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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사와 후미카, 이명.

댓글: 4 / 조회: 813 / 추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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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30, 2016 01:18에 작성됨.

이 노래를 들으시면서 보는 걸 추천합니다.

 

 

 

 

제 이름은 사기사와 후미카, 아이돌로 활동했던, 스물다섯 살의 여성입니다.

삼촌께 1년여 전쯤 물려받은 고서점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습니다.

숙식은 고서점 2층의 방 두개짜리 집에서 해결하고 있습니다.

제 하루는 이 거리의 누구보다도 빨리 시작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전날 밤에 미리 만들어놓은 식사로 아침을 때우고, 가게의 문을 엽니다.

가끔 오시는 손님들을 맞으며 책을 읽으며 하루를 보내다 보면 어느새 밤.

수요일과 금요일은 슈퍼마켓의 할인 행사가 있는 날이기에, 평소보다는 일찍 문을 닫고 장을 보러 갑니다.

빠듯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넉넉하지는 않은 살림 탓에, 아껴 쓰는 것이 몸에 밴 듯합니다.

이런 일상을 매일 반복하는 저는, 얼마 전, 실연을 당했습니다.

상대는 이 집에서 동거하던 2살 연하의 연인이었습니다.

군청색 단발머리와 노랗게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이 빈 공책에는,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그 이야기를 정리해 나가는 일기를 써 보고자 합니다.

그 사람과 처음 만난 것은, 육년 전 아직 아이돌이던 무렵 사무소에서였군요.

같은 프로젝트에 속해, 같은 노래를 부르고 같은 춤을 추고, 같은 공간에서 살았습니다.

그러한 일상 속에서, 저는 그 사람에게 '동료' 이상의 감정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거리낌없는 행동, 언제나 넘치는 자신감.

그런 모습에 저는 반했던 걸까요?

꼭 그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른 동료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은 종종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사람도, 그런 부류답게 본래의 성격은 숨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었다면, 본래의 성격을 꽁꽁 숨기지는 못했다는 점이겠군요.

식물도감에서 읽은 내용이었습니다.

.....봉숭아꽃의 열매는 익게 되면 살짝만 건드려도 터지면서 씨앗을 사방에 뿌린다.

이것과도 비슷했군요.

그 사람도 태연하게 절 사랑하다가, 제가 조금만 진심으로 다가가면 얼굴이 빨개져 본 성격이 드러났으니 말입니다.

첫 키스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첫 키스는 둘이 같은 유닛에 속한 첫 라이브가 끝난 후였습니다.

의상실에서 일부러 늑장을 부리다가, 둘만 남게 되었을 때 최대한 자연스럽게 안겼습니다.

그 사람은 부끄러워 하면서도 제게 기꺼이 입술을 맞춰 주었습니다.

그 순간은, 어릴 때 설탕과자를 처음 맛보던 순간 같았습니다.

설탕 말고는 섞지 않고 갓 만든 설탕과자처럼 뜨겁고 달았습니다.

벌써 열두 시가 한참 넘었습니다.

너무 늦게 자면 내일 일과에 문제가 생기기에 오늘은 여기까지, 이만 줄이겠습니다.

20xx년 04월 xx일, 밤 열두 시 삼십구 분에 씀.

-----------

원래 일기란 것은, 그 날의 기록이란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감정을 밤까지 가지고 있다간 제가 버틸 수가 없을 것 같기에, 아침에 일기장에 펜을 가져다 댑니다.

지난 밤에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사람이 나오는 꿈을 꾸었습니다.

사실 대수롭지 않은 일입니다.

실연하기 전이든, 실연한 후이든 그 사람은 제 꿈의 단골 손님이었으니까요.

문제는 그 사람의 행동입니다.

다짜고짜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미안하다는 말도, 보고싶었다는 말도 없이, 절 방으로 끌고 들어가더군요.

그리고는 그 손으로 절 쓰다듬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두 가지는 확실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한 가지는 손가락.

언제나처럼 가늘고 예쁜 손가락이었지만, 차가웠습니다.

오한이 느껴질 정도로 차가운 손가락으로 제 몸을 어루만졌습니다.

나머지 한 가지는, 그 사람의 말이었습니다.

꿈에서 깨기 직전에 제 귀에 대고 속삭이더군요.

'Hi, It's Me.'

라고 말이지요.

저보고 어쩌라는 건가요.

당신이 당신이란 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요.

