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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 별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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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09, 2016 23:37에 작성됨.

   '지이익'
  아미는 종이봉투 끝자락에 붙은 테이프를 조심스레 땠다. 봉투를 자주 열어본 탓에 접착력이 없어진 테이프가 손에서 떨어져, 사르륵 바닥으로 안착했다. 그녀는 종이봉투 안을 들여다보았다. 하나하나 점점 줄어들어 이젠 몇 개 남지 않은 마카롱들. 원래도 그리 많진 않았지만, 무심코 먹어버린 마카롱들을 떠올린 아미는 반성했다. 다음엔 아껴 먹자. 다음엔 맛을 제대로 음미하면서 먹자. 최대한 그녀의 호의를 오랫동안 간직하자고. 그것을 실행할 날이 다가올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아미는 괜한 기대를 품었다.

 

  좋아진 기분으로 아미는 무릎을 굽혀 떨어진 테이프를 줍고는 책상 옆 휴지통에 그대로 집어넣었다. 마저 종이봉투의 입구를 일정한 간격으로 반듯이 접곤 미리 때놓은 짤막한 테이프를 붙였다. 떨어지지 않게 두 손가락으로 꾹 집어 들어 올린 그녀는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복도에 흘리며 거실로 나왔다.

 

  부엌에 들어온 아미는 벽의 스위치를 눌렀다. 식탁 위의 작은 전등이 켜졌다. 그 옆에 놓인 냉장고를 살며시 열었다. 저녁을 먹고 미리 봐둔 야채칸 구석의 자리에 종이봉투를 집어넣었다. 널브러진 사과들로 그 앞을 가려 다른 이에게 들키지 않게 했다. 야채칸을 닫으려다가 뭔가 아쉬운 느낌을 받은 아미는 마지막인 셈 치고 마카롱 하나를 꺼냈다. 다시 사과를 쌓고 냉장고를 닫으려는 순간, 아미의 뒤에서 마미가 불평했다.
  "아미 혼자 먹고! 치사해!"
  들킨 사람이 마미인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여기."
  돌아본 아미는 손에 있는 마카롱을 거리낌 없이 마미에게 줬다.
  "응?"
  마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미를 쳐다보았다.
  "거짓말해줘서 주는 거야."
  "쪼옴 궁금하긴 해도."
  마미는 마카롱을 한 입 먹곤 말을 이어나갔다.
  "아미만의 비밀이니까 지켜줘야지."
  "고마워."
  "근데 이거 하루룽이 만든 거 맞아? 엄청나게 수준급이라궁."
  "아미, 마미. 잘 시간인데 부엌에서 뭐하니?"
  방 건너편에서 부모님의 잔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자러 갈게~."
  대답을 한 마미는 남은 마카롱을 입안에 모두 집어넣곤 냉장고 문을 대신 닫아주었다.
  "가자."
  "응."
  아미는 전등을 끄고 마미를 따라 방으로 올라갔다.

 

  "앗, 이빨 닦고 올게. 먼저 자."
  먼저 들어온 마미는 형광등의 꼬마전구만 키고 방에서 나갔다. 전구의 따뜻한 주황색 불빛이 방안을 채웠다. 아미는 너저분한 책상 위를 간단히 정리했다. 테이프는 맨 아래 서랍에, 머리끈이 가득 담긴 상자는 뚜껑을 제대로 닫고 원래 자리에 놓았다. 지금 하고 있는 머리끈은 조심스레 풀어 책상 한가운데에 놓았다.
  "내일도 이걸로 하자."
  아미는 침대 속으로 들어왔다. 쏟아지는 잠을 거부하지 않고 맞이하려는 찰나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아차. 알람 꺼야지."
  엊그제 등록해둔 알람 때문에 오늘도 일찍 깼다. 소리까지 크게 해, 집 안을 모두 울려버린 것을 더불어서. 아미는 손을 뻗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휴대폰을 가져왔다. 전원 버튼을 누르니 몇 분 전 미키에게서 문자가 왔다는 알림 메시지가 떠 있었다.
  "아미, 고마운 거야!"
  미키에게서 온 문자. 집에 오기 전에 하루카가 사무소에 왔다는 소식을 알려준 대가로 이런 문자가 왔다. 늦지 않고 잘 만났을까.
  "하루카 있었어?"
  아미는 전송하고 나서야 알아챘다. 문자에 그녀의 이름을 무의식적으로 적었다. 그 날 이후로 자꾸만 이름으로 생각하게 된다. 별명이 먼저 떠오르지 않는다. 미키가 자신의 진심을 물어보는 날엔 무슨 변명을 해야 할지 무척이나 당황한 아미는 다음에 올 답장이 무서웠다.


