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겨울P가 너무 좋은 사람으로만 나온 것 같아서 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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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07, 2017 22:56에 작성됨.

 오랜만에 야근을 하지 않고 회사를 나왔다. 짧아진 해는 이미 낮을 마치고 건물들 사이로 숨어버렸고, 밤의 세상에서 거리와 빌딩들이 불을 밝혔다. 바람이 불어와 나는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걸음을 재촉했다. 피곤한 인생이야, 야근을 안 해도 잔업을 해야 한다니. 바람에 묻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일본에서 일하기 시작한지 벌써 반 년. 굳이 내 전직의 특성 때문이 아니더라도 회사 근처 거리의 지름길을 꿰고 있기에 충분한 기간이었다. 나는 밝은 빛을 피해 골목으로 움직였다. 익숙하게 어둠에 녹아들고 익숙한 술집으로 들어가 익숙한 웨이터의 익숙한 안내를 받아 익숙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유일하게 낯선 존재인 남자가 있었다.

 보기에도 비열한 인상의 남자가 괜히 친근한 억양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프로듀서님.

 “겨울P라고 부를까요? 회사 안 별명이라던데. 보기와 다르게 귀여우셔.”

 나는 대답 없이 자리에 앉아 건조한 음성을 냈다.

 “용건이 뭡니까.”

 “에이. 모른 척 하신다. 다 아시면서.”

 “모르겠는데요. 아직은, 불확실한 제 추측이라.”

 “이런 곳으로 불러내고 그런 말 해봐야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래도 뭐, 모르신다면 알려드려야지. 남자가 가방 안에서 봉투를 꺼냈다. 열어보니 사진이 들어있었다. 나와 아나스타샤의 사진. 저번 휴일에 함께 외출했을 때의 모습이 찍혀있었다. 이렇게 보니 새삼스레 또 아름답군.

 기억 한 구석에서 피어오르려는 그 날에서 눈을 돌렸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남자에게 집중했다. 마치 이 사진으로 인해 나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는 식으로 말을 꺼내고 있었다.

 “이걸 찍은 건 어디까지나 우연이었습니다. 진짜로요. 설마 주가 급상승 중인 인기 아이돌과 그 프로듀서가 단 둘이서 공원을 걷는 모습을 찍을 줄이야. 제가 생각해도 운이 참 좋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뭐가 말입니까.”

 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당신 말대로, 그저, 공원을 걷고 있을 뿐입니다. 직장 동료끼리. 제 일은, 아이돌의 케어니까, 그저 업무의 연장, 이라고도 볼 수 있죠. 그런데…….”

 “겨우 이런 사진 찍은 게 뭐가 행운이냐, 그 말인 거죠?”

 남자가 혀를 차며 내 말을 끊었다. 거 참 말 답답하게 하시네. 거슬리는 혀 차는 소리가 계속됐다. 그래 가지고 일은 어떻게 합니까?

 “물론 이 사진만으로는 그렇겠죠. 금방 오해가 풀릴 수 있어요. 하지만 기사라는 건 어떻게 쓰느냐가 관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저에겐 정보가 있거든요.”

 남자가 여유롭게 말을 꺼냈다.

 “이 날 함께 어느 천문대로 가셨다면서요? 거기서 늦게까지 있다가 근처 여관에서 주무셨던데. 그것도 아이돌의 케어입니까? 뭐, 그럴 수 있다 쳐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죠. 아무리 오해를 풀어도 일단 금간 이미지는 돌릴 수 없다고요. 자, 이쯤 했으면.”

 알아들으셔야죠? 굉장히 거슬리는 목소리가 귓바퀴를 돌았다. 거기에 어울리는 비열한 미소까지. 한두 번 지어본 게 아닌지 그 미소와 같은 형태로 얼굴에 주름이 배여 있었다. 역겨워 가지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놈을 시야에 담았다. 그러자 자기 혼자 무슨 신호라도 받았는지 굉장히 거만한 자세를 잡았다. 그에 어울리는 거만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내게 칼을 던졌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담당 아이돌이 두 분 더 있으시죠? 그 중에서 혼다 양, 인터넷 커뮤니티 쪽에서 말이 많아요. 안티들이 우어어어!”

 “그건…….”

 “아아 됐고요. 계속 듣기나 하세요.”

 짜증이 치밀었다. 원래부터, 낮에 남자의 전화를 받은 그 순간부터 짜증이 치밀었고, 그것을 업무 시간 내내 품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짜증이 내면에서부터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직감이 불쾌감을 표했다. 계속 듣고 있을 거야?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살짝 자세를 고쳤다. 들어달라잖아, 들어주자고.

 남의 속도 모르고 남자가 말했다. 이치노세 양 말입니다.