팔뚝의 굵기도, 오똑한 코도, 가늘고 매끈한 종아리도 아직 기억하고 있다고요.

정말이지 파렴치하고 무례한 사람.

남의 꿈에 치고 들어와서는 한다는 짓이....

 


아침에 쓰던 일기는,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에 의해 끊겨 버렸습니다.

그 손님도 저 못지 않게 책을 좋아하시는 분이라 그분과의 이야기로 인해 일기는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점심때쯤 찻주전자에 물이 다 떨어져 물을 채우러 2층으로 올라와서 식탁에 아무렇게나 펼쳐진 일기장을 보고서야 다시 기억해 냈습니다.

아침에 마구 휘갈긴 일기를 읽다가, 그 꿈이 가진 속뜻이라도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서가에서 해몽, 무의식, 잠재 의식같이 꿈과 관련있어 보이는 책들은 모조리 꺼내어 읽으며 오후를 보냈습니다.

그 중 몇권은 그대로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한 가지 결론을 얻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다, 라고 유명한 심리학자는 기술해 놓았습니다.

평소에 무의식적으로 바라던 것, 또는 즐거웠던 기억 등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란 소리입니다.

그 문단을 읽자마자 부끄러움이 절 덮치더군요.

바라던 행위를 받은 주제에 그 사람에게 덮어씌운 아침의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와 동시에 든 생각은, 언제쯤 저는 그 사람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였습니다.

이 일기장을 그 사람에 대한 내용으로 다 채운 이후일까요.

그때라면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그렇게 믿으며 이만 줄입니다.

20xx년 05월 xx일, 저녁 일곱시 사십팔 분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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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서점 문을 닫고 집 청소를 했습니다.

집이 넓지도 않고 세간도 변변찮아 일찍 끝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한 가지 장애물을 만나 버렸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물건은 손도 대지 않고 그때 입고 있던 옷과 몸뚱이만 사라졌던 겁니다.

걱정되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 앞가림은 철저히 했으니까, 그리고 집도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 물건을 치울 제 마음은 생각하지 않았던 걸까요?

추억들이 스물스물 제 마음을 좀먹는 것을 겨우 억누르면서 종이상자에 마구 우겨넣었습니다.

큰 상자 두개와 작은 상자 하나에 옛 추억이 담기고, 그 대신 세 칸짜리 서랍장 하나와 옷장의 반이 비어버린 것을 보고 저는 저도 모를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창고로 쓰는 방에 상자들을 밀어넣고-밀어넣었다기 보다는 처넣었다는 표현이 적절하겠군요-문을 잠궈 버렸습니다.

난방 밸브도 잠겨서 온기 하나 없는 방에 그 사람의 물건을 처넣었다는 데에 일말의 미안함이 느껴졌지만, 절 버리고 간 사람에게 합당한 대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더군요.

오랜만에 먹고 싶은 것이 생길 정도로 마음이 가벼워지더군요.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크림소스 파스타였습니다.

재료가 다 있는지도 모르면서 물을 끓이고 면을 삶았습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소스 병을 꺼내 드는 순간에, 식욕이 싹 달아나고야 말았습니다.

애초에 저는 양식은 크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은 저와는 다르게, 파스타는 어떤 맛, 리조또는 어떤 재료, 이런 주관이 있을 정도로 양식을 좋아했고요.

저는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취향을 닮아 갔던 겁니다.

그리고 제가 방금 전까지 먹고 싶었던 크림 소스 파스타도, 그 사람이 가장 좋아하던 맛이었습니다.

면은 지금 냄비에서 불어서 먹지 못하게 됐을 테지요.

소스 병을 보는 순간 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슨 정신이 있어서 가스 불을 끄고 펜을 잡았으니까요.

왜 그 사람은, 이렇게 무엇이 되었든 어떤 형태로든, 예고 없이 다가와 제게 인사를 거는 걸까요.

분명히 몇십 분 전까지는 조금이나마 그 사람에게서 벗어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어째서일까요, 그 사람은.

20xx년 06월 xx일 여덟시 삼십이분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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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기적인 외출을 했었습니다.

고서점에 아무리 손님이 적다지만, 팔려나가는 책은 있기에 빈 서가는 반드시 생깁니다.

그 빈 공간을 채울 책을 사러 헌책방과 고서점이 모여 있는 거리에 가는 것이 정기적인 외출입니다.

