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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마스터]Cinderella Lady - Special_Track_0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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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08, 2015 23:59에 작성됨.

"고발?"

 

오늘 아침 오사카 출장 내려갔다고 해서 그런 줄 알고 있었더니, 대뜸 전화해서는 터무니없는 용건을 입에 담았다. 별 일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한 노부오가 담뱃재를 재떨이에 통통 털고 입을 열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린가?"
— 지금 현지에서 파악해봤는데, 아무래도 소속사 측에서 블루 나폴레옹에 뭔가 저지른 것 같습니다.

 

얘기 들어보니 아무래도 본인들을 만나본 모양이다. 내일까지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조치가 빠른걸. 살짝 별일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사이 전화기 너머 카즈키의 목소리가 열기마저 머금고 이어졌다.

 

— 듣자 하니 사사키 양이 쓰러진 게 과로 때문이랍니다. 하다못해 공장 생산 라인에 세워도 9살 여자아이가 과로로 쓰러지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산업혁명기 영국도 아니고 터무니없는 얘기죠.
"듣고 보니 그렇군."
— 전국 데뷔할 때 하더라도 이 문제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다른 걸 다 떠나 이미지 때문에라도 반드시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자세한 건 서류가 확보되면….
"알았네, 알았네. 이해했으니 일단 진정하게."

 

이런 문제를 앞두고 분노하는 건 건전한 사회인으로서 당연한 거지만, 이렇게 열 올리다간 반드시 사고가 터지기 마련이다. 전화 너머에서 씩씩 숨을 가라앉히는 카즈키의 얼굴을 한 번 상상해 본 노부오가 역시나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법무팀에 전달해서 이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찾아보겠네. 사사키 양이 과로로 쓰러진 게 확실하다면 우리 입장에서도 가만있을 순 없지."
— 감사합니다.
"자네도 알겠지만 돌아올 때 관련 서류 꼭 확보해 오게. 그쪽에서 증거 인멸이라도 시도하면 일이 골치 아파져. 뭐든 좋으니 물증이 될 만한 서류를 꼭 확보해 오게나."
— 알겠습니다.
"적당히 머리 좀 식히고 해결 보게나. 이런 문제는 열 내면 열 낼수록 해결이 힘들어지니 말일세. 물론 웬만한 건 해결해줄 테니 너무 몸 사릴 필요도 없겠지만."

 

아무튼 이만 끊지. 수고하게.

 

짤막하게 대꾸하고 수화기를 내려놓기 무섭게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그 사이 사람이 변한 건지 아니면 천성인 건지, 이 와중에도 이런 문제와 마주치면 불같이 화를 내곤 한다. 역시 아직은 젊다는 걸까. 이런 올바른 열정이라면 나이 먹어서까지 그대로 갖고 가줬음 좋겠는데.

 

"하지만 결국 뭘 하든… 꼬리 자르기 밖에 안 되겠지."

 

새삼스레 우울한 기분이 되살아나 다시금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하얀 연기를 뿜어내는 눈이 착잡하게 물들었다. 아무리 열심히 해봐야 어쩔 수 없다. 이 문제에 있어선 누군들 마찬가지다. 마시로 카즈키는 물론이거니와,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제부터 그가 먼 오사카에서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될 것들은, 346의 케케묵고 오랜 어둠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처럼 올바른 열정을 품었던 선배들은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많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그것들을 거꾸러뜨릴 수 없었다. 지난 세월 동안 일본의 방송계와 함께 커온 346이 내면에 감춰두고 있던 그 구질구질한 현실. 지금 이 업계를 이끌어가는 우리의 머리 위에까지 드리워진 그 시커멓고 흉악한 그림자 앞에서는 제아무리 꼿꼿한 사람이라도 변해갈 수밖에 없었다.

 

"난 포기했어. 도저히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손을 놔버렸지. 그리고…."

 

자신보다 한 발 더 나아가 그 어둠과 공존하기를 택한 그 남자는, 지금 이 회사를 한 손에 틀어쥐기 직전이다. 그 현실을 되새기고 그 얼굴을 떠올리면, 이젠 기가 막힌 나머지 평소처럼 화조차도 낼 수 없었다.

 

"다나카 요우조."

 

빌어먹을. 현실이라는 게 다 이렇다. 누구나 다 바꿔놓고 망쳐놓고, 심지어는 이렇게 타락시키기까지 하는 이 끔찍한 놈이다. 그 누구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드디어 이 세계에서 자기 발로 땅을 디디고 서기 시작한 그 젊은이들 또한 마찬가지다.

