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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솔직함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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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25, 2019 00:12에 작성됨.

-그런 건 저도 알고 있어요!


우왓, 깜짝이야. 주변을 울리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혹시 주스가 남아있을까, 하고 냉장고 문손잡이를 잡았던 손이 그대로 멈췄다. 


방금 그건 뭐였지? 


분명 자주 들었던 목소리인데. 아, 방금 그거....치하야 쨩 아니야? 좀 생각해본 끝에서야 겨우 좀 전에 났던 큰 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걸까? 슬금슬금 탕비실에서 나와 주변을 둘러보니, 마코토가 보였다. 나랑 똑같이, 아까 치하야 쨩이 소리치는 걸 들어버린 것 같았다. 


"아, 그게 실은...."


마코토는 날 보자마자 뒷통수에 손을 가져다대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좀 전에 누구누구 있는지 말하다 끝에 얼버무렸던 것도, 일정이 전부 끝났는데도 계속 여기에 남아서 만화를 읽는 둥 마는 둥 했던 것도, 전부 이 때문인 것 같네.


"괜찮아. 뭔가 사정이 있는거지?"

"으, 응. 아까부터 프로듀서랑 미팅룸에 들어가서는 한참 지났는데, 갑자기 저러네."

"에- 프로듀서 씨랑?"

"응. 무슨 일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별로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떨떠름하게 웃고있는 내게, 마코토는 아직 어색함과 미안함이 가시질 않은 얼굴로 말을 마저 이었다.


"아, 그, 하루카. 너무 신경 쓰지 마. 저러다가도 화해하겠지....아마."

"그럴까나.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말을 하고 있는 동안에, 나는 저도 모르게 미팅룸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다. 치하야 쨩은 조용한 아이다. 그렇게 오래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봐왔던 치하야 쨩은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어쩌다 필요해서 꺼내는 말소리는 조금 작고, 침착했다.


아, 물론, 치하야 쨩이라고 해서 완전히 무감정했던 건 아니었다. 좋은 일이 생기면 빙긋 웃으면서 기뻐했다. 화내거나 속상해할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치하야쨩은 그마저도 담백한 편이었다. 그, 노래할 때 빼고는. 


노래할 때는 정말, 어쩜 그렇게나 감정이 풍부해지는 건지.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까지 그 흐름에 휩쓸려버릴 것 같다니까. 평소에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건, 바로 그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인걸까. 아니면 그 때만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걸까. 잘 모르겠어. 평소에도 치하야 쨩이 좀 더 솔직해지면 좋을 것 같은데.


...아차차,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나는 다시 한 번, 좀 전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분명 내가 알고 있는 치하야 쨩의 것이 맞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또 지나치게 가시가 돋혀있었다. 치하야 쨩이 그렇게 소리치는 거, 처음 들어봤어. 진심이었을까? 아마 그런 것, 같은데. 그, 뭐라고 해야할까.....좀 무섭네. 


조용한 애지만 실은 그렇게 조용한 것만은 아니야. 그렇지만 또, 이렇게나 격하게 감정을 터트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앞으로 치하야 쨩이 좀 더 솔직해지면 좋겠다던 생각이 무색해지는 순간.


"나도 좀 신경....아니, 실은 너무 신경 쓰이긴 하지만 두 사람의 일이잖아. 어쩔 수 없지."


이런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마코토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내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것치고는 마코토도 역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걸.


"그래도 결국 마코토는 기다리고 있는 거네."

"아하하, 이대로 집에 가기에는 뒷맛이 좀 쓰니까."

"나도...."

"그러고보니 하루카는 좀 있으면 레슨이던가?"

"응."


이대로 레슨하러 가봤자, 분명 전혀 집중 못하고 선생님에게 잔뜩 혼나기만 할 게 뻔해. 아, 이밖에도 더. 그....치하야 쨩이 걱정되기도 하고. 무, 물론 프로듀서 씨도 마찬가지로 걱정스럽기도 하고. 그리고,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럴까. 사람 궁굼해지게.....라고 하는, 조금 질 나쁜 호기심이 슬쩍 끼어들기까지. 어찌되었든, 이렇게 된 이상 내가 할 행동은 하나다. 


