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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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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22, 2017 02:54에 작성됨.

나는, 아이돌.

 

정확히는 아이돌이 막 된 아이돌이라고 해야할까나. 뭐야 이건, 다시 생각해보니 이상하잖아. 좀 다르게 표현하자면.....아직 아직 햇병아리 아이돌이라고 해야할까. 그래,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나 예능계를 향해 작지만 힘찬 첫 날개짓을 시작한! 아, 이건 좀 거창한 쪽이려나.

 

하여튼 나, 아마미 하루카는 정말 꿈에 그리던 아이돌이 되었습니다. 대략 반 년 정도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을 진득하게 연습해온 끝에, 드디어! 반짝이는 스테이지에서 화려하게 데뷔! 에헴, 놀랍게도 저 TV에도 나왔다고요, TV!

 

에헤헷, 아직도 잊혀지지 않네. 사람들의 박수와 환성. 새, 생각했던 것만큼 회장이 떠나갈 정도는 아니었고, 또 사람들도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아니, 많은 거지. 한 장소에 몇 십명이 모여 내 노래에 집중해주는 거잖아요. 나,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주목 받은 적은 없었다고. 그래서, 부끄럽고 놀라서 조금 실수한 것도 있었지만.....아아, 정말. 그렇게 연습했는데 발목이 순간 삐끗해서 휘청거릴 게 뭐람. 그나마 넘어지지 않아서 다행이긴 해도. 아, 그러고보니 나 가사도 군데군데 좀 틀린 것 같기도 한데......우아아! 잊자, 잊어야해 이런 건!

 

두 눈을 꼭 감고 머리를 몇 번 세차게 흔든다는, 다소 거친 방식으로 부끄러운 기억 삭제 시도. 기억해두었다 반성하며 한 층 더 높은 곳으로 발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일이긴 하겠지만, 사람이 어떻게 바람직한 일만 할 수 있을까. 가끔은, 그냥 도피라는 걸 알면서도 그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을 때도 있는 거야.

 

그래, 이것이야말로 사람이라는 생물이 짊어지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는 게 아닐까.....이러고. 이렇게 쓸데없는 공상이 떠오를 정도라는 건 역시, 삭제가 성공적으로 완료되었다는 것이로군요. 사실 삭제는 아니고, 망각의 저 편에 억지로 밀어넣어버리는 것에 가깝지만. 네 뭐, 지금 안 보이면 그게 그거인거죠. 또다시 불쑥 튀어나올 일도 언젠가는 있겠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라는 걸로. 미안해, 미래의 나! 언젠가 뛰쳐나올 부끄러움은 네 몫이라는 걸로 해둘게!

 

뭐, 그렇다고는 해도 그땐 정말 대단했지. 여기저기 실수투성이이긴 해도 나, 노래 불렀으니까. 춤도 추고. 평범한 나로서는 생각도 못했던 귀엽고 폭신한 의상도 확실히 갖춘 채, 어렸을 때부터 동경해왔던 무대에 서서. 모두에게 웃어주고, 손도 흔들어보고. 끝나서나서 소감도 말했었지. 막상 하고난 뒤로는 전혀 기억 안나서, 나중에 엄마가 녹화해둔 걸 봐서야 알 수 있었지만.

 

여, 여러분~ 제 노래 들어주셔서 저, 뎡말 감사했어여~~~

 

아하하! 말도 왕창 더듬고, 중간에 혀까지 씹고. 온통 새빨간 얼굴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전혀 아이돌답지 않은 얼굴로, 이제 막 첫 걸음을 밟는 건데 무슨 은퇴 무대식으로 마무리해버렸었지. 윽, 이건 어떻게든 재쳐두기로 하고. 어쨌든 나는, 기뻤어. 너무나도 기뻤어. 기뻐서 문제일 정도로. 그, 그게 프, 프로듀서 씨도 정말 잘했다고 칭찬해줬다니까! 그게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온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기뻤어. 그렇지만 지금은 별로 기쁘지 않네.

 

그도 그럴게, 그 뒤로는 정말 나.....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걸.

