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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절의 치트키 <완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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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4-03, 2016 02:58에 작성됨.

 

4월 1일.

사소한 거짓말은 묵인되는 특별한 날.

 

 

사무실 밖 복도에서.

“프로듀서.”

“어, 좋은 아침, 시부야.”

“나 할 말이 있는데.”

“스케줄? 아니면 고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뭔데?”

“나, 이제 다른 프로듀서로 바꿔주면 안 될까?”

“……내 프로듀스에 뭔가 불만이라도 있어?”

“아니, 그냥 당신이 싫어서.”

대답에 앞서서 나는 과장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눈꺼풀을 살짝 떨어주는 것은 덤으로.

“그럼 다행이군. 안 그래도 그렇게 될 테니.”

“어?”

슬쩍,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둔 새하얀 봉투를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슬쩍 꺼내도 잘 보이도록 봉투의 윗부분에 치우치게 사직서라는 글자를 적어둔 것으로, 물론 ‘사직’까지만 위쪽으로 치우치게 적어두었고, 다 꺼내면 ‘사직……할까?’라는 글자가 노출되도록 되어 있었다.

“뭐, 이게 뭔지는 곧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럼, 인연이 닿기를.”

손을 흔들면서 그녀의 곁을 지나가려는 찰나, 미약하게 옷깃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발걸음을 멈췄다.

“자, 잠깐만.”

“왜? 또 할 말 있어?”

“그, 그거, 거, 짓말……이지?”

“뭐? 이거?”

일부러 과장된 모습으로 가슴팍을 툭툭 친다. 고개를 든 린은 촉촉해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거짓말이다.”

“말도 안돼, 그럴 리……뭐?”

“거짓말이라고. 자, 봐.”

품 속에서 봉투를 완전히 꺼내어 팔랑팔랑 흔들어 보이고, 벙쪄있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읏……!”

“만우절이잖냐.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고 생각……아얏!”

“이 바보! 몰라!!”

“야, 그렇다고 발을 밟아?”

“시끄러워, 멍청이! 쓰레기!! 길 가다가 넘어져라!!!”

“아이고 발가락아…….”

 

 

 

 

호조 카렌의 경우

 

“P씨, 여기 있었구나!”

“호조? 무슨 일이야?”

“나 아이돌 그만둘래.”

“그건 혼다 네타인데.”

“아니,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겠니?”

“그냥, 오프도 안 주고 일만 시키잖아. 힘들고 귀찮아서 더 못 해먹겠어. 프로듀서도 요새 좀 쌀쌀맞고.”

P씨에서 프로듀서로, 인가.

“그럼 오프 많이 넣어주면 계속 할거야?”

“아니, 그래도 싫어. 요새 지쳤어.”

“흠, 그럼 나 말고 다른 프로듀서는 어때?”

“어, 그거 괜찮을지도. 프로듀서, 센스 있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너희랑 꽤 오랜 시간을 보냈으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대충 알지.”

“헤에, 그래서, 언제 바꿔줄 거야?”

“음, 나한테 각오가 생기면?”

나는 고뇌하는 듯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이며 신음을 흘렸다.

“좋아, 각오도 했고, 잠깐 사장실에 갔다올게. 이것도 드려야 하고.”

팔짱을 풀고,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품속의 봉투를 살짝 보여주었다.

“엣…….”

“볼일 끝났지? 그럼 나 먼저 간다. 안녕.”

“어? 자, 잠깐만!”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면서 그녀의 양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쳐주고, 눈두덩이를 문지르면서 코를 훌쩍였다. 약간 빠른 걸음걸이로 꺾인 복도를 지나간 뒤 복도의 모퉁이에 바짝 붙어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멍하게 있던 카렌이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울고 있을 때가 아니야. P씨를 따라가야……!”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녀가 모퉁이를 막 돌았을 때.

“야, 호조.”

“꺄아!@?!@#!”

“너무 놀란 거 아냐?”

“P, PPpP씨?!”

“그래 P씨다.”

“사장실 간 거……아니야?”

나는 어깨를 과장되게 움츠리며 턱짓으로 발을 가리켰다.