직접 확인하러 가보는 거야!


"잠깐, 하루...."


나는 마코토가 날 불러세우는 걸 뒤로 하고는 미팅룸으로 향했다. 슬글슬금, 발소리를 죽여가며 통로를 걸어가니, 바로 형광등 빛이 어른거리는 창문이 보였다. 건물이 낡은 탓일까, 미팅룸이라고 해도 방음이 잘 되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이렇게, 가만히 서서 귀를 기울여보면.....꼭 닫혀있는 문에 귀를 세워 찰싹 갖다붙여보려는 그 순간이었다!


덜컥.


"와아앗!?"

"음!?"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곧장 문이 천천히 열렸다. 하마터면 앞으로 넘어질 뻔 했지만, 필사적으로 균형을 되찾고는 한 편에 비껴섰다. 진회색 양복 차림을 한 남성이 눈에 바로 들어왔다. 프로듀서 씨다.


"어, 하, 하루카!? 넌 여기 어쩐 일이니!?"


나도 엄청 놀랐지만, 그건 프로듀서 씨도 마찬가지였다는 듯 안경 너머의 까만 두 눈이 휘동그레져있었다.


"아하하, 어쩌다가...."


되도 않는 말이라도 일단 꺼내고 보면서, 프로듀서 씨를 살폈다. 나를 보고는 애써 부드러운 얼굴을 하려고 애쓰시는 것 같지만, 그 전까지는 꽤나 인상을 쓰셨는지, 양 눈썹 사이가 조금 불거져 있었다.


"저어, 어떻게 된 거에요? 싸웠어요? 그, 치하야 쨩하고."

"좀 그런 사정이 있어서....괜찮으니까 신경쓰지 마렴."


내가 엿보려는 것보다도 먼저, 프로듀서 씨가 급하게   앞을 가로막고는 조금 열려있는 문 틈을 등으로 밀어 닫았다. 그리고는 내 눈치를 살피더니, 영 내키지 않는 듯한 걸음걸이로 나를 지나쳐버린다. 점점 멀어지는 프로듀서 씨의 뒷모습.....어라? 지금이 기회 아니야? 나밖에 없으니까 몰래 확인해보면....그저 멍하니 서있는 와중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안 돼. 멋대로 끼어드는 거잖아.


그치만 걱정되는 걸. 치하야 쨩이 그렇게 소리지를 정도니까, 분명 뭔 일 있는 거야. 프로듀서 씨도 표정 별로 안 좋았고. 그런데도 이대로 그냥 못 본 척 해버릴 거야?


말은 그렇게 번지르르하지만, 실은 그냥 궁금했던 게 아니고?


아니야! 나 말고도 마코토도 걱정하고 있잖아. 아무리 치하야 쨩과 프로듀서 씨 간의 일이라고 해도, 이렇게 걱정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둘만의 일이라고 내버려 둘 수 있겠어!


그래봤자 핑계야.


아니래도!


여러가지 생각들이 머리 안에서 서로의 꼬리를 붙잡으려들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가운데, 내 움직임은 놀랄 정도로 군더더기 없이 매끄러웠다. 용의주도하게 좌우 앞뒤로 주위를 살피고, 슬쩍 문고리를 붙잡는다. 그리고는 마침내, 결국,


덜컥, 끼이익.


저질러버린 것이다.


"힉."


일부러 소리 내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대로 다시 문을 꼭 닫아버리고 싶은 민망함을 참아가며, 좁은 문 틈새에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러자 보이는 건, 조금 어수선하게 놓여있는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힉."


처음과는 다른 의미로 숨을 집어삼켰다. 그리고는 혹여나  눈이라도  마주칠까 잽싸게 문 쪽으로 몸을 숨겼다. 방금 그 곳에는 누군가가 아주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 누군가는 치하야 쨩이었다.


그렇지만 결코 내가 알던 치하야 쨩이 아니었다. 


언듯 보기에는, 얼음장과도 같이 싸늘하고 무표정한 얼굴. 표정. 눈빛. 그렇지만 그와는 정 반대로, 마치 불처럼 일렁거리는 무언가가 주변에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사람에게는 각자 특유한 오오라가 있다.

