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아이돌마스터]Cinderella Lady - Track_03 (2)

댓글: 1 / 조회: 1451 / 추천: 0


관련링크


본문 - 04-01, 2015 23:59에 작성됨.

미친 것처럼 액셀을 밟아 들이받듯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슬슬 내비게이션 없이 하는 운전에 익숙해지면서 가장 먼저 익힌 길은 회사 출근길이 아닌 방송국 찾아가는 길이었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었다면 웃음이라도 지어줬을 변화였지만,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심리가 코너로 몰린 카즈키로서는 도저히 그런 감상 한 번 떠올릴 여유조차 없었다.

 

"왔군."

 

이런저런 굴욕과 승리의 역사가 짧은 시간동안 얼룩지게 된 M 방송국 본사 사옥으로 걸음을 돌리기 무섭게, 무섭게 꽁초를 늘려가던 익숙한 밤송이 수염의 얼굴 하나가 담배를 끼운 손을 불쑥 들었다. 벌써 본사 앞까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제 나름대로 미안한 생각은 있는 모양이지만, 지금은 자신의 영업 성과에 뿌듯해할 여유조차도 없었다.

 

"생각보단 빨리 도착했구만."
"PD님. 이게 대체…?!"
"보채지 말게. 일단 좀 걸으면서 얘기하자고."

 

당장 멱살이라도 잡을 듯 으르렁대며 달려들던 카즈키를 제지한 하지메가 옆쪽의 공원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마음만 같아서는 정말 받아버리기라도 하고 싶지만 그래서야 앞으로 일감 따기가 힘들어진다. 들끓는 마음을 겨우 가라앉힌 카즈키가 고개를 숙이자, 그런 그를 딱하다는 듯 바라보던 하지메가 말없이 공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공원이라고 해봐야 본사 사옥 앞의 남는 부지 약간에 잔디와 산책로를 깔아놓은 것에 불과하다. 의미 없을 만치 기하학적인 곡선을 그리는 금속 조각들이 곳곳에 서있는 괴이하고 을씨년스러운 공간을 두 남자가 말없이 거닐었다. 잔디 위로 불쑥불쑥 솟아난 괴이쩍은 금속 조각들이 석양을 받아 붉게 물들고, 그 사이를 거니는 면면들로 역시나 괴상한 형태로 일그러진 그림자들이 스쳐가고 멈추고를 반복했다.

 

조금이나마 그의 뒤를 따라 걷는 사이 흥분했던 머리가 조금이나마 식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입가가 타는 듯한 느낌에 자기도 모르게 양복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어쨌든 공원인데 금연구역 아닐까? 잠깐 그런 의문이 떠올랐지만 앞서 걷는 하지메도 지금 몇 대 째인지 모를 담배를 피우고 있으니 아마도 상관없을 거라는 무책임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보게."

 

그렇게 그의 뒤에서 묵묵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기 무섭게, 여태껏 침묵만 고수하던 하지메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겠군. 일감 다 끊어졌지?"
"…예?"
"분별 있는 친구가 이렇게까지 당황해서 달려오는 거 보니 대충 견적은 나와. 내 말 틀렸나?"

 

틀릴 리가. 마치 어디서 보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훤히 꿰뚫고 있다. 할 말을 잃은 카즈키가 담배 한 모금을 빨아들이고, 앞서 걷던 하지메가 막막하게 붉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나도 방송 생활을 오래 했어. 자네 같은 처지의 친구들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그럴 때마다 어떤 꼴이 나는 지도 신물이 날 만치 구경해왔네."
"대체 무슨…?"
"그저께 전화가 왔어. 다나카 이사한테."

 

다나카! 역시 그렇게 나오시는군. 분을 못 참고 물고 있던 담배의 필터를 세게 짓씹었다.

 

"이, 빌어먹을 영감이…!"
"나한테 직접 전화해서 틀어막을 정도니 다른 곳도 사정 비슷할 거야. 이렇게까지 대놓고 나오니 사고를 크게 친 모양이군.""…크윽!"
"말 나온 김에 물어나 보자고. 지금 346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나도 듣는 귀 있어. 그 양반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웬만해선 회사 차기 중점 사업에 어깃장을 놓는 짓은 안 해."

