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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마스터]Cinderella Lady - Track_0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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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4-26, 2015 23:59에 작성됨.

생각을 해보자. 갑자기 대뜸 짐을 챙겨 직장을 이탈한 20대 초반 독신 여성이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곳은 어딜까?

드라마나 영화의 선입견에 맞춰 생각해본다면 한적한 겨울바다 같은 쓸쓸하고 분위기 있는 곳일 테지만, 사생활에서 그녀가 나잇값을 전혀 하지 못한다는 건 이미 카즈키 또한 질릴 대로 겪어서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이건 그런 영상매체 속 실연 상황조차도 아니다. 어디 놀러가서 마음 가다듬고 오겠다는 그런 상황이 아니니, 다시 한 번 고려해보자면 분명 마음을 기댈만한 게 있는 곳이 될 게 분명하다. 그게 친구든 뭐든 간에.

그리고 보통 이런 상황에서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곳이란, 언제가 됐든 뻔한 법이다.

— 카에데라면 지금 저희 집에 와 있습니다만.
"진짜냐…."

오래 고민할 것도 없이 한 방에 걸렸다. 스케줄 잡힌 스튜디오와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코가 땅에 닿도록 고개를 숙여대는 지옥 같은 수 시간이 끝난 후, 전화기 너머에서 카에데의 모친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들려준 원숙한 대답에 카즈키가 다시금 몇 번째인지조차 잊어버린 채 앞머리를 덥석 움켜쥐었다.

"혹시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 지난 주 토요일이에요. 전화가 온 건 금요일 저녁이었고요. 오랜만에 전화 받는데 목소리가 굉장히 울적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바깥양반이랑 같이 걱정했었죠.
"하아아…."

금요일이면 분명 아침에 내가 뺨을 얻어맞은 그 날. 그 날 저녁에 바로 전화해서 토요일에 바로 기차에 몸을 실었으니 이미 회사 문 나선 그 순간부터 마음은 정해놓고 있었다고 봐도 될까. 이럴 때에만 눈부시게 빛나는 그 굉장한 행동력에 이젠 한숨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일할 때 쓰던 열정을 이럴 때 쓰지 말란 말이야. 지금 당신 때문에 우리 사정이 얼마나 곤란해졌는지 알기나 해?

— 그런데 저기… 그, 프로듀서 씨?
"마시로 카즈키입니다."
— 예, 마시로 씨. 혹시 저희 카에데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건가요?

목소리만 들어도 카에데와는 달리 똑 부러지고 사리판단 확실한 사람이라는 게 팍팍 와 닿았지만, 조심스럽게 묻는 모습만큼은 여느 부모와 다를 게 없었다. 비록 상대가 성인이라지만 어쨌든 그녀의 관리책임자인 이상 부모 앞에서는 말을 조심할 수밖에 없다. 대뜸 아무도 없는 복도 안에서 카즈키가 살짝 허리를 숙였다.

"아뇨.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이건 제 잘못이니까요."
— 잘못이라 하심은…?
"타카가키 양에게 좀… 무리한 스케줄을 준비해줬던 모양입니다. 톱 아이돌이 코앞이라는 생각에 제가 너무 흥분했던 모양이군요.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 아뇨, 아뇨. 저희야말로 면목이 없습니다. 부족한 딸이 여러 은인 분들께 폐를 끼쳐버리고 말았네요.

어느 시대에 어떤 상대가 됐건, 자식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이란 언제나 한결 같은 법이다. 하물며 이번엔 자기 과실이 없다고도 할 수 없으니 부모 앞에서 말 한 마디라도 제대로 꺼낼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 전화기 너머 상대에게 연방 허리를 굽실거리길 잠시, 이마의 땀을 한 번 슥 훔쳐낸 카즈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혹시 폐가 안 된다면, 타카가키 양을 한 번 뵐 수 있겠습니까?"
— 카에데를요?
"뭐가 문제인지 들은 게 없어서 말입니다.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만, 아무래도 전화로 어째볼 시점은 지난 것 같고 제가 직접 찾아뵈어야 할 것 같습니다."
— 물론이고말고요. 언제든지 오셔서 카에데를 만나주세요. 이제 애도 다 컸고 하니, 부모가 윽박지르는 것만으로는 어쩔 수 없겠죠.
"그럼 실례 무릅쓰고 내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거듭 폐를 끼치게 되어 면목 없습니다."
— 아뇨, 아뇨. 이렇게까지 부족한 딸을 챙겨주셔서 저희야말로 면목 없습니다. 그럼 내일 뵙는 걸로 알고 준비해두겠습니다.
"예. 실례 많았습니다. 그럼."