   '즈응'
  손에 든 휴대폰이 울렸다. 미키의 답장이 왔다. 아미는 손으로 화면을 절반쯤 가리고 확인버튼을 눌렀다.
  "응! 6시 좀 넘어서 갔는데 아직 있었어! 다음에도 꼭 알려줘야 해?"
  별생각 안 한듯하다. 아미는 깊이 안도했다.
  "나중에 또 하루룽 만나면 알려줄게."
  문자를 닫고 이어 알람을 껐다. 그러자 보이는 메인 화면에 등록된, 마미가 어제 보내준 사진. 무슨 생각에서인지 뚫어지라 보았다.
  "뭘 그리 바보같이 자고 있는 거야..."
  이때 무슨 말을 했을까. 설마 진심을 모두 말해버린 건 아닐까, 라고 생각한 추측은 이내 사그라들었다. 하루카라면, 그녀라면 알고 있다는 순간부터 쓸데없는 참견을 했을 게 분명하다. 그런 참견은 아미가 금세 알아챌 정도로 눈치채기 쉽다.

 

  아미가 다시금 잠에 빠질 즈음, 방으로 마미가 들어왔다.
  "아미, 자?"
  "아니, 아직."
  아미는 돌아누웠다. 마미는 크게 하품을 하고 반대편 침대에 몸을 눕혔다.
  "내일 갈 거야?"
  마미가 물었다.
  "어딜?"
  "사무소. 난 유키뿅이랑 어디 좀 가려고 하는데. 그렇지, 아미도 같이 갈래?"
  "별로..."
  아미는 딱히 가고 싶지 않았다.
  "어짜피 할 일도 없는데, 같이 가자~."
  "할 일이 없긴."
  "아미한테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잔냥."
  "좋은 일?"
  "그런 게 있답니다~ 후타미씨~."
  마미는 하루카의 말투를 따라 했다. 아미는 고개를 휙 돌려 마미의 시선을 등졌다.
  "어때? 하루룽이랑 똑같아?"
  "...같은 느낌은 안 나."
  "똑같았다고 100% 확신했는데 아미가 아니라니깐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당연히 똑같을 순 없다. 그럼에도 비슷한 느낌이 들어 아미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어쨌든 가기로한 거다? 불 끌게?"
  머리끈을 푼 마미는 아미의 대답을 듣지 않고 방의 스위치를 내렸다.
  "잘 자 아미~."
  "...응. 마미도 잘 자."

 

 

 

 

#

 

 

 