 “알아봤더니 아버지가 교수더라고요.”

 순간 미간이 꿈틀거렸다.

 “미국에서 강의도 하는 유명한 사람. 제가 인맥이 넓거든요. 덕분에 재미난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다른 두 사람은 어떻게 넘어갈 수 있다 해도, 이 애는……. 와, 나 참. 어떻게 이런 애가 아이돌을 하는지.”

 “용건이 뭡니까.”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그게 굉장히 재밌었는지 놈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좀 확실해 지셨습니까? 저렴한 제스처를 취하며 노골적인 목적을 드러냈다. 계좌번호가 적힌 쪽지였다.

 “입금할 금액까지 다 적혀 있습니다. 딴 데 얘기하거나 하지 마시고요. 혹시라도 어기거나 돈 안 보내시면…….”

 같잖았다. 잘난 듯이 지껄이는 입도, 지가 뭐라도 되는 양 움직이는 행동도. 무엇보다 이 자식이 감히 내 아이돌들에 대해 자기 멋대로 판단하는 것이 같잖았다. 이런 내 마음을 알고 직감이 속삭였다. 저질러버려.

 나는 천천히 모자를 벗었다. 야. 테이블 끝에 모자를 내려놓는 순간 놈이 나를 멍청하게 쳐다봤다.

 “속 시원하게 해줄게.”

 머리를 잡아 벽에 처박았다. 압정을 박듯 고정하고 옆구리를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주먹이 한 번 닿을 때마다 무너지는 자세를 타고 절망이 흘러내렸다. 나도 말 답답하게 하는 거 싫어. 쿵, 쿵, 소리와 함께 폭력이 터졌다. 그래도 널 위해 맞춰준 건데. 놈이 알아듣지 못할 모국의 언어를 쏟아냈다.

 “그게 싫다하니 나도 내 익숙한 언어로 말해야겠지. 마침 잘 됐어. 너랑 대화하기 싫었거든.”

 손을 떼고 가볍게 주먹을 풀었다. 뚜둑, 소리에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겹쳤다. 지난 휴일의 사진이 바닥에 떨어지고, 그 위로 핏방울이 흘렀다. 눈 돌릴 새도 없이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사실 네가 있는 걸 알고 있었어.

 공원에서 대화를 나누고 천문대로 가기 직전. 거슬리는 시선과 셔터음을 직감이 잡아냈다. 하지만 굉장히 로맨틱한 상황이었고, 불안보다는 기쁨이 컸기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드디어 갖게 된 아나스타샤와의 시간이었고, 아나스타샤를 위한 시간이었으며, 아나스타샤가 나를 위해 준비한 시간이었으니까.

 차를 타고 일부러 멀리 돌아가 따돌린 뒤 안심하며 천문대로 갔다. 계획은 성공적이었지만 나답지 않게 뒤처리가 미숙했다. 하룻밤을 새고 온 걸 알아챘을 줄이야.

 “그 날의 분위기를 끝까지 이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 때 장르가 멜로였거든. 남자 주인공이 별로였지만, 여자 주인공은 최고였어. 근데 네가 괜히 들쑤시다 하드코어 고어 장르로 바꿔버렸지. 그게 내 전문분야인지도 모른 채.”

 애벌레 같은 몸짓으로 놈이 바닥을 기었다. 소파를 잡고 간신히 일어나 망가진 눈빛으로 나를 쏘아봤다. 아무래도 나를 위협하려는 듯 했다. 가소로운 새끼. 나는 모자를 집어 놈에게서 더 멀리 떨어뜨렸다.

 등 뒤로 알아듣기 힘든 욕지기가 들렸다.

 “이 개새끼야! 너랑 네 애새끼들, 네 회사까지! 싹 다 망쳐버릴 거야!”

 분위기 파악을 못 했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저런 눈치로 기자를 할 수 있을까. 서랍을 열어 준비된 물건을 꺼냈다. 절규에 가까운 협박이 계속 됐다. 프로듀서란 새끼가 사람이나 팬다고!

 “기사 한 줄만 내면, 씨발, 네들 싹 다 뒤지는 거야!”

 “내가 전부터 이해가 안 되는 게 하나 있는데.”

 푹, 하고 나이프가 놈의 어깨에 박혔다. 충격으로 놈이 엎어졌다. 이어서 비명이 터지고, 그게 시끄러운 나는 천천히 걸어가 머리를 밟았다. 작디작은 신음만이 출혈과 함께 뿜어져 나왔다.