 

데뷔만 하면 모든 게 순탄대로, 척척 잘 풀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나봐. 지금도 레슨만 잔뜩에.....아, 레슨 싫은 건 아니야. 몸을 움직이는 거, 즐거운 걸. 그렇게 잘하는 게 아닌 게 좀 아쉽지만. 가끔은 빼먹고 싶을 때가 있긴 해도......그러니까 싫은 건, 아니야. 그렇다고 완전 좋아! 까지는 아니지만.

 

하여튼! 나는 거의 언제나 레슨밖에 안하는 것 같아. 이래서야 후보생 시절하고 뭐가 다른 걸까? 아, 아주 조~금은 다른 게 하나 있긴 하네. 가끔, 아주 가끔 잊을만 하다 싶으면 일이 들어와. 응! 이제 막 고등학교에 들어간 내가, 아빠처럼 일을 하는 거야! 돈은 진작부터 달마다 지원금식으로 조금씩 받고 있긴 하지만.

 

그렇지만 그것들, 별로 하고 싶다고는 말할 수 없어.

 

길거리에서 덥고 답답한 인형옷 차림으로 홍보용 전단지를 나눠준다던가, 어디 수상한 방송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뜨거운 탕에 들어가거나 대야를 얻어맞는 등 아주 별 이상한 벌칙을 받거거나 하는 일 투성이. 아주 아주 운이 좋으면 어디 이벤트 같은 데 가서 의상을 갈아입고 안내 역을 맡기도 하고, 백화점 옥상 같은 곳에서 공연 정도를 하긴 해도, 그런 건 정말 하늘에서 별따기 같아. 내가 하는 것들은 대부분 다 이상하고, 재미없고, 부끄러운 일 투성이야.

 

사장님한테 받고 있는 월급은 용돈이라 생각하면 많지만, 일해서 받는 돈이라고 생각하면 어딘가 좀 적은 것 같은. 그런 정도. 거기에 대해서는 불만은 없어. 돈도 물론 좋지만, 돈만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니니까. 정말 돈만 벌기로 작정했다면 난 진작에 다 때려치우고 바이트 삼매경에 빠졌을 걸. 그정도로 아이돌이라는 건 정말 힘든 일만 잔뜩인 것 같아.

 

아이돌은 어떤 일에도 웃는 얼굴을 보여줘야해. 그래야한다고 생각해. 그치만 싫은 건 싫은 걸. 있지, 웃으려고 해도 이래서야 웃을 수가 없어. 아아, 아이돌이라는 건 좀 더 반짝반짝-할 줄 알았는데. 그런데 막상 되고보니, 힘들기만 하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기분이 종종, 아니.....요즘 꽤 많이 들어. 나는 그런 웃음거리밖에 안되는 일보다는, 좀 더 많이 즐겁고 재미있는 일들이 하고 싶은데. 사람들의 비웃음이 아닌, 정말로 즐거워서 웃는 그런 표정이 보고 싶은데.

 

그런데, 난.....

 

하아.

 

한 때 기쁨을 토했던 입에서는 한숨만이 튀어나왔어. 하다못해 아, 저기 웃기는 애! 이렇게 알아봐주기라도 하면 좋을텐데. 지금 내 주변을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이 거리를 지나다니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 중에서는 날 알아보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어.

 

나는 아이돌인데. 그렇게나 뛰어다녔는데. 벌칙도 실컷 받고, 게닌 저리가라 할 정도로 웃기는 꼴도 왕창 당했는데. 노래도 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는데. 그래도.

 

변장 같은 거, 하지 않았어. 내 트레이드 마크이자 챠밍 포인트인 리본 한 쌍도 그대로야. 정진정명 아마미 하루카, 여기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저기 아마미 하루카다!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은, 없어.

 

나, 데뷔 했다는 게 전부 거짓말이었던 것 같아.

 

아니, 아냐. 틀려.

 

비록 무대가 좀 작았지만, TV라고 해봤자 채널을 몇 십번 돌려야 겨우 나올까 말까하는 케이블 방송이었지만. 그래도, 나, 제대로 데뷔했다고!? 이제 어엿한 아이돌이라고, 나!