 

현재 346이 아이돌 사업 진출을 준비하고 있고, 그 첫 번째 케이스가 지금 등장한 타카가키 카에데다. 어디까지나 시범 사업이지만 향후 차기 중점 사업으로의 승격이 거의 확정된 상황. 그 또한 예능계에 발을 깊이 들이고 있으니 이런 소문에까지 어두울 리가 없었다.

 

765가 반독점 체제를 형성하고 있는 지금, 그나마 도전장을 내밀 수 있는 건 역시 막강한 자본력과 방송 장악력을 갖춘 346 정도라는 게 방송 관계자들의 중론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346의 첫 번째 아이돌인 타카가키 카에데는 신인으로서는 믿어지지 않는 파급력으로 난투극만 벌어지고 있는 아이돌 시장에 잠시나마 공통된 긴장감을 조성하게 했다. 여기까지는 분명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방송인들의 예상대로다.

 

그런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꼴은 대체 뭔가. 아무리 시범 사업이라고는 해도 향후 승격이 반쯤 확정된 상황에, 타카가키 카에데의 파급력 또한 충분히 검증되어 있다. 그런 상황에서 346이 같은 346의 아이돌을 공격한다? 그것도 다른 회사 공격할 때나 쓰던 이런 비겁한 방식으로?

 

"…내가 의문 가져봐야 별 수 없는 일이겠지. 아무튼 내 사정은 이해했나?"
"……."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어. 이 판에서 해먹은 게 있다곤 하지만 결국 나도 샐러리맨 처지야. 자네랑 다를 것도 없고, 윗선에서 까라면 까야 해. 하물며 그게 스폰서에 방송에 잡지에, 아무튼 이것저것 다 해쳐먹고 있는 346의 다나카 요우조 이사라면 더 말할 것도 없고."

 

정말 할 말이 없다. 확실히 이건 그의 커버 범위를 벗어난 일이다. 공격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설마 다나카 이사가 직접 움직일 줄이야. 아직 이 정도로까지 주도적으로 움직이리라고는 예상 못했는데, 이런 식으로 허를 찔릴 줄은 몰랐다.

 

"자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웬만해선 움직이지도 않는 다나카 이사가 직접 움직여서 자네들 목 졸라 죽이라고 했어. 감투정신 빼면 시체라서 무슨 일이 터져도 밑의 사람들만 움직이고 자기는 꼼짝 않던 양반이,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자네를 직접 조지려 하는 건가?"
"……."

"뭐 사내 정치가 어쩌고 그런 건가? 허이구 참, 난리 났구만."

 

대답 한 번 안 했지만 이미 하지메 안에서는 지금 사태에 대한 대략적인 그림이 나와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이럴 때에는 침묵이 곧 긍정이긴 하지. 입을 꾹 다문 채 연거푸 담배만 피워대는 사이, 가까운 벤치에 엉덩이를 걸친 하지메가 길고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이봐, 마시로 군."
"…예."
"처음 봤을 때 자네가 뭐 무릎 꿇고 그런 거, 처음엔 좀 당혹스럽긴 했지만 이젠 아무렇지도 않네."
"…?"
"오히려 그 정도로 열의를 갖고 있다고 하니 보는 입장에선 대견스럽기도 해.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고는 생각 안 하네. 그러니까 이건 영업사원과 영업 당사자 이전에, 인생 선배로서 하는 충고야."

 

휙. 빨간 불이 붙은 담배 끝이 카즈키를 향한다. 어느새 석양은 깊게 허물어져, 어둑한 그림자가 카즈키의 캄캄한 얼굴과 한데 엉킨 채 일그러져 있었다.

 

"항복하게. 지금 자네는 무슨 수를 써도 다나카에게 이길 수 없어."
"…!"
"내가 말했잖나? 자네랑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을 몇 번이고 봤다고. 설마 그 다나카한테 개긴 게 자기가 처음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젊은 패기가 좋긴 하지만 이건 패기도 아니고 그냥 무모한 거다. 담뱃불을 앞세운 하지메가 체념 어린 미소를 지었다.