 

언젠가 잡지에서 읽고 지나쳤던 말이 순간 머리 속을 팟하고 스치고 지나갔다. 그 때는 에이, 말도 안 돼하고 웃어넘겼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정말 사실인 것 같았다. 그만큼 좀 전의 치하야 쨩에게서는, 주변의 모든 것들에 대한 적의가 묻어나오는 것 같았다. 톡 건드리기만 해도 펑 터져버릴 것 같은 폭탄. 그런 느낌이었다. 


어쩌지, 정말 많이 화났나봐. 직접 보니까 더 대단하네. 만약 저 안에 들어가서 말이라도 걸었다간, 분명 나한테까지 저러려나. 험하게 인상을 쓰고, 두 눈에는 적의를 담아서, 나가라고, 힘껏 소리치려나....


싫어, 그런 건. 무서워. 


".....하루카."

"에, 아, 아아!"


나쁜 상상에 한참 몸서리치고 있는 도중,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날 불렀다. 얼빠진 소리를 내며 뒤를 돌아보니, 커피 냄새가 뒤늦게 훅 풍겨왔다. 그 다음으로는 작은 쟁반 위에 올려진 김이 나는 머그컵 두 개가 들어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날 혼내고 싶은 걸 애써 꾹 참는 것처럼 보이는 프로듀서 씨가 보였다.


"저어, 프로듀서 씨."

"괜찮으니까, 어서 가렴."


프로듀서 씨는 끝까지 평정을 가장한 채, 멍하니 서 있는 내게 비키라고 손짓을 보냈다. 확실히, 여기서 버티고 있어봤자 의미는 없겠지. 나는 프로듀서 씨의 지시를 따라 옆으로 비켰다. 프로듀서 씨는 나를 지나쳐 조금 열려 있던 문 사이를 솜씨 좋게 비집고 들어가더니, 바로 문을 꽝 닫아버렸다. 


이제 다시는 끼어들지마.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마치 그렇게 전하는 것처럼.


.....프로듀서씨가 맞았다. 멋대로 끼어들려고 했던 게 잘못이었다. 저렇게 화내고 있는 치하야 쨩을,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잖아. 아까만 해도 무서워하던 주제에. 그러니까 돌아가는 게 정답. 그럴 텐데. 


나는 꿀꺽하고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는 문에 바싹 붙어 귀를 가져다대었다. 이것 또한 잘못. 해선 안되는 일. 그런데도 난, 여전히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거라도 마시면서 진정해.


낡은 문 너머로 소리의 진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엿듣는 것치고는 상당히 깔끔하게 들리는 프로듀서씨의 말. 컵 부딪치는 소리가 작게 들리고 나서는, 그 말소리가 계속 이어진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네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니야. 오디션에는 운이라는 것도 상당부분 작용하잖아. 그리고 심사위원의 경향성이라도 있는 거니까. 이번에는 그 방향과는 맞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지. 어떻게 성공만 할 수 있겠니. 이렇게 떨어지는 것도 다 과정이야.


실력, 오디션, 경향성...끝까지 들을 필요도 없이, 그 몇가지 단어만으로도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치하야 쨩은 아무래도 오디션에 떨어진 것 같았다. 맞아, 그러고보니 전에 치하야 쨩 본인의 입으로도 슬쩍 지나가는 투로 들었던 것 같아. 그렇게 붙는 일이 드문 나와는 다르게, 치하야 쨩은 오디션에 나갔다고 하면 거의 항상 붙었던 걸로 기억해. 


그런데 요번에 떨어졌으니, 그만큼 충격이 크다는 걸까. 저기요, 여기 대략 30%라는 미묘한 승률을 자랑하는 하루카 씨를 생각하면, 한 번 떨어진 것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라구요? 그러니까 좀 더 자신을 가져도 된다구? 어쩐지 스스로까지 상처받는 것 같은 미묘한 격려를 생각해낸 나는, 머리를 좌우로 몇 번 털어버리고는 치하야 쨩의 대답을 숨죽여 기다렸다.


-.....