 

나는 아이돌인데. 일단은, 아이돌인데. 이게 뭐야. 왜 날 봐주지 않는 거야. 정말, 감히 이 하루카 님을 무시하다니, 그 배짱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 지금 당장 엎드리지 못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만은 굴뚝이네. 그치만 역시 참자. 애도 아니고 그런 유치한 흉내를 냈다간 동네 망신 다 시킬테니까.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런 걸로 유명해지고 싶지는 않아. 아참참, 그러고보니 이럴 때도 아니네. 프로듀서 씨가 좋은 일이 생겼으니 빨리 오라고 했었잖아. 그러니까 이상한 상상은 그만두고, 사무소로 서두르자.

 

.....

 

똑똑. 나는 옆에 있는 간이 의자에 앉아, 아직도 cd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판매대를 손가락으로 두들겼어. 기다리고 있던 프로듀서 씨를 따라 어느 레코드 샵으로 갔더니, 이런 부스가 눈 앞에 있더라고. 이건 또 무슨 일일까.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니 서 있는 나에게, 오늘 첫 발매된 내 앨범을 홍보하는 일이라며 부드럽게 일러주던 프로듀서 씨. 그제야 난 스튜디오까지 가서 노래를 녹음했던 걸 기억했고, 그게 이렇게 돌아왔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어.

 

기뻤어. 아주 기뻤지. 바로 한 달음에 그 쪽으로 달려가서, 내 생애 첫 앨범을 쥐어봤어. 남국의 바다를 배경으로, 수영복 차림의 건강한 여자아이가 뒷모습만을 보이고 있는, 다소 발칙해보이는 자켓이 한눈에 쏙 들어오더라고. 기뻐서, 정말 어쩔 줄을 몰라서, 헤벌쭉한 얼굴을 한 채 그걸 두 손으로 번쩍 프로듀서 씨한테 보여주니까, 온화한 미소가 돌아왔어. 흑, 뭔가 가슴에서 찡- 한게 올라와서, 그만 울 뻔한 걸 겨우 참고는 부스 안으로 들어갔어. 그러니까 프로듀서 씨도 들어와서는, 옆에 서줬어.

 

그러고는 힘내서 같이 이 cd들을 팔아보자고 했지. 이런 것도 아이돌이 해야하는 일인 걸까, 하는 생각이 조금은 들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보다는 훨씬 나은 걸. 그리고, 내 데뷔 곡인데 내가 홍보 못할 게 뭐람. 아니, 내 것인 만큼 더더욱 내 손으로 해야하는 게 아니겠어? 나는 아주 오래간만에 심기일전하고, 최대한 밝은 목소리와 웃는 얼굴을 내보이며 홍보에 나섰지.

 

응, 거기까지는 좋았어.

 

어떻게 된걸까. 나는 맥없이 두들기는 것을 멈추고 양 옆을 둘러보았어. 왼쪽에 있던 프로듀서 씨는 잠깐 쉬자고, 음료 사러 갔다오겠다고 해서 없고, 오른쪽에는 줄어들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cd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어. 정말, 어떻게 된거지? 왜 안 팔리는 거지? 이젠 너무 지쳐서 목소리도 낼 수 없었던 나는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봤어.

 

저기요~ 제가 좀 전부터 계속 cd 좀 봐주세요~ 오늘 처음 나왔어요! 신상품! 죽어라고 외쳤는데 왜 거들떠보지도 않고 구름처럼 흘러가버리는 건가요? 네? 이, 이렇게 예쁘고 깜찍하고 발랄한.....아니 방금 건 아무 것도 아니에요. 저 주제에 자화자찬이 너무 심했어요 예. 하여튼 그래도 아이돌이, 노래를 부른 당사자가 직접! 홍보에 나섰는데 왜 아무도 이 쪽으로 오지 않는 건가요. 만약 사주시기라도 한다면 정말 좋겠지만, 그래도 사주지 않아도 좋으니 조금만, 한 10초라도! 이리로 잠깐 와주기라도 해달라고요, 제발!

 

아주 조금의 계기가 주어지기라도 한다면, 곧장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애원을 억지로 집어삼켰어. 그러고는 최대한 구슬픈 눈망울로 거리를 살폈지만, 역시 원하는 반응이 오질 않았어. 한 80%는 매정하게 지나가버리고, 그 중 20%는 이 쪽에 약 3초 정도 눈길을 주긴 하지만 역시 지나치고 말아. 으흑, 날 파악하는데에는 그정도면 충분하다는 걸까.