날씨가 많이 더워지고, 예고 없이 비가 내리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오늘도 꼭 그런 날이었습니다.

아침까지만 해도 태양은 쨍쨍하다 못해 뜨거운 정도였는데, 어느 헌책방에 들어갈 때부터 먹구름이 끼더니 양손에 책을 들고 나올 때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친절하신 책방 주인아저씨께서 책을 비닐로 꽁꽁 싸 주셔서 책은 문제가 없었지만, 제 자신이 문제였습니다.

비가 올 줄 모르고 우산을 들고 나오지 않았기에, 버스 정류장까지 꼼짝없이 비를 맞은 것이었습니다.

바보같이, 소나기가 그칠 때까지 책방에서 느긋이 기다리면 된다는 생각을 못 했던 겁니다.

온 몸에서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자니, 그 일이 기억났습니다.

딱 이맘때쯤이었지요.

그때도 저는 우산을 챙기지 않고 나가서, 양 손에 책을 한 아름을 들고 그칠 기미가 없는 비 탓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불쑥 나타나 제게 우산을 씌워 주었습니다.

나중에 그 사람이 얘기하기를, 쫓아가서 우산을 전해줄까 했지만 이 편이 더 로맨틱하니까.

그렇습니다.

예상 못한 곳에서 연인이 주는 도움이란, 그 어떠한 것보다 특별하게 느껴지는 법이지요.

그걸 알고 있기에 전 그렇게 행동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비를 맞으며 걷고 있으면 어느 골목에서 그 사람이 불쑥 나타나, 우산을 쥐어 주고, 늦었지, 미안해, 하고 따뜻하게 포응을 해 주고, 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정말이지 헛된 기대를 하고 있었네요.

혼자 집에 도착했을때는, 책을 정리할 힘조차 없을 정도로 녹초가 되어 있었습니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아침에 만들어 놓은 밥을 데워 먹었습니다.

지금은 이상하게 몸이 으슬으슬합니다.

일찍 자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20xx년 08월 xx일, 아홉시 십사 분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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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틀간, 심하게 앓았습니다.

아무래도 비를 맞으면서 돌아다닌 것이 화근이었나 봅니다.

어제는 어떻게든 혼자서 버텨 보려고 했지만, 쌀을 밥솥에 안치는 것만으로도 녹초가 되어 쓰러져서는 잠에 빠졌습니다.

깨었을 때는 상태가 더 심해져 있었고, 어쩔 수 없이 전 프로듀서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었지만, 그래도 부담을 주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삼십 초쯤 지나자, 전 프로듀서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자신은 스케줄 상 갈 수 없으니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누군지 물어보아도 괜찮겠느냐고 했더니, 안심하라고, 보는 것만으로도 안심하게 될 거라고 하더군요.

전화를 끊고 나자, 불안감이 엄습했습니다.

프로듀서는 저와 그 사람의 관계가 끝났다는 것을 아직 모릅니다.

그 사람이 올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는 겁니다.

평소라면 분명히 기대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따위 보여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아파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모습, 마치 당신이 없는 나는 이렇게 나약한 사람이다, 라고 말하는 것 같잖아요.

그렇게 곧 목이 떨어질 새끼양처럼 불안에 떨며 1시간쯤 지났을까요,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나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런 비참한 꼴을 보여 주느니 앓다가 죽는게 낫다고 생각하면서 이불을 푹 덮어썼습니다.

몇 번 초인종이 더 울리더니, 소리가 멎었습니다.

정말로 갔구나, 하고 안심 아닌 안심을 했습니다.

정말로 나는 이렇게 죽는 걸까, 하고 무서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다시 잠에 빠지려는 순간, 세차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후미카 씨, 하고 절 부르는 목소리는 그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정신을 겨우 붙잡고 일어나 현관문을 열자 같은 사무소의 동료였던 타치바나 아리스 씨가 서 있었습니다.

아리스 씨는 제게 와락 안겨서 펑펑 울기부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이 없냐고, 제가 정말 죽기라도 한 줄 알았다고, 왜 이렇게 늦게 나와서 사람 놀라게 하냐고 하더군요.

일단 미안하다고 말하며 아리스 씨를 진정시키고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겨우 울음을 그친 아리스 씨는 절 침대로 데려가 눕히고 물수건부터 갈아 주었습니다.

그리곤 잔소리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죽을 끓이면서도 잔소리, 바닥에 걸레질을 하면서도 잔소리.