  "늦잠이라구 늦잠!"
  마미는 걸음을 서둘렀다. 다급히 깨우는 소리에 푹 자고 있던 아미는 다 제대로 된 아침도 먹지 못하고 집에서 나왔다. 마미가 지갑도 두고 급히 나오는 바람에 아미가 가지고 있는 여분의 교통카드로 전철을 타고 사무실 근처까지 왔다.
  "유키뿅이 기다리겠네."
  "유키뿅은 점심때 온다고 했으니 괜찮은데..."
  "그럼 왜?"
  "다른 사람이 왔다 갈 수도 있잖아. 하루룽이라던지."
  마미의 말에 생각만 했는데 기분이 좋아졌다. 문뜩 앞서가는 그녀를 쳐다보았더니 실실 웃고 있었다. 아미는 째진 눈으로 마미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마미, 솔직하게 말해. 하루룽 불렀지?"
  "아무것도 아니랍...우왓?!"
  마미는 앞을 안 본채로 아미를 놀리다가 타루키정에서 나오는 사람과 부딪혔다.
  "앗, 죄송합..., 음?"
  고개를 숙이려는 이는 둘을 보자 행동이 멈췄다.
  "오? 오빠 할로할로~."
  프로듀서다.
  "아미, 마미. 안녕?"
  "벌써 점심 먹었어?"
  아미는 문이 덜 닫힌 타루키정 안에 고개를 불쑥 집어넣었다. 안의 직원분이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아미도 그에 답해주었다.
  "시간이 없어서 말야. 근데 오늘은 무슨 일로? 딱히 잡힌 일정은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
  프로듀서는 오른손의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유키뿅이 오늘 점심에 같이 견학 가달라고 해서 나왔쟝."
  "그런가. 둘 다 같이 가는구만. 유키호한테 같이 가주겠다고 했더니 거절하길래 혼자 가는 줄 알았어."
  "으흥, 유키뿅이 그렇게 성장했을 리 없잖아?"
  "유키호도 성인이야. 아마 너희 현장에서 감 좀 찾게 해주려고 일부러 그런거겠지."
  프로듀서는 지적했다.
  "...갑자기 진지해지지 말라구 오빠."
  "뭐, 이리 말해도, 좀 부족한 부분이 있긴 해. 내가 없으면 아직도 개를 무서워 한다든지..."
  "그럼그럼!"
  그의 한숨에 마미가 고개를 바쁘게 끄덕였다. 사무소로 걸음을 옮기는 아미는 프로듀서가 들고 있는 쇼핑백을 발견했다.
  "호오? 오빠, 그거 뭐야?"
  "이거? 음, 보답에 대한 답례일까?"
  "누구한테?"
  "하루카."
  프로듀서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하루카에게 답례라. 이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받은 것만, 받고 난 이후만 신경 썼다. 아무리 대신 포장한 보상이라고 해도, 특별한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은 절대 아니었다. 애초에 일의 원인은 자신한테 있었으니 그것을 갚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루룽? 뭐 하루룽이라면야 뭘 줘도 부족하긴 하지."
  마미는 동의했다.

 

  아미는 뭘 줘야 할까 고민에 빠졌다. 쿠키를 줄 수도, 요리를 해줄 실력도 안 된다. 그녀의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주기엔 잘하는 일은 없었다. 늦게나마 곧 다가올 겨울을 준비해 뜨개질이라도 배워볼까 싶었다.
  "오빠가 이걸 가져왔다는 건 하루룽이 왔나 보네?"
  마미는 손등으로 내리쬐는 햇볕을 가리고 조금 열린 사무실의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이른 아침부터 왔더라고. 코토리 씨 잔업을 도와주고 있더라. 아, 잔업이라기보단 사무실 일이지."
  프로듀서는 건물의 철문을 당겨 열었다.
  "피요쨩 잔업을?"
  "도대체 피요쨩은 밤에 뭘 하길래 하루룽한테까지 마수의 손을...!"
  아미와 마미가 들어온 후에 그는 문에서 손을 떼고 자신도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종종 일하시는 도중에 전화 받으러 나가셔서 물어봤더니 슬슬 연말이라 밤늦게도 약속이 많이 잡혔다고 말하시더라. 아, 일단 코토리 씨, 아니 하루카한테 자제해달라곤 말해뒀어."
  그는 뒷목에 손을 올렸다.
  "하루룽? 하루룽이 왜?"
  아미가 물었다.
  "하루카가 먼저 한다고 한 일이라고 하네. 사무소 일은 굳이 나서서 하지 않아도 될 일인데 말야."
  "도대체 하루룽의 참견은 어디까지 가나요~."
  마미는 계단을 오르면서 흥얼거렸다.
  "그러니 마미, 오늘 청소당번은 너야."
  "에엑? 내일 아녔어?"
  "내일은 나고, 어제는 야요이다. 게다가 내일 아침부터 일정 있잖아."
  "아아, 그랬었지... 근데 하루룽도 휴가 끝났는데 언제부터 다시 활동해? 하루룽한텐 별말 못 들었는데."
  마미의 말에 아미는 그의 눈치를 봤다. 프로듀서는 걸음을 멈춘 아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팔이 거의 다 나았다고 해도 좀 더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해서, 웬만하면 육체적 활동이 적은 라디오나 간단한 프로그램부터 일정을 잡았어."
  아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직은 무리해선 안 된다. 아니 다시는 무리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것도 남 때문에, 자신 때문이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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