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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온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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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6-21, 2016 03:21에 작성됨.

가까이 오지 말아주세요.

 

모든 이와의 거리를 가깝게 두고 살아가는, 당신과 같은 사람은 수도 없이 봤어요. 수도 없이 경험했어요. 여러 번 경험한 만큼, 당신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어요. 모두에게 지어주는 미소, 모두에게 닿는 애정 담긴 손길, 모두에게 전해지는 활기. 당신을 보는 사람들은 당신의 친절을 느끼며 행복해하겠죠. 누구는 하루를 버틸 힘을 얻을 거에요. 누구는 내일을 살아갈 의미를 찾을 거에요. 당신은 존재 자체만으로 주변에 힘을 줘요.

당신에게도 특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에요.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 중 조금 더 신경이 쓰이는 사람들이. 당신은 자신의 시간 중 조금 더 많은 부분을 그 특별한 이들에 쓰고 있어요. 하지만 조금 더해진 친절은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 뿐이에요. 눈치는 챌 수 있어도, 그들이 당신에게 신경을 쓰는 만큼 당신은 그들을 신경써줄 수 없으니까요. 받는 만큼의 마음을 확실히 보여줄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당신이 싫어요. 전해 준만큼의 마음을 보답 받을 수 없는 당신이 싫어요. 그러니 가까이 오지 말아주세요.

당신은 문자 그대로 친절한 사람이에요. 처음 만나는 사람도 마치 오래 알았던 친구인 것처럼 대해요. 누군가는 그 친절을 불편해했겠지만, 당신의 분위기는 그런 사람들마저 매료시켰어요. 당신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이야기를 들어요. 매사에 마냥 가벼운 사람일 것만 같은 당신의 분위기와는 달리, 당신은 단서를 놓치는 법이 없어요. 왠지 모르게 반복되는 낱말이든, 알게 모르게 피해가는 이야기든. 유독 단어 하나에 작게 흔들리는 눈동자든, 할 일을 찾지 못한 손짓이든. 당신은 전부 기억하고는 단서를 흘린 사람을 찾아가요. 그리고는 당신은 이야기를 들어요. 당신은 교묘하게 화두를 던지고는, 상대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모든 경과를 알게 된 후에야 입을 열어요. 당신이 하는 말은 상대가 필요로 하던 말이에요. 그 사람이 듣고 싶었던, 찾아 헤매던 말을 당신은 너무나도 쉽게 찾아서 전해버려요. 그렇게 당신은 타고난 분위기를 넘어 만인의 마음 속 아이돌이 된 거에요.

나는 그런 당신이 싫어요. 모든 말을 놓치지 않는 당신이 싫어요. 작은 신호조차, 무심코 나와버린 버릇조차 기억하는 당신이 싫어요. 준비되지 않은 마음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손을 내미는 당신이 싫어요. 가깝게 시작해서 더욱 가까워지는 당신이 싫어요. 자신만의 숲에서 지내는 사람을 볕이 드는 언덕으로 끌어내는 당신이 싫어요. 나무의 사이에 숨어 있는 나를 찾지 말아주세요.

당신은 아끼지 않아요. 다른 사람에게 주는 마음을 아끼지 않아요. 다른 사람과 보내는 시간을 아끼지 않아요. 조금은 자신만의 시간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싶어도, 당신은 항상 누군가의 곁에 함께 있어요. 하루에 한 번 이상, 한 명 이상의 동료들은 당신과 찍은 사진을 올려요. 아침에는 언제나 누군가가 전날 당신과 만났던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당신은 정말로, 밖에 있는 모든 시간을 다른 사람과 함께 보내요. 당신이 타고난 분위기, 단련된 친화력, 무서운 섬세함으로 빚어낸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건, 그만큼 당신이 다른 이들에게 투자하기 때문이에요. 아직 어릴 때라서 그럴까요, 당신은 망설이지 않아요. 마음의 고갈을 신경 쓰지 않고, 재충전의 시간을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 같은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며 자신에게 신경을 쓰거나, 신경을 쓰지 않다가 마음이 전부 말라버렸어요. 나는 그래서 당신이 싫어요. 어린 치기가 싫어요. 먼 앞을 내다보지 않는 과감함이 싫어요.