평소에 나름 깨끗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리스 씨의 기준에선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인가 봅니다.

약간의 실랑이도 있었습니다.

죽 정도는 혼자 먹을 수 있는데도, 아리스 씨가 먹여 주겠다고 고집을 부린 겁니다.

어쩔 수 없이 환자인 제가 한번 양보했고요.

죽을 호호 불어서 제게 먹여 주는 아리스 씨를 보고 있자니, 굉장히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육 년 전에는 제가 아리스 씨를 간호했던 적이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아리스 씨를 빤히 쳐다보고 있자니, 그 쪽은 얼굴이 빨개지며 뭐, 뭔가요, 갑자기 이렇게 쳐다보고...하면서 부끄러워 하더군요.

그래서 아리스 씨는 예나 지금이나 귀엽다고 해 줬더니, 얼굴이 더욱 빨개지며 이런 말을 하던데, 너무 귀여워서 그대로 적어 봅니다.

'무,무슨 소리신가요, 후미카 씨! 저도 이제 열 여덟 살 고등학생이라고요! 이제 귀여울 나이는 지났어요!'

'그렇네요. 이제 귀엽다기보단 아름다울 나이인 거겠죠? 아리스 씨는 아름다워졌네요.'

'무,무무무, 무슨....후미카 씨가 더 아름다운데...'

아리스 씨를 놀려먹는 것도 오랜만이었습니다.

아직도 현역인 아리스 씨에게서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느 유닛이 제 노래를 커버곡으로 불렀느니, 누구는 은퇴를 번복하고 다시 돌아와서 예전보다 더한 인기를 누린다던지, 하는.

그렇게 대화가 이어지던 도중, 아리스 씨가 물었습니다.

하야미 씨는, 어디 있느냐고.

잠시 잊고 있던 그 사람이 떠오르자, 가슴 한 켠이 아려 왔습니다.

몇달 전에 헤어졌다고 대답하자, 역시나 예의바른 아리스 씨는 바로 사과부터 했습니다.

죄송하다고, 눈치없이 그런 걸 물어 봐서, 정말 죄송하다,고 말이지요.

저는 다 지난 일이니 괜찮다고, 그렇게 자책할 필요 없다고 등을 토닥였습니다.

아리스 씨는 그래도 어딘가 미안해하는 기색을 띠고 있었지만....

아리스 씨는 제가 저녁 식사를 끝내고 양치질까지 하게 한 다음에야 돌아갔습니다.

시간나면 또 오겠다는 말과 함께요.

설거지는 제가 할 수 있는데도 설거지까지 하고 가더군요.

이젠 몸이 많이 괜찮아져서, 이렇게 일기도 쓸 수 있어 다행입니다.

아리스 씨에겐 꼭 답례를 해야겠지요.

오늘 하루를 돌이켜 보면, 한 가지 아리스 씨에게 미안한 점이 있습니다.

이제 괜찮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저는 아직, 괜찮지 않습니다.

20xx년 08월 xx일, 아홉시 삼십이 분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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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에 문자가 한통 왔습니다.

그 사람이 보낸 문자입니다.

'내일 모레 오후 3시, 가도 괜찮을까?'

안될 게 뭔가요.

바로 답장을 보냈습니다.

언제까지 있을 건지, 차는 어떤 게 좋은지, 먹고싶은 거라도 있는지.

'오래 있진 않을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말한다면 저녁은 먹고 갈까? 후훗.'

그 뒤로 네 통 정도 문자를 했습니다.

너무도 기대되서, 책이 읽히질 않는 지경입니다.

20xx년 09월 xx일, 오후 네시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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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내일입니다.

식재료도 다 사 놓았고, 그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찻잎도 사 놓았습니다.

다시 그 사람과 하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기는 그른 것 같습니다.

20xx년 09월 xx일, 밤 열시 사십이 분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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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까요.

제 감정을 제가 통제할 수가 없어 답답할 따름입니다.

생각이 정리되는 대로 쓰겠습니다.

20xx년 09월 xx일, 오후 일곱시 이십칠 분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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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재회는, 즐겁게 시작되었습니다.

서로 지난 몇달간 살아온 이야기를 하고, 그 사람은 대학생활이 어떤지를, 저는 제 서점 단골분들의 이야기를 하고,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시작했습니다.

같이 오랜만에 산책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일곱시 즈음에, 같이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괜찮았습니다.

그 사람이, 허튼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싸운 겁니다.