“응, 이제 가려고. 신발끈이 풀려서 말이야.”

“으, 응.”

눈물로 엉망이 된 그녀에게 재킷에서 손수건을 꺼내 엉망이 된 얼굴을 닦아 주었다.

“원하던 대로 됐는데 표정이 왜 그래. 웃어야지. 자 웃어요 우서. 코도 풀고. 그렇지.”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잠시 동안 가만히 있던 카렌은 손수건을 치우고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적 저기, P씨.”

”어 이제 좀 괜찮아졌어?”

“저기, 아까 그거 말인데.”

“뭐? 나 싫다고 한 거?”

“응, 그거, 거짓말이야. 오늘……”

“알아. 만우절이잖아.”

“응, 그러니까 그만두지 마. 난 P씨 없으면…….”

“그래, 만우절이잖아.”

“아냐, 이건 거짓말 아냐, 진짜야. 내 진심.”

“알아. 만우절이잖아.”

“아니, 그러니까 진짜로 알고서 하는……!”

고개를 든 카렌에게 잘 보이도록 나는 방글거리는 웃는 얼굴로 하얀 봉투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래, 만우절이잖……윽!”

“P씨 진짜 바보! 계단 올라가다 확 넘어져라! 우아아앙!!”

“야……! 그렇다고 명치에다 박치기를 하냐……우읍!”

 

 

 

히메카와 유키의 경우

 

 

“히메카와, 또 야구 봐?”

“재미있잖아? 야구.”

“엇차, 쉬는 김에 같이 좀 보자.”

“대신 캣츠 응원해야된다?”

“……사실 난 프로듀서 하기 전엔 야구선수였다.”

“엥? 프로듀서가?”

“어. 보직은 투수.”

“대단한데! 그래서, 무슨 팀에 있었어?”

“내셔널리그 동부지구에 있는 약한 팀.”

“내셔널……리그?”

“미국의 메이저리그 중 하나야. 내셔널이랑 아메리칸.”

“그러니까, 프로듀서가 메이저리거였다 이거지?”

“그렇지. 내가 전성기 때 캣츠에 갔으면 1선발은 따놓은 당상이었을걸.”

“헤-에.”

“메이저에선 미들K라고 불리면서 이것저것 했었지.”

“미들? 그럼 라지랑 스몰K도 있었어?”

“있었지. 라지K는 아메리칸리그에, 스몰K는 내셔널리그 중부지구에.”

“헤에. 그럼, 그 팀에 있을 때 잘했어?”

“날아다녔지. 승을 못 따서 문제긴 했지만. 그래서 상도 못 탔고.”

“상? 사와무라상 같은건가?”

“맞아. 워런 스판 상이라고, 잘 하는 좌완투수들한테 주는 상이 있었어. 사이 영 상도 그렇고.”

“그렇게 잘 했는데도 못 탔어?”

“응. 팀이 잘 못 하니까. 1점만 내줘도 내가 지거든. 그래도 스몰K랑 싸우면 내가 이겼어.”

“헤에, 엄청난 사람이었네.”

“그리고 반지도 있어. 한 개.”

“반지?”

“월드시리즈 우승반지. 그거 하나 따고 나서 완전히 뻗었지만.”

“월드시리즈?”

“음, 일본야구로 치면 일본시리즈.”

“멋지네. 다음에 한 번 보여줄래?”

“그래, 언제 한 번 보여줄게. ……슬슬 일하러 가야겠다. 이 정도만 해야지.”

“프로듀서, 오늘은 만우절이지?”

“그래, 만우절이야.”

“하핫, 재미있는 거짓말이었어.”

“재미있었다니 다행이네. 오프라고 너무 야구만 보지 말고,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들어가서 쉬어.”

“네~.”

 

 

“유키 씨, P씨 라디오 못 들었지?”

“아마도. 그 때는 사치코랑 로케 촬영이었을걸.”

“근데 린은 P씨가 말한 거 무슨 말인지 알아?”

“카렌 언니야가 모르는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이럴때만 언니지?”

 

 

타카가키 카에데의 경우

 

 

“타카가키 씨. 이건 만약의 이야기인데요.”

“네?”