나에게 더 이상 다가오지 말아요. 모두에게 짓는 그 미소를 띄운 채 다가오지 말아요. 당신과 가까이 지냈던 건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어요. 사람들 틈으로 섞여 들어가기로 했다면,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것이 도움이 되니까. 당신은 누구의 곁에나 있었으니까, 당신부터 시작해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조금씩 쌓아둘 계획이었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당신과 내가 어울린다고 평했고, 이미지를 파는 우리들은 대중의 요구에 따라 붙어 다니게 됐던 거에요. 당신은 우리가 잘 어울리는 한 쌍인 것처럼 말했지만, 전혀 아니에요. 당신에게 보여준 미소와 긍정은 전부 꾸며낸 거에요. 당신과 찍은 사진의 필름들은 빛에 내놓았어요. 당신이 건네준 선물은 전부 버렸어요. 당신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아요. 우리는 이 일을 끝내는 순간 아무 관계도 아니게 될 거에요. 당신과 나의 거리는 그 정도에요. 당신이 느끼는 거리와 내가 느끼는 거리는 달라요. 더 이상 멋대로 좁히려 하지 말아요.

 

당신은 분명 이렇게 물어올 거에요. 왜 그렇게 사람을 피하려는 거야? 내가 한 가지 물어볼게요. 사람이 오래 살았다면, 아주 오래 살았다면,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보았을 정도로 오래 살았다면 그 사람은 지금쯤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요? 당신은 분명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고민하겠죠. 그리고 잘 모르겠다는 천진한 표정을 띄우며 대답할 거에요. 잘 모르겠는데.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당신이 믿든 말든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야기에요. 하지만 내 태도에 대해, 내 생각에 대해 당신에게 조금은 답을 해줄지도 몰라요.

불로장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젊음을 유지한 채, 아무런 병에도 걸리지 않고 영원히 살아가는 사람.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이의 이야기는 거짓말이 아니에요. 그 이는 어느 날 문득, 아무 사람도 없는 숲 속에서 홀로 깨어났어요. 눈을 뜬 그 이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햇빛이 옅어질 정도로 울창한 숲이었어요. 그 이는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하다못해 적어도 생각이 통하는 이를 찾기 위해 자신의 위치도 모르는 채로 숲을 헤매었어요. 하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도 보이는 건 나무와 풀, 동물과 벌레, 그리고 나뭇잎에 가려진 햇빛뿐이었어요.

셀 수 없을 만큼 해가 지고 뜬 후의 어느 날, 숲으로 사냥을 나온 한 사람이 그 이를 발견했어요. 사냥꾼에게 구조된 그 이는 사냥꾼의 부족 아래에서 첫 번째 무리 생활을 하게 되었어요. 숲에서 돌아다닐 때에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자신과 비슷한 이들이 가득한 것을 본 그 이는 기대하기 시작했어요. 아무 것도 모르는 자신이었지만, 비슷한 이들의 무리에 속한 이상 무작정 헤매기만 하던 옛날과는 다른 나날들을 보낼 수 있을 거라고. 다행히도 그 기대는 맞았고, 그 이는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것들을 배우며 새로운 매일을 보낼 수 있었어요. 언어, 예의, 공동체, 사냥, 채집....... 아무 것도 모르던 그 이는 그렇게 한 사람이 되어갔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한 점이 드러나기 시작해요. 그 이는 전혀 늙지 않았던 거에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주변 사람들은 한 해가 지나면 얼굴에 하나의 주름살이 새겨진 반면, 그 이는 사냥꾼에게 발견된 첫 날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부족 사람들은 시간의 물살에 휩쓸리지 않는 그 이를 숭배하기 시작했어요.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의 상징으로써, 하늘에서 내려준 신의 사자로써. 평범한 관심을 넘은 맹목적인 숭배의 대상이 되어버린 그 이는, 어리석게도 해결할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이것 또한 새로운 경험이었기에 겪어보고자 했던 거에요. 신앙이 끔찍하게 자라나 광기로 변질될 즈음에 그 이는 두려워했어요. 그리고 그 때 깨달았어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그 이가 선택한 해결책은 도망이었어요. 어느 날 밤 경계를 서는 사람들을 전부 따돌리고 부족을 탈출했어요.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평원을 가로지르며, 그 이는 생각했어요. 그 부족은 잘못된 사람들이 모인 잘못된 집단이었다. 세상 어딘가에는 괜찮은 사람들과 괜찮은 삶이 있을 것이다, 라고요. 그렇게 그 이는 다른 사람들과 만났고,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어요. 새로운 삶을 시작했어요. 하지만 그 끝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그 이는 여러 번 도전했어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고 새로운 모습의 삶을 찾았어요. 수많은 관계를 쌓았고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을 배웠어요.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겉모습에 사람들은 두려워했어요. 태양이 수천 번 뜨고 졌는데도 그 이만 그대로였고 나머지는 전부 변했던 거에요. 수백 번의 도망을 거친 후에야 생각을 바꿨어요. 사람들이 두려워하기 전에 조용히 떠나자. 그러면 아무 문제도 없을 거야. 그 생각은 유효했어요. 그 이는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서 살 수 있었어요.