살짝 통화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오길 기다린 후 폴더를 탁 접었다. 자아, 어쨌든 타카가키 카에데가 고향 본가에 있다는 건 확인됐다. 그럼 이제부터 가서 설득하는 것만 남았는데, 그녀뿐만이 아닌 그녀의 부모님까지 상대하러 가는 거니 이쪽도 나름대로 준비를 갖춰야 한다.

"타카가키 양의 고향이 분명… 와카야마였지?"

당연하겠지만 여태껏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고, 감귤이 유명하다는 거 외에는 아는 것조차도 없다. 그간 운전하면서 실력은 많이 붙었지만 이런 장거리 운전에서 함부로 운전대 잡았다간 자칫 큰일이 날 수도 있다. 결국 이번만큼은 차가 아닌 오랜만에 타보는 열차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어쨌든 부모 뻘 어르신을 뵈러 가는 이상 맨손으로 가는 것도 실례다.

"어디 보자, 선물로는 와인이… 으음, 백화점에서 좀 구색 맞춰 사가야겠는데. 너무 비싼 건 그렇고…."

사가야 하는 선물 생각, 신칸센 티켓 예약할 생각, 거기에 더해 사무실로 돌아가는 즉시 써야 하는 각종 준비 서류들 생각으로 삽시간에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꼬여버렸다. 그렇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차근차근 정리하며 스마트폰 액정에 떠오른 선물용 와인 리스트를 휙휙 넘기며 걷자니, 문득 복도 끝에서 언제나와 같이 인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마시로 과장님."
"…이마니시 과장님."
"타카가키 양은 지금 어디 있다고 하던가요?"

물론 몰라서 물어보는 건 아니고, 그냥 한 번 확인 차 점검이나 해보는 거다. 그 질문에 카즈키가 다시금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여 보이고 입을 열었다.

"고향의 본가입니다. 와카야마요."
"와카야마라면… 흐음, 신칸센으로도 한 번엔 못 가겠는걸요. 시간이 꽤 걸릴 테니, 당일 일정으로는 못 다녀오시겠습니다."
"그 건에 대해선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과장님, 죄송합니다만 이번 건은…."
"센카와 군한테 지시해서, 밀린 월차 다 붙여서 제출하도록 했습니다."
"…예?"
"이런 상황에서 과장님이 어떻게 하실지 저도 이제 슬슬 눈에 보이더라고요. 출장 계획으로 내밀어도 되겠지만, 과장님은 그럴 분이 아니니까요."

무슨 일이 터지면 일단 자기가 총대를 메고 확실히 책임을 진다. 좀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자기학대에 가까운 조치이긴 하다만, 이것도 저 남자가 대기업 틈바구니에서 부대끼며 배운 나름대로의 처세술일 거다. 그런 후미히로의 예상대로 순간 떨떠름하게 굳어있던 카즈키의 얼굴이 다시금 확 풀리더니 후미히로를 향해 정확히 직각으로 허리를 숙였다.

"면목 없습니다. 타카가키 양, 꼭 데려오겠습니다."
"응당 그러셔야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과장님."
"예…?"
"혹시 과장님이 처음 출근하셨을 때, 제가 했던 말 기억나십니까?"

했던 말? 어디서 머리 나쁘다는 소리 들어본 적은 없지만, 이젠 반년도 더 지난 일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다. 순간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카즈키를 뚱하니 응시하던 후미히로가 대뜸 끌끌 혀를 찼다.

"사람은 혼자 못 산다. 자기 혼자 잘 하면 된다는 각오를 일일이 알아주지 않는다."
"예…?"
"제가 분명 그 때 말씀 드렸습니다. 언젠가 그 각오 때문에 곤혹 치를 날이 올 거라고요. 아무래도 보아하니 지금이 바로 그 날인 것 같군요."

그리고 이렇게까지 온몸으로 깨닫게 됐으니, 이제 그도 슬슬 이게 무슨 말인지 감을 잡게 될 거다. 여전히 이해를 못 하고 굳어있는 카즈키의 어깨를 툭툭 두들긴 후미히로가 인자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관리과에서, 아니 이 회사에서 총대를 메거나 메게 될 사람은 마시로 과장님뿐만이 아닙니다.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
"지금 보고 계시는 것보다 시야를 더 넓게 가지고, 한 발 물러나서 바라보는 여유를 보일 때도 됐습니다."

