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나이트 - 서시序詩 후일담 +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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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14, 2018 22:13에 작성됨.

 가벼운 잽으로 복부를 때렸다. 짧게 끊어 쳤을 뿐인데 상대의 숨도 순간적으로 끊어지는 듯 했다.

 이내 정신을 차렸으나 몸부림조차 치지 못 했다. 고통에 마비되어 몸을 웅크린 모습으로 추하게 바닥을 굴렀다. 그 사이 난 녀석이 떨어뜨린 면도칼을 회수해 품 안에 챙겼다. 두꺼운 소가죽도 그어버릴 만큼 예리한 날이었다.

 “일어나.”

 타카후지 카코에게 시선을 던졌다. 녀석은 얼마 전 일본에서 온 의뢰인으로 재밌는 사람을 찾아 한국에 왔다고 했다. 세계를 기웃거리다 일본에서 쉬던 중 배 안에서 야쿠자들을 몰살한 사람의 소문을 들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게 바로 나였고, 나는 카코를 마주한 순간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 여자와는 상종해서는 안 된다, 빨리 자리를 떠야 한다, 라는 위기감을 말이다. 그러나 사무소는 이미 착수금을 받아버렸고, 이대로 발을 뺐다간 업계 내에서 조롱을 받을 것이기에 나는 잠시 카코와 어울려주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절대 하지 말았어야 할 선택이었다.

 카코는 나를 시험하겠다며 ‘경호 게임’이라는 것을 제안하였다. 카코와 24시간 내내, 일주일 동안 붙어 다니며 목숨을 노리는 자들을 저지하는 것이다. 쉬운 일이었지만 어딘가 께름칙했다. 경호를 시작하고 15시간이 지나고도 아무 위협도 나타나지 않은 까닭이었다. 무슨 일을 준비 중이기만 해도 감이 반응할 텐데 전혀 낌새가 없었다.

 이 여자가 돈이 썩어나서 장난을 치나 싶을 때 쯤 감이 무언가를 잡아냈다. 그것은 사전에 예상했던 일들, 이를 테면 저격이나 습격 따위가 아니었다. 의뢰인인 카코가 제 발로 달리는 차를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간발의 차이로 구해냈다. 실로 오랜만에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는데, 카코는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대단해요, 이렇게 순발력 있는 사람은 처음인 걸요, 운 좋게 살았어요. 불길함이란 단어를 얼굴에 발라놓은 듯 했다.

 경호 게임에서 카코를 노리는 적은 카코 자신이었다. 이 게임은 사실상 ‘자살 게임’으로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카코를 뜯어말리는 게 핵심인 것이다.

 카코는 기분 내킬 때마다 취미 삼아 자살을 했다.

 옥상 위에서 투신을 하거나 갑작스럽게 혀를 깨무는 건 물론이고, 한눈 판 사이 한강물에 휩쓸려 있던 적도 있었다. 핸드백에는 항상 청산가리를 구비해뒀다 밥 먹을 때 조미료로 뿌리지 않나, 어디서 구한 건지 모를 리볼버를 꺼내들기도 했다.

 놈이 엽기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노릴 때마다 나는 전력을 다해 뜯어말려야 했다. 정신은 금방 피폐해졌으며 솔직히 말해 이제 곧 한계였다. 그런 상황에서 카코가 이번엔 독일제 면도칼을 꺼내든 것이다.

 말리러 움직이기 전에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저걸 뺏는다 해도 금방 또 다른 미친 짓을 할 텐데, 겨우 이 정도로 될까. 때려 말려도 모자랄 판인데 그럼 차라리 때리는 게 낫지 않을까. 그냥 때리는 게 아니라 저 놈이 원하는 ‘나’를 보여줘도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지금. 나는 어울리지 않는 고상함을 버리고 카코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간신히 숨을 쉬는 녀석에게 똑똑히 물었다.

 “이젠 좀 삶이 소중해졌나?”

 “…….”

 대답이 없었다. 정확히는 못 하는 거겠지만. 평생을 고통 없이 죽는 데 혈안이었던 카코로선 고통만 남고 죽지는 않는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것이다. 내게는 그저 초등학생 시절 배운 수십 가지 기술 중 하나일 뿐이지만.

 야, 잘 들어. 다시 한 번 똑똑히 말했다.

