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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의 문

댓글: 6 / 조회: 1796 / 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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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20, 2015 10:41에 작성됨.

 언제나와 같은 마유 글입니다?

 

-

 

 "윽……"

 

 순간 머릿속을 휘젓는 듯한 통증이 느껴져서 머리를 감싸쥐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느껴진 통증에 무심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일어나셨나요?!"

 

 내가 낸 소리에 반응한 건지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를 움켜쥐고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니 갈색 머리의 여자가 앉아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여자는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있었다. 여자를 보자마자 나는 천장과 비슷한 익숙함을 느꼈다. 나는 이 여자를 본 적이 있다. 절대로 본 적이 있다.

 

 "혹시 안 들리시나요? 아니면 목소리가 안 나오시나요?"

 

 내가 바라볼 때까지는 얼굴에 기쁨의 미소가 가득하던 그녀는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닙니다."

 

 나는 순간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의 물음에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계속 느껴지는 기시감에 몸을 일으키며 얼떨결에 대답을 하고 말았다.

 

 "다행이네요!"

 

 여자는 손뼉을 작게 치며 말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가장 먼저 떠오른 의문점을 물어보았다. 여기가 어디인지, 오늘이 몇일인지 궁금한 것들이 많았지만 눈 앞에 사람이 있으니 가장 먼저 궁금해지는 건 그녀의 정체였다.

 

 "저는 사쿠마 마유라고 해요."

 

 사쿠마 마유…인가. 역시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이었지만 뾰족하게 기억나는 건 없었다.

 

 "…저는 누구입니까?"

 

 나는 마음속으로 한참동안이나 고민을 하다가 질문했다. 자신의 크나큰 약점을 드러내는 말이었기에 굉장히 하기 꺼려졌다. 하지만 백지상태에서 무언가를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어째서인지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사쿠마 마유라는 눈 앞의 여자밖에는 없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건가요?"

 

 사쿠마 마유의 표정은 약간 어두워졌다. 아직 그 밝음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지만 약간 수심에 찬 표정이었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모든게 익숙하지만… 자세하게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제가 누워있는 게 침대라는 건 알고 있지만 침대가 무엇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남아있는 것들이 어떻게든 사고를 회전시키고 있었지만 그건 저절로 돌아가는 쳇바퀴일 뿐 내 자신은 텅텅 비어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실 수도 있지만 완전히 생활이나 사고가 불가능한 정도는 아닌 것 같으니까요. 익숙함이 느껴지는 대로 움직이다 보면 기억나는 게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구요."

 

 사쿠마 마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대답을 안했네요. 당신… 프로듀서 씨는 프로듀서에요."

 

 '프로듀서 씨는 프로듀서에요.' 라는 말은 어색했지만 '프로듀서 씨'가 사쿠마 마유가 나를 부르던 호칭이었다는 건 이해했다. '당신은 프로듀서에요.'쪽이 어색하지 않았겠지만 굳이 바꿔서 말한 걸 보면 그랬다.

 

 "프로듀서라면 어떤 프로듀서를 말하는 겁니까?"

 

 무언가 머릿속에서 프로듀서라는 이미지가 떠오르면서 어느 정도 감이 오기는 했다. 그런데 프로듀서가 뭐였지?

 

 "프로듀서. 영어 단어 뜻 그대로 제작자 혹은 연출자의 역할을 하는 직업이죠. 프로듀서 씨 같은 경우에는 아이돌 프로듀서였어요. 그 담당 아이돌이 저, 사쿠마 마유였지요."

 

 사쿠마 마유의 말을 들으니 약간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아이돌을 만드는 사람. 매너지와 비슷하면서도 좀 더 적극적인 개입을 하는 종류. 다만, 자신이 그런 프로듀서였다는 자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어느 정도였습니까?"

 "…네?"

 

 사쿠마 마유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반문했다.

 

 "사쿠마 마유 씨가 저와 알고 지낸 지 어느 정도나 되었는지 말입니다."

 

 사쿠마 마유는 순간 굉장히 슬픈 표정을 지었다. 가만히 보고 있던 나조차 순간 눈 끝이 찡해질 정도로 슬픔이 가득 찬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한참을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3년이 조금 안 되는 정도일까요."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그녀가 말하기를 망설인 이유는 내가 죄책감을 느끼는 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3년 동안이나 담당 프로듀서와 아이돌의 관계를 유지해 왔다면 아무리 두 사람이 친밀하지 않았다고 가정해도 '사쿠마 마유 씨'같은 호칭은 너무나도 가혹했겠지.

 

 "…미안합니다."

 

 내 사과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프로듀서 씨 잘못이 아닌 걸요."

 

 고개를 저으면서도 그녀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마유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내 말에 마유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순간 마유의 눈에서 참고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 물론이에요!"

 

 마유의 눈물은 어느샌가 슬픔이 아닌 기쁨의 눈물로 바뀌어 있었던 것 같다.

 

 -

 

 "…더럽게 많구만."

 

 일에 복귀한 이후로 가장 처음 든 생각은 나라는 사람은 대체 뭘 하던 사람이었나 하는 것이었다. 사장님과 사무원인 치히로씨는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일거리를 엄청나게 줄여서 건네주었지만 그마저도 지금의 나에게는 힘에 부쳤다.

 

 "후후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프로듀서 씨가 처음 왔을 때도 그랬는걸요. 금방 익숙해질 거에요."

 

 치히로 씨는 스태미너 드링크를 하나 건네며 말했다.

 

 일단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은 사장님과 치히로 씨, 그리고 마유만 알고 있었다.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한 달이나 되는 장기 휴가를 내놓은 상황이었고 기억을 잃고 깨어난 내가 마유와 회사에 복귀한 건 휴가를 1주일이나 남겨놓은 상황이었다. 평소 쉬지도 않고 일한 나에게 한 달이라는 장기간의 휴가를 허락한 사장님도 처음부터 무언가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돌아온 내가 더더욱 이상한 행동을 보였으니 낌새를 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사장님과 치히로 씨에게만 기억을 잃었다는 걸 털어놓았다.