 

타카가키 카에데의 프로듀스가 궤도에 다다르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모든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제부터 마시로 카즈키와 타카가키 카에데는, 이 화려한 세계의 뒤편에 드리워진 끔찍한 현실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자신과 요우조가 갈라섰던 그 현실의 분기점. 그곳에서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될 지는 솔직히 장담할 수 없다. 과연 그들은 어떤 길로 가게 될까. 지난 세월의 나처럼 모든 추잡함에서 고개를 돌려버린 채 모르는 척이라도 해갈 것인가, 아니면 요우조처럼 오히려 그 어둠을 자기편으로 삼아 그 추악함에 일조할 것인가.

 

"하지만 그것조차도 아니라면…."

 

싸울 것인가. 그 어둠에 맞서 싸울 것인가.
지난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꿈들을 거꾸러뜨린 괴물을 향해, 젊은이들은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인가.

 

"만약, 만약 그 길을 선택하게 된다면…."

 

힘들고 괴로운 길이 될 것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고난과 좌절이 덮쳐올지 모를 것이다. 그 냉엄한 현실의 잣대에 나도 요우조도 어떤 방향으로든 고꾸라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선 무언가를 기대하게 된다. 꿈을 바라보는 그 진지한 눈빛, 미래를 향해 힘껏 타오르는 그 올바른 열정들에게선 훤히 보이는 미래라는 걸 알면서도 결국 무언가를 기대하게 된다.

 

결정은 그가 하는 거다. 나 또한 한 번 거꾸러진 처지다. 그에게 길을 알려줄 순 있지만, 그 길로 내몰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만약 그가 그 길을 선택한다면. 그 누구도 선택하지 않은 제3의 길, 자신의 열정으로 그 어둠을 쫓아내리라 결의한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천천히 탁자 위에 올려놨던 서류를 집어 들었다. 서류철이라고 하기엔 차라리 민망하기까지 한 종이 두어 장의 묶음. 표지에 찍혀 있는 빨간 사외비 도장을 힐끗 살펴보고, 천천히 노부오의 시선이 천천히 맨 위의 표제 란을 향했다.

 

"지켜보고 있겠네, 마시로 군."

 

[아이돌 육성 프로젝트 관련 인사조정 안건]

 

"만약 자네가 여기서도 이기게 된다면…."

 

나도 그에게 힘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세상에 맞서 싸울 수 있을지도 모를 힘을.




블루 나폴레옹의 소속사인 오오무라 엔터테인먼트는 오사카 도심으로부터 10km 가량 떨어져 있는 인접시, 셋츠 시(摂津市)에 위치하고 있었다.

 

어쨌든 연예기획사이니 최소한의 주변 정리는 해두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 따윈 택시에서 내려 위를 올려다보는 순간 한 순간에 박살나버리고 말았다. 벽면에 때가 시커먼 낡아빠진 건물에 1층에 있는 술집은 매물로 내놓은 것인지 입주자 문의를 알리는 벽보 하나가 반쯤 찢어져 겨울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계단을 가로막는 출입문은 시뻘건 녹이 슬어 걷어차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고, 그나마 입구 어스름에 붙어있는 낡아빠진 간판 하나가 여기에 연예기획사라는 게 있다는 걸 알려주는 최소한의 이정표에 불과했다.

 

"기가 막히는군."

 

할 말을 잃고 한참이나 그 건물을 올려다봤다. 편견 탓인지 이런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연예기획사가 제대로 된 회사일 것 같지는 않았다. 이 지경으로까지 주변 환경이 어수선한 곳에 연예기획사? 하물며 1층에는 아예 대놓고 술집까지 차려놓고 있었는데?

 

"…아니, 아니다. 정신 차리자."

 

한 순간 머릿속을 채우려 했던 편견을 얼른 붕붕 털어 날려버렸다. 그래, 어디까지나 편견이다. 건물을 보고 판단할 게 아니지. 지금은 업계의 전설이 된 765 프로덕션은 아직까지도 낡은 건물에 세 들어 살고 있다지 않은가. 겨우 건물 따위로 회사의 경영 상태를 파악하는 것만큼 머저리 같은 짓도 없다. 중요한 건 내실이지, 내부 환경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닫혀 있던 문을 힘껏 밀자 어색할 만치 크게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반쯤 기울어지듯 열렸다. 혹시 망가뜨린 거 아닌가 싶은 마음에 조마조마하며 슬그머니 계단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쓰레기가 수북이 쌓인 지저분한 계단을 이리저리 피해가며 올라가자, 간판 하나 안 붙은 채 시커먼 손때가 묻어있는 나무문이 카즈키를 맞이했다.

 

"실례합니다."

 

똑똑 노크를 하지만 안에서는 대답이 없다. 혹시 아무도 없나? 하지만 반신반의하며 슬쩍 귀를 기울이자 문 건너편에서 나지막하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이 있긴 한 모양인데, 근무 태도는 썩 좋지 않다.

 

"이 대낮에 사무실 문 열어놓고 낮잠이라니…."