좋은 친구관계로 남자는 겁니다.

저는 되물었습니다.

다시 함께 있어주는 게 아니었느냐고.

그 사람은 이제 서로 갈 길을 찾을 때가 됐다고, 서로에게 의존하기만 해서는 안된다고 하더군요.

아무리 갈 길이 바빠도, 저와 함께 있어줄 수도 없냐고 했더니 그 사람은 매정하게 안 된다, 고.

거기서 저는 폭발해버린 것 같습니다.

그 뒤론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아침에 일어났을 땐 식탁에 어제 먹던 저녁밥이 차디차게 식어 있었고, 그 사람과 제가 같이 찍은 사진이 있던 액자는 유리가 깨진 채로 널부러져 있었습니다.

창고 방에 있던 그 사람의 물건 상자는 없어져 있었습니다.

가져간 모양입니다.

정말로 저와 그 사람의 관계는, 끝난 걸까요.

더 이상 문자도 할 수 없는 거겠죠.

미안하다고 해야 될 것 같지만, 전화기를 잡기조차 두려웠습니다.

그 사람이 너하곤 이제 진짜로 끝이라고 할 것만 같습니다.

어제 이미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다면 더더욱, 아무런 말도 해선 안 되겠죠.

굉장히 피곤합니다.

그만 자고 싶어요.

20xx년 09월 xx일, 아홉시 오십일 분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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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제게 조금 이른 생일 선물을 주고 갔더군요.

만남 이후로, 환청과 이명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의 목소리만 들렸다면 전 정말 미쳐버렸을 테지만, 다행히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그저 맥락 없이 삐- 하고 울리는 소리, 지하철 소리, 온갖 소리의 사이사이에 그 사람의 목소리가 간간히 섞여서 들리는 정도였습니다.

지금도 귓가에서 누군가 계속 뭐라고 속삭이고 있지만,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제 목소리 같기도 한데, 착각이겠지요.

언제 한번 병원에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20xx년 10월 27일, 시계가 멈췄지만 배터리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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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에서 약을 처방받아 복용한지 일주일째입니다.

약을 먹고 서너 시간 정도는 증상이 좀 나아지지만, 약효가 떨어지는 시간부터는 더욱 심해지고 있어 고민입니다.

본가로 돌아가 요양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의사 선생님이 권했지만, 고서점을 내팽개치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요즘은 책을 읽는 것도, 일기를 쓰기 위해 펜을 잡는 것도 힘이 듭니다.

하지만 자연스레 쓸 거리도 줄어들고 있기에 크게 아쉽지는 않습니다.

20xx년 11월 xx일, 여덟시 이십칠 분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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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환상에 홀려 있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아침 식사를 입에 밀어넣고, 약 한 움큼을 삼키고, 창가에 멍하니 앉아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완연한 가을 풍경에, 예전 같았으면 바로 차를 끓여서 책을 읽고 싶어졌을 테지만 이제는 그럴 기운이 나질 않았습니다.

이제 서점을 열어야지,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그때였습니다.

거리 저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겁니다.

환청이구나, 곧 있으면 약효가 돌겠지 하면서도, 그 쪽을 돌아봤습니다.

웃고 있는 제가 보였습니다.

그 옆에는 그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둘은 행복해 보여서, 비록 환상일지라도, 환청일지라도 조금 더 그들을 지켜보고 싶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두르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둘은 거리 저편으로 이미 사라져 목소리만이 어렴풋이 들려올 뿐이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그 소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걸었을까요?

정신을 차려 보니 제가 서 있는 곳은 어느 산책로였습니다.

이맘때쯤이면 낙엽이 떨어져 길을 수놓는, 매년 한 번씩은 그 사람과 왔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은행나무 아래에 저와 그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서로의 손을 맞잡고, 서로에게 속삭이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저는 상상조차 못할 아름다운 말이었겠지요.

눈물이 흘렀습니다.

저도 저렇게나 뜨겁게 사랑한 적이 있었구나, 정말로 아름다웠구나, 하고.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향했습니다.

낙엽이 발에 밟혀 바스락거릴 때마다, 추억이 눈에 밟혀 발걸음을 떼기가 힘들더군요.

집에 돌아와 무릎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소리 죽여 울었습니다.

20xx년 11월 xx일, 열두 시 이십일 분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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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까요.

제 감정을 제가 통제할 수가 없어 답답할 따름입니다.