그렇지만 돌아온 것은, 긴 침묵이었다. 이건 프로듀서 씨가 봐도, 내가 봐도, 아니, 그 누가 봐도 이건 절~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폭풍 전의 고요. 무섭게만 느껴지는 조용함. 지금 치하야 쨩은, 과연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여전히 그 때의 그 싸늘한 모습일까? 나는 손에 조금씩 맺히기 시작한 땀을 대충 옷에 문질러 닦아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이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이대로 가단, 분명 프로듀서 씨와 치하야 쨩이 또 싸울 거야. 말리고 싶어. 두 사람을 다시 사이 좋게 하고 싶어!


그렇지만 어떻게?


저도 모르게 문고리를 향하려는 손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네가, 무슨 수로?


방금 그 생각은 손을 멈추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보다 무서운 쐐기가 되어서, 나에게 콕 박힌다. 그렇게 해서, 주춤주춤 물러나게 한다.


이제 그만 돌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 언제까지 프로듀서 씨를 곤란하게 할 거야?


스스로가 생각해봐도 정말 차갑고 단호한 내 목소리가, 머리 속을 가득 울렸다. 너무 차가워서 한 소리 하고 싶었지만, 그럴 틈도 주지 않는 정론들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정말, 어쩔 수 없는 걸까.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축 처져버린 어깨를 하며, 어쩔 수 없이 뒤로 뱅글 돌아섰다.


-이럴 시간 없어. 다른 오디션을 준비해야지.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미팅룸은 정말 방음이 안되는 건지, 귀를 문에서 때어도 웅얼거리는 소리가 여전히 들려왔다. 조금, 날이 선 말. 프로듀서 씨, 아무리 화나셨다고 해도 그렇게 말하는 건 좀 그런 것 같은데요.....멍해진 머리 한 쪽 구석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미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돌아가야지. 이젠. 그렇게 마음 먹었을 때였다.


-저도 안다니까요! 


에?


또 한 번, 가시 돋힌 목소리가 한 차례 나를 뒤흔들고 사라졌다. 그 덕분에 돌아가려던 발걸음이, 그 자리에서 탁 하고 멈추고 말았다. 끔뻑끔뻑. 나는 동그랗게 커진 두 눈을 몇 번 느리게 깜빡이고는 몇 번 숨을 골랐다.


어쩔 수 없어. 응. 맞아. 어쩔 수 없어. 내가 가서 뭐할 건데. 가봤자 더 일만 키울 거라고.


어쩔 수 없어. 그런 말을 주문과도 같이 중얼거리며, 너무 놀란 가슴을 진정하려고 했다.


-안다는 녀석이 왜 그러는 건데!


하지만,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 조금 다른 의미로 어쩔 수 없게 되어버렸다.


벌컥!


"잠깐만요!"


방금 전 힘없는 모습이 완전 무색하게, 나는 바로 문을 확 열어버리고는 미팅룸 안에 난입했다. 그리고는 파도처럼 밀려들어오는 답답한 공기를 한 몸에 받고 나서야, 뒤늦게 단단히도 잘못했음을 깨달았다.


어, 어쩌지.


등 뒤가 지나치게 뜨겁다.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거기다 어쩐지 계속 한 쪽이 따가운 것 같아 그 쪽을 봤더니 치하야 쨩이 보였다. 


뭐야, 하루카. 너라도 거슬리게 하면 가만 안 둬. 


치하야 쨩 본인은 고집스러울 정도로 입을 꾹 다물고 있지만, 흉흉한 눈빛이 대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 정말, 어쩌지. 도저히 그와는 정면 승부 할 자신이 없었던 나는 곧장 반대편을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더 이상 표정 관리를 못하게 된 프로듀서 씨가 있었다. 늑대를 피하려다 또다른 늑대를 만나버린 격이었다.


"하루카, 너어....가라고 했잖아."


겨우겨우 난폭함을 억누르는 낮은 목소리가, 나를 무섭게 나무랐다. 정말 죄송해요. 저도 아까만 해도 그냥 가려고 했는데....아무래도 둘이 싸우는 것 같아서....싸움은 나빠요, 안 돼요! LOVE & PEACE! 뭐라도 우물쭈물 핑계를 대려고 했지만 그조차도 하지 못했다. 


"우린 괜찮으니까.....나가보렴."