 

정말 기가 막혀 혀를 끌끌 차고선 문고리를 잡았다. 혹시나 싶어 문고리를 돌려보니 철컥 소리와 함께 아무 저항 없이 돌아간다. 건물 상태, 계단 청소 상태, 거기에 더해 끝간 데 없이 굴러떨어진 태만한 업무 태도. 이미 거기서 잔뜩 마이너스 점수를 매긴 채 문을 여니, 문 너머에서 펼쳐진 광경은 더욱 가관이었다.

 

"…하아."

 

이게 뭐야. 이게 정말 대기업 하청사의 꼬라지라고?

 

참담하다 못해 전위적이기까지 한 내부의 광경에는 산전수전 다 겪은 카즈키마저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가장 먼저 문을 열기 무섭게 밀어닥친 건 잔뜩 찌든 담배꽁초의 역한 구린내. 책상 위에는 다 모으면 6층 피라미드가 될 법한 양의 빈 맥주 캔과 고슴도치처럼 빽빽하게 꽁초를 꽂고 있는 재떨이. 당황한 나머지 한 발 내딛기 무섭게 종이 같은 게 걷어차여 슬쩍 내려다보니, 벌써 1년도 더 지난 그라비아 잡지의 표지 안에서 반쯤 헐벗은 이름 모를 모델이 천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꽉 찬 쓰레기봉투와 빈 깡통, 이외 각종 쓰레기로 뒤덮인 바닥은 정말 발 디딜 곳 외에는 바닥이라는 게 도통 보이질 않고, 사면의 벽은 창문 난 쪽 제외하면 죄다 오만가지 포스터나 사진 따위로 뒤덮여 있었다. 물론 하나 같이 취향을 격하게 타거나 차라리 안 입은 거나 마찬가지인, 수영복과 알몸 사이를 줄타기하는 옷들을 걸친 상태. 내부만 봐서는 이게 도대체 연예기획사인지 성매매 알선소인지 도통 분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으음? 누꼬?"

 

그리고 그 와중에 소란을 떤 탓인지, 책상 너머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눈을 부비며 쑤욱 일어났다. 사람이라기보다는 근육덩어리인지 살덩어리인지, 아무튼 이마엔 칼자국까지 하나 달고 있어서 어딜 봐도 평범한 생업에 종사할 것 같지 않은 남자의 압도적인 인상에 질려버린 사이, 요령 좋게 쓰레기산을 헤치며 다가온 그가 고개를 갸웃하곤 잠에 취한 굵은 목소리로 협박하듯 물었다.

 

"첨보는 얼란디. 믄 일이고? 시청서 나왔나?"
"아, 아닙니다. 여기가 블루 나폴레옹의 소속사 맞습니까?"
"여기가 맞긴 맞는디…."

 

블루 나폴레옹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무섭게 남자의 태도가 변했다. 슬쩍 쏘아보는 듯한 폼이 말 한 마디 잘못 나갔다간 대답 대신 주먹이 날아올 것 같아 새삼 위축된 카즈키가 애써 떨리는 성대를 붙잡고 입을 열었다.

 

"346 프로덕션의 마시로 카즈키라고 합니다. 블루 나폴레옹 건 때문에 상의할 게 있어서…."
"아, 슨님이가? 쪼매만 기둘리소."

 

다행히 카즈키의 생각과는 달리 당장 협박부터 날아온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 거구가 짓기에는 차라리 흉측하기까지 한 미소와 함께 남자가 몸을 돌리더니, 대뜸 맞은편에 위치한 문을 향해 그 솥뚜껑 만한 주먹을 붕붕 휘둘러댔다.

 

"마! 나아라! 니 슨님 왔다 안하나!"

 

쾅쾅쾅쾅쾅! 어떻게 문짝이 남아날까 싶은 무지막지한 노크, 아니 주먹질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저런 거에 얻어맞았다간 병원 신세 정도로 안 끝나겠지. 몸 쓰는 거랑 연관이 있고 없고를 떠나, 아무리 봐도 어깨로 보이는 저런 거구가 달려들면 누가 됐든 좋은 꼴은 보기 힘들 거다.

 

'그래도 저 양반 상대하진 않아서 다행이구만….'

 

평소에도 겁대가리 없다는 소리를 자주 듣고 사는 카즈키지만, 저 지경으로 그 용도가 노골적인 거구가 다가오면 일단 겁먹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일단 저 사람만 피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는 약간의 안이한 안도감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피 터지고 이 갈리는 영업의 전장, 펜이 칼보다 강하고 돈이 힘보다 세다지만 아무리 영업 싸움이라고 한들 상대가 피지컬로 들이대기 시작하면 지금 당장은 뭘 해도 밀릴 수밖에 없다.

 

보아하니 문 너머 상대도 무슨 일인지 금방 나올 것 같지는 않고, 일단 앉아서라도 기다려 볼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던 구둣발이 슬금슬금 솜이 터져 비어져 나오는 소파 쪽으로 향하자니, 벌컥 문이 열리며 깡마른 체구의 사내가 얼굴을 내밀었다.