이제부터 그걸 배우러 가게 될 테니, 나이 먹고 주책맞게 한 마디 더 보태주려는 거다. 급하게 뛰어오느라 내내 뒤집혀 있던 카즈키의 양복 깃을 한 번 툭툭 쳐서 다듬어준 후미히로가 헛헛한 미소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월차는 월차니까, 이 기회에 한 번 푹 쉬고 오시죠."
"과장님…."
"여유, 중요한 겁니다. 모름지기 큰일 하는 사람일수록 여유가 있어야 해요."

그리고 뒷짐을 진 채 카즈키를 지나치다가, 문득 뭐가 생각난 듯 걸음을 멈추고 한 마디.

"여유를 찾아서 돌아오시길 빌겠습니다."

왜일까, 별 거 아닌 덕담 같은데 이상하게 심장 한복판에 깊이 박히는 충고였다.



도통 관리과와 엮일 일 없어 보이는 부서 미팅 예정 리스트에 처음엔 의문이 솟구쳤지만 어쨌든 시간 지체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뭉글뭉글 솟아오르던 의문을 꽉꽉 밟아 치워버린 채 서류 한 장을 낀 치히로가 걸음을 옮긴 곳은 관리부 사무실 한구석에 위치한 구성기획과의 과장 책상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과장님. 종합 엔터테인먼트 관리 2과 마시로 과장님 건 때문에…."
"아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알겠습니다."

같은 지붕 아래에서 일하지만 오늘 처음 보는 구성기획과 과장의 첫인상은 딱 자신이 들은 소문대로였다. 좋게 말해 쾌활한 사람이고 나쁘게 표현하자면 촉새 같은 사람. 툭 튀어나온 주둥이에 큼지막한 눈이 옆구리만 쿡 찔러도 수다를 자글자글 뱉어낼 것 마냥 가볍고 사람이 쉬워 보인다. 사석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람이지만, 역시 비즈니스 관계자로서는 영 신뢰가 가지 않는다.

오늘 처음 본 거긴 하지만 여직원들 사이에서 왕왕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실제로도 입조심을 못해서 두세 번의 승진 기회를 놓쳐버린 적도 있다는 모양이다. 물론 겪어보질 않고 사람을 판단하는 건 무례 중의 무례. 그렇게 내심을 숨긴 채 연신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고 있자니,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쭈욱 기지개를 켠 과장이 쾌활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야아, 그나저나 마시로 과장이 없으면 또 이쪽은 이쪽대로 일이 진척이 안 되는데, 업무 관련이야 메일로 하면 된다지만, 이 일이 또 시간 싸움이라."
"그런가요…?"
"아, 혹시 그… 이름 뭐더라… 아, 맞아. 센카와 씨는 서류 만지면서 뭐 들은 거 없나요? 이번 일에 대한 거, 마시로 과장 성격으로 봤을 때 언질이라도 줬을 것 같은데."
"아뇨, 죄송합니다만 전혀…."

자기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지만, 관리과가 구성기획과와 뭔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은 것도 오늘 아침이 처음이었다.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휙휙 내젓자 역시나 썩 좋지 않은 표정을 지은 과장이 결국 포기한 듯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이거 좀 이상하네. 이런 큰일을 추진하다 보면 사무원들한테도 뭔가가 툭툭 떨어지기 마련인데."
"…저, 과장님? 마시로 과장님은 대체…?"
"흐음. 이거 말해도 되는 건가… 에이, 몰라. 어차피 좀 있으면 알게 될 텐데 입 다물고 있기도 뭐하고."

거기 있는 시트 보이죠? 한 번 확인해 봐요. 책상 위의 두터운 서류철 밑에 깔린 하얀 뭔가를 가리키자 떨떠름한 얼굴로 그것을 꺼내 들었다. 기획 관련 부서 일을 처리할 때 한 번 쯤은 보곤 하는 의상이나 소품 관련 시안들의 디자인 시트. 대충 눈에 익은 그 시트 세 장을 살짝 들춰보자, 생전 처음 보는 생소한 의상 시안 서너 벌이 눈앞에 좌르륵 펼쳐졌다.

"이게 무슨… 의상인가요? 드라마에 쓰기엔 좀 요란한데…."
"그거 관리과에서 발주 나온 거예요."
"예?"
"마시로 과장이랑 이마니시 과장님이 직접 와서 발주 맡긴 거라고요."

이런 하늘하늘한 의상을? 대체 왜?