"이게 괜찮다고요? 프로듀서는 아무래도, 괜찮다는 말의 용법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결국, 그저 가만히 눈치만 보고 있는 내게 프로듀서 씨가 마지막 통보를 날리는 그 순간, 치하야 쨩이 갑자기 불쑥 끼어들어서는 한 소리 했다. 딱 봐도 잔뜩 비꼬는 말에 프로듀서 씨의 표정이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아, 안 돼! 저러다 정말 싸우겠어! 뭐라도 좋으니 이쪽으로 주의를 끌어야 해!


"와, 와앗! 그, 엿들은 건 잘못했지만, 일단 둘 다 제 말 좀 들어보세요!"

"....뭔데."

"....뭐니?"


그러자 싹, 하고 서로를 잡아먹으려고 했던 두 사람의 시선에 내게로 모였다. 의도했던 것이긴 해도, 정말 괴로웠다. 유키호처럼 이 자리에서 구멍이라도 파고 묻혀있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난,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하니까. 아무리 삽이 있어도 그렇게는 못하는 걸. 애초에 그건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신기, 비기, 가문의 비전.....아니, 이게 아니라. 지금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치하야 쨩!"


이렇게 되면 도망칠 수 없다. 여자가 칼을 들었으면 무라도 베어야 하지 않겠어. 나는 겁에 질렸던 마음을 꽉 다잡고는, 최대한 또박또박하게 치하야 쨩을 불렀다. 그러자 얼음송곳과도 같은 시선이 똑바로 내게 날아와서는, 푹하고 꽂혔다. 윽, 아프다. 마음이 아파. 그래도 나는 말을 계속 해야만 했다. 


"저, 저번에 오디션 친 거....떨어졌구나?"


좀 전에 엿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또 질문으로 바꿔서 내었다. 치하야 쨩은 애써 불쾌한 걸 참는 듯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핫, 어쩌지. 건드려서는 안될 곳을 너무 대놓고 건드리고 만 걸까. 순간 그런 걱정이 들었지만, 그런 건 또 아닌 듯 했다. 왜냐면....냉혹하게만 보였던 치하야 쨩의 두 눈에 다른 무언가가 어른거리는 것 같았거든.


거기에 조금 용기를 얻은 나는, 치하야 쨩에게 조금 다가섰다. 프로듀서 씨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것 같았지만, 이대로 물러서기는 싫었다. 치하야 쨩은 말없이 의자를 살짝 뒤로 끌었다.


"그렇다면.....그, 속상했겠네. 화도 났겠고. 슬펐었지?"

"....응."


가만 놔두다가는 자리를 박차고 멀리 날아가버릴 것만 같은 파랑새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치하야 쨩은 한동안 망설이다가 겨우 대답을 내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싹 거두고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분 나빠서 그런 것처럼은 보이지 않아. 치하야 쨩은 어쩌면.....전보다 좀 더 명확한 단서를 붙잡은 나는, 이제 확신을 가지고 말을 이었다.


"있지, 속상하다면 솔직히 속상하다고 해."

"...."


그 말에 움찔하는 치하야 쨩이 보였다. 아, 그렇구나. 나는 이제 완전히 알 수 있었다. 차가운 표정과 가시돋힌 목소리 뒤에 숨겨져 있었던, 치하야 쨩의 진짜 마음을. 속상하고 괴로워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정말, 치하야 쨩은 이런 것에 있어서는 서툴구나. 어쩐지 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걸 꾹 참아가며, 나는 몇 걸음 더 나아갔다. 치하야 쨩과는 이제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 드륵, 하고 조금 더 길게 의자를 뒤로 빼는 소리가 났다. 안 돼, 치하야 쨩. 도망가버리면. 프로듀서 씨에게 화를 낸 건 잘못한 거지만, 지금 속상한 것까지 잘못 된 건 아니라구. 


"자, 여기. 다 식어버린 것 같지만."


그러니까, 가지 마. 나는 기껏 프로듀서 씨가 타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머그잔을 치하야 쨩에게 슬쩍 밀어주었다.


"하루카....."

"괜찮아. 그럴 수 있어. 그래도 돼."

"....." 