 

"아, 안녕하십니까아."

 

생각했던 것보다는 말쑥한 인상의 사내였다. 수수깡처럼 비쩍 말라서 눈앞의 근육덩어리와 그림 같은 대조를 이룬다는 걸 제외한다면, 수염도 말끔하게 깎았고 눈에도 제법 총기가 돈다. 살짝 깃이 구겨진 연회색 양복에 거북하게 새빨간 넥타이가 가히 끔찍할 정도의 조합이라는 걸 제외하자면, 이 돼지우리에서 그나마 말이 통할 것 같은 상대다.

 

물론 말이 통하면 통하는 대로 앞으로 피차 피곤한 일이 벌어지리라는 건 확실했으니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슬그머니 눈가로 떠오르려던 혐오감을 누른 채 꾸벅 고개를 숙이자 깡마른 사내의 귓가에 머리를 기울인 덩치가 뭔가를 속닥이더니 이윽고 피식 코웃음을 치며 사무실을 나섰다.

 

"내 경고해따. 니 조때도 인제 난 모른데이."

 

쾅! 매너라기보다는 철거에 가까운 힘으로 덩치가 나선 문이 세차게 닫혔다. 귓속말로 무슨 말을 했기에 저런 살벌한 경고가 남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신경 쓸 거리가 제 발로 나가준 상황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으, 흠흠. 오오무라 엔터테인먼트 대표 되십니까?"
"맞습니다만, 뉘신지이…?"
"346 프로덕션에서 나왔습니다. 전 이런 사람입…."
"3, 346…! 여, 여기 앉으시죠!"

 

채 명함도 꺼내주기 전에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사내가 재빨리 소파를 치우더니 얼른 자리를 권했다. 그간 워낙 큰 판에서 논지라 의식할 틈이 없었지만, 어쨌든 346이 대기업이긴 한 모양이다. 명함도 확인 안 하고 이름만 들은 것만으로도 저렇게 시퍼래져서 파닥댈 정도라니.

 

물론 그런 사실 깨달았다고 한들 새삼스레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일 따위는 없었다. 소파에 슬그머니 엉덩이를 붙이고 살짝 깍지를 낀 채 눈매에 힘을 주자, 허둥지둥 냉장고 쪽으로 달려간 사내가 어눌한 표준어와 함께 달달 떨리는 손으로 캔 커피 두 개를 꺼내들었다.

 

"아하하, 이거 미안합니다아. 어째 오늘 우리 아새… 아니, 애들이 하나 같이 다 일하러 나가가지고오."
"흐음. 일이요?"
"아무렴요. 다들 하나 같이 바쁘죠오. 요즘 들어 다들 몸값이 허벌나게 뛰어버려서요오."

 

뛰긴 뭘 뛰어. 딱 봐도 견적 나오는구만. 상대가 어려보인다고 일단 말이나마 어떻게 잘 해보려는 모양인데,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 꼬라지를 보고서도 속아줄까. 살짝 가린 입가를 불쾌하게 비틀어대는 사이, 재빨리 캔 커피를 내민 사내가 맞은편에 앉은 채 이마의 땀을 슥 닦았다.

 

"아, 그래서 무슨 일이신지…?"
"용건이야 달리 있겠습니까?"
"그으, 마츠모토… 양 애들 건인가요오?"
"예. 그겁니다."

 

초면에 연락도 않고 쳐들어와서 실례했다는 자질구레한 인사치레 따위는 집어치워버렸다. 살짝 눈에 힘을 준 카즈키가 목에 힘을 주고 상대를 노려봤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사사키 양 문병 가서 문의해보니 과로라고 하던데요."
"아, 아아. 그게 말이죠오. 요즘 그, 유례없는 일이라고 해야 하나, 하도 일감이 많아지다 보니까…."
"유례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무슨 일을 어떻게 시켰다고 9살 꼬맹이가 쓰러집니까?! 그것도 만인이 다 보는 앞에서!"
"그, 그게 말이지예. 요즘 가가 뭘 잘못 묵어부럿는지 통 비실비실…."
"컨디션도 안 좋았다고요? 그런 애를 붙잡아다 스테이지에 세운 겁니까?!"
"아, 지 말은 그기 아니라, 그…."

 

벌써부터 체면 차릴 여유가 없어졌는지 언제부터인가 오사카 사투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걸로 죄책감 가질 사람 같았으면 애초에 이런 문제는 안 만들었을 것 같고, 원청업체 직원이 직접 나서서 얼굴 맞대고 쪼아대자 대뜸 겁부터 나는 것 모양이다. 하지만 상대가 겁먹든 말든 알 바 아니다. 하물며 이런 중대차한 문제가 걸린 상황에선 더더욱 그러하다.