 “왜 너 같은 새끼들은 자기 목숨줄 쥔 사람 앞에서 자꾸 지랄을 하는 거냐. 머리가 딸리는 거야? 그러니 맨날 공장에서 양산한 것보다 못한 기사나 써대는 거잖아. 야. 넌 내가 아직도 프로듀서로 보이냐? 아니야. 절대 아니지. 지금 네 앞에 있는 건 전직 해결사이자 백야이자 너 같은 새끼 작살내는 전문가야. 모르겠으면, 이해를 하지 말고 느껴.”

 어깨에 꽂힌 나이프를 빼내 놈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이렇게 말이지, 그냥. 손목을 잡고 역시 놈의 시야로 가져왔다. 느끼라고.

 다시 푹, 하고 나이프가 손등을 찍었다. 또 터지려는 비명에 놈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이제 넌 기사 같은 거 못 쓴다.

 “하긴. 애초에 제대로 된 기사를 쓸 줄도 모르겠지만.”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눈이 풀렸지만 고통 때문에 기절하지도 못 하는 중이었다. 필사적으로 몸을 떨며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답답하게 굴지 말고 듣기나 해.

 놈의 뺨을 턱, 하고 후려쳤다.

 “미오는 미소가 참 밝은 애야. 걘 항상 웃어. 웃으면서 사람들에게 기운을 팍팍 줘. 그러면서 자기는 속이 아주 곪아터지는 애라고. 인터넷에서 너 같은 새끼들이 뭐라 하는지 다 알거든. 그래도 자기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아니까 계속 웃는 거야. 근데 넌 뭐냐. 애가 계속 웃으니까 우습냐?”

 다시 한 번 뺨을 턱, 하고 후려쳤다.

 “네가 보기엔 시키가 막 생각 없이 아무데나 들쑤시고 다니는 거 같지? 아니야. 걔 말이지, 너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똑똑하고 생각이 많아. 근데 얼마 전에 걔네 학교에서 날 부르더라. 애가 성적은 좋은데 수업에 집중 안 하고 교우관계도 안 좋다고. 내가 그 애한테 굉장히 미안해했어. 원래 이런 건 부모가 와야 되는데, 이렇게 생겨먹은 프로듀서 새끼가 대신 갔잖아. 걔네 부모는 그 애랑 물리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거든. 너 그게 그 아이한테 얼마나 상처일지 생각이나 해봤냐? 안 해봤겠지. 해봤으면 이딴 짓 못해.”

 주먹을 쥐고 뺨에 퍽, 하고 때려 박았다.

 “처음부터 알았어, 새끼야. 네가 뭘 원하는지. 내가 이런 짓 한두 번 해본 게 아니니까. 그 때마다 이 장소를 애용해. 여긴 비밀이 안 새어나가. 너 같은 새끼들 반병신 아니면 시체 만들어 내보내는 작업장이거든. 내가 널 이런 곳으로 불러내고 용건이 뭐냐고 묻는 건, 간단히 말해서 최후통첩이야. 이제부터 생각 없이 지껄였다간 뒤진다는 의미라고.”

 겨울P, 굉장히 귀여운 이름이지. 어깨를 풀고 자세를 잡았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들쑤시지 마. 손가락 하나하나를 유연하게 했다.

 “굉장히 무서운 계절이야. 사람이 얼어 죽고, 굶어죽고, 넘어져 죽고, 사고 나서 죽기 딱 좋은 계절. 너 왜 겨울에 산불이 많이 나는지 알아?”

 단단히 주먹을 쥐고 턱을 겨눴다. 날씨 건조하고, 바람 많이 불고, 무엇보다. 팔꿈치에 힘을 준 뒤 허리를 틀며 날렸다. 꼭 너 같은 새끼가 불을 질러.

 곤죽이 된 놈이 벽에 부딪혔다. 곧 바로 쿵, 하고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손가락이 꿈틀거릴 때마다 구멍에서 피가 흘렀다.

 아직 안 끝났어. 서랍에서 장도리를 가져왔다. 오늘 밤은 백야야.

 “아주 지독한 밤이지.”

 

 

 

 

 

 

 

 

 

 

평소 쓰던 사계절P 이야기와 달리 겨울P 이야기의 본편인 '화이트 나이트'와 같은 형식으로 썼습니다.

팬픽 특유의 대본체로 쓰면 이런 걸 표현하기가 어렵더라고요. 간만에 속 시원히 썼네요.

 

저 짓을 하고 나서 겨울P는 아이돌들과 퇴근은 했는지, 잘 자는지 하는 문자를 주고 받습니다.

굉장히 괴로워 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면서요. 폭력을 쓰는 건 아무렇지 않지만, 폭력을 쓴 뒤에 아이돌들과 함께 하는 게 괴롭거든요.

그리고 저 기자는 겨울P가 평소에 보는 끔찍한 환상과 망상에 뒤섞여 계속 따라다닙니다.

 

아, 오랜만에 어두운 거 써서 좋았다. 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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