 

"자네처럼 고집 부리면서 자기 길 세우려 든 친구들, 346 안이든 밖이든 몇 명이고 있었어. 그리고 그 때마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박살났지. 정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처참하게, 정말 흔적 하나 안 남기고 철저하게 짓뭉개버렸다고."
"그건…."
"내가 방법까지 설명해줘야 하나? 자네도 이제 방송 일을 좀 알았으니 슬슬 수단이 눈에 보일 텐데? 346은 연예가에서 사람을 매장해버릴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갖춘 괴물이야. 하물며 이사가 직접 움직이면 하룻밤 사이에 국장 모가지까지 쳐 날려버릴 수 있다고."

 

그 괴물의 세포 하나를 이루고 있는 그가 이 사실을 피부로 느낀 적이 있었던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있었건 없었건 지금 이 순간은 그도 처절하게 실감하고 있을 것이다. 346은 괴물이다. 연예가의 정상에 군림하는 괴물, 자신을 거스르는 모든 것을 한 입에 삼켜버릴 준비가 된 괴물.

 

이 괴물을 쓰러뜨릴 용사는, 적어도 지금 이 순간까지는 없었다. 지금껏 용사를 자처했던 젊은이들은 많았지만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결과는 똑같았다. 그러니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젊은 친구의 만용도 결국 미래가 훤히 보이는 발악에 불과할 뿐이다. 결과가 예정된, 무슨 짓을 해도 뒤집을 수 없는 파멸일 뿐이다.

 

"솔직히 나도 분하네. 그래도 이 바닥에서 오랫동안 밥 빌어먹는 처지인데,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이렇게나 적다는 게 짜증나. 그래서 자네들한테는 정말 미안한 마음뿐이고"
"……."
"하지만 받아들여야 하네. 이 바닥은 자네가 몸담고 있던 곳과는 전혀 다르고, 지금 자네의 위치도 예전 같지 않네. 지금의 자네는 모두가 우러러보던 대기업 엘리트가 아니고, 헛기침 한 번으로 하청 업체들을 벌벌 떨게 하던 갑도 아닐세."

 

조금 더 신랄하게 말해줘야 이해하겠나? 공포와 분노로 덜그럭덜그럭 턱을 떠는 카즈키의 검은 얼굴에, 무자비한 독설이 시선과 함께 작렬했다.

 

"지금의 자네는 그저, 어쩌다 라인 잘못 탄 나머지 덫에 걸려 찍찍대는 쥐새끼일 뿐이야."

 

어찌할 수 없는 작금의 무게와 함께.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두텁고 드높은 벽과 함께.

 

"항복하게. 이게 지금 자네의… 그리고 우리의 현실이야."

 

덜그럭. 단단한 무언가가 발목을 옭아매는 듯한 착각에 온몸으로 소름이 돋아났다.

 

 

 

분기탱천해서 뛰쳐나갔을 때와는 달리, 맥이 쭉 빠진 채 본사로 돌아왔다. 점심때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했지만 허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사실 허기가 지나쳐 잊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힘이 쭉 빠진 채 해파리 촉수마냥 퍼덕대는 팔다리를 의식한다면 말이다.

 

"……."

 

주차장에 차를 대고도 한참이나 말없이 핸들에 이마를 기대고 있었다. 너무나도 허탈한 현실에 이제는 욕지거리 한 마디 내뱉을 여력조차 없었다. 빠져나갈 구멍 하나 보이지 않는 압도적인 현실의 벽이 좁은 소형차의 사면을 두텁게 에워싼 채 시시각각 자신을 향해 달려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금 몇 시지?"

 

그렇게 한참이나 이마를 기대고 있던 끝에 비로소 손목시계를 들었다. 현재 시간, 밤 9시.

 

이 시간이면 아마 전부 다 퇴근했을 것이다. 카에데는 먼저 돌아갔을 거고, 후미히로나 치히로 또한 오늘 잔업은 없는 걸로 알고 있다. 불현 듯 카에데의 얼굴을 떠올리자 가슴이 욱신 하고 쑤신다. 그러고 보니 오늘 본의 아니게 너무 매몰차게 대했구나. 혹시 상처받았을까. 보기보다는 마음이 여린 사람이니, 어쩌면 오늘 밤을 또 술로 달랠 지도 모르겠다.