 

- dream~ 꿈이라면~ 깨지말아줘~♪

 

아니, 깨어줘. 이딴게 꿈이라면, 제발. 나는 노래 부르고 있는 또 다른 자신에게 태클을 걸다시피 속으로 중얼거렸어. 가게에서 빌린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태양보다도 활기찬 노래와 달리 난 우울해. 우울해서 견딜 수 없어. 이것도 이것대로 스트레스 잔뜩 받는 일이라는 걸 알아버렸어. 이렇게 된 거, 차라리 끝났으면. 어차피 안 팔리는 거 있어봤자 시간만 낭비하는 거잖아. 프로듀서 씨가 오면 한 번 부탁해볼까?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저, 저기....."

"네, 네에!"

 

우핫, 정말 깜짝 놀랐어. 갑자기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서. 에, 잠깐. 목소리? 사람? 나한테 말을 걸어주는.....프로듀서 씨가 아닌 사람!? 어느 순간부터 푹 숙이고 말았던 고개를 급히 들자, 그리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평범한 인상의 남자가 눈에 보였어.

 

"그거, 하나 주세요."

 

그 사람이 손 끝으로 앞에 있던 cd를 가리켰다. 나는 잘못 들었나 하고 그 사람만을 물끄러미 바라봤지만, 가리킨 손이 사라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설마, 설마설마설마! 이게 고대하고 고대하던 첫 손님이라는 건가요!? 나는 곧장 cd를 들어 지갑을 뒤적이는 그 사람을 향해 내미려고 했지만, 바로 그 때 또 좋은 아이디어가 팟! 하고 떠올랐어.

 

그건 뭐냐면, 케이스에 사인을 하는 거야. 첫 손님이잖아. 그정도 서비스는 필요하지 않을까? 마침 여기, 매직 펜도 한 자루 굴러다니고 있으니까.

 

"에.....저, 저기! 혹시 사인 같은 건 필요하지 않으세요? 괜찮다면 해드릴 수도 있는데."

 

내가 말하고도 정말 묘한 기분. 보통은 사람들이 사인을 해달라고 하지, 아이돌이 해주겠다는 경우는 없지. 응. 알아. 조금은, 그래 아주 조금은 비참해진 기분이네. 그래도 저 사람은 고개를 끄덕여줬으니까 그걸로 됐어.

 

아 그런데 잠깐. 사인, 해줘도 되는 걸까. 이럴 줄 알았으면 프로듀서 씨한테 미리 물어보는 거였는데. 으음.....하라는 소리는 없었지만, 하지 말라는 소리도 없었으니 해도 괜찮을 거야. 자 그럼 조속히.....이 기념해야할 장래 유망(예정) 아이돌 아마미 하루카 씨의 첫 앨범에 그에 걸맞는 깔끔한 사인을.....아앗! 진짜 잠깐만! 그러고보니 나, 아직 한 번도 사인 한 적 없잖아!

 

어, 어, 어쩌지?

 

"저기요?"

"아, 아, 네엡! 잠시만요!"

 

움찔. 논스톱으로 가보자, 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빨간 신호인 그런 상황. 아니, 침착해. 고심해둔 사인 하나 정도는 있잖아. 연습도 좀 했었다고. 해줄 일이 없다보니 금방 까먹어버린 게 문제- 으으, 정신 집중! 기억해내라! 어떤 모양이었지? 어떻게 쓰는 거였지? 으, 으으.....그러니까.....아, 그래! 그거야! 해냈어! 드디어 해답의 실마리를 발견했다고! 그럼 조속히 실행을- 일단 한 획 시원하게 긋고 보면 더 기억나거나 하겠.....에, 잠깐 너무 쫙 그엇, 안돼, 미끄러진다 팔이! 저, 저기 아직도 건재하고 있는, 저 웅장한 cd탑을 향해 그대로, 꺄앗~~~!

 

와장창, 쿵콰쾅, 우당탕.

 

"우, 우왓!"

"으에, 하루카!"