 

 "어떻게든 몸이 기억하는 느낌대로 따라가고는 있지만… 도대체 이걸 어떻게 다 했던 건가요?"

 

 가장 어려웠던 일은 인식과 알고있는 지식, 혹은 의식하는 것들이 어긋나는 현상이었다. 흔히 인지부조화라고도 하는 현상인 듯 싶었다. 깨어난 직후처럼 침대가 무엇인지 느낌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침대가 무엇인지 말할 수 없는 그런 문제들이 계속 일어났다. 습관적으로는 기억하고 있지만 머리는 비어버렸기 때문이겠지.

 

 "프로듀서 씨는 이 정도는 금방 해치우고 마유와 시간을 보내곤 했는 걸요?"

 

 이쯤 되면 자기 자신이 무서워진다.

 

 "마유의 이야기를 하고 계셨나요오?"

 

 갑자기 저쪽에서 마유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공포영화처럼 머리만 튀어나온 건 아니고 칸막이 뒤편에 있는 소파에 앉아있다가 이야기를 듣고 일어난 듯 싶었다.

 

 "아니, 별 이야기는 아니야."

 "…흐으응."

 

 마유는 미심쩍은 것을 바라보는 눈빛을 보내더니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래서 말인데요."

 

 나는 칸막이 저편에 있는 마유를 의식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마유와 저는 어떤 사이였습니까?"

 "프로듀서와 아이돌 사이잖아요?"

 

 치히로 씨는 무난한 대답을 했지만 작게 웃는 걸 보니 놀리는 분위기였다.

 

 "치히로 씨야 재미있겠지만 저는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다니까요."

 "뭐,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아요?"

 

 생글생글 웃는 치히로 씨 때문에 머리가 아파서 이마를 짚었다. 받아치기 힘든 사무원이다.

 

 "평범한 프로듀서와 아이돌 사이 이상의 사이였죠."

 

 치히로 씨는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쿡 찔렀다.

 

 "…그런 겁니까?"

 

 치히로 씨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곧이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푸훗, 프, 프로듀서 씨…"

 "왜 웃는 거에요!"

 

 치히로 씨는 손사래를 치고서 웃음을 그치고 말했다.

 

 "프로듀서 씨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말이죠."

 "진지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기억을 잃은 사람한테 너무나도 심한 처사다.

 

 "마유는 이래저래 관심이 많이 필요한 아이니까요."

 

 이야기를 시작하자 치히로 씨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다른 누군가의 관심에 목말라 하는 아이니까… 프로듀서 씨가 같이 밥을 먹으러 가거나 하면서 어울려주는 일이 많았죠."

 "상태가 불안한 건가요?"

 

 말을 해놓고도 단어의 선택이 조금 부적절했나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치히로 씨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글쎄요… 개인적인 느낌이라면 애정결핍 쪽에 가까워 보였죠."

 

 그런가. 내가 봤을 때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던가 했던 불안한 모습들은 그런 종류의 문제였던가.

 

 "…저 때문에 충격이 컸겠네요."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평소의 마유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프로듀서 씨가 기억을 잃었을 때에 마유는 엄청 괴로웠을 거에요."

 

 이상한 느낌이었다. 기억이 없기에 잘 알지도 못하지만 미안함에 가슴이 답답해지는 기분은 기묘했다.

 

 "프로듀서 씨, 점심 먹으로 가실래요?"

 

 마유는 어느새 내 등뒤에 다가와서 말을 걸고 있었다.

 

 "으, 응?"

 "원래 프로듀서 씨는 이 시간쯤에 식사를 하러 가셨으니까요. 같이 가요. 괜찮죠?"

 

 

 마유의 말에 밖으로 나왔지만 딱히 먹고 싶다던가 하는 음식은 없었다. 그저 뭘 먹으면 좋을까 하며 길을 걸어갈 뿐이었다.

 

 "마유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저는 프로듀서 씨가 좋아하는 거라면 뭐든지 괜찮아요."

 

 마유의 마음은 잘 알겠지만 선택을 남에게 미루는 건 당하는 입장에서는 제법 곤혹스럽다.

 

 '그렇게 말해도 기억이 없으니까 말이지…"

 "…그렇네요. 그러면 저건 어떤가요?"

 

 마유는 길 건너편에 보이는 패스트푸드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햄버거?"

 "프로듀서 씨가 자주 드시곤 했거든요. 바쁘니까 간편한 게 좋다면서 영양이나 그런 건 둘째치더라도 맛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익숙하다면서요."

 

 역시 일거리를 봤을 때 눈치를 챘지만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상당한 수준의 워커홀릭이었던 것 같다.

 

 "나야 괜찮지만… 마유는 괜찮아?"

 "마유요?"

 

 마유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이돌이니까 이것저것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내 말에 마유는 후훗 하며 웃었다.

 

 "그 정도는 마유에게는 아무렇지도 않답니다-"

 "그럼 다행이네…"

 

 문득 떠오른 건 여자가 남자보다 식욕이 더 왕성하다는 이야기였다. 어딘가의 책인가 TV 프로그램에서 말했던 것 같다.

 

 "게다가 익숙하니까요."

 "뭐가?"

 "프로듀서 씨와 식사하는 건."

 

 이견이 없자 나는 마유와 함께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 주문을 했다. 나는 햄버커 세트 하나. 마유는 감자튀김 없이 햄버거와 콜라. 패스트푸드점에서 가장 칼로리가 높은 것이 감자튀김이라는데 말은 그렇게 했어도 마유도 신경이 쓰이나 보다.

