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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프로듀서는 아카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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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25, 2016 00:02에 작성됨.

우리 프로듀서는 아카네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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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베프 요연에게.

 

요연, 안녕안녕! 난데없이 편지해서 놀랐지? 그 동안 여러가지 일이 있어서 소식 못 전해준거 미안해. 하지만 들어봐! 나 그렇게나 원하던 아이돌이 되었어! 반짝반짝하는 의상에 상큼한 미소를 짓는, 바로 그 아이돌 말야! 너도 내 데뷔무대 봤으면 좋았을텐데. 멀리 떨어진 친구란게 이럴 땐 아쉽구나.

아이돌 일은 참 즐거워.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힘들긴 하지만, 나를 응원해주고 기억해주는 팬이 있어서 견딜 수 있는 것 같아.
그런데 있지, 딱 하나 버티기 힘든 것이 있어. 바로 내 담당 프로듀서야. 프로듀서 님 성함은 히노 아카네라고 해...'

 

처음 아카네씨를 만났을 때 저는 꽤 놀랐습니다. 교복을 입고 있지 않을 뿐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외모에 밝은 색의 머리. 순간 이번에 오시는 프로듀서님이 원래 담당하던 아이돌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녀같은 아름다움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아담한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우렁찬 목소리가 나올 수 있는지. 저는 첫 대면부터 기가 질려버렸습니다.

목소리만 큰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카네씨는 행동도, 사건사고도, 모든 것이 큼직합니다. 저의 첫 라이브가 결정된 날이었습니다. 아카네씨는 저를 데리고 공연 감독님께 찾아갔습니다. 흔히 신입 아이돌이 라이브를 하게 되면, 프로듀서는 아이돌을 잘 부탁드린다는 의미에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인사를 한다고 해요.

그런데 평범하게 악수와 담소만 나누면 되는 것을, 아카네씨는 어째서인지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봄바-라며 의미를 모르겠는 함성을 남기고 사라진 그녀는 얼마 못 가 철푸덕, 머리부터 대차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거기에다 근처에 감독님까지 계셨다구. 얼마나 창피했는데! 그래서 감독님이 넘어진 아카네씨를 일으켜 세워주려는데...'

 

아카네씨의 몸이 허공을 갈랐습니다. 감독님이 다가오는 것을 모르고, 그대로 뛰어오른 것이었습니다. 억, 단말마가 들려왔습니다. 감독님의 배 한복판에는 아카네씨의 머리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그 두 사람에게, 그리고 제 눈은 그 모든 광경 한복판에 꽂혀있었습니다. 1초가 그 때처럼 길게 느껴지던 건 런던 올림픽 이후로 처음이었습니다.

데구르르, 쾅. 아카네씨는 그렇게 감독님이라는 핀을 쓰러뜨리고 쓰레기통에 스트라이크를 선사했습니다. 별안간 벌떡 일어난 아카네씨는 신기하게도 전혀 아픈 기색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저에게 명함을 내밀었습니다. 큰 소리로 안녕하십니까, 미도리의 프로듀서 히노 아카네입니다, 라며 소개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것 참 고마운 일이지요. 무슨 일을 해야할지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머리를 다치지는 않았으니. 분명 남다른 첫 인상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감독님이 그 때 죽지는 않았으니, 죽을 때까지 기억하시지 않을까요?

 

이렇게 돌이켜보니 아카네씨가 비글과 닮았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그러네요. 본래 사냥견이었다는 비글은 매일매일 자신이 만족할 만큼 뛰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악마로 돌변한다고 하더군요.

아카네씨는 그야말로 인간비글입니다. 먼 곳으로 출장을 갈 때, 분명 지하철을 타고 갈 거리를 자전거로, 자전거를 타고 갈 거리를 뛰어서 다닙니다. 비록 움직이지 않는다고 악마가 되지는 않지만, 신체조건에서 만큼은 진정한 악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일각에서는 그래도 매일 일감을 얻어오는 것을 보아하니 분명 늦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면 순간이동을 했거나, 정신지배를 하는 악마라는 소문도 돌고 있습니다.

물론 아카네씨가 진짜 악마는 아닌지라, 매번 일찍 오는 것은 아닙니다. 한 번은 열심히 혹사를 시키던 자전거가 그만 폐업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체인 OUT!'이라는 구호와 함께요. 그 날 아카네씨는 정말 아슬아슬하게 미팅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아카네씨를 잘 모르는 담당자분들은 그녀가 어딘가 위독해 보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야 온 몸에서 땀이 흐르고, 눈동자는 풀려있었으며, 다리는 후들거리다 못해 엿가락처럼 휘어있었으니까요.

담당자분은 숨을 거세게 꿀떡꿀떡 넘기는 아카네씨를 바라보며 마지막 가는 길, 명복이라도 빌어줘야겠다고 오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승길 노잣돈을 내미는 심정으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주셨습니다. 그 후 쓰러진 아카네씨를 보며 계약금이라도 올려줄걸, 하면서 오열한 것은 덤입니다.

 

'...지금이야 글로 쓰는 거니까 재미있지, 치히로씨는 그 때 일만 회상하면 아직도 손을 부들부들 떤다니까. 뒷처리가 어지간히 힘든 모양이었나봐.