"뭐야? 방금 그 소리?"

"우와 저거 완전 아깝네-"

 

아, 하하하. 하하하. 정신을 차리고보니, 상황은 더 이상 걷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되어있었습니다.

 

먼저, cd탑의 약 반절되는 분량이, 그대로 바닥에 추락해 그 처참한 몰골을 전원에게 선보이고 있는 중. 그와 함께 동반되었던 요란한 소리에, 사인을 기다리던 사람이 놀라서 뒷걸음질. 거리를 지나다니던 사람들도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이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다가, 장소를 마련해준 음반점 점원도 사장님도 휘동그레진 눈으로 주목. 그리고, 아마 돌아오는 길로 보였던 프로듀서 씨가 두 손에 든 음료수마저 뚝 떨어트리고는, 허망한 눈으로 나를.....아아, 이건.

 

끝났다. 끝났어요. 완전히.

 

내가 저지른 대실수의 여파를 온 몸으로 실감하고나니 힘이 쭉 빠져버렸어. 조금 잘 나가나 했더니 이러기야, 나? 이게 뭐냐고. 기껏 손님이 와줬는데, 이상한 일도 아닌데 알아서 망쳐버리다니. 일이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나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닐까? 아, 아, 무엇보다도. 내가 저지른 일이니까. 빨리, 수습, 하지 않으면.

 

"어.....저기......그러니까 이건."

"아, 아하하하. 괜찮아요. 아, 그렇지. 여기요."

 

나는 애써 웃는 얼굴을 지으며 사인을 정말 급하게 쓰고는, 부스에서 뛰쳐나와 기다리고 있던 사람에게 반쯤 던지다시피 품에 안겨주었어. 그러고는 바닥에 널브러진 cd 더미로 다가가, 하나를 주워봤어. 아, 이건 좀 멀쩡. 어디 금가거나 부러진 쪽은 없어. 휴, 다행이네. 판매대에 올리고는, 또 하나를 집어들었어. 엑, 잠깐만. 금이 쩍쩍 가있잖아. 이건 팔려고 해도 팔 수가 없어.....에이, 몰라. 일단 손상 없는 것들 위주로 돌려놓는 거야.

 

하나, 또 하나. 여기도 하나 있고, 저 쪽에도. 나는 될 수 있는 한 빨리 멀쩡한 것들을 주워다가 올려놓았어. 오- 생각보다 빨리 정리가 된 것 같은 게, 아니네. 나는 울기 일보 직전인 얼굴로 발 밑에 잔뜩 있는 나머지 cd를 내려다보았어. 저것들은 누가봐도 완전 엉망진창. 아마 줘도 안 가질 그럴 정도가 되고 말았어.

 

"하루카,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네. 괜찮아요....."

 

뒤에서 프로듀서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어. 나는 흘러나올 것 같은 눈물을 꿀꺽 삼키고는 어떻게든 웃음을 지었어. 아이돌은 어떤 일이도 웃는 얼굴을 보여줘야하잖아. 비록 떨리는 목소리를 감출 수는 없어도, 그래야하니까.

 

"나머지는 내가 정리할게. 하루카는 저기 앉아있으렴. 음료수 놨으니까 마시고 싶으면 마셔."

"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어. 그래서, 비척비척 힘없는 발걸음으로 부스로 돌아갈 수밖에. 프로듀서 씨 말대로 작은 페트병이 두 개 있었지만, 마시고 싶은 마음은 싹 달아난지 오래. 나는 처형을 기다리는 죄인의 마음으로 고개를 푹 숙였어. 그도 그럴게, 꽤 많은 양을 깨트리고 만 거잖아. 배상해야겠지, 저거. 으음.....하나당 적어도 2천엔 정도는 되니까, 10개면 2만엔. 20개면 4만엔.....우왓, 어쩌면 내 월급만으로는 모자를지도!? 그, 그, 그러면 부모님한테 말씀 드려야하는 걸까!?

 

대체 얼마나 깨진 거지? 떨리는 마음으로 프로듀서 씨가 있는 쪽을 슬쩍슬쩍 곁눈질해가며 대략적인 숫자를 세봤어. 음, 그러니까 아마.....한 15개는 완전히 박살이 난 모양이고. 또 10개가 금이 잔뜩 가 있는 것 같고. 또 3개는 모서리가 부러진 것 같아. 그럼, 총 28개 정도가.....무려 6, 6만엔 가량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단 말이야!?