“만약에, 우리 사무소의 재정상황이 최악이고.”

“네.”

“누군가 가치가 있는 한 명을 팔아서 상황을 모면해야만 하고.”

“…네.”

“그 한 명을 지목할 권리가 상대방한테 있다고 한다면.”

“……네.”

“당신은 어떻게 할 건가요?”

“글쎄요……제게 어떠냐고 물어보셔도, 그런 건 높으신 분들께서 정하는 거니까. 저나 프로듀서같은 일선 담당은 그냥 파도에 휩쓸리듯이 가만히 있으면 되지 않을까요?”

“하핫, 그렇지요. 그럼, 조금 더 이야기를 이어서. 만약의 이야깁니다만, 제가 그 파도에 휩쓸린다면.”

“……네?”

“당신은 어떻게 할 건가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네요.”

“저도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니 당신에게 여쭙는 겁니다.”

“힘을 내야겠죠. 조금 더 일을 하고, 조금 더 팔릴 수 있게.”

“그렇군요. 그럼 저도 좀 더 힘을 내서 일을 가져와야겠네요.”

“……하지만, 만약. 만의 하나.”

“남들이 봅니다, 옷깃은 좀 놔 주세요.”

“지금처럼 이렇게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이 없어진다면.”

“그러니까 이거 놓…….”

“저는 새장 안에 갇혀, 사람의 손길을 두려워하는 카나리아로 다시 돌아갈 거예요. 아직 저는 당신의 손길밖에 허락하지 않았답니다?”

“가깝습니다, 얼굴이 가까워요…….”

“그러니까, 다음 만우절에는 조금 가벼운 거짓말을 가져와주세요. 거짓말이 무거우면 만우절이 망해버리니까......후훗.”

“쩝, 알고 계셨습니까?”

“아뇨? 그냥 찔러 본 건데, 맞아 들었나 보네요.”

‘그런 것 치곤 꽤나 안심한 듯 보이지만, 그냥 나만 알고 있어야지.’

 

 

 

 

카미야 나오의 경우

 

 

하늘에 노을이 내려앉고, 길거리의 사람들도 서서히 하루를 마감하려 하고 있던 시각. 카미야 나오는 시원한 음료가 든 컵을 들고 광장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오프도 이렇게 끝인가……시원섭섭하네.”

한때는 사무소에 놀러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래도 괜찮냐는 메일을 보내기가 무섭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여가를 소중히 보내라는 설교가 돌아왔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니 오프인 사람이 어슬렁거려봤자 열심히 일하는 동료들에게 득이 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에 그녀는 얌전히 메일이 시킨 대로 하루를 충실히 날려먹고 있었다.

그 때, 파우치 안에서 차임벨 소리가 울렸다. 약간의 기대감을 품고 컵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파우치 속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어 액정을 확인한다.

[수신된 메일 1건]

‘P씨일까……혹시 저녁에 만나자는?’

“에이 설마 그러겠어? 그 워커홀릭이…….”

말도 안 되는 망상이라며 피식 웃으며 메일함을 열자 다른 의미로 훌륭하게 예상에 적중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저녁 8시쯤 시간 돼? 잠깐 만났으면 하는데. P가.]

프로듀서가. 가 아니라 P가. 라고 적혀 있다는 것은, 업무상 일이 아니라 개인적인 일로써 만나자고 하는 뜻이었다.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하는 핑크빛 상상을 억누르면서 나오는 머릿속으로 뭐라고 답장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너무 늦으면 또 이상한 약속 잡아버릴 텐데, 뭐라고 보내야…….’

3분 정도 고민한 끝에 보낸 답장은 [응]이라는 짤막한 단어 뿐.

[다행이네. 그럼 카미야네 집 근처에 그 카페에서 만나자. 변장 잊지 말고. P가.]

“흐히, 흣……..아, 안 돼. 혼자 푼수처럼 웃을 수는 없어……!”

제멋대로 경련을 일으키는 안면근육을 이리저리 마사지해 평소의 쿨한 카미야 나오로 붙잡아두었다. 더 이상 이런 곳에서 시간을 버릴 수는 없는 노릇. 어서 집으로 가서 ‘준비’를 해야만 한다.