 

그래, 내가 너무했어. 아무리 마음이 급하다고 서니, 동료들한테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되는 거겠지. 일단 마음을 가다듬자. 조금 가라앉히고 천천히 대책을 생각하자. 내일은 1, 2과 전부 다 불러 모아 대책회의부터 해야겠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과장님이라면 뭔가 좋은 대책을 내놓을 수 있을 지도 모르….

 

"마시로 군, 마시로 군."

 

똑똑.

 

순간 운전석을 두들기는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란 카즈키가 잽싸게 핸들에서 이마를 뗐다. 이 시간에 자기 차를 알아보고 두들길 사람이라면 회사 안에서도 많이 없다. 혹시 과장님인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오오타 이사님….

 

"오오, 일어났구만."

 

…이 아니었다. 기분 좋게 웃고 있는 주걱턱을 본 순간, 카즈키의 미간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자고 일어난 건가? 인상 좀 풀게. 피곤하면 집에 가서 자야지, 차에서 그러고 자면 몸 버린다고. 건강은 젊었을 때 챙겨야 하는 거니까."
"……."

 

중키에 나이 치곤 건장한 체격, 그리고 마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주걱턱. 가느다란 눈이 매섭게 빛나지만 도대체 무슨 눈빛인지는 알 수 없고, 살짝 풀고 있는 넥타이에서는 오히려 경계심만 들 뿐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절대로 안 올 것 같은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지만, 그럼에도 카즈키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얼굴만 깊게 찡그릴 뿐이었다.

 

'안 올 것 같은 사람이 아니지.'

 

안 올 것 같으니까 오히려 더 올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창 밖에서 방정맞게 손을 흔드는 남자를 노려보며 카즈키가 곱씹듯 그 직함을 중얼거렸다.

 

"…영화사업부장."

 

이름은 이노우에 노보루. 다나카 라인의 핵심이자 최측근이다. 핸들을 잡고 있던 손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기 시작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나? 일단 나랑 커피나 한 잔 하자고!"

 

마음만 같아선 그대로 시동 걸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어쨌든 부장이니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좀비 같은 몸짓으로 비척비척 차를 나서기 무섭게 그런 카즈키의 옷깃을 잡아 끌고 노보루가 향한 곳은, 사옥 중앙에 위치한 뜰에 자리 잡은 사내 카페테리아였다.

 

"자네 커피 뭐 마시나? 아, 나는 카푸치노로!"
"…블랙으로 부탁드립니다."
"호오, 블랙! 커피 마실 줄 아는 친구군. 역시 잘 배운 친구는 뭐가 다르다니까?"

 

시끄럽게 웃으며 어깨를 팡팡 두들길 때마다 빈속에 늘어진 몸이 이리저리 출렁거렸다. 장담컨대 지난 몇 달 동안 이 사람과 이렇게까지 격의 없이 지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첫 번째 부장급 회의 이후 그와 만난 적 자체가 없었다.

 

이러는 저의가 뭔지도 모를 정도로 사회생활을 헛한 건 아니다. 그 사이 퀭해진 눈으로 제멋대로 껄껄대며 농지거리를 던져대는 노보루를 묵묵히 쏘아보는 사이, 과묵해 보이는 웨이트리스가 가져다 나른 커피 두 잔이 각각 두 남자 앞에 올라왔다.

 

"자, 마시고 기운 내게. 여기 커피 맛있어. 이번에 정말 유능한 바리스타가 들어왔거든!"
"…감사합니다."

 

한 모금 호르륵 들이키기 무섭게 빈속이 발작을 해댄다. 식도로 넘어가는 뜨겁고 쓴 액체에 절로 얼굴이 구겨지려는 걸 참으며 애써 느긋하게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빈속에 뜨거운 커피라니, 이래서야 속 버리는 것도 순식간이겠다.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검은 액체를 겨우 참아내며 슬쩍 고개를 들었다. 어쨌든 업계를 선도하는 대기업답게 노동법도 잘 지키고 야근 수당도 꼬박꼬박 나오는 346이지만, 업종 특성상 야근하는 사람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 시간까지 카페테리아가 영업하는 것도 아마 그런 사원 복지의 일환일 테지. 엉망으로 헝클어진 기분 탓인지 커피 맛에 대한 평가는 뒷전이고, 당장 머리를 떠돌아다니는 것은 그런 건조하고 사무적인 시설물에 대한 평가가 전부였다.

