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와 중2병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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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29, 2017 06:45에 작성됨.

원래 중2병이란건 본인에겐 진지한 거죠. 우리가 무슨 시각으로 보고 있든 상관없이, 어떤 상황이 일어난다면 그 상황을 겪는 당사자는 자기가 겪고 있는 일을 진지하게 여긴다 봐요. 하다못해 갓난아기가 밥을 달라고 우는 것도, 부모한텐 젖병을 쥐어주면 끝나는 하루일과일지 몰라도 아기한텐 생존이 걸린 문제니까요.

그런고로 아스카는 스스로가 매사에 진지하다고 느낄 겁니다. 잘 알지 못하지만 어떤 느낌인지 아는 영단어나 한자를 읊으면서, 스스로 이정도면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적절히 표현했다 느끼겠죠. 설령 틀린 용도로 썼다고 해도, 자신만이 느끼는 정서를 어떤 식으로든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중요한건 다른 사람이 내 말을 내가 원하는 대로 받아들였냐겠죠.

그러다가 언젠가 쎄한 느낌이 오겠죠. 내가 한자와 영어로 말을 했던 건 내 느낌을, 마음을, 다른 사람들한테 전하고 싶어서였는데. 원래 그 단어가 내가 말하려던 것이 맞는가. 내가 원하던 것이 전달되지 않으면 그건 그냥 단어의 나열일 뿐이잖아. 뭔가 거기서부터 중2병의 끝이 시작되지 않을까 합니다. 원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겠니?'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던져대기만 하던 질문을 '그것이 내가 말하려던 걸까?'하고 자신에게 처음으로 던지기 시작한 순간부터.

처음은 더 잘 말하려고, 단어를 찾아보는 것부터 시작하겠죠. 예를 들어 죽을 사 자를 死라고 쓰는데 왼쪽의 歹자는 부숴진 뼈를 뜻하는 부수고, 匕는 비수 비 자니까 즉 이는 뼈에 비수가 꽂히고 부숴짐, 고로 죽음. 이런 뜻이란 걸 알게 된 뒤 나머지도 찾아보는 식으로. 그러다가 문제는 단어따위가 아니란것을 깨달을 겁니다. 문제는 내면의 미성숙함과 거기서 나오는 실수겠죠.

내면이 미숙하고, 그로 인해 과거에 실수를 했을때 사람은 그 미숙했던 자신과 자신이 벌인 실수를 부정하고 싶어해요. 소위 말해 이불킥이죠. 하지만 아스카는 거기서 이불킥으로 끝나는 대신 더 진지하게 들어가지 않을까 싶네요. 미숙했던 자신을 부정하고 '나는 성숙해야 한다'는 것에 얽매이는 대신, 자아성찰에 에너지를 쏟아붓지 않을까요. 나는 나를 얼마나 아는가? 내가 나라는 사람을 얼마나 아는가? 이건 정해진 답이 있어서 거기서 뭔갈 배껴내는 게 아니죠. 전 '나란 사람은 누구지?' 하고 의문을 가지는 것으로부터 중2병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중2병의 본질은 결국 자신에게 힘을 쏟아붓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나이는 원치도 않게 먹고, 주변 환경도 변하고, 자신의 몸도 변하고, 난 내가 알던 내가 아니고, 나와 날 둘러싼 세계 사이에 괴리감이 느껴지는 상황인데. 거기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기엔 힘이 많이 들죠. 내가 누군지 찾아보고, 바라봐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어요.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향해야 할 질문이나 에너지가 밖으로 가는 것이 중2병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자니 모든게 뒤죽박죽이고 엉망진창이라 그나마 형체는 갖춰져있는 바깥으로 에너지가 향하는 거에요. 아 이게 뭐지 내 안이 이상해 하고 바깥으로 자기가 어떻다 하고 표출하는거죠. 그래서 누군가는 그으면 죽는 선이 보이고, 누군가는 알려지지 못한 듯 하면서 잘 알려진 외국 밴드의 노래를 매일같이 듣죠. 그러면서 밖에서 자신을 향해 올 답변을 갈망하는 거에요.

그러다가 어느정도 자신을 둘러싼 폭풍이 어느정도 진정될 거에요. 그러면 자기를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겠죠. 그 여유시간, 거기서 아스카는 자아성찰을 시작하고 끝내 내면의 힘을 얻었으면 합니다. 이 글을 쓰는 저마냥 말만 번지르르 하는게 아니라 정말로 웃으며 자신을 볼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으면.

자다 깨니까 갑자기 아스카가 생각나서 두서없이 1시간넘게 글을 써서 글이 많이 보기 안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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