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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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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27, 2015 19:14에 작성됨.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띵 하는 종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천천히 작은 상자는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안에는 두 사람, 프로듀서 씨와 저 밖에 없습니다. 좁은 공간에 낯선 사람, 그것도 남자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문득 생각나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습니다. 옆을 보니 엘리베이터에는 거울이 있었습니다. 프로듀서 씨는 아무렇지도 않게 앞을 바라보며 바위같이 서있을 뿐입니다. 거울에 비치는 프로듀서 씨와 저의 모습 너머에는 또 다른 거울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거울에는 다시 저희들이 비추고 반대쪽의 거울을 비추어 끝없이 반복되는 모습들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어떤 괴담에서는 혼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 계속되는 연쇄를 바라보고 있으면 몇 번째인가의 거울에서 또 다른 자신이 다가와 자신을 해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도 우리를 들여다본다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이 생각나면서 그 너머에서 오는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점이 제법 흥미로운 점입니다. 결국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그만두면 자아라는 괴물에게 먹혀버린다는 이야기일까요. 어디까지나 혼자만의 생각일 뿐입니다. 제법 오래전부터 고민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항상 책 속의 세계에서만 살아가는 제가 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이어진 생각이 비약하고 제 혼자 날아올라 다다른 헛된 망상일 뿐입니다.

 

고개를 작게 가로저어 잡념을 날려버리고서 몰래 거울 너머로 프로듀서 씨를 살펴봤습니다. 프로듀서라고 해도 사실은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기껏해야 오늘이 세 번째로 보는 사람입니다. 이름은 명함에 적혀있어 알 수 있었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신기한 사람입니다. 프로듀서 씨는 마치 이야기 속의 주인공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수필보다는 소설, 예를 들면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 같은 사람입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프로듀서 씨의 말을 듣고 있으면 자신감이나 희망, 믿음 같은 것들이 생겨나는 기분입니다. 굳이 말한다면 카리스마나 화술이라는 이유를 댈 수도 있지만 프로듀서 씨는 정말로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빛나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조연에 불과한 제게도 따라가고 싶은 이끌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까지 프로듀서 씨를 찾아왔습니다. 저 스스로도 굉장히 놀랐습니다. 제가 먼저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고 움직인다는 건 너무나도 낯선 경험이었습니다. 살면서 처음이라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겁니다.

 

다시 띵 하는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로 붐볐던 1층의 로비와는 달리 여기는 조용했습니다.

 

“이쪽입니다.”

 

프로듀서 씨는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앞장을 섰습니다. 내린 곳은… 생각해보니 몇 층인지 봐두지를 않았습니다.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있던 탓입니다. 결국 아무 말 없이 프로듀서 씨의 뒤를 따랐습니다. 흰색 계통의 벽 때문에 밝은 느낌이 나는 복도는 제법 넓은데다가 양 옆쪽으로 나있는 문들을 통해 방 안의 모습까지 볼 수 있어서 시원시원한 느낌이었습니다. 프로듀서 씨의 뒤를 따라가며 살펴보니 춤을 연습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의상을 고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다들 아이돌 일을 하고 있는 분들이겠지요. 모두들 아름답고 빛이 나는 듯해서 또다시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여기입니다. 들어가시죠.”

 

제법 안쪽까지 들어가서 프로듀서 씨는 어떤 방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나무로 되어 있는 갈색 문은 복도의 끝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방과는 달리 안이 보이지 않는 그곳은 어째서인지 두려움을 느끼게 했습니다. 어떤 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높으신 분이라도 있을 법한 느낌이었습니다.

 

"…저어…?"

 

저는 프로듀서 씨의 뒤를 그저 따라왔을 뿐이라 프로듀서 씨가 발걸음을 멈추자 그저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프로듀서 씨는 옆으로 살짝 비켜서서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들어가라는 뜻일까요? 조그맣게 목소리를 내어서 프로듀서 씨의 주의를 끌어보려고 했지만 프로듀서 씨는 듣지 못한 것인지 계속 서 있기만 할 뿐입니다.