 

이 새끼 봐라. 아무래도 안 되겠어. 묻지도 않고 대뜸 담배를 빼서 물었다. 허둥지둥 라이터를 찾으려는 걸 대충 뿌리치고, 방금 전 뜯은 새 캔 커피에 재를 통통 턴 카즈키가 있는 힘껏 인상을 쓴 채 입을 열었다.

 

"게다가 그건 그렇다 치고, 당신들 제정신입니까? 346에서 이번 건 비밀 엄수 지켜달라는 얘기 못 들은 거예요?"
"비, 비밀 엄수예…?"
"지금 당사자들이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네들이 주둥이 간수 잘 했으면 지금 블루 나폴레옹 당사자들은 346이랑 연관도 짓지 못 하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아주 동네방네 소문 다 퍼져 있던데요?!"
"그, 그기 말이지예에…."
"멤버는 무대 위에서 졸도하질 않나 본사 영업 비밀 엄수는 내다 버리질 않나, 이딴 식으로 했다간 346이라도 블루 나폴레옹 포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따위로 개판 쳐놓고서 무슨 전국구 데뷔입니까?! 뭘 하든 간에 멤버들의 상태를 봐가면서 수용 가능한 수준으로 관리해야 하는 게 당신네들 일 아닙니까?!"
"그, 그리 말씀하셔도 낸들 어쩔 수 없지라예. 346 보내준다 캐놓고 자꾸 일정만 미뤄싸는디 내 뭐 우찌해야 합니꺼?"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어디 두지 못해 빙빙 돌려대는 꼴이란 차라리 가소롭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어떻게든 이쪽에 책임 좀 돌려볼 구석만 찾는 모양이지만, 으레 이런 상황에서의 파워 게임은 한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하물며 생트집을 잡는 것도 아닌 확실한 명분까지 있다면 더 참을 이유조차도 없다.

 

"…아, 됐어요. 당신네들 변명이나 들으러 여기 온 거 아닙니다."
"그, 그라믄…?"
"서류 가져와요. 블루 나폴레옹 프로듀스 계획이랑 스케줄 시트, 가지고 있죠?"

 

물론 아무리 원청회사라 한들 기업 비밀에 가까운 내용들이니 쉽게 보여줄 리는 없다. 역시나 영 곤란한 얼굴로 눈을 돌려대는 모습에 순간 울컥하려던 걸 겨우 참은 카즈키가 빠드득 이를 갈았다.

 

"그거 안 보여주는 거 보니 수상한 거 있는 거죠? 고등학생도 아니고 9살 초등학생 끼워둔 유닛인데 근로기준법도 안 지킨 거 아닙니까?"
"무, 무신 소리 하십니꺼?! 절대 아닙니데이!"
"그럼 어디 그 소리 참말인지 한 번 확인이나 해봅시다. 아, 빨리 안 가져오고 뭐해요?!"

 

될 대로 되란 식으로 고함까지 내질러봤지만 생각보단 효과가 괜찮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뭔가에 떠밀린 것처럼 허둥지둥 소파에서 달려나간 사내가 방금 전 나왔던 문으로 도로 뛰쳐들어 가고, 잠시 후 서너 개의 두툼한 파일 뭉치를 들고 오더니 카즈키 앞에 허겁지겁 내려놓았다.

 

"자, 자. 확인 한 번 해보이소! 내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니께, 절대로 이런 건 어기지 않심더!"
"그건 봐야 알겠죠."

 

신뢰 따윈 요만큼도 안 내비치는 대꾸와 함께 그가 내려놓은 파일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언뜻 보면 대충 집어든 것 같지만 이미 눈앞에 서류들이 나타난 순간 뭘 먼저 집어 들지는 정해둔 뒤였다. 스케줄 시트라고 적힌 다 낡아빠진 파일을 펼쳐들자. 색색의 볼팬으로 빽빽하게 표시된 스케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 보자. 2월… 1월… 작년 12월…."

 

볼펜 끝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빼곡하게 채워진 스케줄 시트가 시간을 거슬러 넘어가고, 한 장 한 장 넘어갈수록 카즈키의 표정 또한 점차 색색이 변해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분노, 그 다음엔 당혹, 그리고 그 다음엔 체념. 그 맞은편에서 죄인이라도 된 것 마냥 사내가 바싹 얼어있는 가운데, 지저분한 사무실 안에 종이 넘어가는 소리만이 가득 찼다.

 

그리고 잠시 후, 탁 소리와 함께 파일이 덮였다. 그와 동시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안은 카즈키가 더듬더듬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 채 나직이 입을 열었다.

 

"…지금 이딴 걸 스케줄이랍시고 짜놓은 겁니까?"
"예, 예?"
"유소년 포함된 유닛 스케줄이 이따위라는 게 말이 되냐는 겁니다! 상식이 있어요, 없어요?!"

 

그래, 어쨌든 말은 지켰다. 주 40시간의 근무 시간 엄수.

물론 말 그대로 근무 시간만.