 

아아......나 정말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구나.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져서 고개를 돌렸어.

 

"저기요."

"거기 아가씨."

 

그러자, 사람들의 목소리가.....우우,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방금 그건 실수, 실수였다니까! 배상은 다 제가 할게요! 이래보여도 저, 월급 받으니까! 방금 그걸로 다 날리게 생겼지만 그래도 정말 어쩔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제발 무서운 얼굴 하지 말아.....

 

"하나 줘봐요."

 

으에?

 

"헤에- 이제보니까 꽤 귀엽게 생겼잖아."

"자, 난 3개 살테니까 빨리 줘요."

"그렇게 울상 지으면 예쁜 얼굴 다 망가져요. 어디보자, 나도 1개는 사볼까?"

 

이게, 대체, 어떻게 된거지? 갑자기 모여드는 사람에 벙쪄있던 나였지만, 곧 머리를 흔들고는 울적 그 자체였던 마음을 억지로 다잡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게 온 거잖아. 내 노래가 담긴 앨범을 요구하고 있잖아! 그러면, 그에 걸맞게-

 

"아, 네! 여기 있습니다!"

 

웃어야 해. 웃어줘야해. 그러지 않으면, 안 돼! 나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쥐어짜 겨우 겨우, 아이돌에 걸맞는 얼굴을 꾸며내었어.

 

.....

 

"생각보다 꽤 잘 팔린 것 같구나."

".....네."

 

겨우겨우 판촉회를 마친 뒤, 늦은 오후. 부스를 정리하는 도중 프로듀서 씨가 건넨 말에, 나는 겨우 대답을 토해내고는 높이가 많이 낮아진 cd 탑에게로 시선을 두었어. 확실히, 아예 안 팔리는 것보다는 훨씬 낫긴 했어. 그렇다 해도 저 cd 탑의 높이가 낮아진 가장 주요한 원인은 바로 나한테 있다는 것이 사라지거나 할 수는 없으니까.

 

"하루카, 어쩔 수 없어. 이미 떨어트린 건."

"그, 그렇죠."

"그나저나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

"하루카?"

"네, 네에. 그렇죠."

 

일단 대답은 했지만, 온 몸이 벌벌 떨려오는 걸 억누를 수 없었어. 목소리에서 울음이 섞이는 걸,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어.

 

"하루카, 너......"

"괘, 괜찮, 괜찮아요. 괜찮다고요, 저."

 

괜찮긴 뭐가 괜찮아. 괜찮지 않아, 하나도! 내뱉는 말은 그저 거짓말에 불과했어. 아이돌은 웃어야지. 어떤 경우라도 웃는 얼굴로 이겨내야지. 응, 알고 있어. 알고 있지만. 솔직히 이젠 좀, 무리, 야.

 

"그, 그보다 죄송해요. 제가 거의 절반은 깨먹은 거, 맞죠?"

"괜찮다니까."

"아뇨, 실은 아니죠?"

 

나처럼, 더 이상 웃을 수 없게 된 나처럼.

 

"뭐?"

"죄송해요. 부서진 거 전부, 변상할게요. 부족하면 부모님께 말씀드려서라도 채울게요."

"아니, 그러지 않아도....."

 

변상하는 것만으로 모든 게 끝나버렸으면 좋았을텐데.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나 자신이 더욱 잘 알고 있었어.

 

"으흑, 프로듀서 씨, 저, 저어....."

 

아, 결국 원하지 않는 눈물만이 줄줄 새어나오고 말았다. 단순히 많은 cd를 깨버렸다는 게 슬픈 건 아니야. 그런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는 게, 뭔가,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졌고, 참담해져서.

 

이런 작은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야 앞으로 어떻게 다른 것들 마저 할 수 있겠니. 난 결국 이런 일만 전전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아이돌을 그만둘 수밖에 없을 거야.

