생각한다.

 

역에 내려서 한참동안 택시를 찾았지만, 탈 수가 없었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술 취한 사람들이 많이 이용해서 그런가.

 

한참을 기다리다, 결국 걸어서 가기로 결심한다.

‘좀 어두운 거리이긴 하지만, 그래도 길가에 평소보다 사람도 많은 편이고... 괜찮을 거야. 아마...’

 

스스로 다짐하듯이 말하며, 나는 무채색의 도시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어이어이, 아가씨, 묻는 말에나 얌전히 대답하라고.”

 

“쓸떼 없이 반항하면 재미 없을 줄 알라고. 크하핫!”

 

“오우, 근데 밝은 데서 보니까, 꽤나 반반한데? 오늘 완전 재수 좋은 날인데, 이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지금 역 근처의 한 골목길의 구석에 몰려있다.

 

내 앞을 막아선 자들은 건장한 남성 3명. 살짝 술에 취해있는 것 같기도 한 상태.

 

 

조금이라도 집에 빨리 가기 위해서 평소와 다른 길을 선택한 것이 화근이었다.

 

어두운 골목길을 바삐 걸어가다가, 그만 술 취한 행인과 부딪히고 말았다.

사과하고 내 갈 길을 어서 가려고 했지만, 그 자들이 뒤에서부터 날 잡고 끌었다.

골목길 한 구석으로 날 몰아서는 여러 가지 말로 위협을 가하는 것이었다.

 

위험하다. 솔직히.

이 어두운 골목길에서는 인적도 보이지 않는다.

즉, 날 도와줄 사람도 없다는 건가...

 

“진짜네? 이야... 아가씨, 우리랑 같이 놀지 않을래?”

 

“야야... 그래도 세명을 동시에 상대하긴 힘들지 않을까? 크하핫!”

 

“야 내가 이번에 죽여주는 거 하나 가져왔는데, 이 여자한테 시험해볼까?”

 

 

정말로 위험하다.

 

“놔 주세요!”

 

용기를 짜내서 소리를 질렀지만, 오히려 그들의 정복욕을 더 돋군 모양이다.

괴성을 지르며, 더욱 내게 달려든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을 쳤지만, 그들 중 한명이 내 입을 틀어막는다.

 

“누군가 좀 도ㅇㅘ...읍읍!”

 

그리고 그들 중 한명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낸다. 그리고는 내 입에다가 털어넣으려고 한다.

 

나머지 한 놈, 우두머리로 보이는 녀석은 벌써부터 노골적으로 흥분한 기색이다.

 

 

아아... 이런 건 싫어.

누군가... 인도자든 뭐든 아무나 좋으니까

도와줘-...

 

그때였다.

 

“거기! 당장 멈추십시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사람은 달려온 것인지 골목길 입구에서 헉헉거리며 잠시 숨을 고르고 외쳤다.

 

“뭐야?” “어이” “죽고 싶냐?”

 

그들은 잠시 내게서 손을 떼고, 시선을 그 남자에게로 돌린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나는 그 남자 쪽으로 뛰어 들어간다.

 

“어이! 어딜 도망 가는거야?”

 

당장 날 잡으려는 기세로 놈들이 달려오지만, 날 위해 달려와 준 이 남자의 체구를 보고, 한풀 기가 꺾여서 주춤한다.

 

그중 한 녀석이 욕지거리를 외치며 무언가를 꺼낸다. 한줄기 가로등 빛에 반사되어 빛난다.

은색 도신-

즉 서바이벌 나이프, 흉기다.

 

그 남자는 흉기를 보고도 전혀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내 앞으로 한 발짝 나가 양팔을 벌려 날 보호하려는 뜻을 확실히 하였다.

한편 서바이벌 나이프를 뽑은 녀석은, 이런일이 처음인지 손을 부들부들 떨며 어쩔 줄을 몰랐다.

나머지 두 놈도 뒤에서 멀뚱멀뚱 바라보는 도중-

 

불현 듯, 내 뒤에서 소리가 났다.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와, 호각 소리

 

“튀어!”

“젠장”

“두고 보자”

 

놈들은 삼류악당의 퇴장 대사같은 말을 내뱉고는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쳤다.

 

아무래도 이 남자가 역 쪽에서부터 오던 도중, 곤경에 빠진 나를 발견하고는 경찰에 신고한 모양이었다. 상황이 급박했던 만큼 자신도 직접 뛰어들었고.

 

생전 처음 겪는 상황이었고, 겨우 거기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한 나는 그만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그래도 감사인사를 전하기 위해 다시 일어서서 그에게 말을 건내려고 했다.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아...앗?”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본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까는 어두워서 잘 안보였지만, 밝은 곳에서 본 그는 구면(舊面)이었다.