치하야 쨩은 조금 망설이는가 싶더니, 곧 양 손으로 온기가 이미 사라져버린 머그잔을 소중하게 꼭 쥐었다. 그리고는 풀죽은 눈빛을 나와 프로듀서 씨에게 번갈아 보내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프로듀서 씨는 잠깐 안경을 벗고는 툭 불거져있던 미간을 살짝 문질러 평평하게 만들더니, 다시 안경을 쓰시고는 작게 미소지었다. 다행이다. 미안하다.. 그런 의미가 담겨있는 듯한, 맥빠진 웃음이었다.


"저, 저기. 프로듀서."

"그, 치하야."


잠시 후, 프로듀서 씨와 치하야 쨩이 서로를 불렀다. 그렇지만 그게 또 이상하게 겹쳐버려서.....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하하, 이렇게 되면 사이에 낀 내가 교통 정리를 해줄 수밖에 없구나. 나는 가볍게 치하야 쨩이 앉아있는 책상을 툭툭 건드렸다. 치하야 쨩이 곧 알았다는 듯 입을 떼었다.


"아, 그, 그게....그.....죄송합니다. 제가 어른스럽지 못했네요."

"아, 아니. 아니지. 내가 좀 더 참았어야했는데....괜히 화내고 말이야. 프로듀서가 되어가지고 아이돌에게...."

"아니에요 프로듀서. 제가 처음부터 화를 내지 않았다면, 이렇게 싸울 일은...."


어색한 침묵 뒤로는, 서투른 사과가 이어졌다. 뭐어, 서로 화내고 싸우는 것보다는 백 배 천 배는 나으니까, 뭐라 불평을 말할 건 아무 것도 없다. 휴우, 살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푹 쉬고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뒤로 슥 물러났다. 잘됐구나, 잘됐어. 이걸로 한 건 해결이구나. 아아, 이제 하루카 씨는 아무 걱정 없이 레슨에 갈 수 있게 되었어요.....마코토한테도 알려줘야지, 이 기쁜 소식을.


"하루카!"

"으, 으응?"

".....미안해. 하루카는 아무 잘못 없는데, 괜히 성질을 부려서....."

"에, 아니. 괜찮아."

"그렇지만....."

"에이~ 괜찮다니까. 이제 다 끝난 일인 걸."


그 때였다. 갑자기 치하야 쨩이 날 부르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사죄의 말을 입에 담았다. 에, 아니아니,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나는 놀라서 손사래를 치며 거듭 괜찮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자업자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거니까.  이건. 내가 멋대로 끼어들지 않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고....


아, 그래도 내가 끼어든 덕분에 프로듀서 씨와 치하야 쨩이 화해할 수 있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꽤 잘한 일 같기도. 뭐 하여튼, 치하야 쨩이 사과할 건 아니니까.


"....."


그렇지만, 치하야 쨩에게서는 여전히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고집 부리는 건 치하야 쨩의 조금 나쁜 점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치하야 쨩답다면 치하야 쨩다운 거지만, 이럴 때는 좀 곤란한 걸. 나는 프로듀서 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슬쩍 보냈지만, 프로듀서 씨는 이상하게도 못 본 척을 했다. 에, 어째서~? 두 사람의 다툼을 말린 건 저잖아요! 그런데도 왜.....하아,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네. 두 사람을 화해시킨 공도 있으니, 조금은 제멋대로 굴어도 괜찮으려나.


"치하야 쨩, 정말로 나한테 미안해?"

"응."

"그렇다면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아하하, 그렇게 긴장할 건 아니야. 간단...."


아니, 어쩌면 치하야 쨩에게는 간단한 일이 아닐지도. 도중에 말을 그만두니, 치하야 쨩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표정은 머지 않아 조금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변했다. 으음, 어쩌지. 확실히 간단한 일은 아니야. 그렇지만 나, 말하고 싶어. 전하고 싶어. 


"그, 저기, 치하야 쨩.....나도 잘 알아, 그 기분. 그렇게 자랑할 건 아니지만...."

"하루카도?"

"응. 하루카 씨는 통상 3할의 승률을....그러니까, 한 7번은 떨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싫어도 잘 알 수밖에요 토호호...."

"....그랬구나, 난 그런 줄도 모르고 투정을....."