 

 

 "마유,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뭐든지 물어보셔도 괜찮아요."

 

 나는 마시던 콜라를 내려놓고 말했다.

 

 "마유는 내가 '사쿠마 마유 씨' 라고 불렀을 때… 엄청 슬픈 표정을 지었었지?"

 "…들켰나요?"

 

 마유는 살짝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처음 깨어났을 때 그렇게 차분했어?"

 "…무슨 말씀이신가요?"

 

 어째서인지 약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평범한 대화일 뿐인데 외나무다리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열지 말아야 할 문을 여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는 담담하게 나한테 설명을 해 줬잖아.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러고 보니 나는 왜 기억…"

 "프로듀서 씨."

 

 마유는 낮은 목소리로 내 말을 가로막았다.

 

 "프로듀서 씨가 기억을 잃었다는 건 의사선생님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던 거에요."

 

 마유의 목소리는 떨리기 시작했다.

 

 "너무 무서웠지만… 제가 침착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면 아무것도 모르는 프로듀서 씨는 더 불안해하실 것 같아서…"

 

 마유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떨어졌다. 나는 왜 마유를 의심한 걸까. 그 누구보다도 나를 생각해주는 게 그녀인데.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프로듀서 씨…"

 

 무심코 마유를 꼭 안아주고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몸만 움찔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예전의 나와 마유의 사이는 이런 것이었구나 하는 기분이었다. 어디선가 다른 사람의 감정이 흘러들어오는 느낌이었지만 그 감정이 자기 자신의 기분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나오자 다시 갈 곳 없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게 되었다.

 

 "프로듀서 씨."

 "응?"

 

 마유도 그걸 알았는지 나에게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사무소로 돌아가지 않는 건가요?"

 "오늘 오후는 오프니까. 오프라도 할 것도 없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별로 없고, 마유의 스케줄도 없으니까…"

 

 이래저래 약한 소리를 하긴 했지만 일의 양이 상당히 적어서인지 오전 중에 다 마무리할 수 있었다. 사장님도 그렇다면 일찍 퇴근해도 좋다고 하셔서 적당히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다행이네요. 일에 적응하는 데에 그다지 문제도 없어 보여요."

 "아니, 문제투성이지만 필사적으로 감추고 있을 뿐이야."

 

 옆에서 보면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어둠 속을 비틀거리면서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면 프로듀서 씨도 이제부터 마땅히 할 일이 없는 거네요?"

 "뭐, 그렇지. 아직 시간도 이르고."

 

 나의 말을 어떤 승낙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마유는 갑자기 팔짱을 껴왔다. 그리고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 마유?!"

 

 순간 거리를 가까이하는 마유의 행동이 당황스러웠지만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아마 마유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기겁해서 떨쳐버렸을텐데 왠지 모를 익숙함이 느껴져서일까.

 

 "그러면 잠시 마유와 어울려 주실래요?"

 "…그, 그래."

 

 

 얼떨결에 마유의 기세에 눌려서 따라가게 된 곳은 CD샵이었다.

 

 "마유, 괜찮은 거야?"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이런 곳에 이런 상태로 와 버리면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닐까 해서…"

 

 마유는 팔짱을 낀 그대로 밀착 중. CD샵이라면 마유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확률이 높은데도 그저 모자를 쓰고 있을 뿐 그 이상으로 자신을 숨기려고 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이렇게 당당하면 의심을 안 받는다구요. 오히려 우물쭈물해서 어색해하면 더 눈길을 받게 되고 들키는 거에요."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노래를 부르고 무대에 서는 게 직업인 아이돌이 가장 가까워야할 CD샵에 와서 행동을 조심해야한다니 아이러니했다.

 

 "그래서 CD샵은 왜 온 거야? 좋아하는 가수의 신보라도 나온 거야?"

 "프로듀서 씨, 마유의 노래도 잊어버렸죠?"

 

 생각해보니 그랬다. 담당 아이돌의 노래도 모르는 프로듀서라니…

 

 "…그렇네. 미안해."

 "아니에요. 그런 말을 들으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닌걸요."

 

 기억을 잃고 나서는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것 같다. 확실히 여러 군데에 민폐를 끼치고 다니는 게 사실이니까 어쩔 수 없기는 하다.

 

 " 프로듀서 씨와 마유가 같이 노력해서 만들어낸 결실이니까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이제부터의 일은 어떻게 될 거고 새롭게 처음부터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마유와 프로듀서는 분명하게, 이제까지도 열심히 해 왔고 의미있는 길을 걸어왔다는 걸 말이에요."

 

 마유는 웃으면서 덧붙였다. 과장된 몸짓을 하면서 마치 어떤 드라마의 등장인물이 대사를 하듯 말했다.

 

 "신보는 아니지만 좋아하는 가수의 CD를 사려고 왔어요. 사쿠마 마유 씨의 데뷔 싱글."

 

 장난인건지 진심인건지 알 수 없지만 장난이라도 자기 자신을 가장 좋아하는 말은 하기 힘들다. 역시 다재다능한 아이돌답게 연기력도 뛰어난 걸까…

 

 마유의 싱글은 나온 지 제법 오래되어 신보도 아니었고 지금까지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정도도 아니어서 한쪽 편에 같은 사무소의 아이돌들의 싱글이나 앨범과 함께 진열되어 있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눈에 익은 이름들이 많이 보여서 반가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프로듀서 씨, CD 플레이어…는 모르겠지만 컴퓨터는 있으니까요."

 "CD 플레이어도 있지만 말이야."

 

 요즘 같은 시대에 왜 가지고 있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집에는 CD 플레이어도 있었다. 다른 아이돌들이나 가수들의 음반도 많이 있었다. 다시 떠올려보면 분명 마유의 CD도 있었다.

 

 "그냥 사기만 하려고?"