 

"그래, 이 시간까지 뭐하느라 퇴근도 안 하고 있나?"

 

그런 생각들이 부질없다 생각될 즈음, 드디어 맞은편에 앉아있던 노보루가 포문을 열었다. 물론 지금 같은 상황에선 일방적으로 맞아줄 수밖에 없다는 것 정도는 카즈키 또한 치가 떨릴 만치 잘 알고 있었다.

 

"그냥… 영업 건으로, 좀."
"그래? 과연 성실한 친구구만! 다나카 이사님이 높게 평가할 만도 해."
"…다나카 이사님 말씀이십니까?"
"아무렴. 얼마 전에 이사님이랑 내기해서 이겼다며?"

 

다 알고 있던 주제에 몰랐던 것 마냥 물어보긴. 새삼스레 욕이 나오려던 걸 참고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쩌다 보니."
"참 젊은이답게 패기 있구만! 요즘 젊은 애들은 패기가 없어서, 이사님이랑 눈만 마주쳐도 그냥 꼬리 내리고 도망가기 바쁘단 말이야. 그런데 거기에 대고 당당하게 내기까지 걸다니. 역시 대기업 경력직은 뭔가 다르다니까?"
"…이제 그만둔 직장입니다. 그 얘기는…."
"뭐, 그냥 자네의 평가 기준 중 하나라는 거지. 아무튼 부서는 다르지만, 내 개인적으로 보자면 자네가 참 마음에 들어."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하면 안 될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라는 게 이렇게 티 나는 사람도 처음이다. 평생 영업은 못 뛸 것 같다는 사소한 조롱이 목젖에 부딪쳐 다시 가라앉았다.

 

"그리고 다나카 이사님도 마찬가지고. 그분이 말이지. 직장 상사라는 걸 떠나서 참 남자답고 도량이 넓은 분이야. 오오타 같은 좀생이 그릇 따위와는 상대도 안 되지. 밑의 사람들을 넉넉하게 품어주고 이끌어주고! 상하관계를 떠나 인생 선배로서 참 닮고 싶은 분이라고."
"……."
"아마 오오타였다면 내기 걸린 시점에서 방해란 방해는 다 하고, 그러고도 이기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모가지 치려 들었을걸! 그런데 말일세, 다나카 이사님은 다르단 말이야. 자네가 그렇게 내기에서 이겼는데도 자넬 미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유능하고 패기만만하다며 자네를 더욱 높게 평가하셨다고."

 

슬슬 무슨 얘기가 나올 건지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책상 밑으로 내려놓은 주먹을 꽉 쥐는 사이, 노보루의 호들갑스러운 장광설이 계속 이어졌다.

 

"자네가 그걸 들었어야 했어. 보통 도량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자네를 고평가하실 줄은 몰랐네. 유능하고, 숙일 줄도 알고, 게다가 자기 입으로 뱉은 건 무조건 이루어낼 정도로 책임감도 있고! 난 여태까지 다나카 이사님 모시면서 이사님이 그렇게까지 신입사원 칭찬하는 거 처음 들어봤네."
"……."
"자넨 정말 좋은 바람을 탄 거야. 다나카 이사님이 그렇게까지 좋게 봐주시는 걸 보니, 아무래도 마시로 군을 직접 옆에 두고 키워주시려는 것 같아. 나야 명퇴 오늘내일하는 퇴물이니 무리지만, 자네는 이제 겨우 서른도 안 됐지 않나? 다나카 이사님은 자기 사람 함부로 다루는 분이 아닐세. 그건 내가 장담해."
"……."
"자네가 아직 사람을 많이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는 모양인데, 진짜 갚을 때는 확실하게 갚아주시는 분이시지. 그 분이 괜히 이 회사의 실세가 된 줄 아나? 자네가 뭔가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오히려 이사님이야말로 지금 마시로 군 앞날에 있어 무엇보다 강력한 지원군이…."
"부장님."