 

'이 자식들 미친 거 아냐? 이동 시간이고 레슨 시간이고 다 빼고 계산했잖아!'

 

톤다바야 시에서 오전 중에 일하고 그날 오후는 타카이시 시.
다음 날은 난데없이 아침부터 센난 시에 출현, 점심에는 사카이 구에서 이벤트 진행.
그 다음 날은 카와치나가노 시와 네야가와 시. 그 다음날은 타카츠키 시에 츄오 구.

 

무슨 축지법이라도 쓰는 건지 오사카 부 전역에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데, 중간에 당연히 있어야 할 이동 시간 따윈 스케줄 시트 상에 전혀 잡혀 있지 않다. 게다가 어쨌든 아이돌이니 레슨도 해야 할 텐데 그에 관해서도 일언반구 언급조차 없는 건 마찬가지. 어째서인지 증발해버린 레슨 시간은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껏 열거한 동선들을 하루 스케줄에 맞춰 이어보면 그야말로 오사카 전역을 종횡무진 이어나가는 정신 나간 동선이 나온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편도 한 시간은 기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스케줄 시트에 기록된 건 오로지 업무 시간, 말하자면 현장에서 직접 촬영이나 행사를 뛴 시간뿐이다. 중간의 이동 시간이나 식사 시간까지 잡을 경우 실제 근무 시간은 최대 세 배까지 급상승. 그 와중에 레슨 같은 변수까지 끼워 넣으면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다. 이건 정상이 아니다. 모델 업계 경력에 방송 일까지 더해 그 동안 충분히 단련된 성인 여성인 카에데라 해도 이런 미친 스케줄은 소화할 수 없다.

 

"스케줄이 이 따위면 어른이라도 지쳐 쓰러질 겁니다! 유소년 포함된 유닛을 굴릴 거면 최소한 법은 지켜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거 그래 마이소. 가는 시간도 포함하몬 일 못 합지요오. 안 그라도 일시키는 시간도 얼마 없고요오."
"그래도 일을 줄이라고 있는 게 법 아닙니까?! 게다가 다른 건 다 떠나서, 레슨은 또 어따 팔아먹었습니까? 사무소에서 레슨 직접 관리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이것도 안 넣으면 그냥 애들 일하다 쓰러져 죽으라는 소리 밖에 더 됩니까?!"
"그라믄 마 우짜라고요? 가들 다 학생 아입니까. 방학띠 안 해두믄 일 년 내내 일 몬합니다요!"

 

그래, 그건 이해한다. 확실히 넷 중 세 명이 학생이니 학기 중에는 일 잡기 힘들겠지. 하지만 그런 것도 전국구 수준에나 해당되는 얘기고, 지역 기반으로 움직이는 지역 아이돌이 이런 미친 스케줄대로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게다가 학기 중에 일하기 힘들다는 것도 결국은 변명에 불과하다. 미성년 예능인을 위한 추가학습 제도가 괜히 있는 것도 아니고, 잘만 활용하면 유급도 면하면서 성적도 유지할 수 있다.

 

즉, 하려면 학기 중에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거다. 이쯤 되자 슬슬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 빌어먹을 자식, 일부러 블루 나폴레옹을 이렇게 만들어놓은 거다. 여봐란 듯이.

 

"말도 안 되는 변명하지 마세요. 전 당신네들 변명 들으러 여기 온 거 아닙니다."
"하이고, 절믄 양반이 와 이리 꽉 막혔노. 거 소리 좀 치지 말고 내사 차근차근…."
"뭘 차근차근입니까? 이렇게 증거가 명백한데! 하루 종일 이런 정신 나간 스케줄대로 끌고 다니는 와중에, 업무 외 상황도 고려해주지 않는다면 소속사는 대체 왜 있는 겁니까?!"
"아, 그리요. 맞아요. 하모요. 내가 아주 쥑일놈이오. 하지만 그기 다가 아니지 않습니꺼?"

 

그게 다가 아니면 또 뭐가 있는데? 당장 손에 든 꽁초를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눈을 부릅뜨자 겨우 여유를 찾은 것인지 사내가 느물느물 웃었다.

 

"헤헤, 뭐 생각보다 오래 하는 바람에 쪼금 막판이 이상허긴 했어도 성공하지 않않습니까아? 요즘 같이 천지사방 아이돌들 굴러다니는 시대에 점마들처럼 금방금방 쑥쑥 커가꼬 팬도 우르르 몰고 다니는 아덜, 정말 몇 없심더."
"…지금 애들 저 꼴 만들어놓고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 따위입니까?"
"아, 그야 가들이 연습한다꼬 찌랄해싸다가 일어난 사고고, 그걸 내한테 따져물음 내사 할말 읎지예."

 

사람이 뻔뻔한 것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자기도 모르게 쥐어지려는 주먹을 참으며 입술을 세게 비틀어대자, 손바닥을 싹싹 비빈 남자가 슬쩍 고개를 가까이 했다.