생각이 정리되는 대로 쓰겠습니다.

20xx년 09월 xx일, 오후 일곱시 이십칠 분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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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재회는, 즐겁게 시작되었습니다.

서로 지난 몇달간 살아온 이야기를 하고, 그 사람은 대학생활이 어떤지를, 저는 제 서점 단골분들의 이야기를 하고,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시작했습니다.

같이 오랜만에 산책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일곱시 즈음에, 같이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괜찮았습니다.

그 사람이, 허튼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싸운 겁니다.

좋은 친구관계로 남자는 겁니다.

저는 되물었습니다.

다시 함께 있어주는 게 아니었느냐고.

그 사람은 이제 서로 갈 길을 찾을 때가 됐다고, 서로에게 의존하기만 해서는 안된다고 하더군요.

아무리 갈 길이 바빠도, 저와 함께 있어줄 수도 없냐고 했더니 그 사람은 매정하게 안 된다, 고.

거기서 저는 폭발해버린 것 같습니다.

그 뒤론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아침에 일어났을 땐 식탁에 어제 먹던 저녁밥이 차디차게 식어 있었고, 그 사람과 제가 같이 찍은 사진이 있던 액자는 유리가 깨진 채로 널부러져 있었습니다.

창고 방에 있던 그 사람의 물건 상자는 없어져 있었습니다.

가져간 모양입니다.

정말로 저와 그 사람의 관계는, 끝난 걸까요.

더 이상 문자도 할 수 없는 거겠죠.

미안하다고 해야 될 것 같지만, 전화기를 잡기조차 두려웠습니다.

그 사람이 너하곤 이제 진짜로 끝이라고 할 것만 같습니다.

어제 이미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다면 더더욱, 아무런 말도 해선 안 되겠죠.

굉장히 피곤합니다.

그만 자고 싶어요.

20xx년 09월 xx일, 아홉시 오십일 분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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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제게 조금 이른 생일 선물을 주고 갔더군요.

그때의 그 만남 이후로, 환청과 이명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의 목소리만 들렸다면 전 정말 미쳐버렸을 테지만, 다행히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그저 맥락 없이 삐- 하고 울리는 소리, 지하철 소리, 온갖 소리의 사이사이에 그 사람의 목소리가 간간히 섞여서 들리는 정도였습니다.

지금도 귓가에서 누군가 계속 뭐라고 속삭이고 있지만,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제 목소리 같기도 한데, 착각이겠지요.

언제 한번 병원에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20xx년 10월 27일, 시계가 멈췄지만 배터리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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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에서 약을 처방받아 복용한지 일주일째입니다.

약을 먹고 서너 시간 정도는 증상이 좀 나아지지만, 약효가 떨어지는 시간부터는 더욱 심해지고 있어 고민입니다.

본가로 돌아가 요양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의사 선생님이 권했지만, 고서점을 내팽개치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요즘은 책을 읽는 것도, 일기를 쓰기 위해 펜을 잡는 것도 힘이 듭니다.

하지만 자연스레 쓸 거리도 줄어들고 있기에 크게 아쉽지는 않습니다.

20xx년 11월 xx일, 여덟시 이십칠 분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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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환상에 홀려 있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아침 식사를 입에 밀어넣고, 약 한 움큼을 삼키고, 창가에 멍하니 앉아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완연한 가을 풍경에, 예전 같았으면 바로 차를 끓여서 책을 읽고 싶어졌을 테지만 이제는 그럴 기운이 나질 않았습니다.

이제 서점을 열어야지,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그때였습니다.

거리 저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겁니다.

환청이구나, 곧 있으면 약효가 돌겠지 하면서도, 그 쪽을 돌아봤습니다.

웃고 있는 제가 보였습니다.

그 옆에는 그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둘은 행복해 보여서, 비록 환상일지라도, 환청일지라도 조금 더 그들을 지켜보고 싶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두르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둘은 거리 저편으로 이미 사라져 목소리만이 어렴풋이 들려올 뿐이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그 소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걸었을까요?

정신을 차려 보니 제가 서 있는 곳은 어느 산책로였습니다.

이맘때쯤이면 낙엽이 떨어져 길을 수놓는, 매년 한 번씩은 그 사람과 왔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은행나무 아래에 저와 그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서로의 손을 맞잡고, 서로에게 속삭이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저는 상상조차 못할 아름다운 말이었겠지요.

눈물이 흘렀습니다.