"에, 아, 그러니까 그렇게 신경 쓸 건 아닌데....아, 그렇지! 그래서 결론은 우는 것도 필요하다는 겁니다! 속상한 마음을 계속 안고 있으면 연습도 잘 안된다구요."

"우는 것도.....필요?""

"응! 그, 그러니까! 나, 앞으로 치하야 쨩이....좀 더 솔직해졌으면 좋겠어. 노래부를 때가 아니어도, 속상하다면 속상하다고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


단순한 바람에 불과하겠지만, 그래도. 아하하, 너무 제멋대로였으려나. 치하야 쨩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였으려나. 말하고 나서 뒤늦게 밀려들어오는 후회. 치하야 쨩은 솔직하지 못해서 탈이지만, 나는 너무 솔직해서 탈인 것 같다니까. 죄송합니다. 앞으로 자중하겠습니다. 넵. 그럴 게요. 그렇게 한참 자기반성에 빠져있을 참에, 의외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노력, 해볼게."

"정말!?"

"으, 응."


순간 잘못 들었나 했지만 어색하게 웃고 있는 치하야 쨩을 보니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좀 더 솔직해진 치하야 쨩은 어떤 느낌일까 기대하고 있을 때, 지금까지 잠자코 있었던 프로듀서 씨가 갑자기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들더니, 치하야 쨩을 불렀다.


"치하야."

"뭐죠, 프로듀서."

"아까는 정말 미안했어."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치하야 쨩이 조금 굳은 표정으로 금방 사과를 맞받아치자, 프로듀서 씨가 뒷머리를 긁적긁적하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나, 지금까지는 네가 항상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혹시 오디션에 떨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넌 향상심이 있는 녀석이니까. 금방 떨쳐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어. 그렇지만.....그건, 아니었구나."

"죄송합니다. 원래라면 프로듀서가 말하는 대로였어야 했는데."

"아니야. 하루카도 말했잖아. 떨어지면 속상할 수밖에 없어.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그렇지만, 이젠 알겠어. 한참 스스로를 탓하던 프로듀서 씨가, 마지막에는 힘있는 목소리로 고했다.


"치하야, 내 품으로 컴온! 힘껏 껴안아주마!"

".....네?"

".....에?"


프로듀서 씨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지? 혹시 장난 치시는 건가? 갑자기 왜? 분위기 전환을 위해서라고 해도 이렇게 갑자기는 좀....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프로듀서 씨, 아무래도 진심인 것 같아.


"후하핫, 망설일 거 없단다!"


에....으음.....조~금 받아들이기 좀 힘들지만, 프로듀서 씨도 프로듀서 씨 나름대로 치하야 쨩을 위로하고 싶은 걸까나....뭔가, 방향이 삐끗한 것 같긴 해도. 치하야 쨩, 어떻게 할래? 가장 중요한 본인의 의사를 살피자, 치하야 쨩은 상당히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치하야 쨩, 솔직하게, 솔직하게."


툭툭. 나는 치하야 쨩의 등을 몇 번 두드렸다. 그러자 치하야 쨩은 여전히 망설이는 듯 주변을 살피다가, 곧 마음을 굳혔다는 듯 한 걸음 내딛었다. 어라, 그런데 잠깐. 치하야 쨩, 그 방향이 아니지 않아? 저기 있지, 어째서 나한테 오는 거야? 우와앗, 치하야 쨩!? 나를 꼭 안아버렸어!? 


"치, 치하야 쨩!?"

"하, 하루카가 말했잖아. 솔직하게, 라고."


꾸우욱. 치하야 쨩이 얼굴을 붉히며 내게 좀 더 달라붙었다. 아, 아하하....치하야 쨩, 내게 위로받고 싶었던 걸까....치하야 쨩이 그렇게 날 생각해준다니 정말 기쁘긴 한데....에, 그렇지만 있잖아....그럼 저기 있는 프로듀서 씨는?


"치, 치하야....나는? 나한테는!?"

"....프로듀서하고는 생각 없어요."

"크헉."


.....솔직함이라는 건, 언제나 좋은 건 아니구나.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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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글을 올리네요. 치하야 쨩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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