레이스가 잔뜩 달리거나, 아니면 비즈나 기타 장신구가 치렁치렁 늘어져 있거나.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들어오는 드라마나 이벤트 행사 관련 일감에는 조금이라도 써먹을 구석이 없어 보인다. 하물며 그쪽 일들에 관련된 소품은 전부 스폰서나 그쪽 제작진이 준비해주는 게 상식이다. 드라마나 이벤트 출연진이 자기 의상을 자기가 직접 들고 가는 코미디 같은 일 따위 일어날 리 만무하다.

하물며 요즘처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마당에 이런 당장 쓸데없어 보이는 의상 발주 따위에 신경 쓸 틈이라도 있을 리 만무. 그렇다면 이 의상은 현재 카에데가 맡고 있는 일감에 관련된 게 아니다. 하지만 구성기획과까지 와서 일을 맡겼다면, 분명 어딘가에 쓸 데가 있다는 뜻.

"…아!"

그럼 나오는 결론은 하나 밖에 없다. 깜짝 놀라 돌아보는 치히로의 시선에 과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벌써 스테이지 쪽은 거의 조율 끝나가는 모양새에요. 무대 장치 제작 완료됐고, 조립해서 설치 상태 확인하고 지금 다 뜯어다가 창고에 보관하고 있죠."
"마, 맙소사… 언제 이렇게까지 일을…."
"홍보 쪽에서는 다음 주부터 벌써 프로모션 진행하는 모양이고, 티케팅 관련 기획도 다 끝났고. 보아하니 늦어도 다음 주 즈음에는 공개할 생각인 모양인데, 그 친구가 바보도 아니고 이런 일을 왜 같은 부서에 숨긴 건지 도통 이해가… 어라, 센카와 씨? 센카와 씨?!"

후다닥 시트를 내려놓고 과장의 다급한 외침을 등진 채 허겁지겁 사무실을 나섰다. 비로소 오늘 받았던 그 이상한 협력 부서 내역의 실체가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관리과와 엮일 일이 없다는 건 그저 자신의 착각, 어디까지나 그간 엮였던 적이 없었을 뿐 앞으로 엮일 일이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그래, 맞아. 이것들을 다 조합해본다면…."

무대 설비 제작을 위한 각종 자재를 구매하기 위해선 자재관리과.
무대 설비의 설계와 제작을 담당하는 건 설비설계과.
티케팅과 각종 현장 굿즈 조달 기획을 수립하는 판촉기획과
그리고 무대의상, 행사 진행 등에서 협력할 수 있는 구성기획과.

이것들을 다 합쳤을 때 나올 수 있는 건?

"…라이브."

그것 밖에 없다. 두 과장이 기획하고 있던 건 라이브가 분명하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정말 아찔할 정도의 보안 유지가 아닐 수 없었다. 언제부터 진행한 건지는 몰라도 오늘 이 시간까지 자신은 사무실에서 이 라이브 기획과 관련된 그 어떠한 서류도 구경한 적이 없다. 사무실에서 들락날락하는 모든 종류의 서류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손을 한 번 거쳐 가기 마련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자기도 만만찮게 꼼꼼한 성격이라 생각했지만, 그마저도 그 두 사람의 병적인 보안유지를 뚫을 수 없었다.

"그런데 대체 왜…?"

대체 왜 이걸 비밀로 한 건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라이브 관련 기획이 거의 종료 직전까지 다다르도록 자신은 이 일의 진척에 대해선 들은 게 전혀 없었다. 아마 자신이 모른다면 카에데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할 텐데, 자기는 그렇다 치고 스테이지에 서야 하는 당사자까지 모르게 일을 추진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어찌됐든 이런 걸 듣고 가만있을 수는 없다. 안 그래도 슬슬 본인으로부터 불만도 들려오고 있던 차였고, 어쩌면 이번 결근의 이유와도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른다. 타카가키 양도 이걸 들으면 마음을 돌릴지 모른다. 애초에 나쁜 건 이런 일을 나한테까지 숨기고 진행한 그 짓궂은 과장 둘 아니던가.

"…그렇다면."

휴대전화를 꺼내 주소록에 등록된 비상연락망을 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르르르르. 단락적으로 들려오는 착신음이 세 번을 채 울리기 전에 달칵 수화기 드는 소리가 들려오고, 전화기 너머에서 침착해 보이는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타카가키 가입니다.
"안녕하세요. 혹시 타카가키 카에데 양의 어머님 되십니까?"
— 그렇습니다만….
"갑자기 전화 드려 죄송합니다. 346 프로덕션 종합 엔터테인먼트 관리과의 센카와 치히로라고 합니다만."