 

"그랴도 이제나마 와서 점마들 거둬준다니께 내 맘이 아주 푹 놓이네예. 하모요. 딸자석 같은 아들이니까예."
"…하!"
"거둬주러 오신 거 맞지예?"

 

확인까지 하면서 물어오는 눈동자에서 뭔가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아, 씨발. 이런 새끼들 꼭 있어. 비로소 상대가 정확히 어떤 부류인지 슬슬 감을 잡기 시작한 카즈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런 부류들을 상대로는 아무 것도 먹히지 않는다. 펜도 말빨도, 영업의 전장에서 통하는 어떤 것도 시원치 않다.

 

단지 통하는 게 있다면 단 하나 뿐이다. 그 혐오스럽기까지 한 상상에 진절머리를 내자니, 잽싸게 탁자 밑으로 손을 집어넣은 남자가 종이 한 장을 스윽 꺼내 내밀었다.

 

"그라믄 거둬주시는 걸로 믿고… 슬슬, 시작혀봐도 괜찮지 않겠심꺼?"
"이게 뭡니까?"
"계약서라예. 중도금 계약서."

 

뭐? 중도금 계약서? 순간 뭘 잘못 들었나 싶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부르르 흔들었다. 이런 정신 나간 새끼를 봤나. 지금 이 판국에 뭘 들이미는 거야?

 

"뭐라고요? 중도금 계약서?"
"하모요. 모르시나예?"
"아니, 무슨 집 사는 것도 아니고 중도금은 개뿔…."
"하이고, 뭔가 즌달이 잘못 됐나 보네예. 본사 높으신 어르신이 말씀 안 해주셨나봐예?"

 

슬슬 기세를 찾아간다고 생각하는 건지 눈빛에 간사함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물론 그 간사함에 위축이라도 될 리가 없어서, 이를 꽉 깨문 채 노려보는 사이 종이 한 장을 딱 올려놓은 사내가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웃기 시작했다.

 

"346서 그으, 중요한 사업 하나 벌이는디 가덜 필요하다 카면서, 후딱 써서 준 거라예. 그 사이 점마들 얼로 튀어싸믄 안되니께, 꼭 붙잡아놓는 대신 나중에 선금으로 치고 더 얹어주기로."
"……."
"아, 물론 지가 듣기론, 한 군데서 점마들 다 관리하는 기 아니고, 싹 다 흩어싸서 한 명씩 쓰다가 필요할 때만 뭉쳐서 블루 나폴레옹이다, 뭐 이런 식으로 굴릴 생각인 것 같드라고예. 저야 뭐 무식캐싸서 뭐라 카는지도 모르는디, 높으신 어르신덜 하시는 데에는 다 생각 있것지 싶어 그냥 그런 줄 알고 있었지라예."

 

사람을 주고받는데 중도금이란다.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말로 금칠하려 애써봐야 중도금이란 단어가 나온 시점에서 그녀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저 개자식과 346 경영진에게 있어, 블루 나폴레옹이란 그저 부동산이나 공장 기계 설비와 하등 다를 게 없었다. 어떻게 굴려먹던 그건 알 바 아니고, 지금 당장 돈을 벌어오면 그걸로 족한, 오로지 그거 뿐인 존재였던 거다.

 

이게 말이나 되는가? 꿈을 안고 온 사람들을 물건 취급하고, 험하게 막 다루다 쓰러지니 나 몰라라 하고, 몸 달아서 안달하는 것도 그깟 돈 몇 푼 달린 문제에 한해서라는 게? 이런 쓰레기들이 사장이네 매니저네 명함만 번듯하게 단 채 꿈만 안고 달려온 사람들을 멋대로 굴려먹는 게,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그래서."

 

슬슬 제어를 벗어난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당장 일어나서 고함이라도 치고 싶은 걸 힘겹게 억누르며 카즈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은?"
"순서로 치믄 이기 더 먼저였을거라예. 데리러 올 때에 잔금 지불이라고 해 놓고는 이제서야 오시믄 저희도 흰소리 나오지예. 사고는 사고, 거래는 거래 아입니까."
"용건만 말하세요. 그래서 뭡니까?"
"아하하, 그래서 말이지예. 이제 와서 우리가 그 게산허니 그게 쪼오끔 문제가 있서가꼬."

 

그래, 이 개자식아. 어디 한 번 실컷 떠들어봐라.

 

"이야, 이게 말이지예. 늦어지고 늦어지다가 일이 좀 많아지다보니 그, 팬이라거나 인지도라거나 올라가지 않았겠습니꺼?"

 

네가 지금 여기서 뭐라 지껄일지, 지금 내 눈에 훤히 보이거든?

 

"그라서 원래는 여기 쓰인 대로 받아야 쓰것는디, 지금까지 내사 들인 돈이랑 요리조리 비교를 해보믄, 그기 쪼금 적자라고 해야 하나 우째야 하나…."