 “운 좋게 집안 잘 만나서 지금껏 살아온 주제에 죽긴 누구 맘대로 죽겠다는 거야. 진짜 뒤질 거면 곱게 죽던지. 꼭 이 따위로 못 볼 꼴을 보여야겠어? 뭐, 권태? 잘 들어. 세상에는 인생 자체를 대충 찍고 편집해 놔도 영화가 되는 놈들이 있어. 장르는 항상 스플래터, 호러, 고어 쪽이지. 그런 놈 앞에서 삶이 어떻다느니 지랄 떨지 말라고.”

 “그럼…….”

 카코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내가 내려놓자 숨을 몰아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대체.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제 삶에 아무런 자극도 줄 수 없는 이 세상을, 무슨 재미로 살아가야 하나요? 당신은…… 대답해줄 수 있나요?”

 “나누려고 해봐.”

 “나눠요?”

 “네가 갖고 태어난 돈, 능력, 권력. 그 모든 행운들을 누군가와 나눠봐. 모든 것을 줘버리고 빈털터리가 된다 해도 좋을 만큼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을 찾아보라고. 그 전까지 죽을 생각 따위 하지도 마.”

 혹시 또 죽고 싶으면. 면도칼을 꺼내 카코의 목에 갖다 댔다. 나한테 말해. 칼날보다 날카롭게 눈을 뜨고 서슬 퍼런 한기로 위협했다.

 “병원신세를 지더라도 죽지는 않게 해줄게. 그게 싫으면, 억지로라도 살아.”


 카코가 찻잔을 내려놨다. 그런 추억이 떠오르네요. 나는 모자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군요.

 “아직도 그 날 맞은 곳이 욱신거릴 때가 있어요.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이 퍼지면서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려주죠.”

 “그렇다고 의존해선 안 됩니다. 어떻게든 뜯어고친 건데 이상한 데서 중독되어버리면 저도 더는 수가 없어요.”

 “걱정 마세요. 지금은 모든 걸 바쳐서라도 이루고 싶은 소중한 것이 있거든요.”

 카코가 고개를 돌렸다. 따라서 시선을 따라가니 ‘아이돌 타카후지 카코’의 모습을 담은 커다란 포스터가 사무실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총선거 순위권에 든 기념으로 제작된 귀한 물건이었다.

 그 시기엔 드물게도 온 힘을 쏟아 노력하는 카코를 볼 수 있었다. 운이 안 좋았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기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하고 있었다.

 당신도 일터 이상의 장소를 찾아 다행이라고, 덕분에 세상이 좀 더 평화로워졌다고 속으로만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약속이 있으신가요?”

 “네. 무엇보다도 중요한 약속이죠.”

 서정적인 벨소리가 울려 말을 끊었다. 뭔가 절묘한 타이밍이라 얘네들도 감이 발달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가벼운 인사를 남기고 사무실을 나왔다. 전화를 받으니 너도 나도 말하려다 뒤죽박죽으로 섞여버린 여대생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째서인지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스스로에게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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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또 또 엄청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나온 다음 편 입니다.

이 고질적인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할 텐데, 의지박약이라 참 어렵군요.

화이트 나이트가 외전을 제외하고 드디어 5편 째가 나왔는데 겨우 이 만큼 쓰는 동안 거의 1년 정도가 지나버리다니.

심각성을 느낀지라 다음 편은 되도록이면 빠른 시일 내에 써보려고 합니다.


이번 이야기 '서시'는 지금껏 쓴 5편의 이야기를 정리한다는 느낌으로 썼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야기들에 비해 분량도 짧고 이야기 자체도 가볍죠.

서문으로 쓰이는 '서시'를 이야기 정리, 그러니까 마지막에 쓴다는 모순도 있고요.

그렇기에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일종의 준비 과정으로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겨울P라는 프로듀서의 시작과 이야기의 중심이 될 아이돌들에 대한 설명인 것이죠.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질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저에게도 큰 도전이라 막 떠들 수는 없고, 그저 응원해주셨으면 합니다.

댓글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된답니다, 여러분.


여담이지만 어제 본편을 올리고 오늘 후일담을 올리려고 하니

마침 카코가 총선거에서 높은 순위권을 차지해 성우가 붙게 되었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또 착한 아이돌을 미친 놈으로 만들어버린 것에 대한 사죄의 뜻에서

이번 후일담을 적게 되었습니다.


전 천벌 받기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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