 

잠깐 장광설을 참고 들어줬지만 역시 한계다. 어차피 뒤에 나올 내용도 뻔하니 더 들을 것도 없다. 순간 신나서 떠들어대던 입을 꾹 다문 노보루를 향해 처음으로 카즈키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뭔가?"
"만약… 만약 말입니다."

 

무슨 질문을 할지 고민까지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지금 같은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내가 어떻게 될 지는 너무 뻔해서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보통은 토사구팽, 잘 해봐야 식물인간 처지. 그러니까 지금 이 분위기에서 확인해야 하는 건 내 자리의 안위 따위가 아니다.

 

그래, 내가 아닌 것이다. 정말로 내가 확인해야 하는 건 내가 맡은 그 꿈, 그 꿈의 안위.

 

"제가 지금까지 하던 대로 하면… 타카가키 양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 한 마디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방금 전까지 바보처럼 벙실대고만 있던 노보루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말라버렸다. 허를 찔린 건지, 아니면 정말 놀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커피 두 잔과 테이블 하나,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벽. 그 벽을 사이에 둔 채 과장과 부장이 눈싸움을 벌인다. 누구 하나 고개 돌리지 않고 잡아먹을 듯 서로를 응시한다.

 

그 짧았던 눈싸움의 끝을 알린 것은 노보루였다. 잠깐 굳어졌던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명백한 비웃음을 지은 그가 피식 혀 차는 소리와 함께 싸늘하게 대꾸했다.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한 건가?"

 

끝났다. 대답은 그걸로 끝났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였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 자기도 모르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래, 하긴 내 목이 날아가면 그 시점에서 타카가키 카에데의 가치는 사라진다. 연습생을 총알처럼 사용하는 346에서 반쪽짜리가 된 신인 아이돌을 내버려둘 이유 따위는 없다. 적당히 치워버리고 자기들 입맛대로 프로젝트를 재편하겠지. 지금은 문서 분쇄기에 들어가기 직전인 인사 1안이 관 뚜껑을 걷어차고 부활할 수도 있겠고, 그게 아니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카에데의 자리를 대신 채울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누가 들어오든 아무렴 어떠랴. 결국 결론은 하나다.
내 목이 날아가는 순간, 카에데의 꿈 또한 사라진다.
난 더 이상 카에데를 지켜줄 수 없다. 그 때처럼 무력하고 처절하게, 사라질 수밖에 없다.

 

"…뭐, 그래도 걱정되는 게 당연하겠지!"

 

다음 순간 거짓말처럼 노보루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사람 좋아보이는 웃음이었지만 더 이상 카즈키는 속을 수도, 속아줄 마음도 없었다,

 

"첫 담당 아이돌이니 정이 많이 가는 것도 당연할 거야. 게다가 자네가 직접 데려온 사람 아닌가? 여기까지 왔으니 애착도 많이 갈 거야."
"……."
"그러니까 마시로 군, 생각 잘 하게."

 

마시다 만 커피를 내려놓은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은근하게 속삭였다. 악마도 이보다 더하진 않을 것 같은 처절한 중얼거림. 온몸이 떨리고 심장이 공포로 두근댄다.

 

"이 회사에는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해. 그 누구보다, 마시로 카즈키의 능력을 절실히 원하고 있어."
"…!"
"기다려줄 만큼 기다려줄 테니, 심사숙고하게나. 사실 내 입장에선 생각할 것도 없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젊은이는 이런 일로 고민도 좀 하고 그래봐야지?"

 

스멀스멀. 잠깐 잊고 있던 소름이 올라온다. 발목을 타고 올라오는 냉기에 전율하며 몸을 떠는 사이, 공포에 몸을 떠는 카즈키를 등진 채 지나치던 노보루가 힐끔 그런 그를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다 한 때의 시련이라 생각하게. 현실은 사람을 강하게 만들거든."

 

철컹! 그 경고에 다시 한 번, 발목에 쥐덫이 감긴다.
현실이라는 쥐덫이다. 진절머리 나고, 끔찍하기까지 한.


쥐새끼 리턴즈 (...)

 

0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