 

그러니까 네가 지금 내 앞에서 뭐라고 헛소리를 지껄여대던 간에.

 

"고로 여기 사인을 할 때 하시드라도예. 그것이…."

 

내 대답은 정해져 있다, 이 쓰레기 자식아.

 

"조오금 더, 적자만 안 보게 읁어주시면…."

 

털썩!

 

순간 카즈키의 가방에서 뽑혀 나온 다이어리가 대뜸 계약서 위를 덮듯 쿵 떨어졌다. 난데없이 눈앞에 빈 종이가 펼쳐지자 여태껏 간사하게 설명하던 사내의 얼굴이 깜짝 놀라 얼어붙고, 그 위로 옆에 굴러다니던 볼펜 하나를 주워 내던진 카즈키가 무시무시하게 굳어버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계좌 적어."
"예, 예?"
"계좌, 적으라고."

 

두 번 설명하지 말게 하라는 듯, 기세부터 무시무시한 목소리였다. 그 살벌한 위압감에 떠밀려 영문도 모른 채 허둥지둥 다이어리 위에 계좌번호를 흘려 쓴 사내가 공손하게 다이어리를 접어 내밀자, 하얗게 얼어버린 채 받아들어 가방에 집어넣은 카즈키가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다 적었냐?"
"…그, 그런디예…."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이런 거 어울리는 스타일도 아니고, 웬만해선 안 하고 넘어가려 했지만 이젠 정말 한계다. 흔들리는 숨을 천천히 내쉬어 가다듬고, 겨우 혈색을 가다듬은 카즈키가 별안간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이 꽉 물어라. 어디 꽂힐지 모른다."
"예, 예… 악?!"

 

꽝!

 

순간 눈앞에서 불꽃이 튀고, 무시무시한 격통이 코를 타고 만면으로 번져 올랐다. 난데없이 얼굴을 후려갈긴 충격에 정신을 못 차린 사내가 시뻘건 코피가 흐르는 코를 쥔 채 벌렁 소파로 자빠지기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카즈키가 방금 전 사내의 코를 있는 힘껏 받아버린 이마를 슥슥 쓰다듬으며 일갈했다.

 

"이 개자식아! 네가 그러고도 사람 새끼냐?!"
"예, 예…?!"
"9살 핏덩이를 무대 위에서 과로로 쓰러뜨렸는데, 사람 배에서 태어난 새끼라면 하다못해 미안한 척이라도 해야 할 거 아냐! 그런데 그러지도 못할망정 뭐? 돈을 더 달라고? 양심이라는 게 있다면 그딴 소린 입에도 담지 못했어야지!"

 

어차피 다시 볼 일 없고, 다시 올 일도 없는 곳이다. 이딴 거지발싸개 같은 공간에 한 시라도 더 있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달리, 오만 쌍욕을 퍼붓는 와중에도 노부오의 지시대로 책상 위에 펼쳐진 서류들을 쓸어 담는 손길은 기계적일만치 잽싸게 움직였다. 잡히는 대로 닥치는 대로, 눈에 띄는 서류란 서류를 모두 모아다 처넣은 가방이 순식간에 터질 듯 부풀어 오르고, 그렇게 순식간에 빵빵해진 가방을 움켜쥔 카즈키가 빈손으로 피범벅이 된 남자의 얼굴을 향해 검지 끝을 쑥 내밀었다.

 

"오냐, 네놈이 그렇게 좋아하는 돈, 한 번 달라는 대로 쥐어주마. 그 대신 돈이랑 변호사가 같이 올 테니까 그렇게 알아! 346 법무팀한테 한 번 영혼까지 털려봐야 정신을 차리겠지?!"
"무, 무슨…?!"
"너 씨발 내가 경고하는데, 살고 싶으면 그냥 이 나라를 뜨는 게 좋을 거다."

 

블루 나폴레옹 프로듀스? 오냐, 그래. 해주마. 얼마든지 해주마.
하지만 할 때 하더라도 이거 하나만 알아둬라. 내가 이 정도도 못할 줄 알아? 천만에, 너 잘못 걸린 거야.
설령 내가 옷을 벗는 한이 있더라도, 너 같은 쓰레기 한 놈은 끌어안고 뒈져야 성이 차겠다!

 

"정말 내 눈에 한 번 띄기라도 하는 날엔, 그땐 정말 지옥 끝까지 쫓아가져 조져버릴 테니까!"

 

그렇게 서류를 잔뜩 채운 가방을 손에 든 채, 카즈키가 분노에 찬 얼굴로 몸을 돌렸다. 쿵쿵대는 발소리가 사무실 밖으로 멀어질 때까지, 사내는 주저앉은 코뼈만 붙잡은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마도 작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카즈키가 주먹을 쓰는 장면이 될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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