“힉, 히힛……!”

이건 틀렸다. 이젠 웃을 수 밖에 없어.

 

 

 

이것저것 ‘준비’를 하다보니 결국 약속시간을 약간 넘기게 되었다. 상대방은 둔감한 듯 보이지만 특급 눈썰미를 자랑하는 괴인. 과도하게 기합을 넣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닌 절묘한 밸런스를 찾는 데 시간이 꽤나 걸린 것이다.

“여기야.”

카페 안에 들어서자,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짙은 회색 수트를 차려입은 프로듀서가 먼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변장을 의식하지 않도록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가가 인사를 한다.

“P씨, 미안해. 오래 기다렸지?”

“아니, 나도 막 온 참이거든. 차가 좀 막혀서.”

나오는 자리에 앉으며 슬쩍 테이블에 놓인 물컵을 바라보았다. 컵 안에 담긴 얼음은 거의 녹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컵이 이리저리 움직였다는 증거인 물방울 자국이 있었다.

‘많이 기다렸구나. 미안하게…….’

“맨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러니까 뭐라도 먹자. 저녁밥 먹었어?”

“응.

“해피밀? 이번엔 미니*즈였나?”

“아니거든! 제대로 집에서 먹었어!”

“그래, 잘했다. 오프일때 더 잘 챙겨 먹어야지.”

평소라면 머리라도 한번 쓰다듬어줄 타이밍이었지만, 오늘의 그는 어째서인지 싱긋 웃기만 할 뿐이었다. 아, 변장 때문에 그런 걸까.

“너부터 골라 봐, 이 오빠야가 사 주는 거니까 팍팍 시켜도 된다.”

“오호, 잘도 말씀해 주셨어. 그럼 사양않고 팍팍 가주지! 여기 주문이요!”

“카미야, 잠깐만……!”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하나씩 다 주세요!”

“아이고…….”

 

잠시 후, 테이블 가득 놓여진 휘황찬란한 디저트를 바라보던 프로듀서는 마지막으로 점원이 건넨 블랙 커피와 영수증을 받아들고는 휘둥그래진 눈으로 중얼거렸다.

“우와, 0이 다섯 개……!”

“인기절정의 아이돌 앞에서 허세를 부리다니, 벌 받은 거야!”

“큭, 이렇게 된 이상, 아깝지 않게 내가 다 먹어주겠어. 우선은 네놈부터다!”

“아~앗! 그거 내가 제일 먼저 먹으려고 한 건데! 빨리 그 손 치워!”

한동안 디저트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을 무렵 프로듀서의 눈빛이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평소와는 사뭇 다른 진지한 얼굴과 예리한 눈빛. 사무소의 아이돌 사이에서는 ‘영업 스위치’라고 부르는 것이 들어간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자신의 ‘소녀’부분이 두근거리기 일쑤지만, 오늘만큼은 그 두근거림보다도 입 속의 씁쓸함이 더욱 컸다. 그렇게 달콤한 디저트를 먹었음에도.

‘뭐,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혹시나는 역시나였구나…….’

“……카미야 나오 씨.”

“응.”

평소와는 다른 풀 네임. 그리고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오는 무언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지금 그가 말하려고 하는 내용을 결코 들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당신에게 프로듀서로써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말해봐.”

아냐, 거짓말이야. 듣고 싶지 않아. 말 하지 마.

“우선은, 이것을.”

프로듀서는 옆에 세워 둔 가방에서 커다란 하얀 봉투를 꺼내어 나오에게 건넸다. 언제였던가, 나오는 이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녀가 처음 스카우트를 받던 날. 그 때는 하얀 봉투가 아니라 하얀 명함이었지만.

“이게, 뭐야?”

안 돼, 듣고 싶지 않아. 가르쳐 주지 마. 그냥 버리라고 해 줘. 제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조금 떨리려는 것을 억눌렀다.

“계…종료…한 …적…류 입니다. 한번 확인해보세요.”

“뭐?”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이적, 서류?

