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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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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20, 2015 15:48에 작성됨.

『날개쉬기』

 

어느 날의 765 사무소의 잉여로운 이야기.

 

키사라기 치하야는 가만히 앉아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음악을 듣고 있는 것도 아니다. 악보를 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멀리 창가를 바라보고 있을 뿐. 그녀의 고운 손에는 작은 문고본이 들려있다. 페이지가 어지럽게 바람에 흩날려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한다. 그러나 치하야는 신경쓰지않은 체 여전히 바깥을 바라본다. 그녀의 눈에 이제 막 저물어가는 해가 그녀의 눈에 비치고 있다. 지긋이 저녁놀을 바라보던 치하야는, 시선을 사무소 안으로 돌린다. 낡은 소파, 여러 종류의 서류더미, 고물 히터나 기타 잡동사니들이 꽉꽉 들어찬 작은 공간. 가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철제 책상에 놓인 구식 컴퓨터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 잡음과 미묘한 열기가 이 곳을 흐르고 있다. 그러나 치하야는 그것들마저도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들을 편하게 여기고 있었다.

 

치하야는 잠깐 눈을 감았다. 잠이 오는 건 아니다. 눈이 좀 빽빽해진 거 같아서 그랬을 뿐. 그녀는 눈을 감은 체 여러가지를 생각해본다. 간단히는 오늘 저녁은 뭐가 좋을까 같은 생활의 사소한 것들에서부터, 지난 날 불러왔던 곡이나 각종 방송 출연에서의 에피소드 같은 그동안 걸어왔던 궤적, 또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것들까지.

 

깊은 생각은 아니기에 순식간에 떠올랐다가도 곧 바로 꺼져버리고 만다. 한동안 여러 생각을 하던 치하야는 다시 눈을 뜨고, 멍하니 다시 창가를 바라본다. 슬슬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언제쯤 집에 가면 좋을지 잠깐 고민.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문고본을 탁, 덮고 무릎에 올려놓고, 허리를 등받이에 기댄 체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사무소 안에서 들리는 소음에 귀를 잠깐 기울여보기도 하고, 덮어버렸던 문고본을 대충 펄럭여보기도 하며 적당히 시간을 보내고 있는 치하야. 평소의 성실한 그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지극히 여유롭고 나른한 모습.

 

결코 생산적이라고는 볼 수 없는 시간. 그러나 치하야는 평온했다. 이것은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으니까. 멀리 날아가기 위해서는 휴식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기에, 그녀는 가끔 이렇게 과감하게 여유를 부린다. 마음을 편하게 먹으며, 초조해하지 않는다. 레슨으로 혹사시킨 몸도 이 때만큼은 긴장을 풀고 힘을 뺀다.

 

그리고 키사라기 치하야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노래도 잠시 내려놓는다.

 

끼익-

 

"으하아암......어?"

 

문 여는 소리와 함께 765 사무소의 프로듀서가 들어온다. 아무리 일이 끝나도 일단 저녁때까지는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는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있는 치하야를 보고 깜짝 놀란다. 사무소에 늦게까지 남아있는 것은 드문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여유로운 모습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방문객을 보고 잠깐 눈을 크게 뜨던 치하야. 그러나 곧 평소의 표정, 아니 그보다 조금 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프로듀서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프로듀서"

 

"아, 안녕."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문을 닫고 자기 자리로 향하는 프로듀서. 그는 혹시 잘못 본게 아닐까해서 다시 치하야쪽을 바라보지만, 그녀는 여전히 여유만만이다.

 

"오늘 뭐 좋은 일 있어?"

 

"아뇨, 딱히."

 

언제나와 같은 딱딱한 대답이 돌아오는 듯 했지만, 그녀는 이 말을 덧붙인다.

 

"그냥 오늘은 잠깐 쉬었다 갈까 해서요."

 

휴식? 치하야가? 프로듀서는 영문을 몰랐다. 항상 스스로에게 엄격하다못해 가혹한 면이 없지 않아있던 치하야가, 스스로 휴식을 선언한다는 것이, 프로듀서에게는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잠깐 고민하던 프로듀서는 일단 좋은 변화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쪽도 같이 어울려주는 것도 괜찮을 거라 여기고, 치하야가 있는 소파쪽으로 이동해 맞은 편에 앉았다.

 

"프로듀서?"

 

"이야, 이거 좀 놀랐는 걸. 치하야가 쉬겠다는 말을 다하다니."

 

"그거야, 저도 쉴 때는 쉬니까요. 그래서 무슨 일이죠?"

 

"치하야가 쉬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쉬고 싶어져서 말이야. 어울려줄래?"

 

치하야는 잠깐 고민했지만, 같이 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아, 걱정말라고. 일은 다 끝내놓고 노는 거니까."

 

프로듀서는 치하야가 묻지도 않은 것을 말하면서 잠깐 소파에서 일어나, 마실 것을 찾았다. 그리고 그 김에 치하야에게도 원하는 것을 물었다. 그녀는 커피라고 답했다. 프로듀서는 나도 마침 커피 마시려고 했는데라고 하면서 웃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커피 2잔을 순식간에 탄 프로듀서는 다른 한 잔을 치하야에게 내밀었다. 치하야는 후후 불어 한 모금 마셨다. 괜찮은 맛이었다.

 

"앗.....커피 잘 끓이시네요."

 

"하하, 그거야 한두번 타먹은 게 아니니까. 그리고 사실은 말이다, 나보다 코토리씨가 더 잘 끓여."

 

"그런가요?"

 

그러면 다음에는 오토나시씨한테 끓여달라고 해볼까요, 라고 치하야가 운을 떼며 이야기를 시작했고, 프로듀서는 그녀의 이야기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기도 하고, 가만히 들어보기도 하고, 또 자신 쪽에서 화제를 꺼내기도 하면서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그리고 그 속에서, 프로듀서는 그동안 봐왔던 모습과는 또 다른 치하야를 발견하게 되었다.

 

쿡쿡 장난스럽게 웃기도 하고, 신기한 듯 눈을 반짝이기도 하고, 때로는 부루퉁한 표정을 짓기까지 한다. 이렇게 표정이 풍부할 줄은 몰랐다. 언제나 진지하고 필사적인, 노래에 모든 것을 걸어버린 평소의 모습과는 달랐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길래 갑자기 이렇게 되었는지 프로듀서는 잘 모르겠지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졌다. 그리고 평소에도 이런 모습을 보이면 좋을텐데, 라고 생각했다.

 

"프로듀서? 제 말 듣고 있나요?"

 

잠깐 생각에 빠져 멍하니 있던 프로듀서를 부르는 치하야의 목소리. 그는 퍼뜩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나이에 비해 침착하고 어른스럽게 보였던 치하야가, 오늘 따라 어리게 보였다.

 

"으, 응?"

 

"저기요, 그러니까 듣고 있는 거 맞으신가요?"

 

말투는 공손하지만, 뭔가 어린아이가 보채는 듯한 치하야의 태도에 프로듀서는 자신도 모르게 그만 흐뭇한 미소를 지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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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쉬기 - 포켓몬의 기술. 사용하면 체력의 2분에 1을 회복하며, 사용하는 동안 비행 타입이 사라지며, 순수 비행 타입일 경우 노말 타입으로 변한다.

 

뻘하게 생각나서 써봤습니다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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