 

 CD샵에는 직접 그 자리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준비된 헤드셋 같은 장비들도 준비되어 있었지만 마유는 그대로 CD를 들고 가서 계산했다.

 

 "어차피 수도 없이 듣고 부른 노래지만… 프로듀서 씨가 지금 앞에서 다시 듣는다고 하니 왠지 부끄러우니까요."

 

 마유는 품에서 펜을 꺼내 CD 겉에 무언가 써서 나에게 건넸다.

 

 '다시 시작하는 프로듀서 씨에게.'

 

 "어차피 프로듀서 씨의 집에는 똑같은 CD가 여러 장 있을 테고, 노래를 들어주셨으면 하는 건 그 쪽으로 충분할 테니까 이건 선물로 받아주세요."

 "…고마워."

 

 살펴보면 마유는 생각이 깊다. 항상 단순한 생각을 넘어서 그 다음까지 생각하고 행동한다. 사려 깊게 상대를 배려한다.

 

 

 CD 샵에서 나와서 거리를 더 돌아다니고 마유의 옷을 사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을 먹고 나서 나는 마유를 태우고 마유의 집 앞에 도착했다. 잊어버린 주소는 네비게이션에 저장되어 있었고 다행히도 운전을 하는 방법을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오늘은 즐거웠어요, 프로듀서 씨."

 

 불이 꺼진 마유의 집 앞에서 나는 마유를 배웅하려 했다. 차에서 내리자 하얗게 켜진 가로등불 아래서 인사를 하는 모양이 되었다.

 

 "이러니까 예전같네요. 아니, 예전같다기 보다는 언제나와 똑같아서 안심했다고 해야 할까…"

 

 마유는 드물게도 우물쭈물하며 대화를 돌리고 있었다.

 

 "점심때부터 돌아다니느라 힘들었을 텐데. 푹 쉬고. 내일 또 보자."

 

 걸음을 돌려 다시 차에 타서 돌아가려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프, 프로듀서 씨!"

 "응?"

 "집… 들렀다 가시지 않을래요?"

 

 -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깼다. 너무나도 깊이 잠들었던 것 같다. 그런 탓인지 시간을 확인하기도 전에 이미 출근시간에 늦어버렸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움직이지 않는 팔을 힘겹게 뻗어 침대 아래로 떨어진 핸드폰을 켜서 확인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한 시간 반이나 늦잠을 자버렸다. 평소에는 7시면 일어나는데 역시 어제 너무 늦게 잔 탓인가…

 

 "부재중 전화가 9건에… 메일도 30통이나 넘게?"

 

 아마 잠을 깬 것도 메일 소리 때문에 그랬나보다. 어디서 스팸메일이라도 날아온 건가 하고 내역을 확인해보니 놀랐다.

 

 "마유…?"

 

 '프로듀서 씨, 일어나셨어요?'

 '프로듀서 씨?'

 '아직 주무시고 계신가요…?'

 '프로듀서 씨! 아침이에요, 아침!'

 '프로듀서 씨, 아직도 주무시고 계신 걸까…?'

 '보고 있으면 답장해주세요.'

 '빨리요.'

 '아직도 자고 있는 건가요…?'

 '어서 답장해주세요.'

 '일어나면 바로 답장해주세요. 기다릴게요.'

 

 순간 소름이 끼쳤다. 전화는 7시부터 10분 간격으로 한 통 씩 와있었고 메일은 몇 분 간격으로 계속 와 있었다. 메일을 확인하는 사이 한 통이 더 도착했다.

 

 '역시 가서 확인해봐야 할까요…?'

 

 나는 곧바로 마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컬러링이 울릴 새도 없이 바로 마유가 전화를 받았다.

 

 "프로듀서 씨, 왜 아무런 답장이 없는 거에요?"

 

 마유의 목소리는 화가 난 것처럼 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거칠었다.

 

 "아, 아니. 지금 막 일어나서 말이지… 늦잠을 자버린 것 같네."

 "…마유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시나요?"

 

 상대의 표정을 알 수 없는 전화로는 마유가 지금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건지 걱정에 가득 차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지 확신하기가 힘들었다.

 

 "하, 하하… 고마워, 그렇게나 신경 써주고."

 

 억지로 웃음을 지어내봤지만 너무나 어색했다. 그래도 마유는 조금은 안심했는지 다시 평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변해있었다.

 

 "혹시 몸이 아프신 건가요? 그러면 오늘은 쉬시는 게…"

 "아냐, 늦잠을 잔 것뿐이니까. 늦었어도 출근은 해야지."

 

 정말로 어딘가 아픈 것도 아니었고 이 이상 사장님께 폐를 끼치는 것도 죄송했다.

 

 "마유는 기다리고 있을 게요… 후후…"

 "그래. 최대한 빠르게 갈게."

 

 통화를 마치자마자 나는 빠르게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 동안 마유에게 메일은 오지 않았다.

 

 

 사무소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맞아준 건 치히로 씨였다.

 

 "이제야 왔네요, 이 늦잠꾸러기."

 "하, 하하… 죄송합니다."

 

 순간 움찔했지만 치히로 씨의 분위기가 그리 험악하지 않아 보여서 멋쩍게 웃었다.

 

 "뭐, 지금의 프로듀서 씨는 어차피 시킬 일도 그다지 없는 잉여 인력이니까 늦게 오나 일찍 오나 별로 상관 없으니까요."

 "이, 잉여…"

 

 사실이지만 마음이 아프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게 더더욱 가슴아프다.

 

 "차라리 늦게 와주셨으면 하네요. 어제처럼 일찍 퇴근하는 걸 보고 있자면 배가 더 아픈걸요."

 "죄, 죄송합…"

 

 웃는 얼굴로 사람을 찌를 듯한 말을 하는게 엄청나게 무서웠다. 이런 사람이었던가…

 

 "…그렇게 굳어있으면 제가 뭐가 되나요! 그저 장난을 좀 쳤을 뿐인데!"