저도 저렇게나 뜨겁게 사랑한 적이 있었구나, 정말로 아름다웠구나, 하고.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향했습니다.

낙엽이 발에 밟혀 바스락거릴 때마다, 추억이 눈에 밟혀 발걸음을 떼기가 힘들더군요.

집에 돌아와 무릎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소리 죽여 울었습니다.

20xx년 11월 xx일, 열두 시 이십일 분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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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상이 더 심각해진 듯 합니다.

며칠 전부터 또다른 제가, 절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분명 환상일 테지만, 너무 선명하여 차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힘든 수준입니다.

'또다른 저'는 제게 계속 말을 걸어왔습니다.

이렇게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 갈 필요가 있느냐.

내 눈은 멀지 않았느냐.

심장은 텅 비지 않았느냐.

빛을 찾는 데는 어떠한 의미라도 있느냐.

너는 불타는 강과 같지 않느냐.

이제 그만 방아쇠를 당길 때가 되지 않았느냐.

네가 원하는 대로, 그 사람을 계속 꿈 속에서 볼 수 있게, 영원히 잠들 수 있지 않느냐.

처음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의 말은 마치 독사처럼 긴 혓바닥으로 제 머릿속을 휘젓고, 날카로운 독니로 제 심장을 찌르더군요.

저는 '저'에게 완전히 굴복해버렸습니다.

'저'와의 대화는 그 무엇보다도 제게 필요한 것을 주고 있었으니까요.

어느새 저는 '저'와의 문답에 푹 빠져버렸습니다.

이제 이 일기장도 마지막 페이지입니다.

저는 결국 그 사람에게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 일기장의 페이지가 채워지면 채워질 수록, 그 사람에 대한 기억도, 감정도 강렬해지더군요.

어릴 때 읽은 공상 과학 소설 중에선, 원하는 대로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기계 장치가 있었지요.

그 기계라도 있으면, 그 사람을 머릿속에서 남김없이 지우고, 조금 더 살아갈 기력이라도 얻었으려나요.

방금 전에 남은 약봉투에서 수면제만 골라냈습니다.

약 서른 개쯤 되더군요.

이 정도면, 영원히 꿈꾸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집 정리는 말끔히 해 놓았습니다.

아리스 씨도 만족하리라 자부할 수 있습니다.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할까 생각했지만, 조용히 사라지는 편이 나을 것 같아 그만두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은, 생각해두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안녕히 계세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사랑했습니다?

전화를 잡고 한참 동안 고민했습니다.

고심 끝에, 이렇게 보냈습니다.

'전에는 죄송했습니다. 친구로 남아 주신다면, 정말로 감사하겠습니다.'

이제 답장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오 분만에 답장이 왔습니다.

'괜찮아, 후미카. 다음에 시간 나면 같이 밥이라도 먹자.'

죄송합니다.

같이 밥을 먹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안녕히 계세요.'

'그래, 고마워, 후미카. 먼저 용기 내서 문자해 줘서.'

이제 더 이상 미련은 없습니다.

제 앞에 있는 '저'도, 그런 모양입니다.

능글능글한 미소를 띠고 있습니다.

'저'도 펜을 잡더니, 제게 필담을 시도하는군요.

때만 되면 찾아오는 내가 질려?

아니오.

아니면 나를 보면 겁에 질려?

아니오. 오히려 감사하고 있습니다. 답을 주셨기에.

뭔가 마음에 걸려?

아니오. 미련따위 없습니다.

그저, 받아들이는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었습니다.

소리가 들립니다.

그 사람의 소리인지 뭔지, 구별도 가지 않을 정도로 왜곡된 소리가 들립니다.

머리가 찡 하고 울리는 게, 깨질 듯이 아픕니다.

그러자 마치 블랙홀이 별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저'는 저를 끌어당깁니다.

이제 그만 떠나자.

이런 잔혹한 세상과 너를 잇던 매듭따위 풀어버리는 거야.

이젠 떠나가야 할 시간이 온 거라고.

약을 삼켰습니다.

일말의 후회는 없습니다.

 

 

이제 정신이 슬슬 흐려지는군요.

안녕히 계세요, 모두들.

'안녕히 계세요, 하야미 카나데 씨.'

20xx년 11월 xx일, 이만 침대에 누워 꿈꾸러 가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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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첫글부터 이따위로 어두침침한 글을 써대다니....

 

다음엔 좀 더 밝은 글로 가져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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