하지만 사람들을 겁먹게 만들지 않게 되자 다른 문제에 마주쳤어요. 도망을 칠 때마다 아주 먼 곳으로 가버렸기에 매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야 했던 거에요. 다시 말해, 그 이는 그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었어요. 그것을 깨달은 순간 파도처럼 그리움이 몰려왔어요. 다른 사람과 달라서 누구와도 가까워질 수 없었으니까요. 그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더더욱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만났어요. 수많은 사람들 중에는 자신을 이해해 줄 사람이 한 명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한 명 정도는. 어리석은 생각이었어요, 그 누구도 이해해주지 못했으니까요. 수백 번, 수천 번 도망쳐 나오면서 마음이 무뎌졌어요. 자신을 이해해 줄 사람을 찾고자 하는 의지는 수천 년 동안 꺾이고 꺾여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됐어요.

나는 아주 예전에 지쳐버렸어요. 수없이 반복되는 역사를 보면서, 세상에 오고 가버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옛날에는 나도 마냥 느긋하지만은 않았어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가치 있는 것들을 찾기 위해 노력했어요.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셀 수 없는 사건들에 직면했어요. 해보지 않은 일도 없어요. 어느 때에는 선생님이 되었고, 어느 때에는 요리사가 되었어요. 운동선수였던 때도 있었고, 한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자리에 앉아있기도 했어요. 더 옛날로 돌아가면 신을 찾아 헤맬 때도 있었고, 그보다 더 옛날에는 숲속에서 혼자 살기도 했어요. 수많은 삶의 형태와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을 거쳐 가며 배운 건, 나 같은 건 삶과 사람에게서는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나요? 당신은 아마, 갑자기 진지해진 이야기에 어떤 답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대답할거에요. 미안, 모르겠어. 당연해요. 나는 평범한 사람은 아니니까요. 가끔 사람들의 상상 속에나 등장하는 존재에요. 이해하려 하지 말아요. 그 누구도 그 이를, 나를 이해할 수 없었어요. 어설픈 도움의 손길 같은 건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제발, 다가오지 말아주세요.

어째서 당신은 나에게 다가오나요? 어째서 당신은 나에게 손을 내미나요?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내가 두는 거리가 보이지 않나요? 얇은 미소 한 장으로 덮어둔 무표정의 얼굴이 보이지 않나요? 당신 같은 사람이라면, 당신이라면 그런 것 정도는 충분히 볼 수 있지 않나요? 정말 당신이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제발 착각하지 말아주세요. 나는 당신과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변하지 않아요. 당신은 변해요. 나는 시간의 위를 떠다니지만, 당신은 시간의 물결에 휩쓸릴 뿐이에요.

당신의 웃는 눈 안에 슬픔이 보여요. 내미는 손에서 작은 망설임이 보여요. 하지만 당신은 그 손을 멈추지 않아요. 손끝이 조금씩, 조금씩, 나에게 가까워져요.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말아주세요. 나에게 더 이상 가까워지지 말아요. 나를 생각하려 해봤자 상처 입는 건 당신 뿐 이에요. 그만, 제발 그만 둬 주세요. 나에게 닿지 말아주세요. 당신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가까이 오지 말아주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미오.......

 

 

 

 

처음으로 글을 올려봅니다. 아이코와 미오의 팬픽이라면 팬픽인 글입니다.

<아이코의 유루후와 공간은 사실 정말로 시간을 늦춘다>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했습니다. 아이디어를 제공해주신 케이드님께 감사를.......

제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구에서 온 사나이>에서도 영감을 많이 얻었습니다.

한 번 몰입해서 쓴 이후로는 다시 건드릴 엄두조차 나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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