 "자, 장난이요?"

 

 치히로 씨는 내 팔을 찰싹 때리며 웃었다.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제가 더 민망해진다구요! 그래도 늦는 건 안되지만요!"

 "아,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잘 지키도록 할게요."

 

 그렇게 치히로 씨와 잡담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프로듀서 씨?"

 "응? 마유?"

 

 어느새 옆에 다가와 서있는 마유는 표정이 밝지 않았다.

 

 "마유가 기다린다고 했는데… 이런 데에서…"

 "아, 미안…"

 

 기억을 잃어버린 후부터 평소의 기억력까지 안 좋아진 것 같다. 최근 들어 까먹는 일이 너무 많았다. 마유를 먼저 찾아봤어야 했는데…

 

 "프로듀서 씨도 마유가 싫은 건가요? 그래서 그런 건가요!"

 

 갑자기 마유가 소리쳤다. 대답을 바라는 듯 내 옷소매를 잡은 마유의 손에는 적지 않은 힘이 실려있었다.

 

 "그, 그럴 리가 없잖아? 잠깐 까먹은 것뿐이라니까. 그 이후로 기억이 잘 안 나고는 하니까…"

 "그런 거죠? 마유는 프로듀서 씨랑 계속 있고 싶으니까요. 마유를 싫어하는 게 아닌 거죠?"

 

 내 느린 대답에 급기야 마유는 나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 그럼. 물론이지."

 

 나는 마유를 달래기 위해 마유를 꼭 안아주었다. 마유는 그제서야 안정을 되찾았는지 내 품안에서 숨을 가라앉혔다.

 

 

 내 책상에는 어제보다는 조금 늘어난 서류들이 놓여있었다. 나날이 상태도 좋아지고 있고 이 정도라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이미 몇 가지는 처리하기도 했고.

 

 "프로듀서 씨, 커피 드실래요?"

 

 뒤에서 마유가 커피를 들고 나타났다. 오늘 스케줄은 오전에 잡지 인터뷰가 있었을 텐데. 따라가야 하지 않나 싶었지만 치히로 씨가 아직은 좀 더 일에 익숙해지고 나서 하는게 좋다고 만류해서 혼자 사무실에서 서류작업을 하고 있었다.

 

 "인터뷰는?"

 "아직요. 시간도 조금 남았고."

 

 나는 자연스럽게 마유에게서 커피를 받아들었다.

 

 "프로듀서 씨가 좋아하던 바닐라 라떼에요."

 "그랬었나?"

 

 확실히 쓴 커피보다는 달달한 쪽이 취향이다. 쓴 맛도 고통스러운 감각중의 하나인데 왜 사람들은 다들 그걸 즐기는 걸까.

 

 "단 걸 먹으면 두뇌회전에 좋다구요."

 "고마워. 잘 마실게."

 

 마유는 바닐라 라떼를 건네주고 인터뷰를 위해 사무실을 나섰다. 마유가 가는 걸 지켜보고 나서 나는 다시 업무에 매진했다. 조금은 익숙해지는 것이 곧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듯 싶었다.

 

 

 일을 하다 보니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벌써 11시 30분이었다. 늦게 일어났어도 체내시계는 정확한지 배가 고파왔다.

 

 "그러고보니 커피 안 마셨네…"

 

 마유가 두고 간 커피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일에 몰두하다 보니 아예 방치해버렸던 모양이다. 다 식어버렸지만 그렇다고 버릴만한 것도 아니었기에 마시기로 하고 컵을 든 순간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프로듀서 씨?"

 

 이번이 몇 번째나 되었지만 갑자기 등 뒤에 서서 말을 거는 마유는 도저히 익숙해 질 수가 없었다.

 

 "커피, 마시지 않았네요?"

 

 뒤를 돌아보자 마유는 한 손에 무언가를 든 채로 멍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취향이 바뀐 걸까요? 그럴 리는 없는데. 아니면 다른 거라도 드신 건가요?"

 

 마유는 멍한 눈빛으로 내 책상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아, 아냐. 그냥 일이 바빠서 까먹었을 뿐이니까."

 "…그런가요?"

 

 마유는 미심쩍다는 눈빛으로 나를 잠시 바라봤다. 나는 어차피 마실 것이기도 했고 마유 앞에서 보란듯이 식은 커피를 다 마셨다.

 

 "역시 바닐라 라떼는 부드러운게 마음에 든다니까."

 "…그렇죠? 그러면 커피를 마시는 직후에는 좀 그렇지만 시간도 시간이니 점심 드실래요?"

 

 마유는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을 내보였다.

 

 "조금 이따 먹어도 될까? 지금 하고 있던 건 마무리하고 싶어서."

 "알겠어요. 마유는 옆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마유는 칸막이 너머의 소파에 가서 앉았다. 나는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하려고 서류더미로 눈길을 옮겼다. 하지만 얼마 안가 집중이 깨지고 말았다.

 

 "프로듀서 씨."

 "응?"

 "저랑 점심 드시지 않겠어요?"

 

 채 3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빨리 끝내고 갈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알겠어요."

 

 하지만 얼마 안가 마유의 재촉이 다시 들려왔다. 마치 아침의 메일을 보는 것 같았다. 그 때마다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지만 계속되는 재촉에 결국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마유와 점심을 먹게 되었다.

 

 "여기 튀김도 있고 비엔나도 있어요. 햄버그 스테이크도 있구요. 과일은 마지막에 드시면 된답니다. 그럼 뭐부터 드실래요?"

 

 마유가 싸온 도시락은 호화판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럼 우선 튀김을…"

 

 마유는 먼저 먹으라고 해도 전혀 말을 들을 기세가 아니었기에 순순히 마유의 말에 따랐다.

