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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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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7-12, 2015 20:48에 작성됨.

765 프로덕션 소속 아이돌, 키사라기 치하야가 세간에 모습을 감춘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그 정도 시간이면 예능계에서는 이미 이름이 잊히고도 남는 시간. 그녀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직 충성심 강한 일부 팬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다른 아이돌에게로 마음을 옮긴지 오래이다.

 

그녀가 이렇게 된 데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범죄.

 

그래, 아주 악질적인 범죄였다.

 

팬이랍시고 나타난 이가 건낸 페트병. 무심결에 그걸 받아 마른 목을 축이려는 그녀. 언듯 보기에는 아무 이상 없어보였던 무색 무취의 내용물. 그러나 그것은 그녀를 다시 나락으로 떨어트리느 데에 아주 충분한 것이었다. 마신 직후 그녀는 쓰러졌다. 작은 입술에서는 기분 나쁜 피거품이 일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범인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과 키사라기 치하야의 목숨을 구사일생으로 건졌다는 것.

 

아니, 후자는 어쩌면 자신에게 더욱 큰 고통을 선사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경을 헤메다 겨우 병실에서 눈을 뜬 키사라기 치하야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주위의 사람들이 뭐라뭐라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녀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저 말, 아니 의미 없는 단순한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단순히 공기가 들어오고 나가는 것도 괴로운 자신의 목을 어루만지며 덜덜 몸을 떨고 있을 뿐.

 

그녀의 눈 앞이 온통 깜깜해졌다.

 

.....

 

그 사건 이후 몇 달이 지나도 그녀의 목소리는 온전히 돌아오지 못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모두."

 

치하야가 예전과는 다른, 잔뜩 갈라지고 쉰 목소리로 동료들에게 거듭 사과한다. 어두컴컴한 눈빛,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 살짝 파랗게 질린 입술. 귀신이라고 착각할 것만 같이 생기 없는 모습이었다.

 

"치하야, 어째서......"

 

"네 잘못이 아니야!"

 

"나쁜 건 그 자식이라고!"

 

의문을 표하고, 사과를 만류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고는 차마 뭐라 말할 수 없었다.

 

"......이런 목으로는 도저히, 노래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저, 더 이상은.....무리라고 생각해요. 다들 미안해요."

 

치하야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고는 힘없이 비틀거리면서 사무소의 문밖을 나섰다. 그 때 그녀를 불러 세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노래는 목소리가 있어야 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모두의 마음 속을 비수처럼 찔렀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그녀는 더 이상 노래할 수 없다.

 

그렇게 가희는 사라졌다.

 

형식 상으로는 잠깐 아이돌 활동을 쉬는 걸로 되어있지만, 그녀가 돌아올 일은 아마 없겠지, 라고 그녀의 가장 열성적인 팬도 가슴 한 구석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이돌에게 노래는 중요한 것이다. 연기나 화보 촬영, 방송 출연, 라디오 방송 등 아이돌이 활약하는 일들은 많지만 결국 노래로 자신의 실력을 알리고, 또 그것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다. 더욱이 키사라기 치하야는 노래를 무기로 삼았던 아이돌이었다. 그런 만큼 더더욱 돌아올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지만, 사실 더욱 큰, 근본적인 문제가 그녀에게 있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은 과연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키사라기 치하야에게 있어서 노래란.....

 

.....

 

치하야쨩! 나야, 하루카.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니? 밥은 잘 챙겨먹고 있어? 어디 아프거나 하지 않지?

 

하루카는 벌써 몇 달째 답장이 날아오지 않는 메일을 쓴다. 그나마 잘못 보냈다거나 없는 주소라는 답장이 오지 않는 걸 위안으로 삼으며 바쁜 아이돌 생활 도중 짬짬히 틈 나는대로 그녀에게 메일을 보내는 것이다.

 

하루카뿐만이 아니다. 765 프로덕션의 모든 사람들은 그녀에게 메일을 보내는 것이 일종의 일정이 되어있다. 그들에게 있어 키사라기 치하야는 여전히 동료이기 때문이다.

 

"하~루~룽!"

 

장난꾸러기 캐릭터로 대활약 중인 아미가 한참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하루카 뒤에 바짝 선다.

 

"뭐해?"

 

"치하야쨩에게 메일."

 

하루카가 그렇게 답하자, 아미는 슬쩍 자기 앞에 있는 휴대폰 화면을 훔쳐본다.

 

"우, 우와앗!?"

 

하루카가 뒤늦게 손바닥으로 화면을 가려보지만 배시시 웃는 아미의 모습으로 볼 때 아무 의미없는 행동이었다.

 

"하루룽은 또 그렇게 엄마같은 메일을 보내네."

 

"아하하.....그거야 역시 걱정이 되니까."

 

하루카는 마른 웃음을 흘리며 습관적으로 뒷통수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 모습을 보며 같이 웃는 아미였지만, 그 웃음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치하야 언니, 언제 답장을 해주는 걸까?"