마음 속으로 필사적으로 외치면서, 나오는 천천히 봉투를 열고 내용물을 꺼내기 시작했다. 천천히, 끝자락부터 나오기 시작한 종이의 윗부분에는 ‘이적 신고서’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떨리는 손길에 천천히 끌려나온 종이의 나머지 활자가 그녀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 너무 불안해 하지 마세요. 그건 당신의 것이 아니라.”

그 손길이 떨리는 것이 불안했는지, 그는 달래듯이 그녀에게 말한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영업 스위치’가 들어간 담담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한 글자씩 또박또박.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이 그녀가 아니라 자신이라서 다행이라는 듯, 미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

”제 것이니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었다.

 

그 뒤는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프로듀서의 차 안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그가 배웅하면서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했더라? 남은 디저트는 포장해서 어디에 갖다 놨더라?

그저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는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한껏 기합을 넣은 옷차림도 갈아입지 않고, 나름 대로 머리를 쥐어짜낸 필살의 메이크업도 지우지 않은 상태였다. 파우치 안에서 메일 수신을 알리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개인 단위로 지정해놓은 독특한 음색. 린과 카렌에게서 온 메일일 것이다.

무슨 내용일까. 확인을 위해 파우치를 향해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그 녀석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니면, 프로듀서처럼 그 녀석들도 어디론가 가 버리는 건 아닐까?

“싫어…….”

오열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그녀 자신도 놀라울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큰일이네, 내일 오후에 녹음인데.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는 조금 더 어두운 곳으로, 조금 더 깊은 곳으로 웅크렸다.

 

 

 

다음 날, 잔뜩 웅크린 채로 나오는 눈을 떴다.

그녀는 아침에 약한 편이었다. 아니, 사실은 트라이어드 프리무스의 3명 모두 아침에 약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모든 것이 선명했다. 마치 날을 잘 세운 면도날처럼, 현실의 칼날이 너무나도 예리하게 서 있었다.

잠들기 직전의 기억과 다른 점이라면 옷이 잠옷으로 바뀌어 있었다는 점과 화장도 지워져 있었다는 점이다. 몸을 일으켜 방 안을 둘러보자 ‘나오에게’라고 적힌 쪽지가 보였다.

엄마한테 또 신세를 졌구나. 하고 생각했다.

“……출근, 해야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욕실로 향했다. 파자마를 대충 벗어놓고, 탈의실의 거울 앞에 서자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몰골을 하고 있는 자신이 보였다.

“우와, 얼굴 최악.”

오늘이 녹음이라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샤워기를 틀어 따뜻한 물을 전신에 뿌리기 시작했다.

 

 

“안녕, 하세요……”

“나오, 안녀……엉?!”

“안……?!”

사무실에 도착하자, 먼저 있던 린과 카렌이 그녀를 반겼다.

“나오! 너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누구랑 싸웠어? 지금 상태가 말이 아닌데.”

“어? 아, 응. 괜찮아, 지금은. 아무 문제 없어.”

“아무 문제 없어가 아니잖아! 말해봐, 무슨 일이야?”

자신을 향하는 두 사람의 온기에 나오는 두 다리를 지탱하던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린과 카렌은 사무소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그녀를 부축해 응접실의 접대용 소파에 뉘였다.

“잠시만 쉬고 있어. 곧 프로듀서가 올 거니까.”

프로듀서? 어떤 프로듀서?

P씨 이외에 다른 프로듀서가 있어?

아냐, 난 인정 못 해. 그딴 거, 절대로.

넘쳐흐르는 감정은 눈물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소파의 등받이에 얼굴을 파묻은 채 그녀는 다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응접실을 나가려던 찰나, 그 모습을 본 카렌이 린을 향해 고개를 저으며 작게 속삭였다.

‘생각보다 상태가 심한데.’

‘어쩌지, 저 정도의 리바운드면 프로듀서 진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장난을 계획했으니까 그 정도는 당해도 싸지 않을까?’

‘그렇겠지?’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린은 휴대전화로 ‘응접실’이라는 짧은 메일을 발신했고, 카렌은 소파로 돌아가 훌쩍거리는 나오의 등을 톡톡 두드려주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뚜벅, 뚜벅. 하고 단화의 밑창이 화강암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발소리가 응접실에서 멈추었다, 고 생각한 순간.