 

 "자, 아~앙."

 "…내가 직접 먹을 수 있는데."

 "자, 아~앙."

 

 마유가 밀어붙이자 어쩔 수 없이 나는 입을 벌려 마유가 주는 튀김을 받아 먹었다.

 

 "…맛있는데? 요리도 이렇게 잘했었나?"

 "후후, 좋은 신부가 되려면 수행은 필수인걸요."

 

 도시락은 한 사람이 먹기에는 양이 많았기에 마유와 함께 나눠서 먹었다. 비교적 밝은 분위기도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눴다. 어제 산 옷이라던가 집에가서 들어본 CD 이야기를 하자 마유도 기뻐해줬다.

 

 "그러고보니 어제라고 해서 그런데…"

 "응?"

 "프로듀서 씨, 왜 중간에 돌아가버리셨나요…?"

 

 확실히 어제는 밤 늦은 시간이었지만 집으로 돌아와서 잤다.

 

 "그야 시간이 늦었으니까…"

 "마유와 함께 있고 싶지 않은 건가요?"

 

 그렇게 말해도 아직 그런 거리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밤 늦게까지 같이 있는다는건 좀…"

 "어째서?!"

 

 마유는 갑자기 격하게 소리를 높였다.

 

 "언제나 마유의 곁에 있어주세요. 일할 때도, 쉴 때도, 잘 때도 계속 마유와 함께해주세요."

 "그건 무리잖아…?"

 

 내 말에 마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갑자기 일어서면서 테이블에 무릎을 부딪혔는지 테이블이 크게 흔들렸다.

 

 "……죄송해요. 마유가 너무 흥분했던 것 같네요. 조금 쉬다 올게요."

 

 마유는 잠시 쉬겠다며 사라졌지만 그 이후로도 상황은 심각해졌으면 심각해졌지 나아지지는 않았다. 그 날 이후로도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메일과 전화가 끊임없이 왔다. 점심은 반강제적으로 매일 마유의 도시락을 먹게 되었다. 일이 있어서 집에 늦게라도 들어가는 날이면 마유가 집에 찾아와 주변 이웃들로부터 수상한 눈총을 받기도 했다. 매일매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 마유에게 거절의 말을 꺼내는 것도 한계였다. 어떤 핑계를 대도 마유는 이미 모든걸 알고 있었고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도 눈치 채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버티기 힘들었다. 너무나도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내 모든 것이 마유에게 감시당하고 있다고 느껴질 무렵 나는 사장님을 찾아갔다.

 

 "무슨 일인가. 몸은 괜찮은가?"

 "제 경우에는 머리 쪽의 문제였으니까요. 다만, 다른 이유로 조금…"

 

 사장님은 내가 말을 흐리자 가만히 내 말을 기다렸다.

 

 "…조금 일을 쉬려고 합니다."

 "……."

 

 사장님은 의외일 수도 있는 내 말에 놀라지 않았다. 다만 뭔가를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프로듀서 일을 그만두겠다는 이야기인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그건 사쿠마 양 때문이고?"

 

 오히려 사장님의 말에 내가 놀랐다. 일을 그만두겠다고 이야기하려고 왔지만 마유 때문이라고 말하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아서 일부러 얼버무린 것이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기억 상실 문제라고 넘겨짚을 줄 알았는데 사장님의 통찰력도 만만치 않았다.

 

 "역시 그런가."

 "……."

 "물론 일을 그만두건 계속하건 자네 마음에 달려있는 일이지만 그 전에 한 가지,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하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이 내 말에 '그럼 잘 가게'라면서 바로 보내줄 리는 없다고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사쿠마 마유 양은 병들어있네."

 

 잔인한 말이었지만 사장님은 단언했다.

 

 "오해하지는 말게. 내 말이 사쿠마 양이 정신적인 질환을 앓고 있어서 병원에 입원을 해야 된다거나 하는 의미는 아니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정신적인 병을 앓고 있다는 건 맞다고 해야겠지."

 

 사장님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하기 꺼려지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말해야한다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입으로 다른 사람의 사정을 일일히 말한다는 건 실례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지만 사쿠마 양이 자네에게 직접 말할 것 같지도 않고 자네는 사쿠마 양의 프로듀서이기도 하니 말해두겠네."

 "아, 알겠습니다."

 

 마유를 이렇게까지 만든 건 무엇일까. 내 기억의 가장 첫부분에 남아있는 조용하고 사랑스럽던 아이를 저렇게나 변하게 만드는 원인은 어디에 있던 걸까.

 

 "사쿠마 양은 어려서부터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보냈네. 부모님이 안 계시는 건 아니지만 항상 밤늦게 돌아오시곤 했고 양쪽 모두 출장을 나가거나 하는 일도 잦았지. 어릴 적에 가족과 함께한 추억이라고는 기억나는 게 없다고 하더군. 사쿠마 양이 요리를 잘 하는 것도 그것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네."

 

 그 도시락에 이런 이유가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렇다고 사쿠마 양에게 부모님이 아예 관심을 끊어버린 것도 아니었네. 차라리 관심이 없었다면 다행이었을 텐데. 평소에 부모로써의 가정교육조차 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사쿠마 양이 사소한 잘못이라도 하는 날에는 크게 혼을 내곤 했지. 맞은 적도 있고. 부모님이 대부분의 시간에 안 계시기에 받은 돈으로 장을 봐서 끼니를 해결하던 사쿠마 양에게 돈을 주지 않고 굶게 만든다거나 하는 일도 있었지. 그런 환경에서 사쿠마 양의 성격은 점점 더 어두워진 거야."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졌다. 용납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아이를 그렇게 방치하는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맞아서 생긴 흉터를 숨기고,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또래의 친구들처럼 모여서 놀러다니지도 못한 채로 집에 돌아와서 혼자 밥을 만들어 먹고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하는 어린 마유의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

 

 "어두운 성격 탓인지 사쿠마 양은 학교에서도 좋은 관계를 가지지 못했네. 다른 여자아이들과 어울리지도 못했고. 오히려 남자아이들에게는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는데 사쿠마 양이 그런 남자아이들과 어울릴 리도 없었지. 반대로 그게 여자아이들에게 더욱 미움을 받는 원인이 되었네. 심지어는 학교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남자아이가 사쿠마 양에게 고백을 했다가 거절당하자 여자아이들의 반감은 극에 달했네."