 

얼마 동안이나 계속 서있던 걸까요. 프로듀서 씨는 무뚝뚝한 외모와 너무나 어울리게도, 사람을 보이는 외모로 평가하는 건 좋지 않고 제게 그럴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마치 벽의 기둥이라도 된 것처럼 표정의 변화도 없이 그저 서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래서는 언제까지도 끝나지 않습니다. 변하기 위해서, 어떤 빛이라도 찾아내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하고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날 수도 없습니다. 지금 뒤를 돌아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내려간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그런 모습은 너무나도 부자연스러우니까요. 돌아가는 일이 있더라도 그건 조금 나중의 이야기, 라고 생각하면서.

 

문을 살짝 열었습니다.

 

작게 열린 문틈으로 보았을 때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조금은 더 용기가 나서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섰습니다.

 

종이의 냄새가 가득한 방이었습니다. 도서관의 향기와는 달랐습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세련된 서점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날카롭게 느껴지는 새 종이의 냄새는 아마 가득한 서류 때문이겠지요.

 

예상과 다르지 않게 하나뿐인 책상 위에는 서류더미가 가득했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방은 응접실이라고 하기 보다는 사무실이었습니다. 창을 등지고 있는 자리가 하나 있고 그 맞은편에 자리가 하나 더 있을 뿐이었습니다. 책장에는 책이 아니라 서류 더미나 비디오, DVD 디스크 같은 것들이 가득했습니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프로듀서 씨가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여기는…”

 

아까와는 달리 제 작은 목소리에도 프로듀서 씨는 확실히 반응해서 고개를 돌렸습니다.

 

“제 사무실입니다.”

 

놀랐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이끌려와서 사장실 같은 곳에 불려가는 건가하고 생각하고 있었는걸요.

 

“그럼 아까는 왜…?”

 

불분명한 질문에도 프로듀서 씨는 말을 돌리는 일도 없이 대답했습니다.

 

“사기사와 씨의 의지를 보고 싶었습니다. 과연 사기사와 씨에게 스스로 문을 열 용기와 의지가 있는지.”

 

일종의 시험이었던 거군요. 불쾌한 기분은 들지 않았지만 저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지는 것 같았습니다.

 

“앉으시죠.”

 

프로듀서 씨는 자리로 걸어 돌아가 앉으면서 저에게도 앉을 것을 권했습니다. 왠지 모르게 저 혼자 어색해진 기분에 한참을 우물쭈물대다 결국 자리에 앉을 때까지 프로듀서 씨는 아무 말 없이 기다렸습니다.

 

“그럼 이제 사기사와 씨의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이미 예상한 이야기이긴 했습니다. 아이돌이 되려고 하는 이유라던가 각오를 물어볼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프로듀서 씨가 사용한 이야기라는 단어는 제 가슴 속에 깊이 남았습니다. 이유라는 건 어떤 일을 해야만 하는 원인입니다. 각오는 어떤 일을 하기 위한 마음가짐입니다. 그런데 프로듀서 씨는 사기사와 후미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어요. 원래부터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익숙지 않았어요. 하지만 책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저를 기다려줬죠. 책을 읽는 동안에는 마치 환상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어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조용한 여자아이도 영웅이 될 수도 있고 뛰어난 의사가 될 수도 있고 현실에 절망하는 비극적인 주인공도 될 수 있었죠.”

 

평소처럼 작은 목소리였지만 자신의 이야기인 만큼 자연스럽게 이야기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어요. 지식을 쌓는다는 측면에서도 독서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니까요. 비단 소설 같은 문학작품뿐만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이란 책은 전부 읽게 되었죠. 그거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프로듀서 씨는 중간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던가 하는 반응을 보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제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책 한 권을 다 읽는 순간, 이야기 속에서 현실의 저로 돌아오는 순간이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두렵다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닐 지도 몰라요. 공허해진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네요. 학교에서 기계적으로 수업을 듣고 밤늦게까지 독서에 열중하다 책을 다 읽고 정신을 차려보면 주변은 너무나도 차가웠습니다. 한여름에도 왠지 서늘한 공기와 비가 내리고 있었고 왠지 무서워지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습니다. 대학생이 되면서 시간에 조금 더 구애받지 않게 되었고 정신을 차려보면 한밤중이 되어있는 일이 많아졌죠. 그때마다 고민했습니다. 책 속의 주인공은 제가 아닌데, 현실의 사기사와 후미카는 계속 멈추어 있는데, 언제까지나 책 속으로 도피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습니다.”