 

예전에는 언제 돌아오냐고 말했던 아미는 어느덧 이렇게 말하게 되었다. 하루카는 아무 말 없이 쓰다 만 메일을 바라보다가, 늦게나마 입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으면 올거야."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하루카는 그 사이에 '분명' 이라는 말을 집어넣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

 

프로듀서-

 

한참 바쁘게 방송국 복도를 쏘다니던 프로듀서의 머릿 속에,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깜짝 놀라 좌우 앞 뒤를 황급하게 둘러보던 프로듀서는 곧 그 목소리와 관련 없는 사람들만 있다는 것을 알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바쁘게 하루를 보내는 와중에도 불현듯 머리를 스치곤 하는 그 목소리.

 

이제 다시는 들을 수 없는 소리.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프로듀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고개를 홱홱 돌리며 애써 그 감정을 떨쳐냈다. 약해져서는 안되었다. 지금은 감상에 빠질 시간이 아니다. 아마 본인이 있어도 같은 소리를 했으려나 생각하던 프로듀서는 가볍게 두 손으로 양 뺨을 두드리고, 안경을 고쳐썼다.

 

"이러니까 한결 낫군."

 

프로듀서가 힘 없이 중얼거렸다.

 

......

 

"흐으으음~"

 

미키는 일부러 소리까지 내가며 문패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와는 인연 없는 성씨가 적힌 그 곳은 예전에 '키사라기' 가 붙어 있었다.

 

"치하야씨도 차암, 너무한 거야. 아무 말 없이 이사 가버리거나 하고."

 

그렇게 말하고는 대문 앞 복도에 털퍽 주저 앉는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바로 큰 소동이 일어나겠지만, 지금은 그녀 혼자밖에 없을 뿐더러, 선글라스와 모자를 갖춘 이상 절대 들키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그녀에게 있었다.

 

코 끝에 살짝 걸친 선글라스 사이로 선명하게 보이는 대문. 그리 자주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몇 번 찾아가 봤던, 미키가 아주 존경하는 사람이 살던 곳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문을 두드리기라도 하는 순간, 운 나쁘면 아침 늦게까지 자고 있기라도 하던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불편한 만남이 이루어질 지도 모르겠지. 그렇게 생각한 미키는 자기도 모르게 문 쪽으로 뻗었던 손을 거두어 들이고, 일어나 천천히 물러났다.

 

"허니에게 혼나기 전에 빨리 돌아가는 거야."

 

미키는 그렇게 말하며 이 장소를 뜨면서도 계속해서 등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

 

받지 않는 전화도, 기약 없는 메일도 질렸다. 마음만 같아서는 뒷조사라도 해서 있는 곳을 알아낸 다음 억지로 끌어내고 싶다, 라고 생각하던 이오리는 곧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봤자 오히려 역효과만 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같은 유닛인 아즈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치하야쨩을 기다려주는 것, 이라고 생각한단다."

 

그렇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는 본인도 근심 가득한 얼굴이었던 것이다. 이오리의 가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정말 언제까지 기다려줘야 하는 거야. 그녀가 툴툴거리면서 발로 책상다리를 툭 찼다.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 이오리는 계속해서 발로 찼다. 신발에 감싸져있다고 해도 아픔이 아예 전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기에, 발 끝이 저릿저릿하게 될 쯤 그녀는 겨우 동작을 멈추었다.

 

"정말, 짜증나."

 

짜증의 대상이 누구인지 이오리 자신도 잘 알 수 없었다.

 

.....

 

연필을 든 유키호의 손이 글자를 쓰다 말다 반복하다, 드디어 마지막 글자를 쓰고 움직임을 멈춘다. 이걸로 몇 번째인지도 모를 편지가 막 유키호의 손에서 탄생되었다. 그녀가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수 없는 탓에, 보낼 수도 없는 편지. 답장이 오지 않는 메일보다도 더욱 유키호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그렇지만 유키호는 편지 쓰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언젠가 이 곳에 돌아오는 날이 오면, 남김없이 보여주기로 결심한 것이니까.

 

제발 이 편지들이 영원히 수신자를 찾지 못하게 되지 않기를, 이라고 유키호는 마음 속에서 강하게, 아주 강하게 빌고 또 빌었다.

 

.....

 

야요이는 그 누구보다도 일찍 사무소로 향했다. 평소에도 일찍 가는 편이긴 했지만, 오늘은 특별히 더 빨랐다. 코토리에게 받은 복사키로 익숙하게 문을 열던 그녀는 곧 신중하게 주변을 돌아보다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는 낙담했다.

 

"아니, 아직이야....."

 

그렇게 스스로를 타일러가며 사무소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청소하고 있었을 즈음-

 

그녀의 귓가에 끼이익하고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치하야.....씨....?"

 

이제는 없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흠칫 흠칫 고개를 빼꼼 내밀어 보지만, 정작 다른 사람이 멋쩍은 얼굴로 열려진 문 앞에 서 있을 뿐.