 

 씁쓸한 이야기였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똑같이 잔혹한 현실을 들이민다.

 

 "그 이후로 사쿠마 양의 부모님이 학교에 불려와 사정을 들었다는데 사쿠마 양의 부모님은 오히려 사쿠마 양을 혼내며 강제로 전학을 시켰다네."

 

 사장님이 말해준 마유의 과거는 참혹한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 느껴지던 분노도 억울함도 사라지고 마음 속에 남은 건 애틋함 뿐이었다.

 

 "물론 전학을 간 후에도 상황은 비슷했지. 그러다 우연히 인연이 닿게 되어서 한 잡지사의 독자 모델 일을 하게 되었네. 그리고 여기까지 인연이 이어져 아이돌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성격은 많이 밝아진 편이지만… 오히려 학교 친구들의 반응은 더 차가워졌다는군."

 "그런 마유가…"

 "그래. 그런 사쿠마 양이 유일하게 마음을 열고 자신을 보여주고 의지한 사람이 자네일세."

 

 뭘 하고 있던 걸까. 그런 사정도 모르고 마유에게 심한 짓을 했다. 생각 없는 말을 뱉어버렸다. 내 말에 마유는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까. 얼마나 마음이 찢어졌을까. 프로듀서를 그만두겠다니, 나만을 의지하고 있던 마유는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죄송합니다."

 

 내 말에 사장님은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드렸던 말씀, 철회하겠습니다."

 

 사장님은 진지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자네는 기억을 잃었네. 지금 그 상황에서도 그렇게 할 셈인가? 그게 자네의 결론인가?"

 "그렇습니다."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런 가녀린 마유를 포기할 수 없었다.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내가 지켜줘야 했다. 프로듀서로써의 직업적인 책임감이 아니라 나라는 한 사람이 사쿠마 마유라는 사람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기억을 잃은 건 상관이 없습니다. 분명, 기억을 잃기 전에도 같은 답을 했을 겁니다. 그렇기에 제가 이 자리에 있고 마유의 담당을 하고 있을 테고요. 그리고 이번에도 제 답은 같습니다. 제가 마유를 지키겠다고."

 "그러면 이제 나가보게.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지 않나."

 

 나는 사장님에 말에 짧은 인사만을 답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사장실을 나왔다. 그리고 바로 마유의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반지도 샀다. 계획에도 없던 일이지만 남자는 기세라고들 하니까.

 

 이제는 슬슬 익숙해진 집 앞에 도착해서 나는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마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유라면 분명히 받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프로듀서 씨…?"

 

 역시나 전화를 걸자마자 곧바로 마유가 전화를 받았다.

 

 "미안해요.미안해요.미안해요.그러니까떠나지말아주세요.앞으로그러지않을게요.착한마유가될게요.마유가앞으로잘할테니까…"

 "마유!"

 "…제발………네?"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그런 건 필요 없다는 듯이 집 안에 있는 마유에게 들릴 정도로 크게 외쳤다.

 

 "나와서 나좀 보자!!"

 

 굳이 핸드폰을 다시 귓가로 가져가서 확인을 하지는 않았다. 내 예상대로 잠시 후에 2층에 있는 창문이 열리고 커튼이 쳐지더니 마유의 모습이 나타났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그리고 바로 마유의 모습이 사라졌다. 마유는 내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계단을 뛰어내려오고 있었다. 곧이어 현관문이 열리고 마유가 나타났다. 파자마에 슬리퍼 차림으로 뛰어나오는 마유를 보고서 나는 다가오는 걸 기다리지 않고 또다시 크게 소리쳤다.

 

 "사랑해!!!"

 

 달려오던 마유의 걸음이 멈췄다. 마유는 얼어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춰섰다. 나는 그제서야 마유에게 다가가 가져온 반지를 왼손 약지에 끼워 주었다.

 

 "프로듀서 씨…"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돼. 내가 마유를 지켜줄게. 내가 항상 마유의 곁에 있어 줄게."

 

 나는 마유를 안아주었다. 옷이 젖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마유는 퉁퉁 부은 눈으로 다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이후로 한참 동안이나 둘 모두 아무런 말이 없었다. 마유는 조용히 내 품에서 눈물을 흘렸고 나도 아무 말도 없이 마유를 안고 그렇게 한참이나 서 있었다.

 

-

 

 그렇게 나를 덮친 인생의 굴곡이라는 이름의 폭풍은 지나간 듯 했다. 마유는 내가 일을 하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다른 여자와 접촉하는 데에 민감했고 때때로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내가 손을 쓰지 않아도 마유가 스스로 나아지려고 노력했다. 내가 확실하게 거부의 의사를 나타내자 내게 다가오는 여자는 거의 없어졌다. 마유의 극성인 성격이 알려져서인지 간단한 일로도 다른 여자를 대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

 

 "마유, 없지?"

 

 마유의 집은 컴컴했다. 마유는 지금은 혼자 살고 있었기에 가끔씩 집에 찾아갈 기회가 있었다. 마유가 알려줘서 비밀번호도 알고 있었다. 덕분에 오늘같이 생일맞이 깜짝 선물을 준비하는 일도 가능했다. 혹시나해서 마유를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바보같은 짓을 한 것 같다.