 

마음 속 어디에선가는 이미 타협을 하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세상은 달라지지 않고 이대로 계속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면서 말이죠.

 

“하지만 그 날, 프로듀서 씨가 제게 말을 걸었던 그 순간 저는 느꼈습니다. 검게 닫혀져있던 방 안에 조그마한 빛이 스며들어 비추는 것 같았습니다. 책 속에서 나와서 너의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습니다. 한 편으론 두려웠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가, 노래도 춤도 전혀 해본 적도 없는 제가 아이돌 같은 게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심했어요. 저의 이야기를 보고 싶다고. 볼품없고 빛이 바랜 이야기라고 해도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프로듀서 씨가 들게 해 주었습니다. 일기일회… 사람이 만나는 인연은 일생에 단 한번 뿐이라는 말처럼 지금을 놓치면 언젠가 반드시 후회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부 쏟아냈습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마음을 털어놓은 건 처음이라서 신기한 기분이었습니다. 부끄러우면서도 뭔가 후련한 기분.

 

“사람 앞에 나서는 일도 잘 못하는 저는… 물론 전부 다 제 잘못이지만… 그래도 바뀌고 싶어요. 이 앞에 있는 새로운 세상을 더 알고 싶어요. 그치지 않는 비도, 새벽이 오지 않는 밤도 없는 것처럼 앞으로 나아간다면… 언젠가는 현실의 저도 책속의 주인공처럼 빛날 수 있는 걸까요?”

 

프로듀서 씨는 어느 순간부터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뜨더니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내 그대를 여름날에 비할 수 있으리까?”

 

프로듀서 씨의 말은 얼핏 들으면 뜬금없었지만 저는 그 시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18번이네요.”

 

프로듀서 씨는 놀란 기색도 없이 긍정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기사와 씨라면 말하지 않아도 뒷부분을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죠.”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그것도 18번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시일 것입니다. 연인의 아름다움을 여름날에 비해 찬미하는 시구는 그 어떤 글귀보다도 명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그의 시에서 줄곧 여름을 아름답고 찬란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겨울을 혹독한 시련과 어두운 분위기로 대조하곤 했고 소네트 18번에서는 그 아름다운 여름날마저 사랑하는 그대에 비하면 무상하고 시들어버리는 여름날과 달리 그대의 아름다움은 영원히 이 시에 남아 살아 숨쉴 것이라는 자신감마저 내비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시구, 글의 힘은 인간이 숨을 쉬고 눈이 있어 볼 수 있는 한 영원하리라는 것이지요.

 

“저는 아이돌이라는 건 시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프로듀서 씨는 약간은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습니다.

 

“하나의 이야기라고 해도 괜찮은 비유지만… 시는 다른 글에 비해 굉장히 짧습니다. 하지만 시인들은 그 짧은 문장 하나하나에 수십, 수백페이지의 글을 쓰는 노력을 담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갈고 닦아 벼려온 한 마디는 수많은 글보다도 더 가슴에 박힙니다.”

 

잠시 숨을 멈추고, 다시 말이 이어졌습니다.

 

“아이돌이라는 존재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모습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뒤에서는 피나는 노력을 하고, 불편한 점도 굉장히 많지만 무대 앞에서는 웃으면서 사람들의 우상을 연기해야 합니다. 어쩌면 자기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자신의 이야기를 보여주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프로듀서 씨의 손이 내려갔습니다. 순간 표정이 진지해졌습니다.

 

“하지만 사기사와 씨라면, 충분히 그 짧은 시구에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프로듀서 씨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습니다. 저도 따라서 웃으려고 했지만 왠지 웃음이 잘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너무 어색하기 때문이겠죠.

 

“멋진 웃음입니다.”

 

거짓된 웃음이 아닌 진정한 미소라면서 프로듀서 씨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라는 사람은 글을 읽는 건 좋아하지만 잘 쓰지는 못합니다. 몇 번이고 실패해서 엉망인 이야기를 자아낼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앞을 바라보고 걷는다면, 계속 전해나간다면, 언젠가는 웃으면서 여러분에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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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기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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