벌컥, 하고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여, 카미야, 호조, 시부야! 좋은 아침!”

그 목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문 가에 서 있던 린도, 나오를 보듬어주던 카렌도 아니었다. 소파 등받이에 얼굴을 파묻고 울고 있던 나오가 마치 튕겨 나오듯 벌떡 몸을 일으킨 것이다.

“프로, 듀서?”

그녀와 눈을 마주친 프로듀서의 얼굴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어!? 카미야 너 얼굴이 왜 그래? 어제 누구랑 싸웠어?”

“P씨, 맞지? 응?”

“그래 나 맞아. P야.”

“진짜지? 꿈 아니지? 그치?”

“그래 꿈 아니니까, 꿈 아니니까 목덜미 꼬집지 마아야야야야야!”

“P씨……P씨……!”

“아야, 아프다고 진짜! 머리끄댕이는 또 왜 잡아땡기냐! 야! 카미야!!”

잠시 동안 프로듀서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나오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고마워요, 정말로. 돌아와 줘서……고마워요. 흑, 으아아앙!”

“…….”

 

 

잠시 후 출근한 치히로가 어느 정도 진정한 나오를 화장실로 데리고 갔다.

사무실에 남은 사람은 린과 카렌, 그리고 프로듀서 뿐.

“프로듀서, 실망이야.”

“P씨, 설마 어제 설명 안 해줬어?”

“아니, 분명히 집에 태워주면서 해 줬는데. 자정 넘어서 봉투 열어보라고. 그런 너희들은 제대로 메일 보낸 거 맞아?”

“응, 확실히 보냈어. 여기 발신 기록 봐.”

“어……진짜네. 그럼 뭐지? 종이가 잘못 나갔나?”

프로듀서는 나오의 가방에서 살짝 빠져나온 흰 봉투에서 내용물을 끄집어 냈다. 그 종이에는 나오가 처음 보았을 때와 달리 진지한 붓글씨로 ‘만우절’이라고 큼직하게 적혀 있었다.

그 종이는 승화성 특수 스티커를 사용해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 스티커와 함께 그 위에 적힌 글자가 통째로 증발하고, 그 아래에 적힌 진짜 글자가 나타나는 방식의 물건이었다.

“아닌데, 종이도 제대로 나갔는데? 흠…….”

“아, P씨, 이건 내 생각인데.”

“무슨 생각?”

“혹시 어제 저 봉투 받고 나서 나오의 상태가 좀 이상하지 않았어?”

“음, 그러고 보니 좀 나른해 보였던 것 같기도 했는데. 대답도 좀 건성으로 하고.”

그의 대답에, 카렌은 히죽 얄미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럼 ‘그거’구만. 그렇지, 린?”

“나오의 ‘그것’도 마유 못지 않게 무거웠다는 거네.”

“뭐? 너희들 무슨 얘기 하는거야?”

“별 거 아냐. 그냥 우리도 더 이상 온건파로는 남아 있을 수 없겠다는 것 정도?”

“친구의 ‘그것’이 이렇게 무겁다는 걸 알았으니, 별 수 없지.”

“뭐래, 내가 사표 낸다니까 울고불고 난리쳤던 녀석들이.”

“”아, 안 울었거든!!””

 

 

 

싱글거리는 표정을 짓고 있는 치히로의 앞에, 프로듀서는 잔뜩 움츠린 채로 정좌를 하고 있었다.

“프로듀서 씨?”

“네, 넵.”

“나오 양에게 자초지종은 다 들었어요. 아무리 만우절이라지만, 정도가 좀 심했다고 생각하시죠?”

“네, 물론입니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소녀의 섬세한 마음에 장난을 치다니, 키라링 룸에라도 들어가고 싶으신건가요?”

“히익.”

 

 

이 일로 단단히 화난 나오를 위로하느라 프로듀서의 지갑이 또 한번 대폭발을 겪었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사실 전편은 추진력을 얻기 위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29살 어릔이 인성이 참으로 훌륭하군요.

 

역시 아이돌-프로듀서의 연애놀음에서 만우절에 무조건 통하는 치트키는 P의 신변을 이용한 거짓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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