일단 카에데에게 말이나 해두자. 아무리 결근중이라지만 그녀도 어쨌든 사무실의 일원이니까. 그렇게 마음먹은 치히로가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혹시 타카가키 카에데 양 자리에 있나요?"



"카에데,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는데."

요 며칠 동안 이럭저럭 마음 편하게 지낸 카에데의 표정이 그 한 마디에 처음으로 볼만하게 구겨졌다. 코타츠에 몸을 절반 이상 파묻은 채 세상 시름 다 내려놓은 표정으로 감귤을 까먹던 얼굴이 왕창 구겨지더니, 이윽고 살짝 퉁퉁하게 부은 얼굴로 고개를 샐쭉 돌려버리고 말았다.

"전화 안 받는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잖니? 사회인이면 최소한의 책임감은 있어야지."
"…알았어요. 누구한테 온 전화인데요?"
"센카와 치히로라는 분이더라. 급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그나마 치히로라면 다행이다. 만약 프로듀서였다면 전화를 받는 즉시 끊어버릴 생각이었으니까. 그제야 살짝 풀린 얼굴로 코타츠에서 굼질굼질 몸을 빼내 전화기를 건네받자, 언제나와 다를 바 없이 잔잔한 목소리가 무자비하게 귓구멍을 찔러댔다.

— 휴가 즐겁나요?
"…죄송합니다, 치히로 씨. 저 때문에…."
— 아뇨, 아뇨.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요. 안 그래도 요즘 타카가키 양이 걱정스럽기도 했고, 이런 문제는 혼자 끙끙 앓느니 집에 가서 편하게 고민하는 게 더 나을 테니까요.
"예에…."
— 아마도 알고 있겠지만, 일단 서류상으로 타카가키 양은 결근이 아니라 휴가로 처리됐어요. 기왕 휴가 얻은 거, 확실하게 즐기다 오라고요. 이렇게 맘 편한 재충전 기회가 흔한 건 아니니까.

주말 합쳐 열흘 가까운 휴가다. 웬만한 직장인은 꿈도 꾸지 못할 장기 유급 휴가이고, 하물며 언제나 스케줄에 시달리는 아이돌에게 있어선 거의 불가능이라고 봐도 될 정도다. 이 기회에 하고 싶은 거 맘껏 하고 재충전하다 오면 되겠지. 그나마 카에데의 목소리는 밝아 보인다며 내심 한 시름 놓고 있자니, 전화기를 든 채 안절부절 못하던 카에데가 살그머니 입을 열었다.

"…저기."
— 예?
"마시로 프로듀서는… 역시 화 많이 났나요?"
— 화는 무슨. 자업자득인 건 알고 계시는 것 같던데요. 하긴 자기 책임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그, 그래요…."
— 아, 그리고 말 나와서 말인데 과장님도 내일부터 휴가에요. 아마 내일 아침 일찍 그쪽으로 내려가 볼 것 같아요.
"프로듀서… 가요?"
— 엎드려 빌든 뭘 하든, 전화 정도로 해결 볼 시점은 지났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으니 이제 남은 건 면담 밖에 없지 않겠어요?

순간 마음 한 구석이 찌릿하게 고통을 호소했다. 불편하다. 지나치게 불편하다.

이제 와서 다시 그의 얼굴을 본다고 해봐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비록 그의 섣부른 영업이 이 모든 일의 발단이긴 하다만, 어쨌든 그의 뺨을 때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버린 처지다. 맘 놓고 화를 내기에도 뭐하고, 그도 그 나름대로 할 말이 있을 터였다. 벌써부터 대면한다고 한들 맘 편하게 얘기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그 사람도 너무하지. 그냥 좀 쉬게 내버려두면 좋을 것을, 굳이 일까지 팽개치면서 쫓아 내려오는 건 또 뭐야. 새삼스레 잊고 있던 야속함이 떠오르자 다시금 뺨이 퉁퉁하게 부어오르고, 그런 기색을 읽은 것인지 전화기 너머 치히로가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 너무 그러지 마요. 솔직히 저도 처음엔 마시로 과장님이 좀 너무했다는 생각을 하긴 했는데, 사정 알아보니 그 분도 그 분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었어요.
"저를 위해 열심히 기획하고 일감 따러 돌아다닌다는 건 알고 있지만…."
— 겨우 그거뿐이게요? 타카가키 양, 정말 들은 거 없어요?
"뭐, 뭐가요…?"
— …예상은 했다만 정말 없는 모양이네요.