 

아- 좀 전에 cd 탑이 와장창 무너져버린 것처럼, 뭔가 내 안의 모든 것들도 깡그리 무너지고 말았다고 해야할까나. 혼나는 건 싫지만,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혼내줬으면 좋겠어. 이렇게 된 거 아무 의미도 없는 아이돌, 그만두라고 윽박지르거나 하면 좋을텐데. 그러면, 그러면 나는......

 

"미안해."

"에?"

 

프로듀서 씨는, 정작 내 마음과는 다른 말을 입에 담았어. 그게 무척 속상하면서도, 묘하게 안심이 들기도 하고, 또 왜 프로듀서 씨가 사과하나요? 같은 생각도 들었어. 사과, 해야하는 건 나잖아. 그치? 그런데 왜? 으음, 뭔가 굉장히 알 수 없는, 이상한 느낌.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구나."

"에, 저기, 그게....."

 

어쩌지, 따스한 손이 굽은 등을 몇 번 부드럽게 토닥이니 그만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어. 그저 훌쩍거리기만 하는 사이, 프로듀서 씨는 그런 나를 대신하기라도 하듯이 쭉 말을 이어나갔어.

 

"하루카는 충분히 잘해주었어. 내가 무리해서 집어넣은 일에도 군말없이 따라줬잖아."

"......"

"오늘도 그래. 갑자기 사고가 나서 좀 놀랐지만, 그래도 끝까지 씩씩하게 수습해줬지."

"그건 제가 저지른 거니까, 당연한 거잖아요."

"아니야. 그게 대단한거야. 만약 내가 거기 있었으면 분명 아무 것도 못하고 울기만 했을 걸."

 

거짓말. 프로듀서 씨라면 애초에 그런 실수조차도 안할 거잖아요. 속에서는 바로 따지는 말이 올라왔지만, 그와는 반대로 울컥했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지고 있었다.

 

"그냥, 오늘은 그냥 운이 좀 나빴을 뿐이야. 음, 아니. 생각해보면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닌걸. 덕분에 사람들이 좀 몰려든 것 같으니. 어쩌면 이걸로 확실하게 네 얼굴을 알렸을 지도 몰라. 아이돌에게 있어서 인지도는 생명!"

"그렇다 해도....."

"하루카, 나는 네가 해왔던 것들이 전부 의미없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네?"

 

정곡을 찌르는 말에, 눈물 가득했던 두 눈이 절로 커졌다. 이럴 수가, 나, 단 한 번도 그런 말 한 적 없었는데. 프로듀서 씨는 어떻게 아는 거지? 프로듀서 씨는 그런 나한테 씩 웃어보였다.

 

"쭉 옆에 있었는 걸. 싫어도 알 수밖에. 특히, 너 같이 표정 풍부한 아이라면, 더더욱."

"그, 그랬어요, 저?"

"음? 본인은 자각이 없었나."

"아하하하......"

 

웃는 얼굴로 빈틈없이 감쌌다고 생각했는데, 프로듀서 씨는 남김없이 보고 말았다는 걸까. 내, 어두침침한 것들을. 우와- 이건 이것대로 굉장히 부끄러워서, 죽어버릴 것 같아.

 

"있지, 우리들.....지금은 별 볼일 없지만 나중에는 분명 대단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

"네?"

"오늘 네가 쓰러트리고 만 cd가 판매로 이어지는 것처럼, 언젠가 네가 해왔던, 하고 있는 일들이 어쩌면 또 다른 기회로 이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겠으면 좋겠지만....."

"응. 그럴 수 있어. 그럴 수 있도록 해보이겠어. 맞아, 앞으로는 너무 이상한 일이다 싶으면 확실히 거절하도록 할테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내주지 않을래? 프로듀서 씨는 그렇게 말하며 새빨갛게 물든 내 손을 꼭 붙들었다. 정말, 이상해. 그렇게 부탁할 정도로 저는, 전혀 대단하거나 하지 않는다고요?

 

"프로듀서 씨, 이렇게 평범하고, 실수투성이인 애를 붙잡기보다는 다른 애를 새로 스카웃하는 게 더 빠를 수도 있다고는 생각 안하세요?"

"응? 무슨 소리하는 거야? 난 다른 누구도 아닌, 네 프로듀서야. 거기다, 가장 첫번째 팬인 걸."