 

"야요이쨩, 벌써부터 온 거야?"

 

"에헤헷, 안녕하세요 코토리씨!"

 

야요이는 웃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슬픔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코토리는 그녀의 곁에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었니?"

 

"......네....."

 

야요이에게는 얼버무릴 여력이 없었다.

 

"코토리씨, 저 말이죠.....꿈을 꿨어요."

 

"그러니? 괜찮다면 말해주지 않을래?"

 

방금이라도 울 것 같은 야요이를 다독거리면서 꿈의 내용을 물어보는 코토리. 곁에 느껴지는 온기에 안심하면서 야요이는 어젯밤 꾼 꿈에 대해 늘어놓는다.

 

"제가 아침 일찍 사무소에 왔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치하야씨가 웃는 얼굴로 타카츠키씨, 하고 저를 부르는 거 있죠....."

 

예전하고 너무나도 똑 닮은 목소리였어요, 라고 말하며 야요이는 쓰게 웃었다. 그랬구나, 라고 대답하는 코토리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결코 울지 않았다.

 

....

 

키사라기 치하야, 저는 히비키와 같이 밤 하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두운 하늘에는 달은 물론이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군요. 제 개인적인 염원으로는 당신이 바라보는 밤 하늘만큼은 둥근 보름달이 떠있기를 소망합니다만.....

 

히비키에게 빌린 휴대전화로 메일을 쓰느라 고군분투를 하는 타카네의 볼에 뜨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어때, 잘 돼가고 있어?"

 

휴대전화의 본 주인이 양손에 따듯하게 데워진 커피 캔을 들고는 씨익 웃었다. TV에서 보이는 태양 같은 것과는 다른, 조금은 쓸쓸한 웃음.

 

"방금 전보다는 진척이 되었습니다만, 아직 제가 의도하는 분량까지는 갈 길이 먼 것 같습니다."

 

"잠깐, 대체 얼마나 보내려는 건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별로 말릴 기색은 보이지 앟았다. 타카네는 잠깐 벤치에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히비키가 건내준 캔커피를 받아 조심스럽게 따개를 젖히고는 후룩 마셨다.

 

"감사합니다. 몸이 좀 따듯해지는 기분이군요."

 

"하핫, 고작 그거 가지고 감사받을 건 아니라고 보는데."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하늘로 돌리던 히비키는 갑자기 앗, 하고 소리를 질렀다.

 

"히비키? 무슨 일인지요?"

 

"저기 봐, 저기!"

 

그녀가 손가락 끝으로 가리킨 곳에는 아주 약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달은, 떠 있었다.

 

"기이한 일이로군요....."

 

타카네는 가늘게 눈을 뜨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

 

"리츠코? 이봐, 리츠코!"

 

멍하니 서 있던 리츠코가 그 말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황급히 좌우를 살피니 곁에 마코토와 마미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아, 아아......미안."

 

리츠코는 그렇게 말하며 안경을 다시 고쳐썼다.

 

"릿쨩도 참, 갑자기 넋 놓고 있슴 어째!"

 

마미가 핀잔을 놓았다.

 

"왜 그래?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

 

마코토의 물음에 리츠코는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픈 건 아니지만, 요즘 피곤하긴 하네."

 

"하긴, 요즘 많이 바빠보이긴 하더라. 그래도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는 큰 일 난다고?"

 

"맞아맞아."

 

두 사람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리츠코는 자기 자신도 긴가민가하다는 얼굴로 한숨을 푹 쉬고는 말을 꺼냈다.

 

"확실히 주의가 필요하긴 하네. 심지어 아까 헛 것을 본 것 같기도 하니까."

 

"뭔데뭔데? 빨리 말해봐!"

 

궁금해하며 다음 대답을 재촉하는 마미. 리츠코는 그에 질렸다는 듯 고개를 돌리면서도 그녀의 요구 사항을 맞춰주기 시작했다.

 

"아까 저기 건너편에서 순간 그 애가 보인 것 같았어."

 

리츠코가 말한 '그 애' 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아챈 마코토가 서둘러 그녀가 지목한 곳을 살펴보았다. 마미도 그 뒤를 이었다. 그렇지만 역시.....

 

".....없네."

 

"정말, 릿쨩! 괜히 기대하게 만들구!"

 

"하하......그러니까 헛 걸 봤다고 말했잖아."

 

그렇게 말하는 리츠코의 얼굴에서 슬픈 빛이 흘렀다. 내심 헛 것이 아니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세 사람은 결국 입을 다문 체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있을 리 없는 그녀의 모습을, 약간의 흔적이라도 찾아보기 위해서.

 

.......

 

그렇게, 765 프로덕션의 사람들은 오지 않는 이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에 지쳐가면서도, 차마 그녀를 놓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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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은 꽤 전부터 한 건데 잘 안 써지다가 요즘 와서 파바박 써졌네요. 쓰면서 뭔가 셀프 고문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역시 치하야는 행복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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