 

 "그럼 준비를 해볼… 응…?"

 

 벽에 무언가 장식이라도 달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다가갔더니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검은 얼룩같은 것이 벽에 작게 묻어있었다. 다른 곳은 먼지도 별로 없을 정도로 깔끔했기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뭐지?"

 

 눈에 잘 안 띌 정도로 작은 검은 점들은 바닥이나 벽지에 여러 군데 묻어 있었다. 바닥에 있는 건 손으로 슥슥 닦으니 손가락에 묻어나오면서 지워졌지만 벽지의 얼룩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나마 지워지는 바닥의 얼룩들을 지워나가다보니 얼룩들이 어딘가로 연결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방인가?"

 

 얼룩을 지우며 따라가자 한 방문 앞에 서게 되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얼룩이 좀 더 많이 있었고 구석에는 눈에 띌 정도로 큰 얼룩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마치 난방이 들어오지 않는 겨울의 방처럼 싸늘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익숙했다. 대부분의 일들을 다시 배워가고 기억을 떠올리며 반반쯤 섞어 타협해서 정상의 상태를 되찾은 나였지만 아직 예전의 모든 기억이 떠오르는 건 아니었다. 다만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니 자연스럽게 잊어버렸다고 생각하기로 했는데 가끔씩 기시감이 들 때가 있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이건……"

 

 무의식적으로 방 안의 얼룩까지 지워나가던 나는 깨달았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점들이었기에 알지 못했던 것을 커다란 얼룩을 보니 떠올렸다. 이 방에서 과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지금까지 지워왔던 얼룩은 사람의………

 

 "프로듀서 씨."

 "……!!"

 

 언제나와 같이, 하지만 어느때와도 다르게 마유는 내 등 뒤에 서 있었다. 분명 집 안에 없는 걸 확인했는데 언제 들어온 걸까.

 

 "오실 거라면 미리 말씀을 해주시지 그러셨어요."

 

 마유의 목소리는 차갑게 식어있었다. 평소의 애교 있는 목소리가 아닌 얼음장같은 느낌이었다. 뒤를 돌아보기 두려웠다.

 

 "…그, 그게 말이지…"

 "……프로듀서 씨…"

 

 아직은 알 수 없다. 내 착각일 지도 모른다. 아무런 증거도 없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유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마유의 생일이잖아? 파티 겸 해서 깜짝 놀래켜주려고 했었지!"

 "…생일이요?"

 

 마유는 고개를 옆으로 기웃 했다. 마치 오늘이 자신의 생일인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렇네요. 이렇게 봐버렸으니 깜짝은 실패지만요."

 "뭐, 그건 어쩔 수 없지…. 그럼 케이크 가져왔으니까 케이크라도 먹을까?"

 

 나는 거실 쪽에 놓아둔 케이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는 장식이고 깜짝파티고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우선은 이 얼어붙은 분위기를 바꿔야했다.

 

 "…그래요. 제가 마실 거라도 꺼내 올게요."

 

 마유가 주방으로 들어간 사이 나는 케이크를 식탁으로 가져와 꺼냈다. 딸기가 올려진 생크림 케이크였다. 케이크를 꺼내 초까지 다 꽂아 놓을 때쯤 마유가 마실 걸 가져왔다.

 

 "…그거 술 아니야?"

 "무알콜 샴페인이라서 마유도 마셔도 괜찮은 거에요."

 

 무알콜이라면 그냥 음료수 수준이니 괜찮을 것이다. 마실 것도 준비가 되었으니 초에 불을 붙였다. 갑자기 주변이 환하게 밝아지고 나서야 지금까지 커튼이 쳐진 채로 불도 켜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잠깐만요, 프로듀서 씨."

 

 마유는 가져온 잔에 샴페인을 두 잔 따랐다. 본격적인 와인 글래스였는데 마유가 어떻게해서 가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제가 불을 끄면 바로 건배하는 거에요, 알겠죠?"

 "그래."

 

 하나 둘 셋 하는 소리와 함께 마유가 바람을 후 불자 촛불이 모두 꺼졌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건배를 했다.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제법 커서 유리가 깨지는 줄로만 알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프로듀서 씨, 한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선물 대신에라도."

 "선물은 따로 있지만… 물론이지."

 

 마유는 샴페인을 마시지 않은 채였다.

 

 "이런 말은 해서는 안되지만, 프로듀서 씨는 기억을 다시 잃는다고 해도 마유를 사랑해 주실 건가요?"

 "물론이지. 이번에도 그랬잖아?"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기억을 다시 잃어도, 다시 태어나도 나는 마유를 사랑할 거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결국은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이 모든 일을 되풀이한다고 해도 나는 다시 마유를 사랑할 거야."

 

 그 말을 하는 순간 머릿속에서 유리가 깨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통증이 밀려왔다.

 

 "나는… 이걸… 여기서… 어딘가…"

 

 그리고 전에 없던 강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머리는 끔찍하게 아팠지만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잃어버린 퍼즐의 마지막 조각. 끼워넣음으로써 다시 흩어지는 모든 퍼즐의 조각.

 

 "……프로듀서 씨는 그걸 봤겠죠? 프로듀서 씨는 상냥하니까 마유를 감싸려고 하겠죠. 그러면서도 스스로의 마음 속에서 갈등하고 괴로워할 거에요.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마유의 웃음이 보였다.

 

 "다시 만나요, 프로듀서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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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네요. 길어요.

 평소에 글을 굉장히 못 늘리는[?] 편입니다만 어떻게 이렇게 되어버렸네요. 10kb, 15kb 달성하는 것도 굉장히 힘들었는데..

 이번엔 언급 할 수 없는 소재와 말하기 뭐한 소재를 가지고 글을 쓰고 마지막에 언급하기 두려운 곡으로 마무리한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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