그러고보니 나, 이번에 꽤 큰 무대에 나가게 되었어. 요즘에는 그 연습때문에 매일이 정신없다니까!...'

 

아이돌은 특별한 일이 없어도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 레슨을 합니다. 몇몇 친구들은 어느 순간이 가장 부끄럽냐고 물어보면 공연도, 팬미팅도 아닌 연습하는 시간이 가장 부끄럽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프로듀서가 자신의 서투른 모습을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어디서 나온 멋진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프로듀서는 아이돌의 첫 번째 팬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팬에게 글러먹은 춤과 노래를 보여준다니, 아이돌 입장에서는 꿈도 꾸기 싫겠지요.

부끄럽지만 아카네씨도 저의 열혈적인 팬입니다. 다만 문제는 제가 마치 TV 너머에 있는 사람마냥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거나, 아니면 그저 쉬고있을 때까지 아카네씨는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 정열적인 눈빛을 다시 떠올리니, 부끄러움에 얼굴도 머리 속도 새빨갛게 뜨거워집니다. 그래서는 연습도 뭣도 안 된다는 걸 왜 모르는 걸까요. 

어제 아카네씨는 특히 더 심했습니다. 어제는 공연에서 보여줄 춤을 마지막으로 손보는 날이었습니다. 무대에서 사용할 의상도 미리 착용해보고, 진짜 무대에서 하듯이 춤과 함께 노래도 소화했습니다. 하도 들어서 이제는 성대모사로 따라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인트로가 들려오자, 아니나다를까 엄청난 열기가 문 밖으로부터 끼얹어졌습니다. 그래도 몇 달 간 그 열기세례를 맞아온지라 저는 별 부담없이 연습을 속행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있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카네씨가 우렁찬 목소리로 콜을 넣기 전까지는 말이죠. 트레이너씨의 눈썹이 움찔거렸습니다. 잘못 들었나, 싶을 때는 증명이라도 하듯이 추임새가 들어왔습니다. 그 파장에 맞춰 트레이너씨의 입꼬리도 들썩였지요. 그리고 마침내 하이라이트 구간에서, 아카네씨는 펑펑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마 그 울음은 트레이너씨에게 맞아서 나온 것은 아닐겁니다. 트레이너씨는 울음소리가 들리자마자 수건을 내팽겨치며 나갔으니까요.

뜻밖에도 저는 전혀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그야 가장 부끄러울 때는, 영업 모드의 아카네씨가 관계자분에게 저를 큰 소리로 소개할 때니까요.

 

'...너도 다른 사람이 자기소개를 한다는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느껴봐야 해. 특히나 그 사람이 폭탄 터지는 목소리로 우리 미도리가요, 우리 미도리는, 할 때는 정말...'

 

이렇게 하루 온 종일을 자신과, 아니 여러모로 인간의 한계와 싸운 아카네씨는 저녁이 되면 참으로 조용하고 진중한 사람이 됩니다. 비글과 같다구요, 글쎄요. 아까는 분명 그렇게 비교를 했었지만, 그녀처럼 슬픈 얼굴을 할 수 있는 비글은 없을겁니다.

언제는 연습이 늦게 끝나는 바람에 밤 늦어서 집으로 돌아갔던 적이 있습니다. 놓고 간 물건을 가져가기 위해 사무실에 들어서자, 아카네씨가 프로듀서 데스크에 앉아있었지요. 정말이지, 그 때의 아카네씨는 낮의 그 아카네씨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냈습니다. 가만히 컴퓨터를 바라보며, 이마를 감싸쥐고 있는 두 손이 불편해 보이는데도 섣불리 일어나지를 못했습니다. 맡고있는 사무가 잘 안 풀리는 걸까요, 아니면 저에게 보내지는 비방과 욕설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는 것일까요. 전 차마 수고하셨다는 말 한 마디 못 한 채 사무소를 나와야 했습니다.

 

그래도 전 알고 있어요. 아카네씨가 비록 자기 머리로 감독님의 배를 들이받아도 저를 세상 제일로 아껴주는 프로듀서라는 것을.

트레이너씨에게 훈계를 듣더라도 제 생각만을 끔찍히 하는 프로듀서라는 것을.

어떤 표정을 짓고 있어도 믿을 수 있는 프로듀서라는 것을.

 

그리고, 저를 향해 지어주는 미소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귀여운 미소라는 것을.

 

마지막에 생각한 내용은 편지에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야, 프로듀서님의 상냥함은 저만 아는 것으로 충분하니까요. 내일은 드링크라도 한 박스, 사서 드려야겠습니다. 아카네씨를 닮은 빨간 라벨의 음료는 어떨까요.

 

'...어쩌다보니 프로듀서 이야기만 잔뜩 해버렸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난 건강히 잘 있어! 언젠가 너희 집에 놀러갈 일 있으면, 다시 연락할게. 그럼, 바이바이!

 

너의 최고의 친구, 미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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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야, 이렇게 긴 글을 써본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포지패 만화를 보다 보니, 어디 아카네가 귀여워서 버틸 수가 있어야 말이죠.

편지를 작성하는 '미도리'는 가상의 인물입니다. 그냥 아이돌이 되었다는 설정밖에는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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