 

바로 아까 아침에 역에서 보았던 연예 기획사의 프로듀서였다!

 

아까 만났었지만, 그 끝이 그리 좋지는 못했다고 생각하기에, 나는 선뜻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역시 구해준 사람이 구면이라서 놀라는 눈치이다.

다시 뒷목을 지긋이 잡고 당황하는 기색을 보인다. 저 습관은 당황하면 나오는 것이려나.

 

왔던 경찰들이 사정을 듣고, 주변 수색을 위해 가자, 우리 둘만 남게 되었고, 나와, 이 곰같은 체구의 남자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나, 무언가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용기를 짜내어 말을 건다.

 

“저기...” “저... 저기”

 

그도 똑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우리 말은 겹쳐서 지워져버린다.

 

그 상황이 뭔가 우스웠던 나는 그만 작게나마 웃음을 터뜨렸고, 그 또한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그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그가 선뜻 자택까지 데려다준다고 하였고, 아까 그가 보여준 태도에 무언가 느낀 나는 그 제안을 수락하였다.

 

집까지 걸어가는 짧은 시간동안 그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며칠 전부터, 상부의 지시에 따라 이 주변에서 스카우트할 대상을 물색하였다는 것.

그러나 그동안 신통치 않다가 오늘 아침에 우연히 나를 보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나를 적격으로 생각하여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지만, 내가 아이돌에 흥미가 없다는 말에 아쉽지만 단념하려고 했다는 것.

그리고 오늘 하루 종일 여기 역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스카우트를 하려고 했지만, 아침에 봤던 나만한 재목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방금 일정을 마치고 역으로 가서 귀가하려는 중, 나를 다시 보게 되어 다시 한번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 뒤따라간 것.

그리고 그 와중에 내가 곤경에 빠진 것을 보고 구하려 달려왔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거의 끝낼 즈음에 집에 도착하였다.

그가 거의 말을 하였고, 나는 듣기만 하였기에, 그의 목적이었던 나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잘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구해준 보답을 하고 싶어서라도 집에 들어와서 이야기를 하자고 하려했지만, 지금 시간에 오늘 처음본 성인 남성을 집에 들이는 것도 이상하였기에, 어쩔 줄을 모르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다행히 그는 나의 고민을 눈치 챈 것이지, 이만 가보겠으니, 혹시나 더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이 주소로 자신을 찾아오면 된다고 하며 아까의 명함을 건냈다.

 

나는 오늘아침부터의 일이 모두 꿈만 같아서, 그리고 지금도 잘 실감이 안되어서 멍하니 있다가 떠나가려는 그를 멈춰 세웠다.

 

어째서 나인 거냐고, 나의 어떤 점 인 것이냐고.

 

그는 나에게 등을 보인채로 말하였다.

 

“미소...입니다.”라고.

 

그리고는 덧붙였다.

 

“닛타 미나미씨, 당신은 지금... 즐겁습니까?

지금부터의 이 길은 아무도 간 적 없는 길. 두려울 줄 압니다. 하지만, 제가 당신을 인도하겠습니다. 아니, 같이 이 길을 걸어갔으면 합니다.“라고.

 

그리고는 뚜벅뚜벅 걸어서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집 안으로 총총거리며 들어갔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며 심신을 진정시키고, 다시 창가에 서서 이어폰을 귀에 꼽는다.

 

あの日見景色Blue Topazのように

아노히 미타 케시키가 히카루 Blue Topaz노 요우니

그 날 봤던 풍경이 빛나는 Blue Topaz처럼

 

いて らしてる

이마모 카가야이테 보쿠라 테라시테루

지금도 빛나며 우리를 비추고 있어

 

그제서야 조금씩 생각이 정리가 된다.

 

아마 이 사람, 아니 프로듀서는, 내게 있어서 인도자가 아닐까 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동시에 두렵기도 하다.

잘 해낼 수 있을까.

괜히 일만 더 늘리는건 아닐까 하고.

 

하지만, 이번의 건, ‘아이돌’은 다르지 않을까.

어쩌면 진정으로 내가 찾던 길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증거로... 가슴이 두근두근 하고 있다.

마치 지금까지의 나를 만든 여러 즐거운 경험들처럼.

 

내일 날이 밝으면 바로 이 사람을 찾아가서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FIN

 

 

짧지 않은 글인데도 이렇게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 Nation Blue는 카에데와 미나미가 포함된 Azul Musica가 부른 것이지만, 여기서는 미나미가 느끼는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하는 노래이다 싶어서

이렇게 카에데상 솔로 곡으로 설정하였습니다. 카에데상하고도 분위기로 잘 매칭되지 않나요?(도주)

여튼 다음에는 더 좋은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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