".....네?"

 

그 말을 들은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오직 나만의 프로듀서라는 말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 가장 첫번째 팬이라는 단어가 차갑게 굳어있던 내 마음을 크게 뒤흔들어버렸다.

 

"후, 후후, 우후훗. 그런가요, 프로듀서 씨가, 제 가장 첫번째 팬....."

"응."

 

내게 팬이 있다. 단 한 명밖에 없지만. 고작 그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없던 힘이 갑자기 솟아올랐다. 펑펑 눈물을 쏟아내던 나는, 이제서야 겨우 힘없는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저를 알아주는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다는 거네요."

"그렇지. 하지만 앞으로는 달라질거야. 두 명, 세 명, 네 명.....팍팍 늘걸?"

"와아, 그랬다면 정말 좋겠는데요. 이참에 백 만명 정도가 제 팬이거나 하면 어떠려나."

"그거 좋지!"

 

내 프로듀서이자, 가장 첫번째 팬 되는 사람은 되는 대로 내뱉은 허무맹랑한 말 한 마디에도 기운 좋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조금 다른 의미이긴 해도, 다시 또 눈물이 흘러나올 것만 같아져, 나는 손등으로 눈 주위를 훑어내었다.

 

그러고는, 이번에야말로 힘찬 웃음을 지어보였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요. 미래의 팬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 만큼, 좀 더 힘내야겠어요! 아마미 하루카, 파이팅!"

"오우!"

 

프로듀서 씨는 한 손까지 번쩍 들며 응답해주더니, 갑자기 판매대 구석에 있던 깨진 앨범 전부를 품에 한 가득 안았어. 그러고는 음반점으로 들어가려고 하기까지. 뭐지? 서, 설마? 나는 급히 프로듀서 씨를 붙잡았어.

 

"와아앗, 프로듀서 씨! 그거, 제가 변상해야하는 거 아닌가요? 그, 업무 과실 같은 거니까!"

"하하, 우리 하루카는 어려운 말도 잘 아네. 그렇지만 괜찮아. 그럴 필요 없어. 우리 사장님은 그 정도로 깐깐하지는 않잖아. 그치?"

"에, 뭐.....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6만엔이나 되는 걸 그냥 넘어가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무엇보다 이것 전부, 내가 사버릴 거니까."

 

네? 순간 잘못 들었나싶었지만, 프로듀서 씨는 이미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가버린지 오래. 멍하니 있던 내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뒤를 따라 나섰지만 이미 모든 것은 끝나있었어. 두 손 가득 커다란 봉투를 들고 있는 프로듀서 씨가, 나를 웃으면서 반겨주고 있었거든.

 

"그, 그런......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저는....."

"하루카, 오해하지 말아줘. 이건 내가 사고 싶어서 산거야."

 

거짓말, 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는데. 아니었어. 각진 안경 사이로 보이는 프로듀서 씨의 눈빛은 그야말로 진검, 그 자체. 할 말을 잃어버린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기만 하자, 프로듀서 씨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어.

 

"어떻게 안 사갈 수 있겠니. 가장 좋아하는 아이돌이 낸 첫 앨범을."

"그래도 이렇게나 많이 살 필요는 없었잖아요."

"필요했어. 나는 하루카가 정말 좋으니까, 좋아하는 마음만큼 이 앨범들이 필요했어."

 

그 목소리는 부드럽지만은 않았어. 아주 단단한, 굳은 결의가 숨어들어있었지. 이런,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도 없네. 나는 감사를 표하는 의미로 최대한 밝고 씩씩하게 웃어보이고는, 최대한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어.

 

"정말로, 감사합니다."

"아- 실은 더 사고 싶었는데. 근데 그랬다간 정말로 생활이 간당간당해질 것 같아서. 조금은 용서해줄래?"

".....물론요!"

 

나는 이 사람을 위해서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기로 새롭게 다짐했어. 단 한 사람의 팬이라도 존재하는 한 나는, 어엿한 아이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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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하루카 무명시절 이야기, 라는 걸로. 이 뒤로 프로듀서는 한동안 소면과 숙주나물로 연명했다고 합니다(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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