하아 하는 나직한 한숨 소리. 뜬금없는 소리에 살짝 카에데의 미간에 주름이 갔지만, 다음 순간 치히로의 고백에 어두워졌던 얼굴에 화들짝 놀라움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 마시로 과장님, 라이브 기획하고 있었어요.
"…예?"
— 라이브요, 라이브. 지금 분위기로 보자면 분명 타카가키 양의 첫 번째 라이브죠.
"라이브…."

생각도 못한 고백에 그간 차분하게 뛰던 심장이 두근두근 흔들리기 시작했다. 라이브, 나의 라이브. 나만을 위해 준비된 첫 번째 스테이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쥔 채 전화기를 귀에 바싹 가져다 대자, 윙윙대던 목소리가 조금 더 크고 선명하게 들려온다.

— 몇 군데 더 돌아다니면서 보니까 이거 생각보다 훨씬 본격적이고 진척도 많이 돼 있어요. 작은 가설무대에서 진행하는 데뷔 라이브 수준이 아니에요. 정말 제대로 각 잡고 극장까지 잡아서 스테이지 설비 조정하고 있고, 무대 의상도 시안이 벌써 서너 개씩 나오고 있다니까요?
"라이브… 제, 라이브…."
— 이런 좋은 걸 기획하고 있었으면서 대체 왜 지금까지 비밀로 하고 있었는지 도통 이해가 안 가요. 뭐, 그래도 무슨 생각이든 있으시니까 이렇게 은밀하게 일을 추진하셨겠죠. 마케팅나 전략상의 문제로 보안에 신경 써야 했을 수도 있고. 마시로 과장님 하시는 일에 그런 이유 하나 없을 리가 없죠.

골수까지 철저한 비즈니스맨인 그가 별 다른 이유 없이 이걸 비밀로 삼았을 리가 없다. 그가 어떤 남자인지는 익히 잘 알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는 납득할 수 있었다. 물론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까지 병적인 기밀을 유지할 이유가 딱히 떠오르지 않긴 하지만, 언제든지 뭐든 설명해주는 친절한 성격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을 거다.

제 나름대로 꿍꿍이를 가지고, 확실한 길을 철저하게 취사선택하며 차근차근 나아가는 스타일인 것이다. 너무 주변에 대고 설명을 안 해주는 바람에 이런 일이 벌어지긴 했다만, 어쨌든 지금 그 문제 때문에 이런 곤욕을 치르고 있지 않은가. 사정을 알게 된 이상 더는 밀어붙이기에도 미안할 뿐이다.

— 아무튼 내일 마시로 과장님 그쪽으로 가시거든 너무 쌀쌀맞게 대하지 마요. 물론 과장님 잘못이 없는 건 아니니, 그건 확실하게 내일 말해주는 거 잊지 말고요.
"…알았어요."
— 물론 그래도 과장님 성격상 도로 물릴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쩔 수 있겠어요? 힘내봐야지. 아무튼 전화는 끊을게요. 내일 과장님 잘 부탁드려요.
"예. 그럼 내일 다시 전화드릴게요."
— 그러지 말고, 기왕 내려간 거 이쪽 신경 딱 끊고 신나게 즐겨요. 아무튼 저도 이제 일하러 가볼게요.

그럼 편하게 쉬세요. 그렇게 짧은 인사와 함께 끊어지는 전화. 달그락 소리와 함께 무선 전화기가 코타츠 위를 구르고, 카에데의 상기된 얼굴이 그 옆에 살짝 기대듯 늘어졌다.

"프로듀서가, 라이브를…."

나한테 말 한 마디 없이 라이브를 준비하고 있었다. 묵묵히, 조용히.

라이브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잠깐이나마 하늘로 날아오를 듯 기분이 절호조에 다다랐다. 그렇게나 꿈꾸던 무대가 코앞에 왔는데,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분명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준비를 해주고 있었다. 남한테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혼자서 묵묵히 모든 짐을 짊어진 채 여기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비록 아키라 건이 있으니 그에 대한 앙금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니지만, 어쨌든 평소 섭섭했던 것 중 하나는 시원하게 해결됐으니 자연스레 마음도 가뿐해졌다. 하지만 그렇게 가뿐한 마음과는 별개로, 여전히 걸리는 게 없는 것도 아니었다.

"프로듀서는 대체 왜…."

라이브에 대한 걸 나한테 숨긴 걸까? 그저 그래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과연 카즈키는 왜 이걸 숨기고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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